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22화 (322/653)

제322화

타천은 목제 테이블 위에 펼쳐진 오웬 왕성을 지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실패인가….”

확실하게 제거하기 위해서 공간 좌표까지 뒤틀었는데 혼돈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라온은커녕 단 한 명도 죽은 인간이 없었다. 말할 필요도 없는 완벽한 실패였다.

“실패라고 하셨습니까?”

적귀사가 타천을 돌아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테이블을 꽉 움켜쥐었다.

“설마 글렌 지그하르트가….”

“아뇨. 라온 지그하르트 때문입니다. 혼돈이 이루어지기 전에 음양의 기운을 지워버리더군요.”

타천이 부드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아귀 위로 빛과 어둠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글렌과 싸울 때 본 게 다일 텐데 혼돈의 흐름을 파악하다니, 역시 보통이 아니에요.”

“그게 놈의 가장 무서운 점입니다.”

적귀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제게 덤벼들 때도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달라졌습니다. 아직은 위협적인 무력이 아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높은 곳에 오르게 될 겁니다.”

지부가 무너지기 전에 라온은 매일매일 싸우자며 검을 날려왔고, 그때마다 사람이 변한 것처럼 격이 달라진 무력을 선보였다.

많은 무인을 봐왔지만 그런 정신 나간 성장력은 처음이었다.

“성장력이라….”

타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수평선 아래로 해가 저물어 바다에 어둠이 찾아와 있었다.

절혼검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자세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놈을 제거한다면 최대한 빠른 게 좋을 겁니다.”

적귀사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타천을 바라보았다. 라온 지그하르트의 성장은 예측 불허. 죽이려면 단호하게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쉽게도 그리 여유가 많지는 않아요. 최근에 꽤 많은 소모를 했으니까.”

타천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올렸다.

“조금만 앞을 보도록 하죠.”

그는 달이 차오른 해변의 하늘을 보며 부드럽게 눈을 내리감았다. 음악을 즐기듯 손가락을 까딱거리다가 다시 떠오른 눈동자에는 각기 다른 색의 이채가 반짝였다.

“라온을 다룰 방법을 바꿔야겠군요.”

“그게 무슨….”

“제거가 아니라 이용으로.”

타천의 입술이 가늘게 말려 올라갔다.

“아무래도 그가 우리의 대의를 도와줄 듯 하네요.”

*     *      *

캬아아아아앙!

적섬의 열선이 보리니 키튼의 장검을 유리장처럼 조각냈다. 그 뒤를 이어 떨어지는 열기가 대련장을 용광로처럼 달궜다.

후우우웅!

검이 깨졌음에도 보리니 키튼의 눈을 죽지 않았다. 반쪽 난 장검을 꼬나쥐고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대련장을 내달렸다.

우우우웅!

부러진 검신에서 지금까지 중 가장 찬란한 빛이 치솟았다. 섬광처럼 뿜어진 강기가 라온의 목을 노리고 나아갔다.

라온 역시 기세를 꺼뜨리지 않았다. 제비가 날듯 무릎과 허리를 낮춘 뒤 아래로 내려간 제천검을 쳐올렸다.

화아아아아!

검날 위에서 꺼지지 않은 불꽃이 반월을 따라 흐르며 보리니 키튼이 마지막 힘을 다해 쏟아낸 강기를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파사사삭!

보리니 키튼의 검이 자루조차 남기지 않은 채 가루가 되고, 밝은 은빛을 자랑하던 갑옷이 비틀어져 뜯겨나갔다.

라온은 이 이상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제천검을 휘돌려 대련장에 가득 찬 열기를 지웠다.

“후우우.”

보리니 키튼은 뜯겨나간 갑옷을 벗은 뒤 깊은숨을 내쉬었다.

“졌습니다.”

그는 패배를 인정하고서 허리를 숙였다.

“온 힘을 다하고서 진다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군요.”

그 말대로 보리니 키튼의 눈빛은 맑았다. 모든 것을 다 쏟아부어 속 시원한 표정이었다.

“많이 배웠습니다.”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아뇨. 제가 더 많이 배웠습니다.”

보리니 키튼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자그마한 사심도 비치지 않았다.

“파, 팔강 1회전! 승자는 설화검협 라온 지그하르트!”

눈치를 보던 사회자가 대련장으로 올라와서 결투의 결과를 외쳤다.

“우와아아아아아아!”

“라온! 라온! 라온!”

“설화검협 믿고 있었다!”

“진짜 무인이 뭔지를 보여줬어!”

“평생 응원한다! 라온 지그하르트!”

관객들은 대련장이 흔들릴 정도의 함성을 지르며 라온의 이름을 외쳤다. 모두 한꺼번에 목청을 높여서 귀에서 윙윙거리는 이명이 들릴 정도였다.

라온이 대련장 아래에 있는 육황의 수장들을 보았다.

“음.”

글렌이 자그마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표현이 옅은 그가 저런 모습을 보였다는 건 나름 만족한다는 뜻이었다.

“멋진 결투였다.”

“너도 제대로 미쳤네. 잘생긴 미친놈이야!”

“둘 다 무인의 자세가 되어 있군.”

레크로스 국왕은 박수를 보냈고, 체임버는 깔깔 웃었으며, 오그람은 마음에 든다는 듯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눈 호강을 한 기분입니다.”

데루스 역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흥겨워 보이는 웃음이겠지만, 실제로는 가식적인 미소일 뿐이다.

지금 놈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느라 바쁜 상태니까.

‘망할 로베르트….’

전생의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음지에서 양손에 피와 오물을 묻히는 동안 데루스는 양지에서 사람들의 환호를 즐겼다.

내가 음지에서 로베르트 가문에 반항하는 인간들을 죽이는 동안 데루스는 사람들을 구하고 천검성이라는 이명을 얻었다.

내가 자금을 끌어모으기 위해 거부들을 습격하고 돈과 정보를 훔칠 때 데루스는 식량을 풀어 현군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나와 그림자가 죽을 고생을 하는 동안 데루스는 힘을 키우고, 명성을 쌓은 뒤 그 업적을 이루게 만들어 준 사냥개를 솥에 삶았다.

죽어서도, 다시 살아나서도 용서할 수 없는 쓰레기였다.

내 덕분에 얻은 네놈의 힘과 명성.

‘모조리 빼앗아주마.’

라온이 데루스의 미소를 보며 볼 안쪽을 강하게 씹었다.

‘지금부터 시작이야.’

제대로 된 복수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내일 놈의 아들인 카디스를 처참하게 깨부수고 나서야 시작 지점에 서는 것이다.

“감사했습니다.”

라온은 속마음을 꼭꼭 싸맨 뒤 데루스를 포함한 육황의 수장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라온 검사님.”

대련장을 내려가려고 할 때 보리니 키튼이 말을 걸어왔다. 그는 검사만이 아니라 뒤에 님이라는 존칭까지 붙였다.

“예?”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그는 소속이 있는 몸이라 함부로 결정할 수 없다며 레크로스 국왕에게 다가갔다. 잠시 그와 대화를 나눈 뒤에 다시 대련장으로 올라왔다.

“라온 검사님.”

보리니 키튼이 앞으로 다가온 뒤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저 보리니 키튼은 그 언제, 그 어떤 일이라도 당신의 부탁 세 가지를 수행하겠다고 이 자리에서 맹세합니다.”

“예?”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라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무슨 말씀을….”

“라온 검사님과 결투를 하며 세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이 못난 인간을 깨우쳐주신 대가로 제 목숨을 걸고 라온 검사님의 부탁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보리니 키튼이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의 안색은 다시 태양이 떠오른 듯 밝았다.

“세 가지라면?”

“첫 번째는 사람을 구하는 건 어느 때도 상관없다는 점, 두 번째는 진짜 무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점,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적을 격려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차례로 펼쳤다.

“사실 그 모든 것을 떠나서 라온 검사님이 저와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평생 따라야 하지만, 제겐 이미 목숨을 건 주군이 있으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음….”

라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보리니 키튼은 지금이 아니라, 미래가 더 기대되는 기사다.

그를 세 번이나 부릴 수 있다는 건 그 어떤 보물과도 바꿀 수 없는 이득이었다.

“이미 전하께서도 허락하셨습니다. 받아주십시오.”

보리니 키튼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 레크로스 국왕과 했던 이야기가 지금의 맹세였던 모양이다.

‘이걸 허락하다니….’

아무래도 레크로스 국왕은 자신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무얼 하는 것이냐.

라스가 얼음꽃 팔찌에서 튀어나와 인상을 찌푸렸다.

-공짜 노동력 아니더냐! 당장 받아들여야지!

녀석은 머리가 없는 솜사탕답게 공짜를 좋아했다.

‘기다려봐.’

라온이 고개를 젓고서 한 발 앞으로 다가가 보리니 키튼과 눈을 마주쳤다.

“하나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제가 기사의 명예에 어긋나는. 아니, 인간의 거죽을 두른 채로 할 수 없는 부탁을 하면 어쩌려고 그런 맹세를 하시는 겁니까.”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저 데루스를 열받게 할 계획을 짰을 뿐인데, 보리니 키튼의 맹세를 받는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지금 그런 말을 하셨으니까요.”

“예?”

“좀 건방져 보일 수 있지만, 제가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맹세를 한다면 대부분은 그 맹세를 받아들이느라 바쁠 겁니다. 시킬 일 따위는 나중에 생각하면 되니까. 일단 받아들이는 데 집중하겠죠.”

보리니 키튼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당신은 맹세를 받지 않고, 먼저 기사의 명예를 걱정해주었습니다. 바로 그 점이 당신을 믿어도 된다고 생각한 이유입니다.”

그가 오른손으로 본인의 가슴을 쿵 쳤다.

“당신이라면 제가 사람이나, 기사의 길을 버리는 일을 시키지 않을 거라 믿고 있습니다. 제 맹세를 받아주십시오.”

라온이 옅은 숨을 뱉고서 눈을 내리감았다.

-저리 말하는데 빨리 받으란 말이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는 저런 놈들이 수없이 달려들었지만, 네놈은 인망이 거지….

‘좀 가.’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라스를 쭉 밀어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

보리니 키튼을 감동시킬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강해지기 위해서 그를 자극했을 뿐인데,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다만 그의 믿는다는 말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대에게 이런 신뢰를 받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라온이 마음을 정하고서 눈을 떴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보리니 키튼과 눈을 마주쳤다.

“저도 맹세하죠. 당신의 명예에 누가 될 부탁은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보리니 키튼 경.”

“믿겠습니다. 라온 검사님.”

라온이 손을 뻗었다. 보리니 키튼의 손을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우와아아아아아!”

“이게 무인의 싸움이고, 이게 무인의 우정이지!”

“멋지다!”

“창첨검! 창첨검!”

“설화검협!”

관중들은 다시 환호를 터트리며 라온과 보리니 키튼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라온은 그들의 함성에 손을 들어 화답하고서 대련장을 내려갔다. 억지로 웃는 데루스 그리고 진심으로 웃는 보리니 키튼을 차례로 보고서 입맛을 다셨다.

‘난 아직 사람도, 세상도 모르는 것 같아.’

-맞느니라. 네놈의 조롱은 마왕급이지만, 인간적인 부분은 본왕만도 못한….

‘넌 조용히 하고.’

*     *      *

8강이 모두 진행된 후에도 사람들의 입에서는 라온과 보리니 키튼에 관한 이야기만 흘러나왔다.

이 마스터 급 결투가 라온과 보리니 키튼만의 무대가 되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글렌은 그런 연무장의 난잡함에 미소를 지었다. 모든 곳에서 아끼는 손주의 이야기가. 그것도 좋은 소리만 나오고 있으니 기분이 절로 들떴다.

‘참아야겠군.’

로엔을 시켜서 라온에게 헛소리를 하던 관객들을 암살하려고 했지만 기분이 좋으니 그냥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돌아가….”

“저도 같이 가요!”

셰릴과 로엔을 데리고 라온이 있을 의무실로 가려 할 때 관객석에서 리메르가 뛰어내렸다.

“너 지금까지 어디서 뭐 하고 있었어.”

셰릴이 리메르를 보며 눈을 흘겼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한 대 칠 기세였다.

“허허, 설마 또 도박을….”

로엔이 부드럽게 웃었지만,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쩍였다.

“에이, 아니지.”

리메르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다들 잘 모르겠지만, 지금 라온의 이름이 퍼지는 데 일등 공신은 나라고.”

그가 히죽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내가 라온을 밀어주지 않았으면 타천이 일으킨 혼돈에 여기 다 날아갔다니까?”

“…….”

글렌은 리메르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의무실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지랄하네.”

셰릴이 리메르를 보며 혀를 쯧쯧 찼다. 한심하다는 표정 그 자체였다.

“안 되겠다. 너는 지금부터 나한테 처맞고 날아가야겠다.”

“아 진짜라고! 로엔 님! 로엔 님은 저 믿죠!”

“허허, 저는 가주님을 따라가야 해서.”

로엔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서, 글렌의 뒤를 따라갔다.

“도움은 개뿔! 도박이나 하고 있었을 게 뻔하지! 주머니를 뒤지면 도박권이 수십 장은 나올 걸? 너 오늘은 그냥 안 끝….”

“천검대주.”

셰릴이 리메르를 후려치려고 할 때 글렌이 뒤를 돌았다.

“이만 가도록 하지.”

“예? 예!”

셰릴이 고개를 갸웃거리고서 글렌의 뒤에 붙었다. 그녀는 의외라는 듯 눈매를 좁혔다.

“후우….”

모두가 떠난 뒤에 리메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그는 품에 가득한 도박권을 보며 히죽였다.

“다 뜯길 뻔했네.”

*     *      *

라온은 의무실에서 허리를 치료받은 뒤에 연무장으로 향했다. 텅 빈 연무장은 어둠으로 물들었지만, 달빛이 밝아 움직이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스르르릉!

연무장의 중심으로 이동해서 제천검을 뽑았다.

-설마….

라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또 수련하려고?

‘당연한 걸 왜 물어.’

라온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학습을 했으면 복습을 해야지.’

오늘 마티스와 보리니 키튼을 상대하며 광아검, 설풍검결만이 아니라, 예검과 정검의 성취마저 상승했다. 잠을 자기 전에 성장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기껏 쌓은 실력이 줄어들 것이다.

-지겨운 걸 떠나서 이젠 네놈이 질리느니라….

라스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겨운 걸 잘해야 뛰어난 무인이 되는 법이지.’

-그게 아니니라! 이 지독한 놈아!

녀석은 빽 소리를 지르다가 인상을 찌푸리고 어깨에 내려섰다. 말하는 것도 지친다는 표정이었다.

‘도리안이 걔를 데리고 올 때까지만 할게.’

-걔?

라온은 대답하지 않고 제천검을 내리쳤다. 사나우면서도, 예리한 광아검의 초식이 밤공기를 갈랐다.

‘좋군.’

예검과 정검의 성취가 오르면서 목줄 풀린 맹수였던 광아검에 날카로움과 정확성이 깃들었다.

검세 하나하나에 섬뜩할 정도의 예기가 치솟았다.

‘더 큰 변화는 설풍검결이지.’

홀로 수련하여 실전이 부족했던 설풍검결에도 섬뜩한 송곳니가 돋아났다. 적의 흐름을 물어뜯어서 끊어버릴 예리한 칼날이 연무장에 깊게 새겨졌다.

‘아직 끝이 아니야.’

앞으로도 더 나아갈 수 있어.

라온은 광아검과 설풍검결을 연달아 펼친 뒤에 검을 내렸다. 만족스러움에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나무 위에서 작은 뱁새가 날아와 칼등 위에 앉았다.

“이 녀석은….”

높은 경지에 오른 검사의 검에는 자연스러움이 묻어나 야생 동물이 다가온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그 경지라는 건가?’

아직 한참 멀었을 텐데.

자연스러운 검이 무엇인지도 모르기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이 시간에 수련한 보람이….”

“잘했어.”

옅은 미소를 지을 때 뱁새가 고개를 모로 틀면서 입을 열어 사람의 말을 뱉었다.

“아….”

라온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 말투만으로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빠르게 기막을 펼쳐서 소리가 새어 나가는 걸 막았다.

“머, 멀린?”

“이제 잘 알아보네.”

멀린이 뱁새의 입으로 조롱조롱하게 웃었다.

“너 간 거 아니었어?”

“네가 위험한데 내가 어딜 가겠니.”

그녀는 왜 당연한 걸 묻냐는 듯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허어억!

라스가 멀린을 보며 움찔 몸을 떨었다.

-과, 광녀! 진짜 광녀이니라! 머리에 집착의 칼이 꽂혔느니라!

녀석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서 얼음꽃 팔찌 속으로 숨었다.

“혼돈이 완성되기 전에 마나를 깎아내다니, 완벽한 대응이었단다. 아름다웠어.”

“하….”

머리가 아파 온다. 그런 식으로 인사를 하고 떠났으면 한동안 못 볼 줄 알았는데, 바로. 그것도 뱁새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다.

“보리니 키튼과 레크로스 국왕의 신뢰까지 얻었으니, 최고의 결과라 봐도 되겠지.”

멀린은 뱁새의 모습으로 히죽히죽 웃었다. 귀여움과 소름 끼침이 동시에 올라오는 건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제 타천도 함부로 못 움직일 거야. 정말 수고 많았어.”

“언제부터 본 거지?”

“처음부터 끝까지. 난 항상 널 지켜 보고 있단다.”

“으….”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팔뚝에 닭살이 올라왔다.

“이 아이로 네 싸움을 지켜보느라 오래는 못 버티네.”

멀린을 담고 있는 뱁새의 날개가 파르르 떨렸다.

“더 높이 날아오를 네 모습을 기대하고 있을 게.”

그녀가 떨리는 날개를 들어 마지막 인사를 했다. 다만 저래 놓고서도 금세 또 나타날 것만 같아서 불안해졌다.

“아, 이 아이에게는 곡식을 좀 나눠주렴. 그런 약속이었으니까.”

“네 약속을 왜 자꾸 나한테….”

짹.

따지려고 했지만, 이미 혼이 교체된 듯 뱁새는 까뭇한 눈동자로 이쪽을 올려보았다. 통통 튀며 칼등을 밟고 올라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빨리 곡식을 내놓으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을 때 연무장 문이 열리고 도리안이 들어왔다.

“부단주님. 불렀어요. 곧 올거에요.”

“마침 잘왔다.”

라온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도리안에게 손짓했다.

“혹시 곡식 좀 있어?”

“곡식? 당연히 있죠!”

도리안이 활짝 웃으며 배 주머니에서 열 개의 원통을 꺼냈다.

“뭘 드릴까요? 보리, 쌀, 조, 콩, 수수, 밀, 옥수수? 더 있으니까. 말만 하세요!”

“피곤해….”

라온이 픽 숨을 내쉬었다. 수시로 나타나는 멀린 때문인지, 모든 물건을 다 가지고 다니는 도리안에게도 지치는 느낌이었다.

“이 녀석이 먹어야 하니까 좀 골라 줄래?”

라온이 뱁새를 가리켰다. 전에 새들이 조와 수수로 만든 사료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뱁새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다 달라고 했다.

“요 녀석에게 먹이를 주시려는 거군요!”

도리안은 어느새 라온의 손까지 올라간 뱁새를 보며 통을 열어 곡식을 모두 꺼냈다. 테이블 위에 곡식을 줄줄이 펼쳐서 뷔페를 만들어 주었다.

짹!

뱁새는 날개를 퍼덕이면 곡식뷔페에서 본인이 원하는 곡물들을 맛나게 즐겼다.

“으헤헤. 이 녀석 귀여운데요?”

도리안이 배가 포동포동해진 채 드러누운 뱁새를 보며 헤헤 웃고 있을 때 연무장의 문이 조용하게 열렸다.

라온이 뒤를 돌아보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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