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20화 (320/653)
  • 제320화

    라온은 16강 결투가 모두 끝난 대진표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예상대로네.’

    창첨검 보리니 키튼, 참룡수 가로나, 파랑검 카디스 그리고 대륙십이성 9위에 위치한 타멸의 마도사 론까지. 16강전은 처음 대진표를 봤을 때의 예상과 조금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었다.

    ‘재밌겠어.’

    보리니 키튼에 이어 참룡수 가로나, 카디스 로베르트와도 싸울 생각을 하니 자연스럽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 전에 할 일이 있지 않느냐.

    라스가 얼음꽃 팔찌 위로 꾸물거리며 올라왔다.

    ‘그렇지.’

    라온이 대진표 아래에 있는 데루스의 직속 부하 마티오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 녀석이랑 타천의 기습을 동시에 해치워야 하니까.’

    -대체 그걸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이제 좀 말해보거라.

    ‘잘.’

    -끄으윽….

    라스가 눈을 부라리며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비, 비밀이 많은 놈은 오래 못 사는 법이다! 본왕이 친히 들어줄 테니, 네 계획을 말해보아라!

    녀석은 정말 궁금한지 분노를 꾹 참으며 재차 물었다.

    ‘오래 안 살고, 비밀 많을래.’

    -이 빌어먹을 자식이 끝까지!

    라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냉기를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8강전 치러야 하니까. 나중에 놀아줄게.’

    라온이 얼굴을 들이밀던 라스를 툭툭 쳐냈다.

    ‘아! 라스.’

    라스를 밀어내다가 다시 그의 뒷목을 잡았다. 예측에 확신을 더하고 싶었다.

    -무엇이냐!

    녀석은 삐진 것처럼 고개를 홱 돌렸다.

    ‘전에 타천이 마지막에 쓴 보라색 마법 기억하지?’

    -물론이니라. 그 반쪽이는 마법도 지 같은 걸 쓰더구나.

    라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빛과 어둠의 조화. 혼돈이라 불리는 힘이니라.

    ‘역시.’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막는 방법 알아?’

    -크흥! 네놈의 실력으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무리니라! 결국 본왕의 힘을 빌리려고 했군! 본왕은 건방진 네놈을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느니라!

    라스는 좋은 기회라는 듯 혀를 깔짝이며 히죽였다.

    ‘맞아. 네 말대로 그 혼돈이라는 힘을 내가 막는 건 무리지. 다만 두 힘이 섞이기 전 빛과 어둠일 때 처리하면 되잖아?’

    혼돈이 막을 수 없이 강력한 힘이라면 빛과 어둠이 만나기 전에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어….

    라스는 혀를 내민 채로 입이 떡 벌렸다.

    -그러네?

    녀석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춰 섰다.

    -아, 아니 그걸로는 부족….

    ‘네. 끝.’

    -이, 이 멍청한 놈! 하나를 빠뜨렸느니라! 그 반쪽이가 처음부터 혼돈으로 공격한다면….

    ‘그럴 일은 없어.’

    혼돈이라는 힘은 강력하다. 그걸 그대로 날렸다간 회의장에 있는 육황의 수장들이 바로 튀어나올 테니, 타천은 분명 빛과 어둠을 따로 보낸 뒤 이곳에서 섞을 것이다.

    ‘고맙다. 네 덕분에 확신이 생겼어.’

    라온이 솜사탕처럼 가늘게 올라온 라스의 머리를 두드려 주었다.

    -네, 네놈은 천벌을 받을 것이니라! 하늘이 내리지 않는다면 본왕이….

    ‘마왕 주제에 하늘을 참 좋아한다니까.’

    -그 발언! 인종차별이니라!

    ‘넌 인간이 아니잖아.’

    -그럼 종족차별!

    라스가 빽 소리를 지를 때 사회자가 대련장 위로 올라갔다.

    “그럼 지금부터 마스터급 결투 대련 8강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와아아아아!”

    “드디어 8강이다!”

    “기다리다가 죽는 줄 알았다고!”

    “빨리 좀 시작해! 숨넘어가겠다!”

    사회자는 관객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어 답하고서 대진표의 첫 번째 칸을 가리켰다.

    “8강 1회전은 설화검협 라온 지그하르트 대 대륙십이성 7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창첨검 보리니 키튼입니다!”

    그의 외침에 대련장이 떠나갈 정도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라온! 라온!”

    “설화검협!”

    “창첨검! 창첨검! 창첨검!”

    “설화검협도 생각보다는 대단했지만 창첨검에게는 무리지.”

    “16강 전 못 봤냐? 마티스를 그냥 발라버렸다고!”

    “보리니 키튼이랑 마티스가 같냐? 대륙십이성 7위가 좁밥으로 보여?”

    아직 보리니 키튼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이 많았지만, 16강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라온의 응원도 늘어났다.

    “후.”

    라온은 등 뒤를 밀어주는 듯한 관객들의 함성을 들으며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반대편에서 보리니 키튼이 각이 진 듯한 딱딱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하늘거리는 청발에 눈빛은 창칼처럼 날카로웠으며, 기세는 고고하다. 오래 산 소나무가 인간처럼 화한 듯한 모습이었다.

    ‘마티스보다 한 차원 높은 곳에 있군.’

    중급이었던 마티스 키세름과 달리 보리니 키튼은 확실하게 마스터 상급에 올라서 있었다. 쉽게 보았다간 순식간에 당할 수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대화하는 건 처음이군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보리니 키튼이 앞으로 다가오며 고개를 꾸벅였다. 낮은 목소리에 의기와 예의가 가득 차 있었다.

    “다른 이들은 라온 검사님을 조금 낮게 보는 듯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그가 천천히 기세를 일으켰다. 피부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기파가 발끝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저는 라온 검사님을 지금 이곳에 있는 상대 중 가장 위험한 우승 후보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 말이 진심인지, 보리니 키튼의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다는 의미 같았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지만, 참룡수나, 파랑검 정도는 아니잖아요.”

    “아뇨. 저는 당신이 그들과 동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좀 부담스러운 기대네요.”

    라온이 보리니 키튼이 일으키는 기세에 맞서며 옅게 웃었다.

    쿠구구구구!

    아직 결투가 시작되지도 않았건만, 라온과 보리니 키튼의 기파가 맞물리며 대련장 위로 모래와 돌조각이 떠올랐다.

    “버, 벌써부터 뜨겁네요.”

    사회자가 두 사람의 기운에 식은땀을 흘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8강전부터는 대련장을 보호하는 마법이 두 장 더해집니다! 마음껏 실력을 발휘해주시길.”

    그는 대련장 아래로 내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럼 8강 1회전! 시작합니다!”

    사회자의 손이 하늘에서 대련장을 가리키는 순간 라온과 보리니 키튼의 몸이 사라졌다.

    쩌어어엉!

    둘은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을 뽑은 채 중앙에서 맞부딪쳤다. 발검이 바로 공격으로 이어지는 찰나의 검격이었다.

    우우우우웅!

    검과 검이 서로 이를 드러내며 사납고 예리한 검명을 터트렸다.

    “역시 반응하시는군요.”

    보리니 키튼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해 주시니, 그에 충족해야겠죠.”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광아검을 펼쳤다. 공기조차 갈라버릴 참격이 사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흠!”

    보리니 키튼은 당황하지 않고, 검을 들어 올렸다. 칼날을 두른 강기가 더욱 예리하게 다듬어져서 광아검의 초식에 맞섰다.

    캬아아앙!

    두 번째 격돌 역시 호각. 누구 하나 밀려나지 않는 백중세의 격돌이었다.

    쿠구구구구!

    라온이 왼발 발목에 힘을 주며 제천검을 밀어붙였다. 오러의 날카로움과 강도는 보리니 키튼이 위였지만, 육체 능력에서 차이가 났기에 충분히 그를 짓누를 자신이 있었다.

    치이이잉!

    보리니 키튼은 힘에서 밀린다는 걸 알아차리고 검면을 튕겨내며 뒤로 물러섰다.

    “그런 체형으로 이런 힘은 반칙 아닌가요?”

    그는 손목을 휘돌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충격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라온이 차게 웃으며 발을 굴렀다. 앞으로 나아가며 재차 광아검을 쳐올렸다.

    땅에 달라붙은 뱀이 하강하는 새를 노리고 독니를 드러내는 듯한 검격. 광아검의 독사지련이었다.

    쩌어어엉!

    보리니 키튼은 왼발을 뒤로 빼서 공간을 만든 뒤에 위로 솟구치는 독사지련의 중심을 후려쳤다.

    “음!”

    라온이 눈매를 좁히며 신음을 삼켰다. 강렬한 충격에 팔뼈가 울렸다.

    ‘제대로 찌르는군.’

    광아검은 나름 자신 있는데.

    사람의 빈틈만이 아니라, 검격의 아주 작은 빈틈까지 노리다니, 대륙십이성에 오른 창첨검의 이름은 진짜였다.

    후우웅!

    이번에는 보리니 키튼의 반격이다. 독사지련을 쳐내며 좌상단으로 올라간 검을 그대로 내리긋는다. 빠르면서도 날카로운 검격이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쿠우웅!

    라온이 발목을 비틀었다. 비복근에서부터 끌어 올린 육체의 힘과 단전에서 일으킨 만화공의 열기를 동시에 내질렀다.

    쿠와아아앙!

    화산처럼 폭발하는 열화의 검격과 벼락같이 떨어지는 보리니 키튼의 참격이 격돌했다.

    찌지지지직!

    강기와 강기가 경합하며 시뻘건 스파크가 대련장 전체로 번져나갔다.

    ‘그 와중에 빈틈을 노렸다는 건가?’

    보리니 키튼은 위로 쳐올리는 검격의 빈틈을 노리고 그 위력을 중화시켰다. 어처구니 없는 눈과 예리함이었다.

    “후우.”

    라온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저걸 얻어야겠어.’

    보리니 키튼과의 결투에서 배워야 할 부분을 결정했다. 정확한 빈틈을 노리는 찰나의 판단력과 그 빈틈을 찌르는 예검과 정검의 숙달. 그 셋을 얻기로 마음먹었다.

    -욕심이 과하지 않느냐.

    ‘욕심이 없는 것보다는 나아.’

    -그리드가 네놈을 보면 친구 하자고 달려들겠군.

    ‘호구는 언제나 환영이야.’

    라온이 제천검을 고쳐 쥐고서 미소를 지었다.

    “분위기가 변했군요.”

    보리니 키튼이 눈을 가늘게 뜨며 검을 중단에 세웠다.

    “그래도 방심 따위는 없습니다. 전력으로 가겠습니다.”

    그가 땅을 밀어내며 다가와 검격을 뿌렸다. 목젖을 향해 다가오는 칼날의 섬뜩함에 등골 사이로 소름이 돋아올랐다. 그가 익힌 최상승의 무학 참혈검결이었다.

    고오오오오!

    라온이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다. 일곱 개의 고리가 연속으로 공명하며 세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우!

    보리키 키튼의 검극이 눈에 들어온다. 자그마한 흔들림도 없이 처음에 정한 빈틈을 향해 곧게 나아가고 있었다.

    ‘지금 보이는 건….’

    불의 고리를 통해서도 보리니 키튼의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없으면 만들면 되니까.’

    중심을 낮추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바닥에서부터 솟구치는 냉기. 글래시아의 기운을 담은 설풍검결이었다.

    캬아아아앙!

    설풍검결의 청운련이 보리니 키튼이 일으킨 참혈검술과 비틀리며 맞물렸다.

    라온과 보리키 키튼을 서로를 스쳐 지나가며 눈을 마주쳤다.

    촤아아악!

    보리니 키튼은 재빠르게 발목을 돌려 두 번째 검격을 쏟아냈다.

    라온은 바로 반격하지 않고, 왼발을 앞으로 뻗었다.

    ‘빈틈 세 개.’

    설풍검결의 비틀림이 만들어낸 보리니 키튼의 빈틈은 세 개다. 하지만 전부 진짜는 아니었다. 가짜를 거르고 진짜를 찾아야 했다.

    ‘우측 허리.’

    목과 심장의 빈틈은 찔러달라는 듯 너무 정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보리니 키튼이 저런 급소를 놔둘 리가 없으니, 저건 가짜가 분명했다.

    빠르게 판단을 끝내고 보리니 키튼의 허리를 향해 제천검을 내질렀다. 빈틈에 제대로 꽂히도록 정검과 예검을 조화시켰다.

    “음….”

    보리니 키튼이 내치던 공격을 수비로 돌리며 허리로 향한 검을 막아섰다.

    치이이이잉!

    하지만 그것 역시 설화검격. 흐름을 꺾는 절검의 호흡이 보리니 키튼의 다른 빈틈을 만들어냈다.

    ‘이번에는….’

    라온이 한발 더 나아가며 만화공을 일으키고, 설풍검결을 광아검으로 전환했다. 광아검의 흉폭함에 예리함과 정확함을 담아냈다.

    콰아아아앙!

    목줄 풀린 맹수처럼 사나우면서도 정제된 검격에 보리니 키튼은 반격을 가하지 못하고, 빈틈만을 막아섰다.

    치이이익!

    뒤로 밀려 나간 보리니 키튼이 인상을 찌푸리며 허리를 폈다.

    “조금 전부터 기질 자체가 달라진 느낌이군요.”

    그는 검을 꽉 쥐고서 눈을 가늘게 떴다.

    “꼭 거울을 상대로 싸우는 기분입니다.”

    “저도 빈틈 노리는 걸 좋아해서요.”

    “그럼 누가 더 위인지 확실하게 겨뤄야겠군요.”

    보리니 키튼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보법조차 예리했다. 칼날 같은 움직임으로 후방을 파고들어 왔다.

    “얼마든지.”

    라온이 차게 웃으며 설풍검결을 찔러넣었다. 보리니 키튼 역시 참혈검을 전력으로 전개하며 맞서 달렸다.

    쩌저저적!

    붉고, 푸른 검기가 가라앉는 태양을 갈랐다.

    *     *      *

    부드러운 파도가 출렁이는 백사장.

    수평선을 향해 가라앉는 주홍빛 태양 아래 가면과 투구를 쓴 남자 두 명이 목제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정말 하실 겁니까?”

    두 개의 뿔이 달린 적색 뱀의 투구를 쓴 남자가 저물어가는 태양을 보며 물었다.

    “당연하지요.”

    글렌과 싸울 때보다 더 어려진 미청년의 가면을 착용한 타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위에 올려진 지도를 툭툭 두드렸다.

    지도에서 가리키는 곳은 오웬 왕성의 중심. 그것도 대련장이 있는 곳이었다.

    “훗날 글렌과도 같은. 아니,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싹을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더불어 다른 육황의 미래도 지울 수 있으니 이런 기회는 다시 없지요.”

    “라온 지그하르트….”

    “아, 그러고 보니 적귀사께서도 그에게 당한 일이 있었죠.”

    “제가 아닙니다.”

    “아, 실수.”

    타천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실수라 말했지만, 그의 표정에는 자그마한 미안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의미 없는 일입니다.”

    적귀사가 느릿하게 손을 저었다.

    “그거 다행이군요.”

    타천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시선을 돌렸다. 절혼검은 얕은 수면에 발을 담근 채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후.”

    그는 잠시 절혼검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다가 검지와 중지를 들어 올렸다.

    고오오오오오오!

    두 손가락에서 백광과 흑광이 반짝거리며 솟아올랐다.

    “육황이 회의실에 있다고 해도 대련장에 강자들이 있을 겁니다.”

    “인간은 말이죠. 하나에 집중하면 둘을 못 보는 법입니다.”

    타천이 손가락 위로 떠오른 흑백의 빛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의 싸움이 최고조에 이르면 저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빛과 어둠 따위는 보이지 않지요. 그게 노을에 섞인다면 더더욱.”

    “음….”

    “그럼 인사하시죠.”

    타천이 손을 내리자, 그의 손가락에 어려있던 두 빛이 반원을 그리며 지도 속으로 스며들었다.

    “오늘이 대륙십이성과 라온 지그하르트의 마지막이니까요.”

    아이처럼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지도 속에서 장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     *      *

    캬갸갸갸걍!

    적색 강기의 폭풍 속에서 쇳덩이가 톱날에 긁히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온과 보리니 키튼이 서로를 향해 검격을 쏟아내는 굉음이었다.

    두 사람의 검 위로 송곳처럼 날카롭게 갈린 강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서로의 빈틈을 정확하고 예리하게 찌르기 위해 갈고 닦은 검강이었다.

    쩌저저저저정!

    강기와 강기가 맞닿으며 맹렬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지만, 라온도 보리니 키튼도 물러서지 않았다. 찢겨 나간 상처들이 강기에 지져져 고통이 엄청날 텐데도 상대의 숨통을 끊기 위한 검결만을 몰아쳤다.

    라온의 두 눈동자에 시뻘건 이채가 빛났다.

    ‘우측 어깨, 좌측 무릎.’

    진짜는 무릎.

    빈틈을 보자마자, 진짜와 가짜가 구분된다. 좌측 무릎을 향해 설풍검결을 내쳤다.

    “크으윽….”

    차디찬 검격을 제대로 상쇄하지 못한 보리니 키튼이 두 발 밀려났다.

    쿠우웅!

    라온이 오른발을 앞으로 뻗으며 진각을 밟았다. 대퇴근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힘에 강대한 열기를 담아 회전시켰다.

    만화공 회천. 회전하는 화염의 톱날이 무식할 정도의 힘으로 꺾어 내려갔다.

    콰아아아앙!

    보리니 키튼은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며 대련장의 끝으로 밀려났다. 마법으로 보호되는 대련장에 족적이 남을 정도로 강대한 위력이었다.

    후우우우우욱!

    강기의 폭풍이 그치고,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난다.

    라온의 제복은 곳곳이 찢어져 붉게 물들었고, 보리니 키튼의 갑옷도 찌그러지거나 깨져 피가 흘러내렸다. 둘 다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안색은 더할 나위 없이 밝았다.

    “어어….”

    “누, 누가 일방적이라고 했어! 막상막하잖아!”

    “아니, 지금은 라온이 더 유리해 보이는데?”

    “저게 설화검협의 진짜 무력….”

    “생각해보면 납치당하는 게 당연했지! 10사도랑 멀린이잖아!”

    “그래. 납치 따윈 신경 쓸 게 못 됐어.”

    “생각해보면 설화검협이 잡은 사도만 둘이잖아!”

    관객들은 관객들도 보리니 키튼과 막상막하로 경합하는 라온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놀랐는지 침을 흘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렇게 재밌는 싸움은 정말 오랜만이로군요.”

    보리니 키튼이 살짝 떨리는 손으로 검을 다잡았다. 그는 대련이나, 결투가 아니라 싸움이라고 말했다. 실전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네요.”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교육적인 대련이었어.’

    그와 접근전을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진짜 빈틈과 가짜 빈틈의 구분, 빈틈 중에서도 중요한 곳을 노리는 판단력, 예검과 정검의 숙달까지. 바로 앞에서 가르쳐주는 선생과도 다를 바가 없었다.

    “싸우면서 성장한다는 괴물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눈앞에 보고 있으니 섬뜩하군요.”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보리니 키튼은 인격적으로도 완성된 기사였다. 조롱이 아니라,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아쉽지만 끝을 낼 때로군요.”

    보리니 키튼이 미소를 지었다. 검을 상단으로 올리며 왼발을 뒤로 뺐다. 창수가 중거리에서 적을 노리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오러를 모조리 끌어 올렸다.

    고오오오오오!

    오러가 강해질수록 그의 주변을 휘감은 강기는 가라앉는다. 말 그대로 강기를 끝없이 다듬은 하나의 창. 그 어떤 방패도 찢어발길 기세에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미소를 지었다. 만화공과 글래시아를 동시에 일으켰다. 마나회로에 큰 부담이 가는 운용법이지만, 지금은 그걸 가릴 게 아니었다.

    화아아아아!

    오른손 제천검으로 만화공의 불꽃을 피워내 보리니 키튼을 겨누고 왼손은 허리 뒤편의 진혼검의 검병을 쥐었다.

    쿠구구구구!

    전력을 꺼내놓은 서로의 기파가 맞붙으며 대련장이 지진이라도 난 듯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후우욱.”

    라온이 숨을 들이켜며 입맛을 다셨다.

    ‘뜨겁군.’

    보리니 키튼의 강렬한 시선이 느껴진다. 두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마티오와 마른침을 삼키는 사회자 그리고 모든 관중들의 정신이 고조되는 게 느껴졌다.

    ‘이제 올 거야.’

    이 대련장의 모든 시선과 정신이 집중된 지금이 그놈이 노리고 있던 순간일 테니까.

    찌이이이잉!

    불의 고리와 설화의 감각을 극성으로 운용했다. 시간이 한층 더 느리게 흐른다. 손끝에 닿는 먼지의 무게가 느껴질 정도로 세밀해진 감각으로 천공을 살폈다.

    ‘왔다….’

    극한까지 갈고 닦은 감각이 저 먼 하늘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은밀한 빛과 어둠의 기운을 잡아냈다. 예상대로 놈은 빛과 어둠을 따로 보낸 뒤 섞으려고 했다.

    ‘지금 가야 해.’

    라온이 이를 악물었다. 보리니 키튼에게 집중하던 힘을 한층 더 압축시켰다.

    투우웅!

    제천검을 휘감던 열기가 한순간에 응축된 순간 보리니 키튼이 달려들었다.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공격하는 것 같았다.

    ‘이건 막을 수 없어.’

    여기서 방어했다간 위에서 떨어지는 타천의 기운을 막지 못한다. 뒤섞여서 혼돈이 되어버릴 것이다.

    ‘견딘다.’

    태화보를 밟으며 몸을 비틀었다. 보리니 키튼이 눈을 부릅떴다. 그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검을 빼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푸카아악!

    우측 허리가 길게 뜯기며 시뻘건 피가 터져 나왔다.

    “왜….”

    보리니 키튼이 턱을 파르르 떨었다. 왜 멈췄냐고 묻는 듯했다.

    “방해꾼 좀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라온이 파리하게 웃고서 끌어모은 힘을 터트려 땅을 차올랐다.

    후우우우!

    점차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빛과 어둠의 기운을 향해 나아갈 때 우측 관중석에서 리메르가 튀어나왔다.

    ‘단주님도 기다렸던 건가?’

    그저 도박만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리메르가 미소를 지으며 눈으로 말한다. 네가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럼 다녀와라!”

    리메르가 검을 뽑아 발밑에 대어준 뒤 그대로 쳐올렸다. 그 덕분에 바닥에서 전력을 다해 올라선 것보다 더한 속도로 천공에 도달할 수 있었다.

    파지지지직!

    낮과 밤이 교차하는 노을빛 사이에서 빛과 어둠이 자석처럼 서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두 힘 사이에서 혼돈을 담은 보랏빛 스파크가 튀기기 시작했다.

    라온의 붉은 눈동자에 그보다 더한 뇌광이 번졌다. 제천검에 타오른 화염과 진혼검에서 피어나는 서리가 두 빛을 향해 쏘아졌다.

    콰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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