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2화
“음?”
라온은 햇볕이 내려오는 창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웬 벼락?’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인데, 갑자기 천둥 소리가 들려왔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닌 것 같았다.
‘별 일이 다 있군.’
피식 웃으며 손으로 주먹을 쥐어보았다. 체력은 어느정도 돌아온 듯 하지만, 오러는 거의 회복되지 않았다.
‘오러를 너무 많이 썼군.’
말 그대로 단전의 오러를 모조리 사용했기에 나태의 효과를 받았음에도 회복이 더디다. 만전으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어.’
환자에게는 남는 게 시간이다. 불의 고리와 만화공을 동시에 운용하여 내상과 오러를 동시에 회복시키려고 할 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육황의 수장들에게 받았던 우승 상품들이었다.
글렌에게 받은 백금 메달과 레크로스 국왕에게 받은 장갑, 체임버에게 받은 반지, 오그람에게 받은 영약 그리고 데루스에게 받은 비령도라는 무학서가 놓여 있었다.
-본왕의 부하들이 놓고 간 물건들이니라.
‘네 부하?’
-그렇느니라.
부하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광풍단 녀석들이 놓아두고 간 모양이다.
‘좀 볼까.’
먼저 메달을 살펴보았다. 딱히 특별한 건 느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우승자가 속해있는 세력의 수장이 목에 걸어주는 기념품 같았다.
‘단주님이 좋아하시겠네.’
대륙에서 백금은 금 10배의 값어치를 가진다. 리메르가 보았다면 눈이 돌아갔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려나.’
또 졸부가 됐을 테니까.
그는 이번 결투에 돈을 걸어 어마어마하게 땄을 테니, 이 정도 백금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조만간 양손에 금가락지를 끼고 나타날 모습이 눈에 선해서 웃음이 나왔다.
“다음은….”
라온이 백금 메달을 내려놓고 레크로스 국왕이 넘겨준 장갑을 보았다.
“어?”
이거 설마 테르릴로 만든 건가?
테르릴은 실을 뽑아낼 수 있는 특수한 금속으로 내구성이 좋은 건 물론이고, 마법과 사기에 강한 저항력을 지니고 있다.
같은 양의 백금보다 비싼 테르릴로 만든 장갑이라니, 상상을 한참 넘어선 상품이었다.
‘이런 보물을 주시다니….’
이렇게 값을 매길 수 없는 물건을 내어 줄 줄은 몰랐다. 조만간 찾아가서 다시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할 것 같았다.
라온이 들뜬 가슴을 가라앉히고, 체임버에게 받은 반지를 보았다.
‘이건 뭐지?’
분명 상당한 양의 마나가 깃들어 있는 게 분명하지만, 그 능력을 전혀 모르겠다.
선물을 줘놓고 쓰는 법을 알려주지 않다니, 체임버는 육황의 수장답지 않게 장난기가 많다고 들었는데 그 말이 정말이었다.
‘일단 넘어가야겠네.’
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오그람이 주었던 목갑을 열었다. 청초하면서도 씁쓸한 향이 스멀스멀 피어 나왔다.
‘검은색 단환?’
이거 사운환이잖아.
사운환은 최상급 약초와 독초를 세밀하게 조합하여 만들어낸 야수연맹의 최상급 영약이다.
오러만이 아니라, 뼈와 근육, 피부마저 튼튼하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어서 부르는 게 값인 보물이었다.
‘이거 하나만 먹으면 내상은 가볍게 회복하겠는데.’
사운환을 복용한다면 내상과 오러 회복은 물론이고, 육체를 한 층 더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라온은 오그람의 시원한 웃음을 떠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그놈의 물건을 볼까.
데루스가 내어준 비령도라는 무학서를 펼쳤다.
‘최상급은 안 되어도, 상급 이상.’
비령도는 근거리 단검술과 원거리 비도술을 조화시켜서 어떤 상대에게도 대응 가능한 상승 무학이었다.
‘좋기는 하지만….’
이대로 쓸 수는 없지.
데루스가 비령도를 주었다는 건 이 책에 있는 모든 것을 파악했다는 뜻. 언젠가 놈의 목을 벨 칼날이 될지도 모를 무학을 그대로 사용하는 건 미친 짓이다.
‘개선해서 익혀야겠어.’
다른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불의 고리가 있는 자신은 비령도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데루스의 심장을 뚫어버릴 정도로 뛰어난 무학을 만들겠다고 다짐하고서 책자를 덮었다.
-끄으으윽….
라스가 입김을 뱉으며 눈을 부라렸다.
-테르릴 장갑에 최상급 영약이라니!
‘무학서도 있어.’
라온이 라스를 놀리듯이 책을 흔들었다.
-그딴 코딱지만 한 대회의 상품치고는 너무 과하지 않느냐! 구슬 아이스크림이나 주지. 무슨 영약을 준단 말이냐!
라스는 구멍만 한 대회의 상품이 너무 크다며 악을 질렀다.
‘구슬 아이스크림이라….’
라온이 피식 웃었다. 영약과 같은 점은 동그랗다는 것밖에 없지만, 라스에게는 영약보다 아이스크림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만약 본왕이었다면 손만 흔들어주고 끝냈을 것이니라. 이런 낭비를 하다니 전부 정신이 나간….
라스가 혀를 쯧쯧 차며 말을 이어가려 할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더 높은 경지의 상대를 연달아 꺾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5포인트 상승합니다.]
[<불의 고리>의 성취가 크게 상승합니다.]
[<만화공>의 성취가 크게 상승합니다.]
[<글래시아>의 성취가 크게 상승합니다.]
더 높은 경지에 있는 강자 두 명을 상대로 승리한 덕분에 모든 능력치가 15포인트 상승하고, 불의 고리와 두 오러의 경지가 상승했다.
‘능력치 15포인트?’
한 번에 15포인트는 처음인데?
능력치 15로도 충분히 큰 보상이었지만, 메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특성 <불굴의 의지>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특성 <블리딩 커스>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특성 <나선력>의 등급이 2단계 상승합니다.]
이번 대회를 치르며 사용했던 특성들의 등급도 함께 상승했다.
‘불굴의 의지 덕분에 버틴 거였네.’
모든 체력과 오러를 사용한 이후에도 쓰러지지 않았던 이유는 큰 충격을 받았을 때 정신력을 북돋워 주는 불굴의 의지 덕분이었다.
‘이게 없었으면 데루스의 그 표정을 못 봤을 거 아니야.’
역시 다 쓸모가 있다니까.
별거 아닌 듯 보이는 특성들도 언젠가는 전부 쓸모가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내어준 라스에게는 정말 고마울 뿐이었다.
‘너 밖에 없다니까.’
-모, 모든 능력치 15? 1.5가 아니라, 15?
라스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
‘너와 달리, 시스템은 낭비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조금 전에 라스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며 피식 웃었다.
-끄으윽….
라스는 고개를 살짝 내린 채 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곧 오겠군.’
라온은 라스의 어깨 떨림이 강해지는 것을 보고 문 앞에 방해하지 말라는 푯말을 걸고 문을 잠갔다.
-이건 못 참느니라! 네놈이 뭘 했다고 능력치를 15나 받아 처먹는 것이냐! 대가리에 포크가 박힌 게 분명하느니라!
라스가 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눈동자가 훼까닥 돌아간 것을 보니, 열이 받을 대로 받은 모양이다.
라온은 팔에 달라붙는 라스를 보고서 사운환을 꺼내 입 안에 넣었다.
흙이 달라붙은 나무뿌리를 씹는 듯한 쓴맛이 입안 전체로 퍼지며 영약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뜨거운 기운이 마구잡이로 뻗어 나왔다.
-뒈지거라!
외부에서는 라스에게서 피어난 무시무시한 냉기와 분노의 기운이 밀려들었다.
‘내부에서 열기, 외부에서 냉기라.’
딱 좋네.
라온은 내부와 외부에서 전해지는 강대한 기운에 미소를 지으며 만화공을 운용했다.
고오오오오오!
외부에서 전해져오는 막대한 냉기에 견디기 위해서 사운환이 더 빠르게 녹아내리며 만화공에 힘을 실어주었다.
영약의 기운이 빠르게 흡수되고 있지만, 얻는 건 이게 다가 아니다.
‘라스의 냉기.’
마나회로를 두드리는 라스의 냉기를 글래시아로 바꿔서 흡수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회였다.
분노해서 눈이 돌아간 라스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은 오러를 2배 이상으로 빠르게 회복시켜주는 마사지나 다를 바가 없었다.
‘어디….’
슬그머니 눈을 떴다. 라스는 아기 상어처럼 팔을 꽉 씹은 채 끊임없이 냉기를 뿜어냈다. 그 모습을 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라스.’
역시 넌 아낌 없이 주는 나무야.
라온은 마음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연공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꿀꺽.
마티오는 그의 치료실에 들어온 데루스와 카디스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두 사람은 이곳에 들어온 지 20분이 지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카디스.”
치료실에 들어온 지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데루스의 입이 열렸다.
“죄, 죄송합니다.”
카디스는 그저 이름만 불렸을 뿐인데, 먼저 무릎을 꿇었다.
“무엇을?”
“그, 그놈에게 패배하여….”
“그게 아니다.”
데루스의 목소리는 평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안에는 감정이 없었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짜증도 없이 그저 무미건조했다.
그 인간답지 않은 음성에 가디스와 마티오의 안색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둘 모두 아는 것이다. 화를 내야 할 상황에서 내지 않는 데루스가 더욱 무섭다는 것을.
“내가 전에도 말했을 터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말고 빨리 끝내라고.”
“그, 그….”
“청운현성검이 밀리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놈은 청운현성검의 극상성인 절검을 익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성광검결로는 확실히 끝낼 수 있었다.”
데루스의 눈동자가 어둑한 빛으로 가라앉으며 방의 공기가 사막처럼 메마르기 시작했다.
‘크으….’
마티오는 당장 목을 움켜쥐고 싶은 감정을 꾹 참고 피나도록 주먹을 말아쥐었다.
‘목이 타는 것 같아.’
조금만 더 있으면 숨을 쉬지 못해서 죽겠다고 생각할 때 데루스의 말이 이어졌다.
“너보다 한참 어린아이에게 처참하게 지는 것으로 모자라. 경지까지 높여주었구나. 최악 중의 최악의 결과야.”
“죄, 죄송합니다.”
카디스는 간신히 붙인 팔을 움켜쥔 채 고개를 숙였다. 처음 오웬에 왔을 때의 보여주던 자신감은 그의 발밑으로 녹아내려 있었다.
“다, 다음에는 무조건 놈의 목을 베는….”
“다음?”
데루스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닿기만 해도 얼어버릴 듯한 차가운 웃음이었다.
“다음은 없다.”
“예?”
“19살에 네놈을 꺾을 정도의 괴물이다. 1년 후에는 네 머리 위에 올라가 있을 텐데 다음이 있을 거 같나?”
“죽을 정도로 노력하겠습니다! 기회만 주신다면 어떻게 해서든….”
“넌 그 기회도 살리지 못할 것이다.”
데루스의 시선이 두꺼운 붕대를 감고 있는 카디스의 오른 어깨로 향했다.
“네 팔은 정상이 아니니까.”
“그, 그게 무슨….”
“그놈의 냉기 때문에 네 마나회로와 힘줄에 동상이 생겼다. 완전히 회복된다고 해도 이전처럼 자유롭게 검을 휘두를 수는 없을 것이다.”
데루스는 아들이 아니라, 쓸모없어진 물건을 보는 듯한 눈으로 카디스를 굽어보았다.
“아….”
카디스의 눈동자가 파도를 맞은 돛단배처럼 격하게 흔들렸다.
“돌아가라. 네가 왜 그 꼴이 되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도록.”
“…알겠습니다.”
데루스의 손짓에 카디스가 고개를 떨구고 마티오의 치료실을 나섰다.
“마티오.”
“예.”
마티오는 카디스만큼이나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라온은 어땠지?”
데루스의 명령 때문에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대련장으로 가서 라온의 움직임을 살피고 확실한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는 생각을 정리한 뒤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라온 지그하르트의 싸움을 모두 본 바. 그는 제가 키웠던 암살자 라온이 아닙니다. 놈에게선 그림자의 행동 방식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티오는 어제와 오늘 라온을 보며 느꼈던 점을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가.”
데루스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장갑을 벗었다. 20년이 지난 상처에서 시뻘건 핏방울이 흘러 내려왔다.
“재밌군.”
그는 손등의 상처를 혀로 핥으며 사이한 미소를 지었다.
“으음….”
마티오는 그 기괴한 모습을 보며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았다.
“내일 저녁에 마지막 연회가 있을 것이다. 그게 끝나는 대로 넌 바로 가문으로 돌아가도록.”
데루스가 마티오에게 품에 가지고 있던 마법서를 건넸다.
“그에게 이 마법서를 넘겨서 바로 던전 공략에 착수해라.”
“가주님께서는….”
“난 카디스의 팔을 고치기 위해 조금 움직여야 할 것 같다. 가는 길에 훈련소를 돌아보는 것도 좋겠지.”
그는 카디스가 나간 방문을 가리키며 눈매를 찡그렸다.
“아, 알겠습니다.”
마티오가 턱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운 분….’
데루스는 카디스를 생각해서 그의 팔을 고쳐주려는 게 아니다. 카디스의 팔이 망가진 사실을 들었을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아버지의 인상을 주기 위해 나서는 것이다.
오랜 기간 데루스를 봐왔지만, 최근의 그는 점점 더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아 오를 정도로 오싹한 사람이 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카디스에게도 다시 기회를 줄 생각이다. 다만 이게 마지막이 되겠지.”
“예….”
데루스는 새로운 장갑을 꺼내서 착용한 뒤에 몸을 일으켰다.
“마티오.”
“예.”
“네게 주어진 기회도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아두도록.”
데루스는 수하만이 아니라, 혈육도 버릴 수 있는 남자다. 이 이상의 실패는 목을 베어달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마티오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데루스에게선 어떠한 말이나 반응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
마티오가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데루스는 처음 그 자세에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섬뜩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심장이 꽉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나중에 보도록 하지.”
데루스의 껌껌한 눈빛에 점차 빛이 들어선다. 그는 눈동자를 온화하게 바꾼 뒤에 마티오의 어깨를 두드리고서 방문을 나섰다.
“하아….”
마티오가 눈을 내리감은 채 그대로 침상에 쓰러졌다. 오늘 밤은 잠이 들지 못할 것만 같았다.
* * *
라온이 천천히 눈을 떴다. 햇살이 쏟아지던 창가는 어느새 떠오른 달빛이 이지러지고 있었다.
‘꽤 회복됐네.’
내부에서는 사운환의 기운이 일어나고, 밖에서는 라스의 냉기가 두드려준 덕분에 내상은 대부분 회복되었다. 오러도 반 이상 차오른 것을 보니, 곧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흐음.”
-끄윽.
손을 들어 기지개를 펴자, 허리 부근에서 라스가 도토리처럼 굴러떨어졌다.
-네, 네놈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는 것이냐….
힘이 다 빠졌는지 라스의 팔이 너풀거렸다.
‘네 덕분이지.’
-그게 무슨….
‘네가 밖에서 때려 준 덕분에 영약의 기운이 더 빠르게 풀렸어. 그 많은 기운을 이용해서 내상을 치료하고, 오러까지 회복시켰지.’
라온이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 아….
라스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깨닫고 입을 떡 벌렸다.
‘아주 시원한 마사지 고맙다.’
라온은 넋이 나간 라스의 머리를 휘저으며 조롱의 미소를 날렸다.
-아아아악! 이 얌생이 같은 놈이!
라스가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지만, 힘이 다 빠져서 허공만 긁다가 아래로 추락했다.
-제, 제기랄. 어쩐지 힘이 빨리 빠지더니….
녀석은 남 좋은 일만 해줫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아우, 좋네.”
라온은 기지개를 펴고 일어났다. 개운함을 느끼고 있을 때 문 앞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루난?”
문을 열고 나가자, 루난이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꾸벅이고 있었다.
“뭐하고 있었어?”
“호법.”
루난이 맹한 눈을 꿈뻑이면서 대답했다.
“호법….”
아무래도 연공을 하는 걸 알아차리고 와서 호법을 서준 것 같았다.
“고마워.”
“그럼 가자.”
루난은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턱을 끄덕이고서 소매를 잡았다.
“어딜?”
“연회장.”
그녀는 의무실에서 서쪽에 있는 연회장을 가리키며 입맛을 다셨다.
“나오면 데리고 오라고 했어.”
“누가?”
“천검대주님이.”
루난은 그리 말하면서 의자 옆에 걸어두었던 옷을 들어올렸다. 금색과 적색이 어우러진 화려한 예복이었다.
“이거 입어.”
“이건 좀….”
“꼭 입으래.”
루난은 조금 즐거워 보이는 눈빛으로 옷을 내밀었다.
“그럼 난 패스….”
“안 돼.”
-안 되느니라!
라온이 거절하고 의무실에 남아 있으려고 할 때 루난과 라스가 동시에 팔을 잡았다.
“구슬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본왕은 구슬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느니라!
둘이 같은 말을 하며 눈매를 찡그렸다.
“오늘도 구슬 아이스크림이 쌓여 있어.”
-너희 영감도 고기 많이 먹으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건 오라는 뜻이지!
“으음….”
라온이 오물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호법을 서준 루난과, 본의는 아니지만 마사지를 해준 라스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자 거절의 말이 나오질 않았다.
“뭐, 배를 채우긴 해야 하니까.”
“응. 가자.”
루난이 빨리 가자는 듯 손을 흔들었다.
“라온 존잘!”
-이제야 네놈에게도 양심이라는 게 생기는구나!
루난은 아주 얇은 미소를 지었고, 라스는 교육한 효과가 있다며 콧김을 흥하고 내뿜었다.
‘민트초코 바보 둘을 붙여 놓고 싶네.’
잘 어울릴 텐데.
라온은 민트초코 하나를 놓고 싸우는 라스와 루난이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 * *
라온은 세안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연회장으로 향했다. 이미 시작한지 시간이 꽤 지났는지 내부가 북적거렸다.
“청월검?”
“백검룡!”
연회장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이 라온과 루난을 알아보고 눈을 화등잔만하게 뜬 채 고개를 숙였다. 며칠 전 연회보다 훨씬 예의가 깃든 인사였다.
“라온 검사님의 결투를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응원하겠습니다.”
그들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어제 대결을 본 소감을 전한 뒤 창으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쿵 소리와 함께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육황 결투 대련의 우승자! 백검룡 라온 지그하르트와 청월검 루난 슬리온 입장합니다!]
문이 활짝 열림과 동시에 안에 있던 기사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백검룡이라는 이름이 들려온 순간부터 시끌벅적했던 연회장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단상에 있는 육황의 수장들부터 아래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까지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문으로 라온에게 꽂혔다.
“가자.”
라온은 부담스러울 정도의 시선을 가볍게 흘리며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응.”
-후우! 이 냄새는 양갈비가 분명하느니라! 일단 양갈비 구이부터 맛보자꾸나!
루난과 라스는 그런 부담 따위 처음부터 못 느꼈다는 듯 들어가자마자 음식을 찾았다.
‘일단 자리부터 좀 잡고.’
라온이 피식 웃으며 광풍단이 있는 곳으로 향하려고 할 때 이곳저곳에 퍼져 있던 육황의 무인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왔다.
“우오오오오오!”
“설화검협이다!”
“이제 백검룡이라고!”
“라온 검사님 결투를 단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봤습니다! 심장을 울리는 싸움이었어요!”
“저는 떨려서 어제 잠도 못 잤습니다!”
“악수 한 번만 해주세요!”
남녀노소 가릴 거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주변이 꽉 들어찼다. 물러서거나 나갈 공간 자체가 없었다.
-이, 이것들이! 양갈비를 먹어야 한단 말이다!
라스는 손으로 눌러버린 솜사탕처럼 짜부가 된 채 분통을 터트렸다.
“라온 님!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십니까?”
“성광검결을 지운 검술은 정말 직접 만드신 건가요?”
“다른 검술들도 만들었다고 하던데 기회가 된다면 보여주실 수….”
너무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서 그 말도 제대로 들려오지도 않았다.
‘조용히 빠져나가긴 힘들겠군.’
어쩔 수 없겠어.
기세를 일으켜서 사람들을 물리려고 할 때 연회장 중앙 부근에서 건물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이 터져나왔다.
쿠구구구구!
강대한 충격이 일어난 곳에서 어마어마한 기파가 치솟으며 라온의 앞에 선 사람들이 저절로 갈라지며 좌우로 밀려났다.
열린 인해 위로 거대한 체구가 드러난다. 오그람. 단상 위에 있던 야수연맹주 오그람이 아래에 내려와 있었다.
오그람은 묵직한 걸음으로 다가와 라온의 앞에 섰다.
“대련장 위에서는 노회한 야수가 따로 없더니, 이곳에선 제 나이로 보이는구나.”
-고기는 언제….
그는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강하게 치지만, 조금의 악의도 없기에 오히려 시원했다.
“내어주신 영약 덕분에 내상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양갈비 냄새가 많이 나는데….
라온은 만난 김에 그에게 사운환을 받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앞으로 30개를 더 주어야 하는데. 그 정도야.”
“예?”
무슨 소리지?
갑자기 나온 사운환 30개 소리에 입이 헛바람이 나왔다.
“너희 영감과 내기를 했고, 내가 졌다. 그 대가는 너희 아이들 숫자에 맞는 사운환이었지.”
“그럼 광풍단 전원에게 사운환을 주신다는 겁니까?”
“그렇다.”
-아니 일단 밥부터….
오그람은 패했다고 말하면서도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서 앞으로 내밀었다.
“이 흑룡포도 네 것이다.”
-흑룡이고 지렁이고 일단 밥부터 먹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