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3화
라온은 흑룡포를 받지 않고 그 뒤에 있는 오그람을 보았다.
“가주님과 어떤 내기를 하셨는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야 어렵지 않지.”
오그람이 흑룡포를 어깨에 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느끼지만, 당황스러울 정도로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
“시작은 나였다. 널 얼굴만 잘난 꼬맹이라고 말하며 금방 떨어질 거라고 비웃었지.”
육체의 힘을 중시하는 야수연맹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기에 턱을 주억였다.
“그때 너희 영감이 끼어들었다. 너만이 아니라, 다른 지그하르트의 꼬마들도 연맹의 아이들에게 지지 않는다고 하더군.”
“아….”
라온이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글렌을 보았다. 저런 도발은 신경도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크흠.”
글렌은 별 관심없다는 듯 헛기침을 하고서 고개를 돌려 와인을 마셨다.
“그렇게 내기를 해보자는 말이 나왔지. 난 네게 주었던 사운환을 걸었고, 너희 영감은….”
오그람이 손가락을 들어 글렌의 허리춤에 걸린 진천검을 가리켰다.
“저 검을 걸더구나.”
“진천검을?”
라온이 오그람의 손가락을 따라 진천검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검을 거셨다니….’
진천검은 글렌 지그하르트의 상징과도 같은 검이다. 이런 작은 대회에서 본인도 아니고, 광풍단을 위해 저 검을 걸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가주님….”
“저희를 위해서 진천검을 거시다니….”
버렌과 마르타는 글렌을 보며 두 손을 꼭 모았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광풍단 검사들도 글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모두 감동했는지 툭 건드리면 울 듯한 표정이었다.
“감사합니다.”
라온도 허리와 어깨를 편 뒤 글렌에게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가벼운 여흥일 뿐이었다.”
글렌은 별 거 아니라며 무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조금은 우리에게 신뢰가 생기신 모양이네.’
여흥이라 말하지만, 검사가 검을 거는 건 확신이 있을 때뿐이다. 광풍단이라는 단체가 그의 믿음을 얻은 것 같아서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본왕에게도 신뢰를 지키면 안 되겠느냐?
라스가 둥실 떠올라 얼굴을 들이밀었다. 홀쭉해진 볼을 가리키며 인상을 찌푸렸다.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겠느니라!
‘실컷 먹게 해줄 테니까. 지금은 좀 빠져!’
-으억!
라온은 손등으로 라스를 쳐내고 오그람을 바라보았다.
“계속해주시겠습니까.”
“저쪽에서 애병을 걸었는데, 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지. 너희 모두에게 사운환을 내어주고 이 흑룡포까지 걸겠다고 맹세했다.”
오그람은 별일 아니라는 듯 가벼운 어투로 말을 이었다.
“결과는 모두 알다시피 익스퍼트 급은 저 살짝 미친 아이가, 그리고 마스터 급은 네가 우승했지. 어디에서도 핑계를 댈 수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그는 패했다고 말하면서도 흥겨운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영약은 너희 모두에게 줄 것이고, 흑룡포는 따로 누구에게 준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마음에 드는 네게 주고 싶다.”
오그람은 어깨에 걸쳐놓았던 흑룡포를 다시 들어서 내밀었다.
“흑룡포는 블랙 드래곤 스케일로 만든 코트인데, 정말 주셔도 되는 겁니까?”
흑룡포는 아룡이나, 해츨링이 아닌, 진짜 드래곤의 비늘로 만든 무구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검은 코트처럼 보이지만 외부와 내부 모두 드래곤의 비늘로 만든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야수족은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빨리 가져가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으음….”
라온은 바로 받지 않고, 글렌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주기는 한다만 지금의 네가 쓰기는 힘들 것이다.”
“예? 그건 무슨….”
“이 녀석은 저 광녀와 함께 만든 물건이라 주인을 가리거든.”
오그람이 인상을 찌푸리며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검게 물든 손으로 초콜릿을 먹던 체임버가 헤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꽤 까탈스러운 녀석이라, 벽을 넘어야 제대로 다룰 수 있을 게다.”
오그람이 다가와서 직접 코트를 예복 위에 걸쳐주었다.
‘이거 좀 긴데….’
자신의 키도 큰 편이지만, 2m 30cm 가까이 되는 오그람이 입던 코트였기에 땅에 질질 끌렸다.
우우우웅!
잘라야 하나 고민할 때 흑룡포가 부르르 떨리더니 물에 젖은 천처럼 쪼그라들며 키에 맞는 길이로 줄어들었다. 형태 역시 바람막이처럼 거칠어 보이던 모양에서 지금 입은 예복에 맞게 고귀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으로 변했다.
‘몸에 딱 달라붙는 느낌이야.’
맞춤옷을 입은 듯 움직이는 것에 자그마한 불편함도 없었다. 예복 위에 흑룡포를 걸치고 있다는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거 예상외로군.”
오그람이 그 모습을 보며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아직 널 주인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너라는 존재는 인정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널 미래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지.”
그는 역시 대단하다며 어깨를 두드렸다.
“흑룡포에도 자아가 있는 겁니까?”
“그리 거창한 건 아니다.”
오그람이 고개를 저었다.
“그저 주인을 인정하여 힘을 빌려주느냐, 인정하지 않느냐 정도 뿐이다.”
그는 묘한 눈동자로 흑룡포를 바라보다가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힘을 빌려준다라….”
말을 들어보니, 흑룡포에도 진혼검 같은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흑룡포는 이제 됐고, 자네 혹시 결혼은 했나?”
오그람이 눈앞으로 다가와 얼굴을 들이 밀었다. 이곳저곳을 훑으며 탐색하는 눈빛이었다.
“어….”
라온이 입을 떡 벌렸다.
‘이게 다야?’
대륙 전체에 이름이 퍼진 흑룡포를 넘겨줘놓고 생색조차 내지 않다니, 어이가 없을 정도로 시원한 사람이었다.
“…아뇨.”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바로 고개를 저었다.
“사귀는 처자는?”
“없습니다.”
“좋구만!”
오그람이 시원하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내 딸하고 만나 볼 생각 없나? 귀엽고, 아담한 아이인데.”
“그게….”
그 아담하다는 말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모나가 아담하기는 하죠.”
라온은 등 뒤에서 들린 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가로나가 다가와서 씩 웃고 있었다.
“얼마 전에 봤을 때 이쯤이었던가.”
가로나는 손을 들어 본인의 턱 부분을 가리켰다.
‘그게 아담해?’
190은 되겠는데?
가로나의 체구는 오그람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그의 턱은 자신의 정수리보다도 높기에 낮게 봐도 190은 되는 키였다.
여자의 키가 크든 작든 상관없지만, 190이 아담하다는 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네가 모나와 결혼한다면 나와 진짜 형제가 되겠군! 아니! 뭐 지금도 진짜지만!”
“그래. 네 녀석과도 형제였지! 모나만 좋다면 아주 좋은 인연이 되겠어!”
가로나와 오그람은 앞뒤 길을 막고 귀가 아플 정도로 큼지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음….”
2m가 한참 넘는 거한들에게서 강한 압박이 느껴졌지만, 할 말은 해야 한다. 목숨을 걸고 이뤄야 할 목표가 있기에 아직 누군가와 혼약을 맺을 생각은 없었다.
“저는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에헤이! 어딜 선수를 쳐!”
라온이 거절을 하려고 할 때 허공에서 체임버가 나타났다.
“좋은 아이는 우리 쪽에도 있다고!”
그녀가 지팡이를 살짝 까딱이자, 멀리 떨어져 있던 제이나 왕녀가 눈앞에서 튀어나왔다.
“꺄악!”
제이나는 쥐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리고 비명을 질렀다.
“우리 제이나 정도면 얼굴도 좋고, 배경도 좋고, 실력도 좋고. 성격이 조금. 아주 조금 까칠하지만 그게 또 매력이거든.”
체임버는 제이나가 당황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칭찬 아닌 칭찬을 쏟아냈다.
“끄윽….”
제이나는 라온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홱 돌렸다.
라온은 분노와 부끄러움이 어우러진 제이나의 표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오?”
체임버는 제이나와 라온을 번갈아 보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뭐야 뭐야! 이거 뭔데! 둘이 벌써 저지른 거야?”
“전혀 아닙니다.”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기에 바로 손을 저어주었다.
제이나의 본성이 어떤 줄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와 좋은 관계가 될 일은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저 싸가지와 만날 일은 없지.’
-이 싸가지야! 밥 좀 먹자고!
* * *
“볼수록 재밌는 아이로군요.”
레크로스 국왕은 오그람과 체임버 사이에서도 할 말을 다 하는 라온을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강자 앞에서 주눅 들지 않지만, 약자를 배려하는 성향. 최근에는 드문 성격입니다. 왜 저리 어린아이의 이명에 협이 들어가는지 알겠군요.”
“…뭐, 어렸을 때부터 남들과는 조금 다른 아이였지.”
글렌은 눈동자를 살짝 굴려서 레크로스 국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보는 즐거움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딱히 관심이 없었어서.”
그는 잘 모른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레크로스 국왕은 라온의 어린 시절을 듣지 못해 아쉽다며 입매를 내렸다.
“크흠.”
잠시 몇 초간의 침묵이 이어진 뒤에 글렌이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저 아이가 처음으로 두각을 드러낸 건 예비 훈련생 시절이었네. 당시에 좋지 않은 체질을 앓고 있었지만 첫 훈련에서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달려….”
셰릴은 라온의 이야기를 꺼낸 글렌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거기서부터?’
어느 정도 성장한 뒤가 아니라, 예비 훈련생 시절부터 시작하다니, 글렌은 라온의 일대기를 모두 말하려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제대로 된 활약부터 시작하라고 전하고 싶었지만, 말릴 수는 없었다.
‘표정이 너무 밝으셔.’
라온의 어린 시절을 말하는 글렌의 표정이 너무 즐거워 보여서 말릴 수가 없었다.
‘거기다….’
라온에 대한 이미지가 좋은 탓인지 그 이야기를 듣는 레크로스 국왕도 흥미로워 보였다.
“…그렇게 되어서 라온은 처음 이루어진 결투에서 당당하게 승리했지.”
“오호, 어렸을 때부터 두각을 드러냈군요. 하긴 저희 셋째도 지그하르트에 다녀온 뒤로 라온을 칭찬했었죠.”
“그 뒤에도 있네. 이제 훈련생으로 인정받고 제대로 된 훈련을 시작하려 할 때 마르타가….”
글렌이 라온의 훈련생 시절로 이야기를 넘기려 할 때 데루스가 느릿하게 단상 위로 올라왔다.
“음….”
글렌이 말을 멈추고, 데루스를 불렀다.
“파랑검의 상태는 어떤가?”
“진단은 같습니다. 아무래도 조금 후유증이 있을 듯하군요.”
데루스가 눈썹을 살짝 내린 채로 고개를 저었다.
“으음….”
레크로스 국왕이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 왕국에서 일어난 일이니 가만히 있을 수 없군요.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아닙니다.”
데루스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먼저 살기를 높인 게 카디스라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습니까. 자업자득일 뿐입니다.”
“정말 괜찮은 건가?”
글렌이 데루스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필요하다면 도와주겠다는 듯한 잔잔한 눈빛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칠 방법을 몇 가지 생각해두었으니까요. 카디스 녀석도 이번 일을 통해 배운 게 있을 테니, 전 만족합니다.”
데루스는 카디스의 팔을 고치기 위해 내일 바로 떠나야겠다며 옅게 웃었다.
“자네는 여전하군.”
“멋지네요.”
글렌과 레크로스 국왕은 진심으로 아들을 생각하는 데루스를 보며 감탄을 흘렸다.
“와아아….”
“역시 데루스 님.”
“저런 인자하신 분은 세상에 또 없으시지.”
“남부가 괜히 평화로운 게 아니라니까.”
연회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데루스의 말을 듣고서 눈빛을 반짝였다.
“우울한 소리는 그만하죠.”
데루스가 손뼉을 치고서 와인이 든 잔을 쥐었다.
“저희가 이렇게 모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니, 처음으로 건배나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가 잔을 들어 올리자, 글렌과 레크로스 국왕이 잔을 들었다.
“아, 나도 같이해!”
어느새 다가온 체임버가 주스가 든 컵을 허공에 띄웠다.
“너희들끼리만 놀자는 건가?”
오그람도 단상 위로 뛰어올라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다섯 개의 잔이 부딪치고, 그 아래에 선 육황 수장들의 눈동자를 비춘다. 모두가 평온한 눈빛이었지만, 데루스의 눈은 무저갱처럼 깊게 가라앉아있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육황 만세!”
“앞으로도 함께 갑시다!”
연회장의 모두는 그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박수와 환호를 보냈지만, 딱 한 명. 그의 속을 알아차린 사람이 있었다.
라온은 사람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어주는 데루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열 받았네.’
그것도 아주 단단히.
카디스를 이용한 계획이 실패한 것으로 모자라, 지그하르트의 이름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상승했고, 카디스의 어깨에는 장애가 생기는 최악의 결과가 일어났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속으로는 이곳을 다 뒤집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차올랐을 것이다.
‘데루스 로베르트.’
역시 대단한 놈이야.
속으로는 그렇게 화가 났으면서 겉으로는 저런 인자한 미소를 짓다니, 적이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괴물이다. 카디스와 비교하는 게 민망할 정도의 인내력이었다.
‘다만….’
다음 건 참을 수 없을 걸?
데루스를 바라보는 라온의 눈동자에 붉은 뇌광이 튀었다.
‘네가 그리 아끼던 해저 던전의 보물이 사라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