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0화
레크로스 국왕은 자그마한 기운도 남지 않은 대련장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바, 방금 그 검술은 대체….”
카디스가 살기를 담은 채 검을 내리쳐서 시합을 중지시켜야 하나 고민할 때 라온의 검술이 급변했다.
기이한 백색 오러가 피어나며 대련장에 존재하던 성광검결의 흐름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지그하르트에 특별한 검술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런 무학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
“힘으로 꺾은 게 아니라, 강기를 아예 지워버렸어. 바닷물이 모래사장의 낙서를 지운 것처럼….”
체임버가 허공으로 떠오른 채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녀 역시 깜짝 놀랐는지 눈이 크게 벌어져 있었다.
“저런 비기를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건가.”
“그게 아니다.”
오그람이 라온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곳에서, 성광검결을 보고 완성한 새로운 무학이다.”
그는 마른침을 크게 삼키고서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대단한 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대종사의 기질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뛰어난 무학 재능을 가진 것과 무학을 직접 만들 수 있는 재능은 다르다.
전자가 만분의 일의 확률이라면, 후자는 십만분의 일의 확률로 나오는 특별한 재능이었다.
“아아, 좋네. 좋아.”
체임버의 뺨에 홍조가 올라왔다. 입맛을 다시는 그녀의 눈동자는 먹이를 발견한 고양이처럼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아름다운 원석 그 자체야. 다듬어주고 싶어….”
“이번만큼은 마음이 통하는군.”
오그람이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에게 연맹의 무학을 가르치면 어떻게 될지가 궁금해졌어.”
그는 흥미의 빛을 띤 눈길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어이. 영감. 저 아이 대체 어떻게 키운 거야.”
오그람이 짧게 숨을 뱉고 글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수로… 여, 영감?”
글렌의 얼굴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굉장히 기쁘지만, 그 기쁨을 억지로 짓누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보통 가짜 웃음은 입은 웃지만 눈이 웃지 않는데, 글렌은 그 반대였다.
눈은 반달을 그리고 있는데, 입술을 억지로 내리고 있어서 기묘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어? 숨도 안 쉬는 거 아니야?’
호흡하는 것도 잊었는지, 그의 얼굴이 점차 창백해졌다.
“영감! 정신 차려!”
“허억….”
오그람이 일어서서 손을 흔들고 나서야 글렌이 눈을 껌뻑이고서 숨을 내쉬었다.
“대체 뭐 하는….”
“크흠, 아무것도 아니다.”
글렌이 헛기침을 하고서 빠르게 손을 저었다. 그의 표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평소의 공허함이 담긴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되면 결국 라온의 승리로 끝나는 건가?”
체임버가 데루스를 보며 히죽 웃었다.
“아뇨.”
데루스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카디스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옆으로 시선을 돌려 글렌과 다른 육황의 수장들을 보며 옅게 웃었다.
“이런 결투는 아이들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죠. 조금 격해지더라도 놔두는 게 좋을 듯합니다.”
“당연하지!”
“난 재밌어! 좋아.”
오그람은 뭘 묻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체임버도 손가락을 돌려 동그라미를 그렸다.
“하아, 알겠습니다.”
레크로스 국왕은 조금 걱정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짧게 한숨을 뱉었다.
“그래. 멈춰서는 안 되지.”
글렌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떨리던 그의 입매가 멎고, 확신이 담긴 미소가 지어졌다.
“저 아이의 검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니까.”
* * *
라온은 왼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지워졌어.’
온 세상을 뒤덮었던 카디스의 강기가 물을 뿌린 거품처럼 지워졌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자그마한 마나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역시 그 선은….’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던 수많은 검흔을 지워버렸던 하나의 선은 평범한 검술의 궤적이 아니었다.
적의 오러, 검술 묘리, 흐름 그리고 호흡까지. 상대의 모든 공세를 단번에 지워버리는 허무의 기운이 담긴 검술이었다.
‘이런 검술이 만들어지다니….’
빈틈을 만들어내는 광아검과 무학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설풍검결을 조화시키고 싶었을 뿐인데, 예상치 못한 초상승의 검술이 만들어졌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더 중요한 건….’
아직 이 검술은 완성형이 아니야.
중간에 힘이 빠져서 멈췄지만, 백영섬의 끝은 상대의 공격을 모두 지우는 게 전부가 아니다.
반격기.
청운현성검과 성광검결의 절기처럼 상대의 힘을 모조리 지운 뒤에 역습을 가하는 게 백영섬의 진짜 모습이었다.
‘다만 반동이 너무 커.’
백영섬을 사용한 순간 뇌가 타버리는 듯 아렸고, 지금도 긴장을 풀면 기절할 정도로 어지러웠다.
오러 소모도 지금까지의 검술 중 가장 심한 것을 보면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는 무학이었다.
‘그래도….’
한 번 더 해야 해.
집중력과 감각이 극한에 이른 지금이 아니라면 백영섬을 완성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고통은 극심하고, 만화공의 기운은 동났으며, 글래시아도 정상이 아니지만 지금 백영섬의 진짜 모습을 꺼내야 한다.
‘복수도 해줘야 하고.’
어깨를 보았다. 살이 깊게 파인 검흔. 0.01초만 늦었어도 팔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당하기만 하고 끝낼 수는 없으니 이 상처도 갚아주어야 했다.
“후우….”
라온은 울렁거리는 속을 내리누르고 고개를 들었다. 당황하여 손을 떠는 카디스를 보며 턱을 모로 틀었다.
“항복해라. 네 검은 내게 통하지 않아.”
이번에는 이쪽이 덫을 놓아둘 차례였다.
* * *
카디스가 손톱으로 관자놀이를 후벼파듯이 긁었다.
‘뭐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라온이 강대한 열기를 담은 검술을 펼친 순간 성광검결의 절기 청광해람을 일으켜 놈의 팔을 베어버리려 했다.
‘아니, 분명 베었어.’
지금도 라온의 어깨에서는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제대로 검이 들어갔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다 사라진 거지?
대련장을 가득 메운 채 넘실거리던 강기의 바다도, 그 바다를 채운 둔검의 묘리도, 그 묘리를 일으켰던 호흡까지. 모든 게 지워져 버렸다.
‘성광검결이야! 청운현성검이 아니라, 아버지의 성광검결이라고!’
이곳저곳에 퍼져나간 청운현성검과 달리 성광검결은 많이 보여주지 않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서는 안 될 초상승의 검술이었다.
꿀꺽.
카디스가 마른침을 삼키고서 라온을 바라보았다. 그의 검에는 어떠한 기운도 남지 않고, 텅 비어 있었다.
“너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지웠다.”
라온의 목소리는 너무도 당연한 일을 말하듯이 덤덤했다.
“그저 지웠을 뿐이다.”
눈빛 역시 맑으면서도 올곧았다. 이제 장난을 칠 생각도 없는 듯 존댓말로 비꼬는 말투도 사라졌다.
“항복해라. 네 패배다. 카디스 로베르트.”
라온은 이제 다 끝났다는 듯 손을 저었다.
“개소리!”
카디스가 이를 바득 갈았다.
“네놈 따위에게 성광검결이 꺾일 리 없다!”
그가 악을 지르며, 대륙십이성 상위에게 도전하기 위해 숨겨둔 오러를 모조리 개방했다.
쿠와아아아아아!
카디스에게서 퍼져나온 어마어마한 기운에 대련장이 뒤흔들리고, 부서진 조각들이 허공을 떠올랐다.
‘절대 져서는 안 돼!’
청운현성검만으로 상대했다면 모를까. 성광검결을 꺼내놓고 진다면 가문의 망신이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겨야 했다.
“크으으!”
카디스가 분노를 토해내며 성광검결을 일으켰다. 그의 검의 궤적을 따라 푸른 별빛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는 건가?’
라온은 이전처럼 피하거나, 막으려 들지 않았다. 대련장에 중심에 선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여유로운 모습을 보니 속에서 열불이 터져 나왔다.
‘참아야 해.’
분노에 넘어가면 놈의 의도대로 된다. 이성의 끈을 꽉 붙잡고, 놈의 검술을 깨부숴야 한다.
‘평생 오른팔을 쓸 수 없게 해주마.’
치료사나 신관이 힘을 써도 제대로 고칠 수 없도록 힘줄과 마나회로를 아예 갈라버리기로 마음먹고 전력으로 성광검결을 펼쳤다.
콰아아아아아아!
극에 이른 성광검결과 파운종보가 어우러지며 검날을 비추던 작은 빛은 어느새 푸른 별빛의 바다가 되어 대련장 전체를 뒤덮었다.
고오오오오!
성광검결의 절기를 펼칠 수 있는 청은이라는 단계였다.
[카디스.]
검을 들어 절기의 흐름을 일으키려 할 때 데루스에게서 의념이 전해져 왔다.
[만령성광을 펼쳐라.]
‘만령성광?’
만령성광은 성광검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절기. 성광검결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초식이었다.
[초식이 드러나도 상관없다. 대신 확실하게 베어라. 저놈이 더 올라갈 수 없게 만들도록.]
그 말은 라온의 팔이 회복될 수 없게 자르라는 뜻이었다. 역시나 말이 잘 통하는 아버지였다.
카디스는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늘게 끄덕이고서 검을 다잡았다.
쿠구구구구구!
가볍게 휘돌린 뒤 라온을 겨눈 칼날 위로 장대한 별빛이 퍼지며 청은이 대련장을 넘어 관객석에 닿을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끝이다!”
카디스가 앞으로 나아가며 성광검결의 절기를 일으키려 할 때 라온이 움직였다. 이 정도로 어마어마한 기운이 모일 줄은 몰랐다는 듯 다급한 표정이었다.
치이이이이잉!
놈의 검날 위로 얼음 꽃송이들이 줄줄이 피어났다. 강기를 두른 서리의 조각들이 별빛의 바다를 향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훌륭한 검술이로군.’
고맙게도.
성광검결의 진의는 반격의 검술. 상대의 검격이 강할수록 더 강하게 돌려주기에 놈의 어깨를 베기에는 최적의 상황이었다.
쿠구구구구!
카디스는 라온이 일으킨 냉기의 꽃무리가 주변을 모두 뒤덮을 때까지 기다린 뒤 검을 휘돌렸다. 은빛 칼날의 투로를 따라 대련장을 뒤덮은 별빛의 바다가 움직였다.
콰아아아아아!
강기로 이루어진 빛의 바다는 찰나의 순간에 냉기의 꽃 폭풍을 집어삼키고 더욱더 몸을 부풀렸다.
‘지금!’
카디스가 검으로 십자의 선을 그렸다. 은하처럼 명멸하는 별의 바다가 사위로 번지며 모든 공간을 장악했다. 조금 전에도 펼쳤었던 성광검결의 절기 청광해람이었다.
고오오오오오!
청광해람의 어마어마한 기운이 검날과 함께 움직이며 라온의 어깨선 위로 떨어져 내렸다.
피이이익!
라온의 어깨에 검이 내려오기 직전 그의 칼날 위로 있을 수 없는 백색 그림자가 졌다.
‘이거야.’
이전의 청광해람을 지웠던 무학은 바로 이 이상한 기운이 분명했다.
‘두 번은 안 당한다!’
카디스가 진각을 밟으며 검의 투로를 비틀었다. 부드럽게 흘러가던 검세가 급격하게 꺾이며 장대한 선을 만들어냈다.
고오오오오오!
주변을 가득 메우던 별의 바다가 칼날 위로 응집되며 무시무시한 파동을 만들어냈다. 성광검결의 마지막 절기인 만령성광이었다.
‘이건 막을 수 없어.’
단순한 검강이 아니라, 공간을 먹어 치우며 성장한 기운이다. 아무리 대단한 검술을 사용한다고 해도 지울 수 있는 위력이 아니었다.
쿠구구구구!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기운이 라온의 어깨를 통째로 지워버리려고 할 때 놈의 백색 그림자가 진 검을 내뻗어왔다.
‘소용없…아!’
빠르지도, 느리지도,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다. 검은 그저 현상처럼 다가올 뿐이었다.
화아아아아.
그 기묘한 검과 마주선 순간 모든 기운을 응집시킨 만령성광이 멈춰선다.
별빛의 바다가 찢어지고, 강기가 녹아내리며, 검술의 묘리가 지워진다.
허무를 담은 백색 그림자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세상이 아닌 꿈만 같은 광경이었다.
그리고….
푸카아아악!
거친 절삭음과 함께 오른쪽 어깨에서 핏물이 치솟았다.
고개를 돌리자, 팔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어깨에서 시뻘건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아….”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기분. 팔이 떨어져 나간 어깨에서 지독한 통증이 차올랐다.
“끄아아아아아악!”
카디스는 어깨를 부여잡은 채 비명을 터트렸다. 그의 괴성과 함께 멈춰진 시간이 다시 흘렀다.
* * *
“하아….”
라온이 죽을 듯이 숨을 뱉어냈다.
‘완성했어.’
진짜 백영섬을.
두 번째로 백영섬을 사용하며 그 검술의 진의를 깨달았다.
백영섬은 적의 검술을 지워버리는 게 다가 아니라, 그 적이 노렸던 곳에 피할 수 없는 공격을 날리는 반격의 무학이었다.
‘그랬기에….’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으어어어어억!”
카디스가 피가 흘러내리는 어깨를 말아쥐고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저 팔이 잘린 거지.’
카디스가 자신의 오른팔을 노렸기에 백영섬은 역으로 그의 오른팔을 베는 반격을 가했다. 노린 곳을 똑같이 베어버리는 지기 싫어하는 검술이었다.
‘꼴 좋군.’
솔직히 말하면 중간에 멈출 수 있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눈에는 눈, 피에는 피. 일부러 그의 팔을 베어버렸다.
‘그것도….’
중간에 냉기를 집중하여 힘줄과 마나 회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아마 붙인다고 해도 이전처럼 오른팔을 쓰기는 힘들 것이다.
‘자업자득이지.’
카디스 역시 단순히 팔을 베려는 게 아니라, 장애를 만들려고 했기에 조금도 불쌍하지 않았다.
‘그럼 지금부터 연기를 할 땐가.’
라온이 숨을 몰아쉰 뒤 무릎을 꿇었다. 카디스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카, 카디스 님!”
턱을 부르르 떨면서 눈동자를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체력이 너무 빠져서 반격할 때 힘 조절이 안 됐습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네가 먼저 살기를 높였기에 어쩔 수 없다고 표현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윽….”
카디스는 팔이 잘렸다는 정신적인 충격과 고통에 발작을 일으키다가 눈을 까뒤집은 채 기절했다.
“치, 치료사!”
“아!”
“움직여!”
치료사를 부르자, 멍하니 서 있던 치료사들이 대련장으로 뛰어 올라왔다.
“빠, 빨리 처리해야 합… 커헉!”
라온은 치료사에게 카디스를 넘겨주며 참고 있던 피를 토했다. 카디스의 팔에서 떨어진 핏물과 겹치며 바닥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라, 라온 님도 함께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상이 심합니다!”
치료사 중 한 명이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아뇨. 이, 일단 카디스 님부터 데려가세요. 급합니다.”
라온은 얼마 남지 않은 오러로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며 카디스의 떨어진 팔을 건네주었다.
“꼭 붙여주십시오!”
“하지만 라온 님도 안색이….”
“부탁드립니다!”
“아,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자, 치료사가 입술을 깨문 채로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감동받은 눈빛인데?’
치료사는 본인도 심한 부상은 입어놓고 먼저 카디스를 챙기는 자신에게 감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오오오오!”
“저런 상태에서 먼저 상대를 걱정하다니….”
“진짜 무인이다. 기사의 정신이야!”
“라온 지그하르트! 멋있다!”
“진짜 감동했어!”
팔이 잘려서 놀랐던 관객들은 라온의 희생에 감동하여 오히려 환호를 보내주기 시작했다.
-허어, 네놈은 정말 귀신이니라.
라스는 솜사탕이 바람에 날리는 듯 전신을 파들파들 떨었다.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거짓말을….
녀석은 손을 흔드는 관객들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직은 갈 수 없거든.’
라온이 살점이 떨어진 어깨를 잡았다. 고통으로 정신을 차린 뒤에 고개를 들어 올려 단상 위를 보았다.
오그람과 레크로스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큼지막한 박수를 보내왔고, 체임버는 무언가 욕망이 깃든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글렌은….
‘저 표정은 뭐지?’
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훈련시키기 위해서 앞에 먹이를 놔두고 ‘기다려’를 외쳤을 때의 강아지의 표정을 보는 듯했다. 무언가를 억지로 참는 듯한 얼굴이었다.
‘상태가 별로신가.’
그러려니 하고 마지막 사람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 전에 보기 위한 입가심이었으니까.
데루스 로베르트. 그는 처음으로 웃음기가 사라진 채 인형처럼 무미건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들에 대한 걱정 따위가 아니다. 본인의 계획이 깨진 것에 대한 분노로 가면에 실금이 간 것이다.
별거 아닌 듯하지만, 난 알 수 있다. 지금 데루스는 속에서 타오르는 분노를 참느라 이를 악물고 있을 것이다.
‘이거야.’
저 표정을 보고 싶었어.
심장이 격하게 뛴다. 남이 들을까 봐 걱정될 정도로 웅장한 고동이었다.
기분이 고조된다.
데루스의 분노에 찬 얼굴은 시상식에서 얻을 명성이나, 영약, 무구보다도 큰 보상이었다.
‘벌써부터 놀라면 곤란해.’
라온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눈매를 좁혔다.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네 모든 것을 뺏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