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4화
라온은 와인으로 입을 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직접 카디스의 팔을 고친다고 했었지?’
계획대로 되는군.
데루스는 카디스의 어깨를 고칠 방법 몇 가지를 생각해두었다고 말했다.
그중 가장 우선되는 방법은 넝마의 성자처럼 뛰어난 의원이나, 영약을 찾는 걸 테니, 한동안 로베르트 가문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 행동을 유도하기 위해서 카디스의 어깨를 끝까지 베었지.’
카디스의 팔을 베면서 놈의 근맥과 마나회로를 비틀어버린 이유는 복수 때문이기도 하지만, 데루스가 카디스를 치료하게 만들어 해저 던전에 들어갈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라온이 조용히 뒤를 돌아보았다. 데루스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행이야.’
네가 여전히 뱀 같은 놈이라서.
가면을 쓴 데루스, 가면을 벗은 데루스 모두를 알고 있기에 놈의 행동을 예측하기 쉬웠다.
진짜 데루스의 얼굴을 알고 있다는 점은 앞으로도 저 괴물을 상대하는데 최고의 칼이 되어 줄 것이다.
-얌마! 피자 다 식느니라!
만족스럽게 웃고 있을 때 라스가 뱁새처럼 손을 파닥이며 접시를 가리켰다.
‘아, 미안.’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접시에 놓인 피자를 먹었다. 짭짤한 치즈와 바삭한 도우 그리고 매콤한 소스가 발린 소고기가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조화로운 맛을 뿜어냈다.
-이 집 피자 잘하네. 파인애플 소녀만큼은 아니지만, 본왕을 만족시킬 정도는 충분하느니라!
라스는 행복한 듯 볼을 만지며 히죽였다.
‘그러냐.’
라온이 피식 웃으며 남은 피자를 한입에 삼켰다.
‘데루스는 해결되었으니, 해저 던전에 갈 방법만 생각하면 되겠네.’
육황 회의와 결투가 다 끝나서 모레쯤 지그하르트로 복귀한다고 들었다.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빠져나갈 방법이 필요해서 여러 생각을 해봤지만, 만족스러운 계획이 나오지 않았다.
‘뭔가 좋은 게….’
-크으으으!
라온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라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치즈가 아니라, 피자가 입안에서 녹아내리는구나! 좋은 한 입이었느니라!
녀석은 텅텅 빈 접시를 가리키며 오뚝이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다음! 다음은 고기와 새우다! 이곳에 오자마자 끌렸던 양갈비와 새우구이를 바치거라!
‘좀 침착해.’
흥분하여 얼굴이 뻘게진 라스를 내리누르고 일어섰다. 뷔페에 가서 라스가 먹고 싶다고 했던 갈릭 버터 새우와 양갈비를 담아왔다.
-새우. 새우부터 먹어야 하느니라!
라스는 동그스름한 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새우를 가리켰다.
이딴 게 마왕?
음식 앞에만 서면 아무리 높게 봐도 10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보는 듯했다. 요 녀석이 마왕. 그것도 분노의 마왕이라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그냥 식충인데…..
라온은 입맛을 쩝 다시고서 새우를 까서 먹었다. 통통한 새우살에 부드러운 버터가 녹아 고소하면서도 달달했다. 마늘의 풍미가 살아 있어 느끼함도 없어 계속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입안이 가득 차오르는구나! 이게 요리지!
라스는 이 맛에 산다고 중얼거리며 코를 훌쩍였다.
-이번에는 양갈비로!
‘예. 예.’
픽 웃고서 양갈비를 뜯었다. 고기에 스며있는 육즙이 터지며 입안 전체에 고소함이 퍼져 나왔다. 육질도 부드러워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가볍게 넘어갔다.
-입안에서 녹아내리는구나. 따스한 아이스크림이나 다름없느니라!
‘그러냐.’
라온은 라스가 기쁨에 젖어있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았다.
‘쟨 아직도 저기 있네.’
루난은 여전히 아이스크림 코너를 벗어나지 않았다. 저 근처에서만 움직이며 여러 아이스크림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한 통은 먹었겠는데?’
대충 계산해도 루난 혼자 아이스크림 한 통은 비운 듯 보였다. 아이스크림에 대한 열정만큼은 라스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버렌도 여전하네.’
여기서도 인맥을 쌓는군.
버렌은 다른 육황 소속 무인들과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는 것을 보니 꽤 친해진 것 같았다.
‘마르타는….”
마르타는 테이블이 가득 차도록 고기를 가득 쌓아서 먹고 있었다. 별로 특이할 게 없는 평소 그녀의 모습이었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삼왕자가 왜 저기에 있지?’
오웬의 삼왕자 그리어가 고기를 꿀떡꿀떡 삼키는 마르타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음식을 먹지도, 술을 마시지도 않고 말 그대로 마르타만 바라보고 있었다.
“안 먹어? 짜증 나게 왜 보고만 있는 건데!”
마르타는 그 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난 그대가 먹는 것만 보아도 배가 부르오. 아, 입가에 묻었소.”
삼왕자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손수건을 꺼냈다. 그가 마르타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려고 손을 뻗을 때 마르타의 주먹이 날아갔다.
“이 미친놈이!”
“커헉!”
삼왕자는 마르타의 주먹에 이마가 찍혀 바닥에 처박혔다.
“아우, 느끼해! 닭살 돋았어!”
마르타는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옆 테이블로 이동해서 계속 고기를 씹었다.
라온은 비틀거리는 삼왕자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절대 안 통하지.’
삼왕자의 배경과 외모, 실력 때문에 조금 전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는 통할 수 있겠지만, 마르타에게는 절대 먹히지 않는다.
아마 지금 일로 호감도가 바닥까지 떨어졌을 것이다.
“과, 관자놀이에 이어서 이마인가.”
삼왕자가 턱을 부르르 떨며 일어섰다. 얻어맞았음에도 그의 눈빛은 밝았다. 아니, 더 기뻐 보였다.
“내 이마에 주먹을 박은 사람은 그대가 처음이오! 당신에게 반했….”
“꺼져!”
그는 되지도 않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마르타에게 다가가다가 목을 처맞고 다시 쓰러졌다.
‘저기도 힘들겠네.’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일어섰다.
-설마 알아서 가는 것이냐?
‘디저트지?’
-이제야 본왕의 교육이 통했구나!
라스가 헤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잘 받들면 네놈도 본왕의 부하로 삼아줄 수도 있느니라!
‘됐네요.’
라온이 아이스크림 라인으로 가자, 루난이 홱 고개를 돌려왔다. 맹한 눈에 행복의 빛이 가득 차 있었다.
‘저게 다 몇 개야?’
루난의 접시에는 구슬 아이스크림이 거품처럼 쭉 쌓여 있었다. 민트초코는 즐길 만큼 즐겼는지 여러 종류의 아이스크림으로 가득했다.
“라온도 아이스크림?”
“그래.”
“민트초코를 추천해.”
루난이 맹한 눈을 깜빡이며 민트초코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오늘 건 더 맛있어.”
-민트초코! 역시 본왕의 부하답느니라!
라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이스크림 소녀의 추천대로 민트초코를 푸거라. 아니, 아예 통으로 가져가도록 해라!
‘그럼 루난이 울걸.’
-크흠. 그렇다면 다섯 덩어리만….
‘다 떠나서 민트초코 맛없어.’
-이런 맛알못 자식! 민트초코의 상쾌함을 모르는 네놈이 불쌍하느니라!
‘그래. 난 불쌍하게 쿠앤크만 먹을게.’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쿠키앤크림 아이스크림만 두 덩어리를 퍼서 접시에 담았다.
-라, 라온?
라스가 오랜만에 이름을 부르며, 슬금슬금 다가와 어깨에 달라붙었다.
-라온아? 오늘 느끼한 걸 많이 먹지 않았느냐. 마지막을 민트초코로 장식한다면 입안과 속 모두 소나무 향을 맡은 듯 시원해질 것이니라!
녀석의 목소리가 비단 위를 구르는 옥구슬처럼 보드라워졌다.
‘그럴까?’
-그렇느니라! 분명 속이 편해져서 꿀잠을….
‘응. 오늘 수련할 거야.’
-끄윽, 이 귀신 같은 놈이!
라스는 얼마 설득도 못 하고 분노를 일으켰다. 물론 힘이 없어서 종이처럼 나풀거렸다.
그 모습이 조금 안쓰러워서 민트초코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에헤?
라스가 헤죽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네, 네놈 오늘 대체 무슨 일인 것이냐! 좋기는 하지만, 불안하느니라!
잘해준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라스는 왼쪽 얼굴로 웃고, 오른쪽 얼굴을 찡그려서 의심하는 놀라운 표정을 만들어냈다.
‘그냥.’
밥 먹는 김에 오늘 능력치 뺏기느라 고생한 라스의 기분을 적당히 풀어주려 했을 뿐이다.
“어?”
라온이 민트초코를 푸려다가 손을 멈췄다. 다른 아이스크림과 달리 민트초코는 텅 비어 있었다. 떠봐야 반 스푼도 안 될 것 같았다.
‘없는데?’
루난이 반 이상 먹고,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호기심에 퍼가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끄아아아악!
라스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비명을 질렀다.
-아이스크림 소녀여!
‘이게 라스지.’
라온이 피식 웃었다. 제대로 먹는다면 그게 라스겠는가. 녀석은 저렇게 먹지 못해서 절망하는 게 잘 어울렸다.
‘음?’
쿠앤크만 떠서 자리에 돌아가려 할 때 붉은 머리 엘프 하나가 그림자처럼 슥 지나갔다.
‘저 인간 또 무슨 짓을 벌인 거지?’
좀비처럼 주변을 배회하는 사람은 리메르였다. 술 냄새는 났지만, 취했다기보다 그냥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단주님?”
“어?”
이름을 부르자, 그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눈에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라, 라온이구나. 우리 복덩이!”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크흑!”
리메르는 울먹이면서 다가와 고개를 푹 숙였다.
-야. 일단 아이스크림을 먹고….
“이쪽으로 오시죠.”
라온은 리메르를 데리고 구석으로 간 뒤에 기막을 쳐서 소리가 나가는 것을 막았다.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내 돈이! 내 노후 자금이! 내 금화 5,000개가 날아갔다!”
그는 실성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먹으면서 하면 안 될까? 쿠앤크도 괜찮은데….
“금화 5,000개?”
금화 5,000개는 도박에서 땄겠지만, 그게 왜 날아갔다는 건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걸 봐.”
리메르가 주머니에서 검게 그을린 종이 하나를 꺼냈다. 도박권으로 보이는데, 크기를 보니, 반 이상 타버린 것 같았다.
“여기 도장이 찍힌 부분이 타서 환전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
그는 인생이 망가졌다며 뒤로 자빠져 울먹였다.
“흐음….”
라온이 도박권을 펼쳐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망가졌네.’
다른 부분도 아니고, 진짜인지를 확인하는 인장 부분이 타버렸으니, 돈을 못 받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근데….’
잘하면 받을 수 있을지도.
어차피 밑져봐야 본전이다. 한 번 시도라도 해보기로 마음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번 해볼게요.”
“하, 할 수 있어?”
“확실하지는 않아요. 받는 것도 전부는 안 될 것 같고.”
“그래도 상관없어! 적어도 괜찮으니까! 제발!”
리메르는 100골드라도 좋으니, 받아만 달라고 발목을 붙잡았다.
“당장 가자!”
“아, 그 전에 제 지갑 좀 찾구요.”
“지갑?”
“도리안!”
* * *
라온은 아이스크림을 전부 먹은 뒤 도리안을 데리고 이번 대회의 도박을 관리했던 재정부로 향했다.
-도박을 왕국에서 직접 진행했다고?
배는 가득 채웠지만, 민트초코를 먹지 못해 기분이 애매한 상태의 라스가 어깨에 내려앉았다.
‘당연하지. 이번 도박에 걸린 돈이 장난 아니었으니까.’
대륙에서 도박은 하나의 여흥이다. 음지는 물론이고, 양지에도 수많은 도박장이 있고 합법적으로 운영된다.
이번 결투 대련에서도 당연히 도박판이 열렸고, 그걸 담당했던 곳은 절대 돈을 먹고 도망가지 않을 오웬 왕국의 재무부였다.
“실례하겠습니다.”
라온은 이번 결투의 도박판을 담당했던 관리자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30대로 보이는 담당관이 고개를 들어 올리다가 벌떡 섰다.
“헉! 백검룡! 아, 죄송합니다! 라온 검사님!”
그는 당황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담당관의 책상 앞에 섰다.
“환전을 받으려고 왔습니다.”
그 말을 하며 반이 타버린 리메르의 도박권을 내밀었다.
“아, 이건….”
담당관이 도박권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리메르 님께도 설명해드렸지만, 인장 부분이 타 버려서 환전을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희 단주님 말고 금화 5,000개를 달라고 온 사람이 없을 텐데요?”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규정상 인장 부분이 사라진 도박권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담당관이 책상에서 도박권 한 장을 꺼냈다. 그는 도박권 위쪽의 나풀거리는 부분을 양옆으로 당겨서 두 장으로 만들었다.
“본래 도박권은 이렇게 두 장으로 나눌 수 있게 만들어서 저희와 손님이 한 장씩 나눠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두 도박권을 합치자, 검의 형태를 지닌 은은한 빛이 떠올랐다.
“이렇게 두 개를 합쳐야 진품 확인이 되는데, 그게 안 되니 금화를 지급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담당관은 정말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흐음….”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담당관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키루스라고 합니다.”
담당관은 명찰을 가리키며 살짝 눈을 내렸다.
“담당관님 일단 저희 단주님이 이 도박권을 샀다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가격이 가격이니, 얼굴을 확인했을 테고, 주변에서 단주님이 도박권을 가진 걸 본 사람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음, 그건 맞습니다.”
“그럼 신분은 인정하신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인장 부분만 확인된다면 바로 금화를 지급해드릴 수 있습니다.”
키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절반 정도는 넘어왔군.’
신분을 인정한다는 뜻은 꽤 가능성 있다는 뜻이었다.
“전 조금 전까지 연회장에 있다가 나왔습니다.”
“아, 역시 그러셨군요.”
키루스는 화려한 예복과 그 위를 덮은 흑룡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대회 때문인지 육황의 수장분들의 친분이 한층 더 돈독해지셨더군요.”
“그럴 겁니다. 저도 결투를 보면서 여러 번 감동했으니까요. 특히 백검룡께서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대련 중에 하늘로 뛰어오르는 모습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는 구해주어서 고맙다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시선에서 호감이 묻어나왔다.
“그중에서도 저희 가주님과 레크로스 전하께서 특히 가까워지신 듯 보였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두 분이서 대화를 많이 나누시더군요.”
키루스가 동의하며 빙긋 웃었다.
“그렇다 보니 이번 일이 위로 올라가게 된다면 조용히 처리하라는 지시가 내려오게 될 겁니다. 결국 그 돈은 저희 단주님에게 흘러가겠지요.”
“음….”
“다만 조용히 처리한다고 해도 잡음이 들려서 좋지 않은 소문이 날 가능성도 있을 겁니다.”
“그건 그렇겠죠.”
“그 잡음조차 지우기 위해서 위쪽에서 저를 보냈습니다.”
라온이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 그렇군요.”
키루스는 위라는 소리를 듣고 긴장하여 마른침을 삼켰다.
-위? 네놈을 보낸 건 귀때기지 않느냐!
라스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아. 하지만 저 사람은 천검대주님이나 가주님을 생각하고 있을걸.’
본론을 꺼내기 전에 글렌과 레크로스 국왕의 이야기를 늘어놓았기 때문에 지금 저 담당관의 머리에 스며든 얼굴은 글렌이나 셰릴일 것이다. 그게 노리는 바였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영감의 이야기를 꺼낸 거였나? 이 지독한….
라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술을 떨었다.
“윗분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용히 해결하고 싶습니다. 결국은 단주님께 갈 돈이니까요.”
“그, 그렇지만 이 도박권이 있어야….”
키루스는 이마에서 땀을 흘리며 도박권을 가리켰다. 물론 그것도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도박권 신품이랑 펜 하나만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여기 있습니다.”
키루스가 서랍에서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도박권과 펜을 꺼냈다.
“음….”
라온은 펜을 쥐고 리메르의 도박권 적힌 필체 그대로 새로운 도박권에 옮겨적었다. 살짝 종이를 구겨서 원본과 똑같을 정도의 모양새까지 만들었다.
암살자 시절에 홀로 연구했던 서류 조작 기술이었다.
‘정말 도움이 많이 된다니까.’
전생의 경험은 현재에도 이어져 정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아….”
키루스는 그걸 보고서 입을 떡 벌렸다. 이런 일이 가능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이제 이곳에 도장만 찍어주시면 됩니다. 도리안.”
라온이 옆에 선 도리안에게 손을 뻗었다.
“옙.”
도리안이 평소처럼 대답하고서 배 주머니에서 새하얀 보자기를 꺼냈다. 미리 금화를 넣어둔 보자기였다.
“피곤하실 테니, 이걸로 목이나 축이셨으면 합니다.”
금화 보자기를 받아서 키루스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짤그랑 소리에 키루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이, 이건….”
“일을 조용히 해결하기 위한 제 성의입니다.”
라온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으음….”
키루스는 떨리는 눈동자로 금화 주머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일을 담당하는 사람답게 소리만으로 그 안에 얼마가 들어 있는지 알아차린 표정이었다.
라온은 키루스의 떨리는 턱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떴다.
‘제대로 먹혔군.’
부드럽게 말하지만 이건 협박. 지위로, 명성으로 그리고 돈으로 짓누르는 협박과도 같았다.
“끄윽….”
키루스가 입술을 꾹 깨물고서 금화 주머니를 아래로 내렸다. 서랍에서 동그란 인장을 꺼내 도박권에 내리찍었다. 그는 그 도박권을 양옆으로 당겨서 손님용과 확인용 두 개로 나눴다.
“도, 도박권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도박권과 확인증을 옆으로 빼고서 눈을 살짝 내렸다.
“금화는 지금 가져가시겠습니까?”
“그게 편하겠죠.”
라온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키루스가 우측 금고로 가서 문을 열었다. 안에 있던 금화 주머니 열 개를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무게 때문에 책상이 살짝 흔들거렸다.
“한 주머니에 500개씩 담겨 있습니다.”
“확인했습니다.”
라온은 주머니를 한 번씩 훑어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환전이 완료되었습니다. 즐거운 저녁이 되시길.”
키루스는 이제 완전히 받아들였는지 처음 보았을 때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감사합니다. 도리안.”
“아, 예!”
라온의 부름에 도리안이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배 주머니에 금화를 넣었다.
-미친. 이게 돼?
라스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지나갔으면 합니다.”
“저희가 무슨 일을 했던가요? 그냥 환전받으러 오신 거 아니셨습니까?”
키루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
“그러네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등을 돌렸다. 정말 별일이 없었다는 듯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허억….”
도리안이 그제야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 이게 진짜 되네요?”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니까.”
라온이 피식 웃고서 도리안을 보았다.
“이따가 내가 손짓하면 받은 금화에서 다섯 덩이만 꺼내.”
“다, 다섯 덩이요? 그럼 반밖에 안 되는데….”
“괜찮아.”
“어….”
당황하는 도리안을 데리고 재무부 밖으로 나왔다.
“라, 라온!”
정원 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리메르가 입에 술을 들이붓다 말고 네 발로 달려왔다.
“안 된다고 하지? 그 망할 것들이! 내 돈! 크흐흑….”
그는 빈 술병을 내던지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네. 아쉽게도….”
“제기랄!”
“반만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어? 진짜?”
그 말에 리메르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도리안.”
“네….”
도리안이 턱을 떨며 배 주머니에서 금화 다섯 자루를 꺼내 내려놓았다.
“이, 이게 어떻게….”
“흥정을 했거든요. 그쪽도 남겨두면 왕실 예산으로 쓸 수 있으니까. 어려웠지만 간신히 반은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어디야! 아예 못 받을 뻔했는데!”
리메르는 상관없다며 금화 주머니를 보고 훌쩍였다.
“대신에 이건 누구에게 말하면 안 되는….”
“물론이지! 역시 너뿐이다!”
그는 벌떡 일어나 라온을 끌어안았다.
“넌 내 인생의 빛과 소금이며, 등불이고, 재신이야! 정말 고맙다!”
“아닙니다.”
라온이 리메르의 등을 두드리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제가 감사드려야죠.’
매번 알아서 금화를 헌납해주시니 감사드릴 뿐입니다.
피식 웃으며 옆을 보니 도리안과 라스가 겁에 질린 듯 쭈그러든 눈동자를 떨고 있었다.
“아아….”
-보, 본왕은 이제 네놈이 두렵느니라….
* * *
라온은 기뻐서 정신이 나간 리메르를 놔두고 도리안과 함께 숙소로 향했다.
숙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할 대 우측에서 중년인 한 명이 다가왔다.
“어?”
도리안은 그를 알아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검룡을 뵙습니다.”
중년인이 예의 있게 고개를 숙였다.
“연암 상회의 테트칼이라고 합니다.”
“아, 라온 지그하르트입니다.”
그의 인사에 맞춰주었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죄송하지만 잠시 이 친구를 빌려 갈 수 있겠습니까?”
테트칼이 도리안을 가리켰다. 둘의 반응을 보니 이전에 알던 사이 같았다.
“아, 아버지 친구분이세요.”
“아!”
“잠시만 이야기를 나누고 올게요.”
“그래.”
고개를 끄덕이자, 도리안과 테트칼이 숙소 옆에 있는 정원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테트칼이 먼저 떠나고, 한참 뒤에 도리안이 정원에서 걸어 나왔다. 힘이 쭉 빠진 걸음이었다.
“흠….”
라온이 입맛을 다셨다. 도리안은 걸음만이 아니라, 표정까지 평소보다 어두웠다.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는 별일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닌데?”
“으….”
도리안이 배 주머니를 쓱쓱 문질렀다. 녀석이 불안할 때 나오는 행동이었다.
“뭐, 비밀이라면 어쩔 수 없고.”
“그….”
도리안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가 상회에 들리라고 하셨다고 전해주셔서….”
“너 상인 출신이라고 했었지.”
도리안은 서남부에 있는 상회 출신이라고 지나가듯이 말했었다.
‘상회라….’
이거 괜찮겠는데.
라온이 입맛을 다셨다. 로베르트에 있는 해저 던전에 어떻게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도리안을 집에 데려다준다는 핑계를 대면 될 것 같았다.
‘충분히 가능해.’
부단주로서 아끼는 조원을 집에 데려간다는 이유라면 리메르는 물론이고, 가주님에게도 먹힐 것이다.
“그럼 가야겠네.”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 납치당했을 때도 안 갔으니, 여기까지 온 김에 가자. 위에는 내가 말해놓을게.”
“예에….”
도리안은 싫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이 있는 건가.’
전에는 귀찮아서 안 간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표정을 보니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네 성이 아피세였지?”
아피세라는 이름의 상가나 상회를 생각해봤지만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예전에 생각했던 대로 그리 크지 않은 상가였던 모양이다.
“지, 지금에서야 말씀드려서 죄송한데, 그건 가짜예요….”
도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 진짜 성은 아피세가 아니라, 그 반대인 세피아….”
“세피아?”
라온이 세피아라 중얼거리다가 눈을 부릅떴다.
“그 세피아 상회라고?”
“알고 계셨어요?”
“그걸 말이라고!”
세피아는 대륙 5대 상회 중 하나로 서남부만이 아니라, 대륙 전역에 가지를 뻗은 거대 단체였다.
“너….”
라온의 어조가 처음으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도련님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