제335화
라온이 어쩔 줄을 모르는 도리안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제야 배 주머니의 의문이 풀렸네.’
세피아 상회는 어느 한 종류의 품목에 집중하지 않는 만물상.
세피아 상회의 도련님이었기에 도리안의 배 주머니에서 경악스러운 물건들이 연달아 나왔던 것 같다.
-보, 본왕은 이럴 줄 알았느니라!
라스가 멍하니 있다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본왕이 아무나 부하로 받았을 것 같으냐! 저 녀석에게서 피어나는 귀티를 놓치지 않고 부하로 받아들인 것이니라!
녀석은 스스로의 안목이 대단하다며 콧대를 우뚝 세웠다.
‘하여튼 허세는….’
이런 허세는 거짓말로 안 치는 건지 헛소리가 아주 술술 나왔다.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도리안을 보았다.
“네가 날 도련님이라고 부를 게 아니라, 내가 널 도련님이라고 불렀어야 했군.”
도리안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을 도련님이라고 불러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작 도련님이라고 해야 할 건 자신이었다.
“아, 아니에요! 절대!”
도리안이 고개를 맹렬하게 저었다.
“아니기는. 배경으로만 따지면 나보다 훨씬 나은데.”
지그하르트에서 최하위 방계 취급을 받던 자신보다는 세피아 상회의 아들인 도리안의 위치가 더 높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상회의 도련님이 왜 정체를 숨겼지?”
라온이 눈빛을 가라앉혔다. 도리안의 성격상 기만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 이유는 확실히 알아야 했다.
“하아….”
도리안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정말 전 도련님이 아니에요. 서자거든요.”
그는 배 주머니를 쓱쓱 문지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서자인데다가 막내라서 가문을 떠날 때까지 구박만 받았어요.”
“구박?”
“네. 상회주님은 절 거의 없는 사람 취급하셨고, 형, 누나들은 매일 같이 괴롭혔거든요.”
도리안의 목소리는 슬프도록 담담했다. 세피아 상회에 정 하나 남지 않은 듯 보였다.
‘나와 비슷한 삶을 살아서 날 챙겼던 건가….’
도리안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감을 보여주고, 말을 걸어준 것도 내게서 상회에 있을 때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세피아 상회에서 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고, 딱히 얻을 것도 없어서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죄송해요….”
도리안이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아니. 개인 사정을 다 말할 필요는 없지.”
라온이 손을 저었다. 사람은 누구나 숨기고 싶은 게 있는 법. 부하라고, 친하다고 그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다.
“근데 세피아는 서남부에 있잖아. 지그하르트에는 어떻게 들어오게 된 거지?”
“상회주님께서 시험을 내리셨거든요.”
“상회주가 네 아버지 맞지?”
“아, 네.”
“음….”
아버지가 아니라, 상회주라고 부르는 걸 보면 정말 대접받지 못하고 컸던 것 같다. 이것 역시 자신과 비슷했다.
“무슨 시험을 내렸지?”
“상회에 안에 있는 무언가를 가져가서 누구보다 큰 보물을 만들어오는 사람이 세피아 상회의 후계자가 된다는 시험이었어요. 당연히 가문의 후계자가 모두 참여했죠.”
도리안이 그 당시를 생각하는 듯 깊은숨을 내뱉었다.
“태어난 순서대로 선택권이 있다 보니, 형님이랑 누님들이 상회주님의 인맥이나, 매매권, 금화, 상회의 인재들을 데려가서 저한테 남은 건 이거 하나뿐이었어요.”
그는 배 주머니를 쓸어내리며 피식 웃었다.
“그 주머니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도리안의 배 주머니는 일반적인 아공간 주머니와 달랐다.
저장 방식도 특이하고, 공간 제한 자체가 없는 듯 보였기에 값이 매겨지지 않는 보물이었다.
“상회주님께서 설명을 안 해주셔서 이게 뭔지 아무도 몰랐거든요.”
“아….”
그러면 이해가 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주머니보다는 당연히 눈에 띄는 인맥이나, 매매권, 상품들을 고를 테니까.
“전 이게 아공간 주머니라는 걸 알고 상회 창고에 있던 물건들을 전부 주머니에 담은 뒤에 도망쳤어요. 어차피 상회를 물려받을 생각도 안 했으니, 돌아갈 생각 따위도 없었죠.”
도리안의 눈동자가 밝아졌다. 표정을 보니, 상회에 갇혀 있는 동안 정말 고생했던 것 같다.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우연히 만난 지그하르트 검사에게 나름 재능이 있다고 추천을 받아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어머님은?”
“제가 태어날 때 돌아가셨대요. 얼굴도 모르니 별로 슬프지도 않고.”
도리안은 덤덤한 얼굴로 손을 들어 올렸다.
“이게 다예요. 별로 재미없죠?”
“그러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이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아니 그 이상으로 좋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난 것 같았다.
‘다만….’
몇 가지 의문이 있다.
배 주머니의 능력을 설명하지 않아서 도리안에게 넘어갔다는 점, 어린아이가 상회의 물건을 훔치는데 아무도 막지 않았다는 점을 볼 때 숨겨진 사정이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크흑.
라스가 눈가에 손등을 대며 코를 훌쩍였다.
-불쌍하느니라. 저 어린 것이….
‘얜 진짜….’
라스는 분노를 떠나, 마왕 자체가 어울리지 않았다. 누가 왕을 시킨 건지 꼭 한번 보고 싶었다.
“그럼 돌아오라는 이유는 뭐지?”
“아마 중간 점검일 거예요.”
“중간 점검?”
“예. 10년 기한이었는데, 지금 거의 8년이 지나고 있으니까요. 무얼 했나 확인해보는 거죠.”
도리안은 다른 형제들은 이미 다 들렸을 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가야지.”
“예?”
“네가 세피아 상회의 회주가 될 기회를 그냥 놓칠 수는 없잖아.”
“그, 그렇지만 서자인 제가 어떻게….”
그는 절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마구 저었다.
“해보기도 전에 포기하는 건 광풍단의 자세가 아니지.”
“아….”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실린 라온의 말에 도리안의 눈이 보름달처럼 차올랐다.
“성공하면 상회주가 되는 거고, 실패하면 지금처럼 광풍단으로 살면 되잖아. 넌 손해 볼 게 없어. 거기다….”
라온이 손을 들어 올려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널 괴롭힌 형제들을 조질. 아니, 복수할 기회잖아.”
“그, 그건 그렇네요. 벌써 겁을 먹을 필요는 없죠. 조금 무섭지만….”
도리안은 겁쟁이답게 턱을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떠날지 모르니, 출발 준비를 해. 나도 함께 간다.”
“라, 라온 님도요?”
“네가 납치당한 건 내 탓이니, 가서 인사는 해야지. 그리고 너 혼자 보내면 쭈구리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올까 봐. 불안해.”
“아, 네!”
녀석은 햇빛이 드리운 듯 밝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서 숙소로 달려 들어갔다.
-네놈….
라스가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았다.
-저 녀석을 응원하려는 게 아니라, 상회주로 만들어서 이용하려는 것이지!
‘이제 너도 눈치가 좀 생겼네.’
-아, 악마보다도 사악한 놈! 네놈의 심장은 분명 시꺼멓게 그을려 있을 것이니라!
‘농담이야.’
라온이 도리안의 등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배려받았으니, 돌려주기도 해야지.’
상회를 차지한다면 좋겠지만, 먹지 못해도 상관은 없다. 돌아가기 싫을 정도로 구박만 받은 집에서 도리안의 힘이 되어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럼 나도…음?’
뒤편에 있는 정원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제천검 위에 손을 얹고, 뒤를 돌았다.
‘저건… 올빼미?’
나무 위에서 어린 올빼미 하나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분 탓이었나.’
야생 동물이 아니라, 사람이 쳐다보는 느낌이었는데 아무래도 착각했던 것 같다.
“후.”
한숨을 내쉬고 글렌의 숙소로 가려 할 때 올빼미가 날개를 펼쳐 나무 위에서 하강해 이쪽으로 날아왔다.
“끼익.”
올빼미는 귀여운 눈웃음을 치고서 자신의 어깨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설마….”
“그 설마가 맞단다.”
올빼미의 부리 안에서 멀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끄윽….”
라온은 기막을 펼쳐서 소리가 나가는 것을 막은 뒤에 이마를 쳤다.
‘이 정신 나간 스토커가….’
인상을 찌푸리며 사람이 적은 구석으로 이동했다.
-히이익!
라스가 올빼미를 보며 턱을 떨었다.
-진짜 귀신 같은 것이니라! 대체 왜 널 따라다니는 것이냐!
‘…나도 모르지.’
다람쥐, 뱁새에 이어 올빼미까지 구슬려서 이야기를 걸어올 줄은 몰랐다. 심지어 셋 다 외형이 귀엽다는 점이 우스웠다.
“결국 우승을 차지했구나. 정말 멋졌어.”
“그걸 또 다 봤어?”
“내가 네 활약을 어떻게 놓치겠니. 가로나를 무릎 꿇리고, 카디스의 팔을 베는 장면까지 똑똑히 봤단다.”
“가주님이나, 다른 육황의 수장들도 있었는데?”
“그들로는 날 막을 수 없지.”
멀린이 날개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올빼미의 눈이 사람처럼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뭐 이런 집착이….”
예선전이라면 모를까. 4강부터는 육황의 수장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에덴 소속인 멀린이 그들을 피해서 경기를 봤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널 보면 볼수록 네 미래가 기대 돼. 어떤 남자가 될지 흥분되어 못 견디겠어.”
멀린이 날개로 뺨을 문질렀다. 본인은 농염한 척하고 싶겠지만, 어린 올빼미의 모습이다 보니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우리도, 백혈교도 한동안은 움직이지 못할 테니, 마음대로 놀아봐.”
“백혈교까지?”
에덴이 안 움직일 거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백혈교도 가만히 있을 줄은 몰랐다.
“네 괴물 할아버지 덕분에 백혈교 쪽도 피해가 컸거든.”
멀린이 방긋 웃으며 날개를 흔들었다.
“다음에는 아까 조금 전 그 순딩이의 집으로 가는 거야?”
“…….”
라온은 대답하지 않고 멀린이 깃든 올빼미를 바라보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너와 나는 가는 길이 달라. 이렇게 정보를 준다고 해도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건 없어.”
멀린이 록타가 아니라, 날 보고 있다고 해도 가는 길이 엇갈린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정보는 고맙지만, 속이면서 받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말했잖아. 상관없다고.”
멀린이 픽 웃으며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길은 언젠가는 합쳐지기 마련이거든. 내가 너한테 갈 수도, 네가 나한테 올 수도 있잖아?”
“그럴 일은 없어.”
라온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길의 끝이 어디인지는 가봐야 아는 법이야. 우리는 결국 함께 가게 될 거야.”
멀린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앞으로도 널 지켜보고 있을게.”
그녀가 부리로 배 부근의 털을 고르고서 날개를 흔들었다.
“이 아이에게는 벌레를 좀 주렴.”
“아, 그러니까 그 약속 나한테 시키지 말라….”
“캬악.”
그 약속은 네가 지키라고 말하려고 할 때 올빼미가 울음을 터트렸다.
“카아악.”
녀석은 발로 어깨를 툭툭 치며 빨리 먹이를 내놓으라고 재촉했다.
-크흐흐.
라스가 그 모습을 보고 턱을 치켜올렸다.
-저 스토커는 오싹하지만, 네놈이 당황하는 꼴을 보는 건 즐겁구나.
녀석은 먹이를 재촉하는 올빼미와 인상을 찌푸린 라온을 보고 낄낄 웃었다.
“여기서 벌레를 어떻게 구하라는 거냐고.”
“부단주님!”
올빼미를 보며 인상을 찌푸릴 때 숙소에서 다시 도리안이 튀어나왔다.
“저희 내일 바로 떠나는 건 아니죠?”
“아니야. 그런데….”
라온이 손가락으로 어깨 위의 올빼미를 가리키며 짧게 숨을 뱉었다.
“너 벌레도 있냐?”
“…….”
도리안은 멍하니 올빼미를 바라보다가 입을 벌렸다.
“도, 동물원이라도 차리시게요?”
* * *
글렌은 연회를 끝내고 돌아온 뒤 로엔, 셰릴과 함께 가벼운 뒷풀이를 즐기고 있었다.
“이번 육황 회의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건 우리 지그하르트네요.”
셰릴이 술잔을 기울이며 빙긋 웃었다.
“예. 라온 님과 광풍단 검사들 덕분에 지그하르트의 명성이 더욱더 높이 올라갔습니다.”
로엔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광풍단도 광풍단이지만, 라온의 성장 속도가 경이적이에요. 함께 임무를 나갔을 때가 익스퍼트 최상급이었는데, 벌써 마스터 중급이라니. 옆에서 봐왔음에도 믿을 수가 없어요.”
셰릴은 어이가 없다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더 놀라운 점은 폭발력이죠. 이번 결투에서 라온보다 약한 상대는 단 한 명도 없었어요. 마티스, 보리니 키튼, 가로나, 카디스까지. 본인보다 강한 상대를 무슨 수로 그렇게 잘 잡는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저도 볼 때마다 놀랍습니다. 본래 마스터의 급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데 그 격차를 어떻게 뛰어넘으시는 건지.”
로엔도 라온 같은 무인은 처음이라며 헛바람을 흘렸다.
두 사람은 실컷 라온의 칭찬을 한 뒤에 동시에 글렌을 바라보았다.
“크흠!”
글렌의 얼굴에는 홍조가 차올라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턱을 괸 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는 입매를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뭐, 그 아이가 확실히 독특한 면이 있지. 단순히 기연의 힘으로 강해진 게 아니라, 노력으로 그 위치에 갔기 때문에 무학 자체가 단단해. 하위 무인에게는 절대 뚫리지 않고, 상위 무인에게도 빈틈을 찌를 정도의 검술을 단련했지. 거기다….”
억지로 막고 있던 그의 입매가 슬슬 풀려 올라갔다.
“투쟁심과 의협심 또한 내가 본 아이들 중 최고였다. 대련 중에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하늘로 뛰어오르는 바보천치가 또 어디 있겠어!”
바보라고 말하지만, 글렌의 눈동자에는 라온에 대한 대견함이 가득 스며들어 있었다.
“그럼요.”
“당연하죠.”
로엔과 셰릴은 흥분한 글렌을 보며 히죽 웃었다.
“이번 결투를 통해서 라온이 어떤 녀석인지는 대륙 전체로 퍼져나갔을 겁니다.”
셰릴이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백검룡이라는 이명까지 얻었으니, 이미 유망주급을 벗어났다고 봐야죠.”
용이 붙은 이명은 최고의 유망주를 뜻한다. 라온을 대륙십이성 상위와 같은 경지라고 인정하는 뜻이었다.
“현재 경지도 반을 넘어섰으니, 내년에는 상급에 도달하겠네요.”
“20살에 마스터 상급이라 정말 역사를 새로 쓰네요.”
셰릴과 로엔은 감정을 억누르려는 글렌의 반응을 즐기며 계속 라온을 칭찬하고 있었다.
“커험, 뭐 그렇겠지. 라온은 재능만이 아니라, 노력을 멈추지 않으니까. 내일 또 어떤 모습이 될지가 기대되는 녀석이야.”
글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완전히 막았다. 다만 눈이 웃고 있어서 웃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똑똑.
세 사람이 각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방문에 노크가 일었다. 모두 노크를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제가 나가보지요.”
로엔이 일어서서 방문을 열었다. 라온이 가슴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숙였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지?”
글렌은 순식간에 표정을 감추고 차가운 눈빛으로 턱을 들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보아라.”
라온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와 글렌의 앞에 섰다.
“조금 전에 광풍단의 보급관 도리안을 찾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라온은 글렌에게 도리안의 사정을 말해주었다. 세 사람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그저 듣고만 있었다.
‘전부 알고 계셨던 건가?’
세피아의 이름이 나왔음에도 세 사람은 별 반응이 없다. 아무래도 다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네가 그 아이와 함께 가겠다는 건가?”
“도리안이 납치를 당한 이유는 저 때문입니다. 제가 가서 설명과 사과를 하고, 그 녀석에게 받은 것을 조금이라도 돌려주고 싶습니다.”
라온은 조금의 거짓도 없이 솔직하게 사실을 말했다.
“받은 것?”
“도리안은 가문 사람들이 저를 멀리할 때부터 제게 다가와 준 녀석입니다. 많은 힘은 못 되더라도 최대한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런가.”
글렌이 턱을 괸 손으로 입을 꾹 막은 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또 납치를 당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
“가주님이 지그하르트를 납치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직접 보여주셨지 않습니까. 그런 미친놈은 또 나오지 않을 겁니다.”
에덴은 지부가 무너지고, 백혈교는 사도와 교도들이 무수히 죽어 나갔으니, 지그하르트의 검사를 함부로 건드릴 미친놈은 한동안 나오지 않을 것이다.
“다만….”
라온이 제복을 살짝 건드리며 눈을 내렸다.
“혹시 모르니 함께 복귀하는 척하다가 중간에 빠질 생각입니다. 당연히 변장도 할 생각입니다.”
“흐음….”
“허락해주십시오.”
라온이 고개를 숙였다.
“음….”
글렌이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라온의 손을 보았다.
“체임버에게 받은 반지는 가지고 있나?”
“아, 숙소에 놔두고 있습니다.”
“그 반지를 항상 착용하고 다니도록.”
“위치 추적 기능이 있는 겁니까?”
“…비슷하다.”
그는 절대 빼지 말라고 재차 말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사흘 뒤 실핀 마을에서 떠나도록.”
“감사합니다.”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달고 간다면 일은 제대로 해결하고 오도록.”
“알겠습니다.”
라온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숙소를 나갔다.
“허허.”
“함께 돌아가면 좋았을 텐데… 음?”
로엔과 셰릴은 라온과 떨어진 글렌이 섭섭해할까 봐 걱정하며 그를 보았다. 하지만 글렌은 예상과 달리 눈을 가리고 있었다.
“너, 너무….”
그는 입을 틀어막은 채 라온이 나간 문을 보았다.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기특하지 않느냐. 어찌 저런 아이가 있다는 말이냐….”
글렌은 섭섭함보다도 손주의 마음이 기껍다며 손을 떨었다.
“…….”
셰릴과 로엔은 그런 글렌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정도라면 놀릴 수도 없었다.
‘손주 병이 중증이셔….’
* * *
이틀 후.
지그하르트 가문이 로베르트 가문에 이어 두 번째로 오웬 왕국을 떠났다.
“와아아아아아아!”
“백검룡! 백검룡!”
“지그하르트! 지그하르트!”
“그날의 결투는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오웬 왕국의 국민들은 글렌만이 아니라, 라온과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180도로 달라진 상황이었다.
“오오!”
“우리 인기가 장난이 아닌데?”
“오웬이 아니라, 지그하르트로 복귀한 느낌이야.”
“아니지. 가문에서도 이런 환호는 못 받는다고.”
광풍단은 손을 흔들어 왕국민들의 함성에 화답했다.
“선풍검이래! 내 이명도 불리고 있어.”
“나찰녀라고 부르지 말라고!”
버렌은 본인의 이명을 듣고서 히죽였고, 마르타는 나찰녀라 부른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에휴….”
도리안은 집에 돌아갈 걱정 때문인지 땅이 꺼지도록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평소와 같은 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루난 뿐이었다.
라온은 뒤에서 들려오는 광풍단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눈매를 찡그렸다.
‘벌써 빠졌군.’
광풍단 검사들의 반응을 보니, 가문에 돌아가면 훈련에 집중하지 못하고 나태해질 것 같았다.
‘좀 눌러놔야겠는데.’
함께 돌아가면 모를까. 한동안 떨어져 있어야 하기에 그들의 마음을 단단히 잡아놔야 할 것 같았다.
고오오오.
라온은 광풍단만 가두는 기막을 친 뒤 뒤를 돌았다.
“너희들 나랑 도리안 내일 빠지는 거 알고 있지?”
“어어….”
“다, 당연히 알죠.”
“아는데 갑자기 그걸 왜….”
광풍단은 라온의 가라앉은 음성을 듣고 입술을 떨었다.
“내가 가문으로 돌아갔을 때 성장이 마음에 차지 않는 녀석은….”
“윽!”
“끄으….”
라온이 차가운 눈빛으로 광풍단을 훑어내렸다. 광풍단이 겁에 질린 듯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한 달 동안 집중력 강화 훈련을 진행한다.”
“하, 한 달?”
“미친….”
“그, 그럼 뒈져요!”
“인간이 버틸 수 있는 훈련이 아니라고요!”
광풍단은 정신이 나갔냐며 손을 마구 흔들었다.
“열심히 훈련하면 그럴 일 없어.”
“네 마음에 차는 게 어느 정돈데! 얼마나 성장해야 하는지는 알려줘야지!”
버렌이 말도 안 된다며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돌아와서 판단할게.”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판단은 내가 할 테니, 너희는 수련만 하라는 뜻이었다.
“제기랄!”
“망했어!”
“돌아가도 못 쉬겠네….”
“엄마….”
광풍단은 말을 부여잡은 채 눈물을 글썽거렸다.
“저 악마 자식!”
“악마가 아니라, 저 새끼 마왕이야! 그것도 조롱의 마왕!”
버렌과 마르타도 라온을 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오오! 역시 눈깔이와 소고기 소녀는 알아주는군! 요놈의 악의는 마왕급이니라! 본왕도 매일 같이 털리고 있다고!
라스가 버렌과 마르타 앞으로 날아가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라온은 피식 웃으며 다시 몸을 돌렸다.
‘이걸로 저 녀석들 훈련은 해결됐네.’
지금의 광풍단은 강하다. 어설픈 선을 만들어줘 봐야 금방 부수고 쉴 게 뻔하니, 끝까지 스스로를 단련할 이유를 만들어 주었다.
“부단주님. 그럼 바로 저희 집으로 가시는 건가요?”
“그러고 싶지만 좋은 일 하나만 하고 가자.”
“좋은 일이요?”
“그래.”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또 당할 수는 없으니까.’
에덴이든, 데루스든 당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다. 혹시 모를 데루스의 참여를 막기 위해서 놈을 이곳에 확실하게 묶어두어야 했다.
일단 네 시간부터 뺏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