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9화
라온은 카디스의 검에서 뿜어지는 장대한 푸른 빛을 두 눈에 담으며 아래턱을 바짝 당겼다.
‘이걸 이렇게 마주하게 되는군.’
성광검결은 데루스 로베르트가 창안한 검술로 많은 곳에서 선보이지는 않았지만, 성광검결을 펼칠 때마다 이름난 악인들의 목이 날아갔기에 데루스를 대표하는 성명절기 중 하나가 되었다.
20년이나 지났으니, 새로운 검술을 만들거나 익혔겠지만, 성광검결이 데루스의 주요 검술 중 하나라는 건 분명하다.
저 검술의 묘리를 파악한다면 복수에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성광검결을 사용하는 카디스를 깨부수면 데루스의 자존심도 함께 무너지겠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열불을 터트릴 데루스의 얼굴이 기대되어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너 따위에게 이 검술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카디스가 빛나는 검을 중단에 세우며 입술을 꾹 씹었다.
“다만 성광검결을 쓰게 된 이상 승패는 이미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 너는 내가 이 검술을 꺼내기 전에 끝을 냈어야 했어.”
“지금부터가 청운현성검의 진짜라더니, 결국 다른 검술을 꺼내는 건가요?”
라온이 카디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거 조금 추하지 않나요?”
“추해도 상관없다.”
상관없다는 말과 달리 카디스의 눈에서는 분노가 뚝뚝 흘러내렸다.
“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건 그렇네요. 어떻게든 이기면 그만이죠.”
“네놈….”
라온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여주자, 카디스의 기세가 짙어진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기세였다.
‘도발이 잘 먹히네.’
곱게 자랐기 때문일까. 첫 만남부터 비웃음을 드러내던 카디스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니, 당연한 거겠지.’
카디스는 좋은 집안과 재능을 타고난 천재 중의 천재. 어디에 가서도 주인공으로 살았으니, 가벼운 조롱에 넘어가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가벼운 조롱? 지독한 조롱이니라!
라스가 한숨을 쭉 뱉어냈다.
-네놈의 혓바닥은 도를 넘어섰느니라. 옆에서 보고만 있어도 분노가 차오르느니라!
녀석은 본인이 열받는다며 고개를 이를 갈았다.
고오오오오!
카디스의 검에서 뿜어지는 빛이 점점 더 강하게 타오른다. 검광이 바다 같은 푸른색을 띤 순간 그가 움직였다.
화아아아아!
찰나의 순간에 짓쳐 들며 푸른 강기를 사선으로 그어 내렸다. 웅장하면서도 쾌속한 흐름. 청운현성검과 비슷하지만 격 자체가 높은 검술이었다.
치이이이잉!
라온이 글래시아를 전력으로 운용하며 설풍검결의 은풍회류를 펼쳐냈다. 회전하는 바람의 칼날이 성광검결의 푸른빛 사이를 파고들었다.
쩌어어어엉!
성광검결이 일으킨 강대한 반탄력에 손목이 떨어져 나갈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떨리는 손에 억지로 힘을 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후우우우웅!
카디스가 일으킨 성광검결의 흐름은 절검에도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청운현성검과는 다르다는 건가.’
은풍회류에 꺾였던 청운현성검과 달리 성광검의 빛은 지워지지 않았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수준의 검술이라는 뜻이었다.
‘사람이 달라진 것 같네.’
재밌어.
이제야 긴장감이 가슴에 스며든다. 지금부터가 진짜 결투의 시작이었다.
“보았겠지.”
카디스가 검을 들어 올리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역으로 그는 이제야 여유가 차오른 듯한 표정이었다.
“네놈은 절대 이 검술을 끊어낼 수 없다.”
“그건 해봐야 알겠죠.”
“건방진 놈.”
카디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달려든다. 설풍검결로 성광검결을 끊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움직임이 거침없었다.
후우우웅!
파랑종보로 순식간에 공간을 파고들어 와 성광검결의 초식을 내리쳐왔다.
터어엉!
라온이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공명시켰다. 심장을 울리는 고동 소리와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뒤로 물러설수록 수세에 몰릴 뿐이야.’
성광검결은 청운현성검처럼 공간을 장악하는 검술. 물러서면 물러설수록 더 강해져서 돌아오기에 절대 뒷걸음질 쳐서는 안 된다.
치이이잉!
라온이 중심을 낮추며 설풍검결의 무성경풍을 펼쳐냈다. 가벼우면서도 쾌속한 바람이 깃든 검격으로 성광검결의 중심을 후려쳤다.
쩌어어어엉!
먼저 공격했음에도 어깨의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크으.’
고통스러웠지만 이를 씹으며 참고, 연달아 설풍검결을 내리그었다.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뼈가 아릿할 정도의 충격이 뇌리를 덮쳤다.
고오오오!
다만 문제는 고통이 아니다. 설풍검결을 전력으로 펼치고 있음에도 성광검결의 흐름이 끊어지질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영역을 넓히며 대련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계속 가야 해.’
라온이 거친 숨을 흘리며 왼발을 뻗었다. 글래시아를 극성으로 일으키며 설풍검결의 절기 멸화성풍을 쏘아냈다.
콰아아아아!
차디찬 냉기가 깃든 강기가 유성우처럼 쏟아졌지만, 성광검결의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그러질지언정 끝없이 흘러가며 점점 더 강대한 빛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앙!
라온은 성광검결의 흐름이 만들어낸 정심한 검격을 막지 못하고, 대련장 끄트머리로 밀려났다.
“크윽!”
속의 울렁거림이 심해진다. 가로나에게 얻었던 내상이 더 심하게 돋아난 것 같았다.
“후우….”
라온은 입가로 흘러내리는 핏물을 닦으며 허리를 폈다.
‘무슨 차이지.’
청운현성검과 성광검결의 요체는 같다. 흐름을 이어가며 점차 강해지는 검술. 청운현성검이 물을 본뜨고, 성광검결이 별과 빛을 본뜬 것 치고는 그 격의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났다.
‘그 차이를 알아야 해.’
머리를 흔들어 고통을 지우고 태화보를 밟았다. 대련장 뒤편으로 이동하며 만화공을 일으켰다. 강대한 열기를 두른 칼날이 카디스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의미 없는 일이다.”
카디스가 발목을 돌리며 유연하게 검을 올려 긋는다. 찬란하게 번쩍이는 빛이 그 궤적을 따라 솟아올랐다.
콰아아아아앙!
대지를 노니던 화염의 맹수는 푸른 빛 속에서 녹아내렸다.
“검술을 바꿔도 소용없다.”
카디스가 검으로 라온의 목을 겨누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그는 역으로 도발을 하며 거만한 눈빛을 토해냈다.
“그거 알려나?”
“무얼 말이냐.”
“나한테 그런 말을 했던 사람은 전부 땅에 처박혔다는 거?”
라온은 붉은 기광이 번쩍이는 눈으로 성광검결의 푸른빛 속으로 뛰어들었다.
“당신도 곧 그렇게 될 거야.”
* * *
“서, 성광검결!”
“천검성의 성광검결이라니!”
“저런 비기를 숨겨두고 있을 줄이야!”
“역시 파랑검이야! 격이 다르다고!”
도박꾼들은 라온을 압도하는 카디스를 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역시 정배는 승리한다니까!”
“파랑검! 파랑검! 파랑검!”
“드디어 따는구나!”
“레나야! 아빠가 맛있는 거 사서 돌아갈게!”
그들은 이미 승부가 끝난 듯 도박권을 움켜쥐며 웃음꽃을 피워냈다.
“리메르 님. 이제 좀 쫄리시겠네요.”
“한두 푼도 아니고, 그 금화 다 날리면 속 쓰려서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놀리지 말라고, 오늘 잠도 못 주무실 텐데.”
“다 끝났네. 정산하러 가시죠!”
“끝이라니?”
리메르는 도박꾼들에게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고 있음에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더 여유로워진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딜 봐서?”
그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설화검협의 불꽃과 냉기가 다 안 먹히는데, 다 끝난 거 아닙니까?”
“맞아요. 저 검술들로 마티스, 보리니 키튼, 가로나까지 쓰러뜨렸는데 하나도 안 통하잖아요.”
도박꾼들은 다 끝난 싸움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다들 잘 모르네.”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너희는 저 얼굴이 수세에 몰린 것처럼 보여?”
그의 긴 손가락이 가리키는 건 라온의 얼굴이었다. 성광검결에 얻어맞고 튕겨 나가는 라온의 눈빛은 황홀할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꼭 보물을 발견한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어…?”
“왜 웃고 있는 거지?”
“벼, 변탠가?”
“저 아이는 대체….”
도박꾼들은 피를 토하면서도 미소를 짓는 라온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내 제자는 위기에 웃는 미친놈이거든.”
리메르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확신을 담은 눈빛으로 라온을 보며 빙긋 웃었다.
“저 녀석이 저런 표정이 되면 절대 안 져.”
…
승패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는 건 도박판만이 아니었다.
“성광검결이라니, 파랑검이 단단히 마음먹은 모양이군요.”
레크로스 국왕은 카디스의 검에서 피어나는 장대한 빛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점점 더 흥미로워지는군.”
오그람도 만족스러운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 근질거려.”
그는 싸우고 싶은지 두꺼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좀 가만히 좀 있어. 이 근육 바보야.”
체임버는 오그람에게 손을 젓고서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번에는 카디스가 유리하네. 정말 누가 이길지 모르겠어.”
그녀는 흥미롭다고 중얼거리며 볼에 홍조를 띄웠다.
“맞습니다.”
데루스 로베르트가 진중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설화검협의 눈은 아직 죽지 않았어요. 승패는 조금 더 봐야알겠군요.”
그는 카디스가 우세한 것을 보고 있음에도 승리를 말하지 않았다.
“아저씨. 지금 생각은 어때?”
체임버는 글렌에게 조금 전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변함없다.”
글렌은 체임버를 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라온이 이긴다.”
“애정이구만.”
체임버는 피식 웃으며 물러났다.
데루스는 그런 글렌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카디스를 바라보았다.
[카디스.]
그는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오러 메시지가 아닌 의념을 이용하여 카디스에게 말을 전했다.
카디스는 성광검결을 사용해서 죄송하다는 듯 눈매를 내렸다.
[상관없다. 그를 망가뜨리는 게 더 중요하니까.]
데루스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놈을 흥분하게 만든 뒤에 오른팔을 베도록.]
지시를 내리자, 카디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루스는 차가운 눈동자로 라온을 굽어보며 미소를 흘렸다.
‘글렌의 반응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 * *
퉷.
라온이 입안에 고인 검은 핏물을 뱉어냈다. 격 높은 강기로 차오른 성광검결과 정면에서 부딪치다 보니 내상이 심해지며 속에서 죽은 피가 올라왔다.
‘아직 모르겠어.’
광아검과 설풍검결을 모두 펼쳐보았지만, 성광검결의 빈틈을 찾아내거나, 흐름을 끊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만 보면 완벽에 가까운 검술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검술은 없지.’
데루스 로베르트와 싸운다면 모를까. 카디스의 검술이 완벽할 리 없다. 분명 노릴 수 있는 틈이 있을 것이다.
“잘난 듯 입을 놀리더니 결국 그 꼴인가.”
카디스가 턱을 치켜들며 오만한 눈빛을 뿜어냈다.
“이게 수준 차이라는 것이다. 네놈은 성광검을 깰 수 없어.”
그는 도발하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검을 겨눴다.
라온은 장엄한 빛이 뿜어지는 카디스의 검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어쩔 수 없네.’
힘으로 깨부수는 수밖에
어깨에 힘을 빼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글래시아의 냉기를 극성으로 운용하며 검을 고쳐 쥐었다.
후우우우웅!
카디스가 발을 굴렀다. 파도를 탄 범고래처럼 파고들어 와 검을 내리쳐온다. 성광검결의 묘리가 타오른 칼날이 공간을 휘감아왔다.
‘살기?’
지금까지와 달리 그의 검에서는 은밀한 살기가 느껴졌다. 암살자이자, 마주 서고 있는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아주 은밀한 살기였다.
‘노리는 건 팔인가?’
이쪽을 도발하여, 팔을 어깨째로 날리려는 것 같았다.
‘데루스에게 지시라도 받은 모양이로군.’
카디스의 움직임만 봐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았다.
‘누가 당해준대?’
라온이 코웃음을 치며 대련장의 직선을 따라 제천검을 그었다. 극한의 속도를 두른 푸른 칼날이 성광검결과 맞부딪쳤다.
쩌저저저적!
검격은 성광검결의 빛무리를 가르지 못했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치이이잉!
검의 궤적을 따라 질주해온 서리의 가시가 빛 속으로 파고들었다.
찌지지지직!
강렬한 냉기의 칼날에 성광검결의 흐름이 크게 출렁였지만, 이번에도 끊어지지는 않았다.
‘서리연으로도 안 되는 건가.’
서리연의 두 참격으로도 가르지 못하다니, 성광검의 흐름은 정말 바다라도 된 듯 거대했다.
“고작 그 정도인가.”
카디스는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차오른 자신감으로 자신의 팔을 베기 위한 밑밥을 깔고 있었다.
‘이건 기회야.’
놈이 결과만을 생각하는 지금이 성광검결의 비밀을 파헤치기 가장 좋은 때였다.
콰앙!
라온이 진각을 밟으며 제천검을 어깨 뒤로 젖혔다. 찰나의 순간에 타오르는 극한의 열기. 위력만큼은 최강이라 봐도 과언이 아닌 염룡결이었다.
화아아아아아!
시퍼런 칼날 위에 강림한 화룡의 포효가 성광검결의 빛을 향해 뿜어졌다.
“그 정도로는 깰 수 없다.”
카디스가 이미 대련장을 집어삼킨 성광검결의 흐름을 가져 와 염룡결 앞에 강기의 벽을 쌓았다.
쿠구구구구!
폭렬적인 열기의 강기와 맞부딪쳤음에도 성광검결의 흐름은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짙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장대한 별의 바다를 일으켰다. 대련장 전체가 성광검결의 빛에 둘러싸인 듯했다.
라온은 아찔할 정도로 강렬한 빛을 보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드디어….’
서리연과 염룡결의 강렬한 공세 덕분에 성광검결의 비밀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선 배치였어.’
성광검결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는 이유는 적의 공격이 들어오는 공간에 미리 강기를 배치해두는 특이한 방식의 검술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공간을 먹고 들어가기에 그 흐름을 깨는 건 당연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일 줄이야.’
간단하기에 파악하기 힘들었고, 또한 깨기도 쉽지 않았다. 공간을 장악해나가는 방식의 검술과는 너무도 잘 어울리는 방법이었다.
“하아아….”
라온이 깊은숨을 뱉어냈다.
‘얼음물에 들어간 기분이야.’
내상 때문에 속이 울렁거리고, 손발이 떨리고 있음에도 뇌리에는 시원한 희열이 찾아온다.
광아검과 설풍검결의 조화. 그 마지막 퍼즐이 드디어 맞춰진 느낌이었다.
고오오오오오!
불의 고리가 타오를 정도로 가속하며 머릿속에 수많은 검술의 선을 그어 내렸다. 눈앞이 끝도 없는 검흔으로 가득 차올랐다.
“네 덕분에 결국 별의 바다가 완성되었군.”
카디스가 대련장 전체를 휘감은 성광검결의 빛무리를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 이 공간은 모두 그의 것. 누구도 벗어날 수 없었다.
“포기를 하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그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라온에게만 전해지는 살기가 서늘하게 퍼져 나왔다. 포기하라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도발이었다.
“포기? 그런 단어도 있나?”
라온이 차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너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카디스가 만족스러운 듯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와라! 네 검의 모든 것을 보여봐라!”
그는 갑자기 대인배라도 된 듯 모든 검술을 받아주겠다며 손을 까딱였다. 하지만 저건 덫. 검을 날리는 순간 팔을 베어버리는 반격이 날아올 것이다.
‘그걸 알지만….’
가야 해.
지금 머릿속에 어지러진 검술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깨진 검날 사이로 거침없이 파고든 마르타처럼 발을 내디딜 때였다.
쿠웅!
라온이 만화공의 기운을 모조리 끌어 올리며 검을 내질렀다.
발목에서부터 끌어올린 근육과 관절의 회전을 손목까지 이어 만화공의 열기에 담아냈다
화아아아아!
제천검의 검극에서 강렬한 회전을 일으키는 광구가 돋아난다. 절기처럼 변한 만화공 백화 회천이었다.
맹렬하게 회전하며 응집된 회천이 폭발하며 막대한 열기를 뿜어냈다.
“좋은 검격이다.”
카디스가 차게 웃으며 성광검결을 회전시켰다. 공간을 뒤덮은 빛의 바다가 순식간에 회천의 기운을 지워버리며 역으로 라온에게 다가왔다.
반격기. 성광검결의 절기는 청운현성검처럼 반격의 묘리를 담은 검술이었다. 시야 전체가 성광검결이 일으킨 장엄한 푸른빛으로 가득했다.
절망과도 같은 성광을 마주하면서도 라온의 뇌리는 멈추지 않았다.
마티스를 무너뜨린 광아검, 보리니 키튼의 흐름을 끊어버린 설풍검결, 가로나와 싸우며 얻어낸 진정한 회전과 뒷면의 공격, 마지막으로 눈앞의 강기를 놓아두는 카디스의 성광검결까지.
그 모든 경험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검흔을 지워버릴 하나의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찌지직!
카디스의 검격이 오른 어깨에 닿는다. 피부가 갈라지고, 피가 튀어 오르는 찰나 아이의 손길처럼 느릿하게 그어지던 선이 끝에 도달했다.
번쩍!
그 선을 따라 뇌리에 휘광이 차오른다.
라온이 손에 힘을 뺀 채 명멸하는 머릿속 선을 따라 제천검을 그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류 검식
제5형 백영섬.
시퍼런 칼날 위로 백색 그림자가 피어난다.
백영이 깃든 칼날이 흘러가며 별빛의 바다를 지운다. 흐름도, 강기도, 호흡조차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