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21화 (321/653)

제321화

“드디어 이야기가 진척되는군요.”

레크로스 국왕이 두터운 서류 뭉치를 덮으며 미소를 지었다. 지지부진했던 회의가 끝나가기에 그의 안색도 밝아졌다.

“백혈교와 에덴의 정보를 교환하기 위한 마나망은 회의에 참여하지 않은 마탑에서 진행하게 될 겁니다.”

“그 귀찮은 일을 마탑의 게으름뱅이들이 한다고?”

체임버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탑주께서 이번에 참여하지 못했기에 그 일을 맡아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그 녀석들은 왜 안 온 거야?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레크로스 국왕을 바라보았다.

“여태 뭐 하다가 지금에서야 그게 궁금한 거냐?”

오그람이 체임버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다른 곳에는 별 관심 없었거든. 난 저 아저씨를 보러 온 거라서.”

체임버는 글렌을 가리키며 빙긋 웃었다.

“얼마나 강해졌나 보러 왔는데, 역시 실망을 안 시킨다니까.”

그녀가 혀로 붉은 입술을 축였다.

“그래서 마탑 애들은 왜 안 온 건데?”

“그들은….”

“음?”

레크로스 국왕이 답을 해주려고 할 때 말없이 서류를 살피던 글렌이 눈을 부릅뜬 채 창가 쪽을 돌아보았다.

“가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이런!”

셰릴과 로엔이 글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려는 순간 데루스, 체임버, 오그람, 레크로스 국왕까지 모두가 글렌과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버러지 같은 것이!”

글렌은 회의장 창문을 부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른 육황의 수장들도 황급하게 글렌의 뒤를 따라갔다.

화아아아!

그들은 저 멀리 보이는 대련장 위로 추락하는 빛과 어둠을 보고서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빛과 어둠! 타천인가!”

“거리가 멉니다. 이대로라면 늦어요!”

오그람이 이를 바득 갈고, 레크로스 국왕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좌표 방해가 걸려 있어. 이동이 안 돼.”

체임버가 계산을 끝내고서 이마를 찌푸렸다.

“여기서 요격해야겠어.”

그녀가 추락하는 빛과 어둠을 향해 지팡이를 겨눌 때 글렌이 손을 들어 앞을 막아섰다.

“아저씨?”

“기다려라.”

글렌은 차가운 눈으로 떨어지는 빛과 어둠을 지켜보았다. 숨 한 번 들이킬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빛과 어둠 사이로 노을빛을 닮은 금발의 검사가 뛰어올랐다.

“저 녀석 영감 손자잖아!”

오그람이 타천의 마나를 향해 날아가는 라온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정말 노망이라도 난 거냐고! 타천의 마법을 저 꼬맹이가 어떻게 지워!”

“이건 나도 반대야. 저 녀석에겐 아직 무리야.”

“제 생각에도 일단은 처리하고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체임버와 레크로스 국왕도 이건 아니라는 고개를 저었다. 데루스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은 채 라온을 지켜보았다.

“라온은 내 뒤에서 타천의 힘을 지켜보았다.”

글렌은 그들을 안심시키듯 부드럽게 손을 내렸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비상하는 라온을 두 눈에 담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움직이는 아이가 아니야.”

*     *      *

“크윽!”

라온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전력을 다한 제천검과 진혼검으로 빛과 어둠의 기운을 후려쳤지만, 밀려난다.

그리 크지 않은 마나였지만, 주먹으로 거대한 쇳덩이를 친 듯한 충격에 손아귀가 떨렸다. 극강의 반탄력이었다.

‘이대로는 못 지워.’

계획대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눈앞에 보이는 빛과 어둠의 기운을 절반 이상 날려야 하지만 생각보다 그 힘이 강대했다.

이대로라면 빛과 어둠이 섞인 혼돈이 터져 대련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게 될 것이다.

‘숨겨두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군.’

라온이 진혼검을 고쳐 쥐고 만화공과 글래시아의 기운을 폭발시켰다.

‘부탁한다.’

우우우우웅!

그 말에 화답하듯 진혼검에서 터져 나온 강대한 검명이 천공을 가득 채웠다.

화아아아아!

라온이 허공에서 몸을 휘둘리며 진혼검으로 열기와 냉기를 동시에 내뿌렸다.

분수처럼 뿜어진 두 기운은 은빛 궤적을 따라 수백 장의 꽃잎이 되어 휘날렸다.

만화공의 열기와 글래시아의 냉기를 동시에 운용하여 펼치는 화령이었다.

‘크윽….’

마나회로에서 돋아나는 극심한 통증을 이 악물고 참으며 끝까지 검을 그어 내렸다. 노을빛을 받아 뻗어나가는 붉고 푸른 강기의 조각들이 천공을 가득 메웠다.

-그 정도로는 무리다.

라스가 빛과 어둠을 향해 쏘아진 화령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 반쪽이는 본왕이 인정할 정도의 마법사. 아무리 혼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아직은 네가 감당할… 음?

녀석의 장담과 달리 화령의 꽃잎들은 타천이라는 괴물이 만들어낸 빛과 어둠의 기운을 깎아내기 시작했다.

찌지지직!

조각칼로 나뭇조각을 잘라내듯 빛과 어둠의 기운이 뭉텅이로 찢겨나갔다.

-어, 어떻게….

‘그렇게 화내놓고 벌써 잊었어?’

라온이 진혼검의 칼날을 가리켰다. 붉은 칼날 위에서 샛노란 요기로 새겨진 글자가 돋아나 있었다.

-마법 역장!

‘마법 요혈이지.’

마법 요혈은 4사도의 흑도를 깨부수고 얻어낸 진혼검만의 특성. 마법의 흐름 사이에 요기를 밀어넣어 마법 발동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타천의 빛과 어둠의 마법은 이미 발동되었기에 억제할 수 없지만, 마법 역장처럼 방해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래도 조금 부족하군.’

화령이 상당히 많은 기운을 잘라냈음에도 빛과 어둠은 여전히 서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결국 직접 부딪쳐야 했다.

뿌드득!

라온이 진혼검의 검병을 으스러져라 쥐고서 이를 악물었다.

‘흐름을 잘라내야 해.’

빛과 어둠의 기운만이 아니라, 두 기운이 서로 합쳐지려는 성질까지 지워야 했다.

‘그걸 위해서는.’

쾌속하게 손목을 돌려 진혼검으로 새로운 경지에 오른 설풍검결을 펼쳤다. 마법 요혈을 담은 설풍검결의 절기 은해섭풍이 빛과 어둠 사이로 쏟아졌다.

쿠구구구구!

빛과 어둠의 기운은 마지막 발악을 하는지 쉽게 꺾이지 않았다. 손목이 부러질 것 같은 통증을 참으며 끝까지 검을 내리쳤다.

촤아아아악!

마티스와 보리니 키튼을 상대하며 급성장한 설풍검결 사이로 마법 요혈의 흐름이 깃들며 끝까지 발악하던 빛과 어둠의 기운을 갈라냈다.

타천이 일으킨 두 종류의 마법은 섞일 일 없이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했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라온은 제천검과 진혼검에 달라붙은 빛과 어둠의 기운을 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전에 글렌과 타천의 전투를 볼 때 빛과 어둠이 글렌의 검에 옅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였다.

놈의 기운은 그저 강하기만 한 게 다가 아니라, 상대의 기운에 달라붙어 두 번째 충격을 주는 효과까지 있었다.

타천은 적을 끝까지 공격하기 위해서 이 흡착력을 만들었겠지만, 지금의 자신에게 이건 도움이 될 뿐이었다.

‘데루스가 보고 있겠지.’

글렌이나, 데루스 같은 초월자들은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이쪽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의심받지 않도록 이 상태를 이용해야 했다.

라온이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기운을 함부로 버릴 곳이 없다는 점을 보여줘야 해.’

이건 연기가 아니다. 대련장만이 아니라, 주변이 사람으로 가득 차서 이 기운을 어디로 보내도 인명 피해가 일어날 상황이었다.

‘즉, 안전한 곳은 한군데밖에 없지.’

차게 웃으며 아래를 보았다. 이곳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여러 겹의 마법으로 보호되는 대련장이었다.

“크윽!”

허리에서 전해지는 고통을 참는 척 입술을 깨물며 몸을 돌렸다. 두 검에 깃든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마티오의 앞에 있는 대련장 모서리를 향해 두 검을 내리찍었다.

“이익!”

마티오가 다급하게 방비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깎아냈다고 해도 타천의 기운은 쉽게 받아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찌지지직!

검과 검 사이에 어린 빛과 어둠이 합쳐지며 터진 아주 작은 혼돈이 마티오를 덮쳤다.

쿠와아아아아앙!

대련장을 두르고 있던 여섯 개의 보호 마법이 통째로 찢어지고, 마티오가 거칠게 튕겨 나가 땅에 처박혔다. 팔과 다리는 뒤로 꺾였고, 그의 눈과 코에서 핏물이 줄줄이 흘러내렸다.

‘저놈이 대자로 자빠져 있는 꼴을 보게 되다니.’

라온이 비틀거리는 척하면서 마티오의 표정을 살폈다. 얼음장을 씌운 듯 무표정한 얼굴이 고통과 당황으로 물들어 있으니, 전신의 통증이 싹 가시는 듯한 기분이었다.

“끄으윽, 왜….”

마티오는 충격이 심했는지 고통스러운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후욱….”

라온이 입에 차오른 핏물을 뱉으며 마티오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이 가득 차서 어디로도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보호막이 쳐진 이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었고, 당신이라면 받아주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헛소리가 아니다. 이 주변에서 가장 안전한 건 보호 마법이 있는 대련장이고, 심판들이 가장 강한 무력을 지닌 것도 사실이니까.

“죄송합니다.”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속마음을 꾹 참은 채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그런….”

마티오는 말을 다 하지 못한 채 눈을 내리감았다. 아쉽게도 죽은 건 아니고, 심한 충격에 기절한 듯 보였다.

“뭐, 뭐야 이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설화검협이 왜 위로 올라갔다가 심판을 공격한 건데?”

“하늘에서 누가 습격한 거 같아.”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식할 정도의 힘이 격돌했어.”

“그럼 설화검협은 그 습격을 막으려고 올라간 거야? 대단한데?”

관객들은 지금 일어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살폈다.

“누가 공격을 했다고? 근데 그걸 직접 막을 필요가 있었나?”

“웬만한 건 다 보호 마법이 다 막아줄 텐데.”

“그러게? 괜히 심판만 충격받고 기절했잖아.”

“질 거 같아서 뛰어오른 거 아닐까? 헛짓….”

“아아, 구해줘도 지랄이 여기에 있네.”

마스터 대련이 시작하기 전부터 라온을 조롱하던 관객들의 주절거림을 일축하는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저 꽃미남이 나서지 않았으면 너희들 뼛조각도 하나 남기지 않고 지워졌을걸.”

어느새 나타난 체임버가 관객석 위에 둥둥 떠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타천의 마법이었으니까.”

“타, 타천?”

“에덴의 타천?”

“타, 타천이라니….”

허공에서 떨어진 마법이 타천의 것이었다는 말에 관객들이 턱을 파르르 떨었다.

체임버의 말에 본인들이 정말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고오오오오오오!

그저 눈빛만으로 사람의 심장을 찢을 듯한 기세가 타오른다. 대련장 앞에 선 글렌이 라온을 조롱했던 관객들에게 일으키는 살기였다.

“크억!”

“아악….”

“꾸아악….”

그들은 글렌이 일으킨 기세에 짓눌려 입에서 거품을 뿜어내며 눈을 까뒤집은 채 기절했다.

“설화검협이라. 이명 한번 잘 지었군요.”

레크로스 국왕이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은 라온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흘렸다.

“흥. 미친놈이다. 허나, 제대로 미쳤어.”

라온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오그람도 이번만큼은 대견하다고 생각했는지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

데루스 로베르트는 쓰러진 마티오에게 자그마한 관심도 주지 않은 채 라온만을 지켜보았다.

“타천이라니….”

“맞아! 노을 사이로 빛과 어둠이 반짝였잖아! 그 마법을 사용하는 건 타천뿐이라고.”

“그럼 설화검협은….”

“그래.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 창첨검에게 허리를 찔리면서도 뛰어오른 거야.”

“그가 나서지 않았다면 여기 있던 모두가 죽었겠지.”

“막은 것도 대단하지만, 여기서 그 습격을 알아차린 것도 라온 님뿐이었어.”

“저게 라온 지그하르트의 본 모습인가….”

이제 사정을 파악한 관객들은 라온에게 경외와 고마움을 느끼며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모두 전율을 느꼈는지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라온은 탁한 숨을 내쉬며 마티오에게 다가가 고개를 돌렸다.

“치료사!”

그의 외침에 멍하니 서 있던 치료사들이 달려와 마티오의 상태를 살폈다.

“뼈가 부러지고, 내상이 심하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치료소로!”

치료사들은 마티오를 조심스럽게 들것에 올린 뒤에 치료소로 향했다.

“라온 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허리의 부상이 심해 보입니다.”

치료사 중 한 명이 함께 가자는 듯 다가왔다.

“전 괜찮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젓고서 뒤를 돌았다. 보리니 키튼이 놀람을 넘어 경악한 눈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허리의 부상과 마나회로의 통증은 심했지만, 이곳에서 결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오늘 이기고, 내일도 싸워 광아검과 설풍검결의 성취를 높이고 싶었다.

“허어….”

“이 와중에 자신보다 남을 걱정하다니….”

“저 상태로 계속 싸울 생각인가?”

“협…. 협이라는 이명을 가진 무인은 많이 봤지만 저런 녀석은 처음이야….”

“설화검협. 그 이름과 소문이 진짜였다니….”

관객들은 본인보다 어린 라온의 정신력에 감탄하며 헛바람을 흘렸다.

“라온! 라온! 라온!”

“설화검협! 설화검협!”

“우오오오오오오!”

“난 오웬 사람이지만 너만큼은 앞으로 평생 응원한다!”

대련장에 가득 찬 관객들이 라온의 이름을 외쳤다. 오웬 왕국이 아니라, 지그하르트에 온 듯 모두가 오직 라온의 이름만을 부르짖었다.

‘데루스는….’

라온은 관객들을 살피는 척하면서 데루스를 보았다. 그는 백지처럼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표정 좋고.’

다른 사람은 그가 당황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저건 화를 억지로 내리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자신이 저 표정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미소가 절로 피어났다.

‘이제 가볼까.’

데루스의 분노한 얼굴도 보았으니, 이제 상황을 끝낼 차례다.

라온이 숨을 고르고 대련장으로 올라가려 할 때 글렌이 계단 앞을 막아섰다.

“부상이 심하다.”

글렌은 라온의 찢어진 허리와 아직 떨리는 손아귀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진천검이 달린 일이었음에도 그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라온을 잡았다.

“이 이상 싸울 필요는 없다.”

“맞아. 여기까지만 해.”

체임버가 하강하여 글렌의 옆에 섰다.

“여기서 멈춰도 뭐라 할 사람은 없어.”

그녀도 그만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달고 나왔습니다. 이런 이변 따위에 무릎을 꿇을 수야 없지요.”

타천과 백혈교주를 홀로 압도하는 글렌의 뒷모습을 봐왔다. 힘겨운 몸 상태나, 검술 성취를 떠나 여기서 물러나기에는 아쉬움이 많았다.

“알겠다.”

글렌은 라온의 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물러섰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글렌과 체임버에게 고개를 꾸벅이고서 다시 대련장 위로 올라갔다.

“당신은….”

보리니 키튼은 아직 라온의 피가 묻어있는 검을 든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멍청한 놈!’

자신이 눈앞에 싸움에 집중하는 동안 라온은 더 높은 곳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검을 찌르는 동안 라온은 적의 습격을 막기 위해 반격하지 않고 몸으로 버텨냈다.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방해만 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라온의 허리에서는 아직도 핏물이 떨어졌고, 얼굴은 파리했으며, 손아귀에는 힘이 없어 보였다.

그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에서도 끝나지 않은 결투를 위해 대련장 위에 올라왔다.

스물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협이라는 글자를 단 이유가 있는 남자였다.

라온에게 감탄을 넘어 존경이 피어났다.

“라온 검사.”

보리니 키튼이 깊게 한숨을 내쉬고, 라온을 바라보았다.

“이 대결은 제가 졌습니다. 그대로 싸웠어도 난 당신을 이기지 못했겠죠. 무력으로도, 무인의 정신으로도 모두 패배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그리 느낀 듯 고개를 떨궜다.

“난 여기서 기권….”

“그게 맞는 길입니까?”

라온이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가운 음성을 뱉었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저는 당신과 싸우기 위해서 다시 이곳에 섰습니다. 당신이 말한 기사의 정신은 상대를 무시하고 기권하기 위해 있는 겁니까?”

“그건….”

“제가 먼저 보고 나섰을 뿐입니다. 창첨검께서 먼저 알았다면 저처럼 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닌가요?”

“으음….”

보리니 키튼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말과 달리 실제로 움직이는 건 다른 일이니까.

“아직 우리의 결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라온은 타천의 마법이 떨어지기 직전으로 돌아간 듯 제천검을 두 손으로 잡고 만화공을 모조리 끌어 올렸다.

“오시지요.”

“하아아….”

보리니 키튼이 허공을 올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동안 어둑해진 하늘을 보던 그가 시선을 내렸다. 흔들리던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도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다.

“제가 또 실수할 뻔했군요. 가르침을 주어서 감사합니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는 말은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지금은 최선을 다해서 당신을 꺾는 게 맞겠지요.”

그의 주변으로 바다처럼 푸른 강기가 치솟았다. 검을 상단으로 올린 뒤에 뒤로 젖혔다. 타천의 마법이 떨어지기 전보다 더 날카로운 기세를 두른 채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얼마든지요.”

라온은 머리털을 쭈뼛 서게 만드는 보리니 키튼의 기세를 느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이거지.’

타천의 마법을 막고, 마티오에게 복수를 한 것과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결투를 계속하는 건 다른 일이다. 무엇 하나 놓칠 생각 없었다.

-정말 그리드보다 더한 욕심이니라….

라스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욕심부려야지. 난 아직 출발선에도 서지 못했으니까.’

라온이 미소를 흘리며 검신 위로 만화공의 열기를 응집시켰다. 강기가 두터워지는 게 아니라, 얇게 예리하게 갈리며 잔불처럼 타올랐다.

“내가 사용할 검술은 참혈검결의 절기 혈성첨관이오.”

그는 초식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과 달리 생사대적을 만난 듯 섬뜩한 기세를 쏘아냈다.

“저는 적섬이라는 초식을 사용하겠습니다.”

만화공의 절기 적섬. 숙련된 예검과 정검을 통해 한층 발전한 적섬으로 끝을 낼 생각이었다.

“적섬이라. 멋진 이름이군요.”

보리니 키튼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에게서 피어나는 기세가 더더욱 예리하게 다듬어진다. 레크로스 국왕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전신이 검에 뚫리는 기분이었다.

고오오오오!

라온 역시 검을 중단에 둔 채 만화공의 기운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극한에 이른 집중력 덕분에 육체의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파스슥.

서로가 서로의 기세를 이 악물고 견딜 때 타천의 기운이 스쳤던 대련장의 끝부분이 무너졌다.

터어엉!

선공은 보리니 키튼이다. 바닥을 박차고 나아가 검을 내지른다. 검극에서 솟구친 장대한 빛무리가 창칼처럼 쏘아져 라온의 전신을 휘감았다.

쿠웅!

라온은 진각을 밟으며 제천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은백색 검신 위로 짙고도 깊은 홍염이 타오른다.

만화공 백화

적섬.

송곳니를 드러낸 염화의 칼날이 서산 아래로 가라앉는 태양과 푸른 빛무리를 동시에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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