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6화
콰아아아아!
가로나의 권격이 벼락처럼 떨어져 내린다. 맹렬한 회전이 담긴 강기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흐읍.”
라온은 이번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진각을 밟아 박살 난 대련장에 발을 박아놓고 만화공의 불꽃을 극성으로 일으키며 나선력을 운용했다.
쿠와아아아앙!
흉폭한 강기들이 수없이 격돌하며 기이한 형태의 붉은 소용돌이가 솟구쳤다.
“후욱.”
라온이 혈향이 섞인 숨을 뱉었다. 피부를 찢을 듯한 강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음 권격을 준비하는 가로나를 바라보았다.
‘무학의 파악은 끝났어.’
가로나와 정면에서 맞부딪치며 그의 무학을 모두 습득했다. 지금 당장 그의 권격을 똑같이 펼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아무리 잘 따라 해도 원조는 이길 수 없다. 잠시 가로나의 멘탈을 무너뜨릴 수는 있겠지만 그런 승리는 의미 없었다.
‘내가 바라는 건 승리 따위가 아니니까.’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한 발판.
마티스, 보리니 키튼 그리고 가로나와 싸우며 얻어낸 그들의 장점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더 높은 곳에 오르는 게 목표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의 통증을 참으며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그것뿐이다.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군.”
가로나의 양 주먹에서 타오르는 강기가 압축되듯 일그러졌다.
“이제야 한계에 도달하다니, 지독한 놈이야.”
말과 달리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는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지.”
“너는 이 가로나가 인정하는 남자다. 그에 어울리는 끝을 내어주마.”
가로나가 오른 주먹을 어깨 너머로 젖힌 뒤 왼손으로 오른 팔목을 잡았다. 보이는 건 등과 눈동자뿐이지만, 그에게서 전해지는 패기는 하늘에 닿을 정도로 솟아올랐다.
“네 인정 따위는 필요 없어.”
라온이 제천검을 고쳐 잡았다. 검사의 가장 기본이 되는 중단세를 취한 뒤 만화공을 극성으로 일으켰다.
뜯겨나간 대련장 바닥에서부터 타오른 불길이 아지랑이처럼 치솟아 공간을 뒤덮었다.
“이걸로 끝이다!”
가로나가 대련장을 무너뜨리며 돌진해온다. 찰나의 순간에 그의 주먹이 시야를 전부 가릴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쿠구구구구!
그 상태에서 내뻗는 주먹에 파천의 위력이 담긴다. 제대로 방어하지 않는다면 전신의 뼈가 으깨질 위력이었다.
우우우웅!
라온이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다. 일곱 개의 고리가 청명한 울림을 일으키며 존재의 격과 집중력을 드높였다.
느려지는 시간 속에서 라온이 왼발을 앞으로 뻗었다. 발목 관절과 근육을 회전시키며 땅을 디뎠다.
치이이이잉!
바닥에서부터 치솟은 회전을 대퇴근과 기립근까지 끌어 올린 뒤 팔을 거쳐 손목으로 이었다. 산들바람처럼 가늘었던 회전이 어느새 태풍이 되어 검날 위로 뻗어 올랐다.
화아아아아아!
오러, 관절, 근육. 세 번의 뒤틀림이 같은 방향으로 이어지며 장대한 열기를 솟아오른다.
지금까지의 회천과 달리 만화공의 불꽃이 검극에 둥글게 응집되며 극렬한 나선력을 일으켰다.
“그건….”
가로나가 검극 위에 피어난 태양 같은 광구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죽기 싫으면 힘 꽉 줘.”
라온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문 채 제천검을 내리쳤다. 맹렬한 회전과 폭발력이 깃든 만화공 회천이 가로나의 권격 위로 떨어져 내렸다.
“마지막까지 즐겁게 하는구나!”
가로나가 눈을 희번뜩 뜨며 회천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힘 대 힘. 지금까지의 전투처럼 라온과 가로나는 회피 따위는 생각하지 않은 채 상대를 향해 전력을 퍼부었다.
쿠와아아아아앙!
무시무시한 성장을 이룬 회천과 가로나의 전력을 담은 절기가 정면에서 맞부딪쳤다. 응축되었다가 폭발한 충격파가 사위를 휩쓸며 대지가 내려앉고, 천공에 구름이 지워졌다.
찌이이잉!
라온과 가로나는 그 충격속에서 서로를 향해 검과 주먹을 밀어냈다. 검격과 권격의 위력은 호각이었지만, 가로나에겐 무기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쿠구구구구!
가볍게 쥔 가로나의 주먹에 힘이 깃든다. 첫 번째에 이어 터져나오는 두 번째 권격. 묵직한 강기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끝이다!”
가로나는 승리를 확신한 듯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번쩍!
그 순간 라온의 눈동자에 기광이 깃들었다.
‘그걸 잊을 리가 없지.’
라온이 차게 웃으며 제천검을 비틀었다. 검은 주먹처럼 쥐는 것으로 충격을 더할 수가 없기에 칼날을 돌리는 움직임으로 그 현상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
같은 두 번의 공격. 하지만 그 안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그저 힘으로만 뻗어낸 가로나와 달리 라온은 손목의 관절과 근육에 회전을 걸었다.
다른 관절과 근육을 사용하지 못한 아주 미약한 회전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쩌어어어억!
두 번째로 번진 회천의 불꽃이 가로나의 강기를 부수고 그의 가슴을 갈랐다.
푸카아아악!
가로나의 가슴에 새겨진 검흔에서 붉은 핏물이 치솟았다. 그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진 땅에 무릎을 꿇고 손을 짚었다. 내부까지 베이지는 않았지만 워낙에 강한 힘이 깃들어 몸이 버티지 못한 것 같았다.
“네, 네놈. 마지막 공격… 나를 보고 따라 한 거냐.”
“그래.”
실제로 그의 권격을 보고 떠올린 방법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을 받을까 봐 근육의 회전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정말이지 무서운 재능이로군.”
가로나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가슴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핏물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무슨 백혈교도 아니고….’
무서운 재생력과 내구력이었다. 아무리 봐도 인간이 아니라, 트롤 같았다.
“후욱….”
가로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고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졌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라온의 손을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네가 승자다! 라온 지그하르트!”
가로나의 선언에 고요하던 대련장 전체에 소리가 돌아왔다.
“우와아아아아아!”
“라온! 라온! 라온!”
“최고의 승부였다!”
“이렇게 가슴이 끓어오르는 결투는 처음이었다고!”
“가로나! 너도 멋있었다!”
“진짜 무인들의 대결이었어!”
관객들은 지금까지 참고 있던 목소리를 한 번에 폭발시키며 끝없는 환호를 질렀다.
“형제여. 네 이름이 불리니 내가 다 기분이 좋구나.”
가로나가 라온의 등을 팍 치며 씩 웃었다.
“형제?”
라온이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지금 이 트롤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우리 흑수족은 육체와 마음을 전력으로 부딪친 사람을 형제로 인정하는 풍습이 있다. 네 전력은 내 마음에 그대로 와닿았다. 오늘부터 너는 나의 형제다! 라온 지그하르트!”
가로나가 스스로의 가슴을 쿵 치면서 미소를 지었다. 방금 칼에 베인 놈이 가슴을 치는 모습에 입이 떡 벌어졌다.
“난 당신이랑 형제가 될 생각이….”
“그 무슨 섭섭한 말이냐! 네게도 내 마음이 닿았을 터! 우리의 연은 피를 나눈 친형제보다도 진해지게 될 것이야! 우리 흑수족은 한 번 정한 형제는 절대 버리지 않아!”
그는 시원한 웃음을 터트리며 라온의 어깨를 잡았다.
“형제여! 대련도 끝났으니 밥 한 끼….”
“됐네요.”
“형제여!”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련장 아래로 내려갔다.
“단 한 명도 정상이 없어….”
* * *
“크하하하하하!”
오그람이 의자의 팔걸이를 부수며 광소를 터트렸다.
“좋구나! 좋아!”
그는 가로나가 패했고, 흑수족의 비기를 라온이 본뜬 것을 보고서도 오히려 즐거워했다.
“우리 부족 못지않은 싸움을 보여준 아이다! 형제로 인정할만하지!”
오그람은 가로나가 라온과 형제가 된 게 만족스럽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영감. 손주를 아주 잘 뒀군. 지그하르트 놈들 중에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녀석이야!”
“크흠, 시끄러우니까. 그 입 좀 닫아라.”
글렌은 손을 젓고서 아무도 없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모르게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저 아이들의 결투를 보니, 심장이 뛰는군요. 20년은 젊어진 기분입니다.”
레크로스 국왕도 흥분했는지 얼굴에 홍조를 띄워 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예측을 뛰어넘는 결투였습니다. 다시 보고 싶을 정도예요.”
데루스도 놀랍다는 듯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멈춰 있었다.
“이게 요즘 말로 상남자라는 건가.”
체임버가 휘파람을 부르며 손가락을 돌렸다.
“아저씨. 손주 잘 둬서 좋겠네. 다들 우리 꽃미남 이름만 외치는데?”
그녀는 관객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라온이라는 이름을 들으며 방긋 웃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글렌은 얼굴을 돌리지 않은 채 콧방귀를 뀌었다. 지금 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참느라 손끝까지 떨고 있었다.
로엔은 뒤에서 글렌의 볼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인정 좀 하시지….’
* * *
라온은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은 뒤에 대련장으로 돌아갔다. 대련장을 고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는지, 4강 2차전은 지금에서야 시작되고 있었다.
깔끔하게 원상복구 된 대련장에는 카디스와 그의 상대인 타멸의 마도사 론이 이미 대련장에 올라와 있었다.
라온은 먼저 우측에 있는 타멸의 마도사 론을 살폈다.
‘타멸의 마도사라.’
론은 대륙십이성에 올라가 있기는 하지만 중위에 속한 카디스, 보리니 키튼과 달리 하위인 아홉 번째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뛰어난 마법사는 분명하지만, 실력 차이가 나기에 이번 승부는 이미 승자가 결정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론이 아무것도 못 하고 졌으면 좋겠네.’
-뭐라?
라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놈 네 스튜 원수의 아들이지 않느냐.
‘맞아.’
-네놈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저쪽도 고생하다가 올라오는 게 나을 텐데?
‘그게 아니지.’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론을 가볍게 이겨서 체력과 오러가 만전인 놈을 꺾어야 의미가 있지. 저놈 얼굴도 못 들고 다닐 거 아니야.’
상대를 그냥 이겨봐야 의미 없다. 부상을 입고, 체력과 오러가 떨어진 자신이 만전의 상태인 카디스를 꺾어야 저놈들의 자존심이 더 뭉개질 테니까.
-진짜 네 사고 방식은 인간도 마족도 아니니라. 더러운 천계의….
라스는 정말 질린다며 어깨를 떨었다.
“흐음.”
라온이 카디스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기분이 더러운가 보네.’
그의 표정은 얼음장을 씌운 듯 냉막했다.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 대놓고 나오고 있었다.
‘당연하겠지.’
카디스는 데루스 이상으로 명성을 따지고,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 놈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자신과 가로나가 모든 시선을 가져갔으니, 들러리가 된 기분에 짜증이 가득 차올랐을 것이다.
‘걱정 마.’
라온이 차게 웃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그 짜증이 절망이 될 테니까.’
결승전에서 자신에게 패배한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그럼 마스터 급 4강 2차전을 시작합니다!”
사회자가 단상 아래로 내려가 손을 내렸다.
우우우우웅!
먼저 움직이는 건 카디스가 아니라, 타멸의 마도사 론이다. 그가 양손을 펼치자, 주홍빛 마나의 펼쳐졌다.
타멸이란 쳐서 없앤다는 뜻. 론은 타멸의 기운이 깃든 주홍색 마나를 조작하여 사물만이 아니라, 오러까지 지워버리는 혈계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였다.
치이이이잉!
론의 손이 움직임에 따라 타멸의 마나가 예리한 창이 되어 카디스를 향해 쏘아졌다.
카디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검을 휘어내렸다. 검날 위에 어린 오러가 부드럽게 물결치며 타멸의 기운을 흘려보낸다.
후우우우웅!
로베르트 가문이 자랑하는 둔검이자, 유검 청운현성검이었다.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유영하는 강기가 론의 공세를 모조리 흘려버렸다. 아니, 타멸의 기운이 저절로 카디스를 피해 가는 듯 보였다.
‘청운현성검을 완벽하게 익혔군.’
카디스의 무력은 확실히 다른 대륙십이성 중위와 달랐다. 그의 검에서는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강기가 물 흐르듯 번지고 있었다.
“흐으읍!”
론이 고속으로 영창하며 두 손을 모은 채 손가락을 벌렸다.
화아아아아아아!
카디스의 검에 밀려나 사위로 퍼져 있던 주홍빛 마나들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
라온이 살아 있는 듯 움직이는 타멸의 기운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하위라고 해도 대륙십이성. 노렸던 건가?’
타멸의 기운이 카디스의 검에 너무 허무하게 밀린다고 생각했는데, 마나를 흘려보내며 지금의 기습을 준비한 것 같았다.
수백 개가 남는 타멸의 기운이 크고 작은 칼날이 되어 동시에 쏟아져 내린다. 아무리 카디스라고 해도 전부 막기에는 쉽지 않은 숫자였다.
터엉!
카디스가 검극을 아래로 내린 채 발목을 회전시키며 검을 위로 쳐올렸다. 그가 일으킨 강기의 흐름을 따라 쏘아지던 타멸의 마나들이 자석처럼 이끌린다.
아무리 강력한 강물도 결국 바다에 휩쓸리듯 카디스의 강기에 먹힌 타멸의 기운들이 파도가 되어 론에게 되돌아갔다.
“이, 이게 무슨!”
론이 억지로 버티려 했지만, 이미 몰아친 파도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는 대련장에서 거칠게 튕겨 나가 맨바닥에 처박혔다.
“크헉….”
론이 피를 토하며 고개를 저었다.
“져, 졌습니다.”
“스, 승자는 파랑검 카디스 로베르트!”
사회자의 선언에 카디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는 대련장 아래로 내려가 론의 상태를 확인하며 고개를 숙였다.
“와아아아아아아!”
“압도네! 압도!”
“역시 대륙십이성! 순위는 어쩔 수 없는 건가?”
“이것도 멋지네. 역시 미래의 검성이야.”
“이번 결투 대련은 하나도 빼놓은 장면이 없어.”
“캬아! 이기고 패자를 챙기는 모습도 좋고!”
관객들은 론을 압도하며 이긴 뒤 패자를 챙기는 카디스에게 박수를 보냈다.
“음?”
카디스의 등을 보고 있을 때 그가 뒤를 돌며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데루스와 같은 웃음을 흘렸다. 겉으로는 따스하지만, 실제로는 비웃음이 담긴 미소였다.
라온은 그들과 달리 눈까지 웃어 보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웃음 곧 지워질 거야.’
* * *
선수들의 휴식 시간이 끝난 뒤 다시 대련장에 관객들이 모여들었다. 부상과 오러를 회복하느라 4시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지만 좋은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대로 남아 있던 사람들도 절반이 넘었다.
사회자는 그 열기에 오싹함을 느끼며 대련장 위로 올라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는 양팔을 쭉 펼친 채 관객들 모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부터 육황 결투 대련의 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기다리고 있었다!”
“밥도 안 먹고 4시간을 버텼다고!”
“빨리 좀 시작해!”
관객들은 제발 좀 시작해달라며 손을 마구 흔들었다. 더 시간을 끌면 사회자를 죽일 기세였다.
“아하하. 열기가 뜨거워서 익을 것만 같네요. 좋습니다.”
사회자가 식은땀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익스퍼트 급 결승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마르타 지그하르트 대 그리어 드 오웬! 대련장으로 올라와 주십시오!”
“이야아아아아!”
“마르타아아아아!”
“왕자님! 이기십시오!”
그의 외침에 대련장 위에 다시 한번 웅장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삼왕자에 대한 응원은 당연했지만, 마르타에 대한 환호도 그에 못지않았다.
“후우우….”
마르타는 대련장 위로 올라가서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부상의 여파는 아직 남아 있지만 못 싸울 정도는 아니다. 라온 덕분에 성장한 경지를 생각하면 평소만큼의 실력은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고개를 들어 올려 앞에 있는 오웬의 삼왕자를 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재수 없는 뺀질이였지만, 지금은 헌양한 느낌을 주는 사내가 되어 있었다.
“당신과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겨뤄보고 싶었소.”
삼왕자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폈다.
“기억나. 라온을 꺾은 뒤에 나와 싸우겠다고 말했었잖아.”
오웬의 사절단이 지그하르트에 도착했을 때 그는 라온을 우습게 보고 바로 다음 상대로 자신을 지명했었다.
“맞소. 라온 검사에게 처참하게 패배했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자다가 이불을 걷어차고 있소.”
삼왕자가 민망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그 경험이 있었기에 난 더 강해질 수 있었소.”
그의 분위기가 급변한다. 날카로우면서도 고고한 오웬 왕국 기사 특유의 기세였다. 눈동자에도 현묘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마찬가지야.”
마르타가 검을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녀석에게 발린 뒤에 정신을 차렸거든.”
“우리 둘 다 라온 검사 덕분에 이 위치에 섰다는 뜻이로군. 재밌구려.”
삼왕자가 빙긋 웃고서 눈빛을 가라앉혔다.
“라온 검사는 못 본 사이에 저 하늘에 올랐소. 난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라도 이 대결에서 꼭 이길 생각이오.”
“그것도 마찬가지네.”
마르타가 차가운 안색으로 삼왕자를 바라보았다.
“나도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져서는 안 되거든. 절대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본 채 천천히 기세를 끌어 올렸다. 마스터들의 전투보다는 옅지만 그 기상만큼은 하늘에 닿은 듯한 기파가 맞부딪쳤다.
“두 분 모두 준비되셨습니까?”
“예.”
마르타와 삼왕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회자가 숨을 한 번 뱉고 대련장 아래로 내려갔다.
“그럼 익스퍼트 급 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간 순간 마르타가 땅을 박차고 돌진했다.
마르타는 속전속결로 끝낼 생각인지 단숨에 삼왕자의 공간을 파고들어 검격을 쏟아냈다. 묵직하면서도 빠른 검세가 좌우에서 연속으로 뻗어나갔다.
챠아아아앙!
삼왕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몸의 중심을 낮췄다. 그대로 내지르는 검기가 마르타의 검격의 빈틈을 뚫어버렸다.
마르타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역시 오웬의 눈.’
단숨에 검격의 빈틈을 뚫어버리다니, 지그하르트에 찾아왔을 때와 지금의 삼왕자는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도!’
마르타가 삼왕자의 검이 우측 앞으로 나온 것을 노리고 좌측에서 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삼왕자는 예측했다는 듯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 여유를 보인 뒤 검을 내리쳐 완벽한 방어를 해냈다.
힘은 이쪽이 우위지만, 기술의 정밀도와 날카로움은 삼왕자가 더 높았다. 이대로라면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후우….”
마르타가 한숨을 내쉬고서 뒤로 물러섰다. 오러가 만전이 아니기에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 끝이오?”
“아니, 이제 시작이야.”
마르타의 붉은 입술 위로 검은 입김이 흘러나왔다. 검은 눈동자가 시뻘겋게 번들거리며 그녀의 전신을 덮은 황갈색 오러가 불길처럼 거칠게 타올랐다.
쿠와아앙!
땅을 부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마르타의 몸이 사라졌다. 그녀는 조금 전보다 2배 이상 빠른 속도로 삼왕자에게 파고들었다.
쩌어어엉!
삼왕자가 빠르게 검기의 벽을 쌓았지만, 마르타는 그 벽을 거칠게 깨부수고 쇄도해왔다.
“크윽!”
삼왕자가 입술을 깨물며 검날을 비틀어 마르타의 참격을 흘려냈다.
‘광폭화인가!’
마르타의 돌아간 눈과 급격하게 강해진 육체 능력과 오러의 양을 보면 사이한 협곡의 전사들이 몬스터를 상대로 사용한다는 광폭화가 분명했다.
콰아아앙!
막아내는 것만으로 어깨가 빠질 것 같았다.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보법을 밟았다.
‘정면에서 상대할 수는 없어.’
자신은 라온 지그하르트가 아니다. 저 강대한 힘과 속도를 정면으로 막았다간 뼈도 못 추린다.
‘그래도 오래 버티지는 못 해.’
사이안 협곡의 전사들의 광폭화의 효과는 1.5배에서 2배 가량. 마르타는 2.5에 가까운 힘을 증폭시켰기에 지금의 힘을 유지하는 건 1분이 채 되지 않는다. 움직임도 단순해졌으니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크아아아아!”
마르타가 괴성을 지르며 검을 내리쳐왔다. 익스퍼트 급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검격에 대련장 바닥이 찌부러졌다. 무서운 위력이지만 예상대로 검술은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어?’
마르타의 두 번째 검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돌렸는데, 어느새 그녀의 얼굴이 다가와 있었다.
“어?”
삼왕자는 마르타의 눈을 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왜 눈빛이 맑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