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1화
눈치를 보던 사회자가 대련장으로 올라와 고개를 숙였다.
“육황 결투 대련이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그는 갈라진 목소리를 헛기침을 해서 다잡은 뒤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피 튀기도록 치열했던 마스터급 결투의 정점에 선 무인은 대회 최연소 참가자 라온 지그하르트! 설화검협 라온 지그하르트가 우승을 차지합니다아아아아!”
사회자가 목이 터지도록 함성을 지르자, 대련장 전체가 들썩였다.
“우와아아아아아아!”
“라온! 라온! 라온!”
“대륙십이성을 모조리 깨부수다니….”
“마티스랑 가로나도 잊으면 안 되지.”
“그러고 보니 최연소였어. 이제 스물이 되는 아이가 이름난 마스터들을 모조리 때려눕혔다고!”
“진짜 말도 안 되는 걸 봤다. 평생 잊지 못하겠어.”
관객들은 괴성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커다랗게 라온의 이름을 외쳐댔다.
“그러고 보니 익스퍼트 급 우승자도 지그하르트잖아. 나찰검 마르타 지그하르트!”
“떠오르는 것도 지그하르트 애들 뿐이야.”
“그러네. 선풍검에 청월검까지.”
“인재들이 다 지그하르트에만 가는 건가?”
“북멸왕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아래가 더 단단하잖아!”
관객들은 라온만이 아니라, 익스퍼트 급 대회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던 마르타, 루난, 버렌의 이름도 외치며 환호를 보냈다.
라온은 웅장함이 전해져오는 함성을 들으며 관객석을 둘러보았다.
‘변했군.’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지그하르트에 환호를 보내는 관객은 아무도 없었다.
익스퍼트 급에서는 제이나 왕녀나 그리어 왕자가 우승 후보였고, 마스터급에서는 보리니 키튼, 가로나, 카디스가 우승 후보였다. 지그하르트가 이기리라 생각하던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지그하르트!”
“지그하르트!”
하지만 모든 결투가 끝난 대련장에서는 오직 지그하르트의 이름만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재밌네.’
무시하고, 무관심하던 사람들을 모두 감화시켰다는 것에 감정이 끓어오른다. 다른 사람들을 구해주고 찬사를 받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라온. 괜찮아?”
어느새 다가온 루난이 눈썹을 축 내렸다. 우승 축하보다 먼저 걱정을 해주다니, 루난다웠다.
“딱 좋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기 직전의 상태였지만, 데루스 로베르트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 관객들의 함성을 듣자 내상과 외상의 고통이 극단적으로 줄어들었다. 각성 상태 같았지만,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괘, 괜찮다고?”
마르타가 어깨의 상처를 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응. 시상식까지는 버틸 수 있어.”
이렇게 재밌는 상황에서 기절할 수는 없지.
우승자는 시상식에서 육황의 수장들에게 직접 선물을 받는다. 데루스 로베르트를 한 번 더 조롱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라온 님. 이제 시상식을 해야하는데, 버티실 수 있겠습니까?”
사회자가 다가와서 조용하게 속삭였다.
“힘드시다면 관객 없이 나중에 시상식을….”
“아뇨.”
라온이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해도 괜찮습니다. 제 이름을 저렇게 외쳐주시는데 미룰 수는 없죠.”
지금도 라온이라는 이름을 부르짖는 관객들을 가리키며 옅게 웃었다.
“아….”
사회자의 눈동자가 살짝 쭈그러들었다.
“가,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연기가 아니라,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그는 감격한 표정으로 손을 떨었다.
“라온! 넌 진짜 징한 놈이다!”
버렌이 입술을 꾹 깨문 채 다가와서 몸을 껴안았다. 그도 감동을 받았는지 코를 살짝 훌쩍였다.
“근데 이 인간은 또 어디 있어?”
마르타가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단에서 우승자가 둘이나 나왔는데 단주는 어디에 처박혔냐고!”
“그러게….”
“에휴….”
광풍단은 리메르를 찾기 위해서 주변을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난 부자다! 진짜 초대박 부자다!”
라온이 그들을 따라 시선을 돌릴 때 우측 관객석에서 목이 갈라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있네.’
여전하다고 생각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저 인간 때문에 엘프에 대한 이미지가 점점 안 좋게 바뀌고 있었다.
“부단주님.”
도리안이 옆으로 다가와서 손짓을 했다.
“그 상태로 단상에 올라가긴 좀 그러니, 옷부터 갈아입어요.”
“음….”
라온이 스스로의 상태를 확인했다. 제복은 다 찢어졌고, 카디스와 자신의 피가 묻어서 좀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게 낫겠네.”
시상식을 열 때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릴 테니, 옷을 갈아입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라온은 도리안과 함께 아래로 내려가서 대기실로 들어갔다.
“뭘로 드릴까요?”
도리안은 배 주머니에 손을 넣은 뒤에 연달아 여러 종류의 의복을 꺼내놓았다. 다양한 종류의 예복과 제복이 어느새 테이블 위를 가득 채웠다.
“드레스는 왜 있냐?”
라온은 중간에 끼어 있는 드레스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 이쪽은 정리가 다 안 되어서요.”
도리안은 헤헤 웃고서 다시 드레스를 배 주머니에 넣었다.
-저 녀석에게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이 있는지 물어보아라.
‘…….’
왠지 진짜 있을 것 같아서 물어보지 않았다.
“이걸로 할게.”
라온은 예복 중에서 가장 덜 화려한 검은색 정장을 골랐다.
“생각해줘서 고맙다.”
“아뇨.”
도리안이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부단주님도, 1조장님도 우승하셔서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알렸는데 전 한 게 없잖아요. 이런 거라도 해야죠.”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배 주머니에 옷들을 넣기 시작했다.
“아니지.”
라온이 찢어진 제복을 벗으며 눈을 내리감았다가 떴다.
“우리가 한 거다.”
“예?”
“내가, 마르타가 한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한 거라고.”
손가락을 들어 대기실의 천장을 가리켰다. 지그하르트를 외치는 관중들 때문에 대기실도 흔들리고 있었다.
“광풍단 모두가 전력을 다해서 싸웠기에 저렇게 이름이 불리는 거야. 나 혼자였다면 라온이라는 이름만 불렸겠지.”
라온이 옷을 다 갈아입은 뒤 도리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부심을 가져. 너와 광풍단 모두는 최선을 다했어.”
“…네.”
도리안이 옷을 배 주머니에 넣다 말고, 바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라온이 픽 웃으며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우와아아아아아!”
“라온!”
“설화검협!”
“백검룡!”
“백검룡! 앞으로도 기대한다!”
설화검협말고도 백검룡이라는 이명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마지막에 보여준 백영섬이 그들의 뇌리에 깊게 박혔던 것 같다.
‘검룡이라….’
이명에 용이 붙는 건 젊은 무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광이다. 대륙십이성에서도 용이 붙는 사람은 상위에 있는 네 명 중 둘 뿐이었다.
‘점점 이름이 과분해지네.’
검협에 이어 검룡이 되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약간 부담스러워졌다.
“그럼 지금부터 시상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가 대련장 위로 올라와서 손을 들어 올렸다.
“익스퍼트급 우승자 마르타 지그하르트는 단상 위로 올라가 주십시오.”
마르타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육황의 수장들이 있는 단상 위로 올라갔다.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은 글렌이었다.
“훌륭한 투지였다. 하지만 넌 스스로를 더 아끼는 법을 배워야겠구나.”
글렌이 마르타의 목에 백금 메달을 걸어주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수고했다.”
“예!”
마르타는 크게 고개를 숙이고서 옆으로 이동했다.
“그리어 녀석을 깨우쳐 주어서 고맙네.”
레크로스 국왕은 마르타와 악수를 하고서 검 한 자루를 건네주었다.
“깨진 검만은 못하겠지만, 명검에 속해 있으니 새로운 검을 얻을 때까지 도움이 될 거네.”
“감사합니다!”
마르타는 허리를 굽힌 채로 두 손을 들어 검을 받았다.
“얼굴에 흉은 안 지겠네. 다행이야.”
체임버가 마르타의 얼굴을 살피고서 방실 웃었다.
“선물은 얼굴 상처를 지운 것으로 때워도 되지?”
“네. 상관없습니다.”
마르타는 정말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 귀여워!”
체임버가 키득거리고서 마르타의 손 위에서 지팡이를 흔들었다. 푸른 빛이 돋아나며 마르타의 손 위로 회색 팔찌 하나가 떨어졌다.
“능력은 비밀!”
그녀는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고서 뒤로 훌쩍 물러섰다.
“감사합니다.”
마르타는 팔찌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아직 어리지만, 무인의 정신만큼은 우리 아이들 못지않더구나.”
오그람이 마르타의 앞에 섰다. 마르타의 키가 여자치고 큰 편인데도, 오그람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연맹의 상급 영약이다. 네 육체가 정신을 따라가는 데 도움이 될 게다.”
그는 마르타에게 영약이 든 목갑을 건네주며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마르타는 오그람에게 고개를 숙인 뒤에 마지막으로 데루스에게 다가갔다.
“멋진 승부였습니다.”
그는 구김 없이 웃으며 마르타에게 책 하나 건네주었다.
“파현보라는 보법입니다. 그 위력적인 검술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마르타는 다섯 사람에게 다시 인사를 한 뒤 관객들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우와아아아아아!”
“마르타! 마르타!”
“나찰검! 나찰검!”
관객들은 마르타에게 박수를 보내주었지만, 그녀의 이마에는 힘줄이 뚜둑 올라왔다.
“나찰검이라고 하지 말랬지! 이 개자식들아!”
마르타는 수장들이 내려준 보상들을 꽉 안은 채 이를 바득 갈았다.
“아하하하하!”
“진짜 나찰이야!”
“다시 나찰녀로 부르자! 검으로는 저 흉폭함을 못 담는다니까!”
“나찰녀! 나찰녀!”
“나찰검! 나찰검!”
관객들은 마르타를 놀리듯이 낄낄 웃었다. 검이든, 녀든 상관없이 마르타에게 나찰이라는 이미지가 붙어버렸다.
“이 썩을 것들이!”
마르타가 눈에 불을 피우며 관객석으로 뛰어들었다.
“야! 말려!”
“마르타!”
“조장님!”
밑에 있던 광풍단이 빠르게 진입한 덕분에 마르타의 입에 재갈을 채운 채로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아, 자, 잠시 문제가 있었던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사회자는 이마 위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다음으로 마스터급 우승자 라온 지그하르트. 단상 위로 올라가 주십시오!”
“이야아아아아아아!”
라온은 하늘까지 닿는 함성을 들으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크흠.”
글렌은 얼굴은 평소처럼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서 목에 백금 메달을 걸어주었다.
“적의 공세 자체를 지우는 훌륭한 반격기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마스터 최상급 검사의 절기는 지우지 못했을 테니까.”
“예.”
다른 사람이 있기 때문인지 그는 칭찬보다는 검술에 관해 말해주었다. 솔직히 이게 더 편하기에 미소가 나왔다.
“네가 많은 검술을 보고, 많은 경험을 겪을수록 강해질 수 있는 검술이다. 잘 다듬어나가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라온은 글렌에게 고개를 꾸벅이고서 옆으로 이동했다.
“오랜만에 개안을 한 기분이야. 훌륭한 결투였네.”
레크로스 국왕의 큼지막한 미소에서 만족스러움이 전해져왔다.
“자네에게는 검이 있으니, 다른 게 좋겠지.”
그는 세검이 새겨진 장갑 한 쌍을 건네주었다. 장갑을 잡기만 했음에도 특별함이 전해져왔다.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자네의 명성이 더 높은 곳에서 들리길 바라겠네.”
“감사합니다.”
레크로스 국왕은 처음 보았을 때부터 호의를 보여준 사람이다.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하고서 체임버의 앞에 섰다.
“너 나랑 갈래?”
체임버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미소를 지었다.
“체임버 님….”
“저 미친 것이!”
그녀의 양 옆에 있는 레크로스 국왕과 오그람이 인상을 찡그렸다.
“농담…은 아니고 진짜 끌리는데.”
“예?”
“너 마법 배울 생각 없어? 내가 직접 알려줄게. 제자로 들어와.”
“검 하나로도 버겁습니다.”
마법에 재능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 검 하나로 끝을 볼 생각이다. 거기다 이상한 마법사는 멀린 하나면 충분했다.
“아닌데, 될 거 같은데?”
체임버는 ‘너라면 가능해.’라고 중얼거리며 라온을 훑어내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욕망의 빛이 날름거렸다.
“체임버.”
“에휴, 알겠어.”
글렌의 낮은 음성에 체임버가 고개를 끄덕이고 지팡이를 내밀었다.
“다음에 볼 땐 더 잘생겨져 있어야 한다.”
그녀의 지팡이에서 반짝이는 빛이 떨어지더니, 푸른빛 반지가 되었다.
‘아티팩트인가.’
마르타에게 주었던 팔찌처럼 이 반지도 발카르의 아티팩트인 것 같았다. 요난 가문과 맞먹는 아티팩트 제작 왕국이니, 특별한 아티팩트가 분명했다.
“너도 능력은 비밀!”
“감사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숙이고서 오그람의 앞에 섰다.
“처음 보았을 때는 비쩍 말라서 마음에 안 들었는데, 정신만큼은 진짜로구나. 네 녀석은 이 오그람이 인정한 진짜 무인이다.”
그는 시원한 손길로 등을 두드려준 뒤에 목갑을 하나 내밀었다.
“영약이다. 망가진 몸 상태를 회복시키는 건 물론 마나회로와 단전도 튼튼해질 게다.”
“감사합니다.”
“또 전해줄 게 있으니. 나중에 보도록 하지.”
“예.”
오그람은 글렌을 보며 피식 웃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기에 일단 고개를 숙이고 마지막 데루스의 앞에 섰다.
“그….”
“죄송합니다! 본의가 아니라고 해도 카디스 검사의 팔을 베어버렸습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일부러 데루스의 말을 잘라버리고, 허리를 깊게 굽혔다.
‘이 녀석은 말 끊는 걸 엄청 싫어하지.’
어떤 상황이든 데루스는 본인의 말을 끊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일부러 말을 잘라서 그의 화를 한 번 더 돋궜다.
“…괜찮습니다.”
데루스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입술은 살짝 떨렸다. 가라앉혔던 분노가 다시 솟구치고 있다는 뜻이었다.
“라온 검사도….”
“그래도 무인의 팔을 베었다는 건 그저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처벌이든 받겠습니다!”
라온은 다시 데루스의 말을 끊어버리고, 고개를 숙였다.
“와아….”
“어떤 처분이든 받겠다니….”
“진짜 대단한 무인이야.”
“그러게. 먼저 살기를 띤 건 카디스였는데….”
“멋지네. 왜 지그하르트가 북방의 패자라 불리는지 알 거 같아.”
관객들은 시상식 중에서도 사과하는 라온을 보고 감격하여 박수를 보냈다.
‘어디….’
라온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데루스의 미소가 작위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가라앉았다. 남들은 인자한 웃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아니다. 저건 분노가 목까지 차오른 듯한 표정이었다.
‘당연하겠지.’
계획은 털리고, 아들은 팔이 잘렸으며, 상황상 따지거나, 보상을 요구할 수도 없다. 말은 못 해도 당장 목을 조르고 싶을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겠네.’
볼을 씹어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더 놀려주고 싶지만, 그건 이후를 위해 아껴두고 싶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이건 결투였으니 그 아이도 받아들일 겁니다.”
데루스가 고개를 젓고서 책자 하나를 넘겨주었다.
“라온 검사의 단검술은 체계가 없는 듯 보였습니다. 이 단검술이 도움이 될 겁니다.”
책자에는 비령도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데루스에게 고개를 숙인 후 뒷걸음질 쳤다. 육황의 수장들에게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이고 뒤를 돌아 단상 앞에 섰다.
“우와아아아아아!”
“라온! 라온! 라온!”
“설화검협! 설화검협!”
“백검룡! 백검룡!”
마르타 때보다 더한 함성이 울려 퍼진다. 사람들의 목소리만으로 대련장이 뒤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거칠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관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지금까지 응원해줘서 고맙다고 한 후 일어서려는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대로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하필 여기에서….’
데루스를 놀리고 얻었던 기력이 지금 다 된 것 같았다. 추락하며 땅이 가까워진다.
눈이 감기려고 할 때 누군가가 몸을 잡아주는 감각이 느껴졌다.
‘아….’
이 감각은….
굉장히 예전에 느꼈던 것 같은 따스함과 함께 라온의 눈이 감겼다.
* * *
라온이 새하얀 천장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기절했던 건가?’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난 뒤의 기억이 없다. 마지막 장면은 가까워지는 땅이었다.
‘이렇게 강해지고도 기절이라니, 한심하네.’
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당연한 건가?’
백영섬은 뇌력과 오러를 극단적으로 소모하는 검술이다. 한 번만 사용해도 힘든 검술을 연달아. 그것도 내상이 심한 상태에서 써버렸으니, 기절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라스.’
라스에게 얼마나 지났냐고 물어보려고 할 때 의무실의 문이 열렸다.
“이제 괜찮은 모양이네?”
가장 먼저 들어온 리메르가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방금 일어난 애한테 괜찮다는 말이 나와?”
셰릴이 리메르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부단주님. 속은 괜찮으십니까?”
로엔은 부드럽게 웃으며 몸 이곳저곳을 살펴주었다.
“아, 괜찮습니다.”
라온이 옅게 웃을 때 세 사람 뒤로 글렌이 들어왔다. 그는 침상 앞으로 다가와 날카로운 눈빛을 뿜어냈다.
‘혼나는 건가?’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내려가는 중요한 순간에 쓰러져서 꾸중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인이란.”
글렌의 입이 열림과 동시에 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남보다, 스스로를 더 잘 알아야 한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항상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하는 게 진짜 무인의 자세다.”
그의 목소리에서 서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넌 오늘 한계를 넘어섰다. 몸과 뇌에 과부하가 걸렸다가 퍼지며 정신을 잃었던 거지. 아무도 없었다면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역시 꾸중이었다. 다만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고개를 숙였다.
“가문의 이름도, 명성도 좋지만 네 자신을 먼저 생각하도록 해라.”
글렌이 한 발 더 다가와 어깨를 잡았다. 그의 손길은 따스했지만, 이상하게도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 고….”
살짝 뜸은 들이지만, 고로 시작하는 것을 보니 ‘고생했다’라는 칭찬으로 끝내려는 것 같았다.
글렌은 절대 빈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그의 칭찬을 들으면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고, 고기 많이 먹어라.”
“…….”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의무실이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어….”
라온이 턱을 모로 틀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떡 벌어졌다.
“크흠, 난 이만.”
글렌은 바로 몸을 돌려서 의무실을 빠져나갔다.
“가, 가주님.”
“라온 도련님. 나중에 뵙지요.”
셰릴과 로엔이 이쪽을 한 번 보고서 글렌을 따라 나갔다.
“에라이!”
리메르는 바닥에 침을 뱉는 시늉을 하고서 인상을 팍 찡그렸다.
“저 영감탱이!”
그는 꽥 소리치며 세 사람의 뒤를 쫓았다.
“뭐지…?”
약해 빠졌으니까. 고기 먹고 강해지라는 건가?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머리가 멍해졌다.
-멍청한 녀석.
라스가 콧김을 흥하고 뿜어내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네놈이 한심할 정도로 약하니까! 고기 먹고 힘을 기르라는 뜻이지 않느냐!
녀석이 어깨를 꽉 잡았다. 입가에는 참을 수 없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오늘 파티가 있을 테니, 무조건 참여해라! 본왕이 말하는 것만 먹는다면 네놈도 마왕처럼 튼튼해질 수 있느니라!
‘어….’
정말 맞아?
* * *
“어휴우우우!”
리메르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고기 많이 먹으라니! 한심해서 진짜!”
그는 앞에 가는 글렌을 보며 이를 갈았다.
“손자한테 ‘고생했다.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
글렌은 고생했다라는 말만이 아니라, 사랑한다라는 말도 추가하려다가 언어 오작동을 일으켰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눈 한 번 딱 감고 말하면 앞으로의 일이 일사천리로 뻗어나갈 텐데!”
글렌은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허리가 점점 굽어졌다.
“진짜 답답해서 속이 터져요!”
기세를 잡은 리메르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손주 안 안아볼 거예요? 딸한테 사과 안 할 거냐고! 그냥 그러고 있다가 땅에 묻힐 겁니까?”
“으음….”
“라온이 단상에서 떨어질 때는 당황해서 숨도 못 쉬고 뛰쳐나온 양반이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는지 모르겠네! 우리 뒷집 볼락 아저씨도 이렇게는 안 하겠다!”
“…….”
글렌이 걸음이 우뚝 멈췄다.
“문제가 있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또 무슨 문제를 일으킨 겁니까! 내가 해결해드려요? 나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네.”
글렌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린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시선이 리메르를 휘감았다.
“에?”
“내가 가주고, 네놈이 가신인데 내가 왜 혼나고 있는 거지?”
“예? 아니, 그게….”
리메르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야 너무 말이 많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저, 저는 가주님을 위해서….”
“잡아.”
“예!”
그가 물러서려고 할 때 셰릴과 로엔이 그의 양 팔을 잡았다.
빠지지직!
글렌의 손가락에서 붉은 스파크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허허….”
“이해는 하지만, 너 너무 까불었어.”
“잠깐만!”
리메르가 오러까지 써가며 발버둥 쳤다.
“지금은 안 돼! 아직 환전 안 한 도박권이 있….”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글렌의 손끝을 따라 거대한 벼락이 떨어져 내렸으니까.
콰르르르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