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19화 (319/653)

제319화

쿠우웅!

들소만 한 체구를 자랑하던 야수연맹의 무인이 까맣게 그을린 채 쓰러지고, 맞은 편에 선 제이나 왕녀가 찬웃음을 흘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익스퍼트 급 4강의 마지막 자리는 발카르 왕국의 제이나 왕녀님이 차지합니다!”

사회자가 대련장으로 올라오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우오오오오오!”

“왕녀님!”

“제이나 왕녀님! 나 죽어요!”

“역시 야수연맹의 상성은 발카르네!”

“저 괴물을 저리 쉽게 쓰러뜨리다니, 미모, 실력 뭐 하나 뒤지는 게 없으시다니까!”

관객들은 제이나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대련장이 떠나가라 환호성을 질렀다.

“이걸로 익스퍼트 급 4강의 자리가 모두 채워졌습니다! 한 자리는 아쉽게도 공석이지만, 그 아쉬움 이상으로 박진감 넘치는 대결을 보았으니 만족하셨을 겁니다!”

사회자는 투혼 넘치는 싸움을 보여주었던 버렌과 루난의 결투를 다시 꺼내고서 내일을 기대하라 말했다.

“흠.”

라온은 대진표를 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

4강의 첫 번째 자리는 비었고, 두 번째는 오웬의 삼왕자 그리어, 세 번째는 마르타. 그리고 마지막이 제이나였다.

지그하르트 검사가 4강의 두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결국 승자는 마르타가 될 테니까.

라온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대련장에서 환호를 즐기는 제이나를 바라보았다.

“윽!”

그녀는 이쪽의 시선을 느끼자마자 어깨를 부르르 떨고서 황급히 대련장을 내려갔다.

-흐음.

라스가 제이나의 등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 싸가지. 네놈에게 목줄 잡히지 않았나?

‘맞아. 그래서 저렇게 눈치를 보는 거잖아.’

세 가지 부탁을 들어준다는 특별 계약서에 사인했기에 제이나의 목줄을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거 이용하면 기권도 가능하지 않느냐?

‘가능하지만 그랬다간 마르타가 날 죽일걸?’

마르타는 아집에 가득 차 있을 때도 정정당당한 승부를 벌이고 싶어했다. 제이나 왕녀를 억지로 기권시키면 난리가 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거 안 해도 우승할 수 있어. 너도 알잖아.’

바로 결승에 진출한 삼왕자보다 조금 불리하겠지만, 결국 승자는 마르타가 될 것이다.

-본왕은 그저 소고기 소녀를 조금 더 좋은 상태에서 싸우게 하고 싶었을 뿐이니라.

‘하여튼.’

라온이 피식 웃었다. 부하를 아끼는 마왕이라니, 매번 느끼지만 여러 가지로 신기한 놈이다.

“이걸로 오늘 진행될 익스퍼트급 결투는 모두 끝났습니다. 하지만 아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마스터급 결투가 시작되니까요!”

사회자가 하늘로 손을 뻗자, 마법사들이 허공에 마나의 선을 그려 마스터급 대진표를 만들었다.

128강이었던 익스퍼트급 대진표와 달리 마스터급은 16강밖에 되지 않았다.

아니, 16명도 대단한 숫자다.

단순히 마스터가 아니라, 마흔이 넘지 않은 젊은 나이의 마스터들만 16명이 모였다는 뜻이니, 육황이라는 거대 단체가 모이지 않았다면 절대 나오지 않았을 숫자였다.

“우오오오오오!”

“파랑검! 파랑검!”

“창첨검! 창첨검!”

“이대로면 둘이 결승에서 붙겠는데?”

“무슨 헛소리야! 용을 찢어버린 가로나가 있는데!”

“흑현갑 마티스 안 보여? 저 남자에게 어설픈 검술을 펼쳤다간 그대로 부러진다고!”

관객들은 각자 본인들이 생각하는 우승자를 말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라온 지그하르트도 괜찮아 보이지 않아?”

“그러게. 익스퍼트 급에서 싸우던 지그하르트 애들을 보니까. 설화검협도 장난 아닐 거 같은데.”

“에이! 그건 아니지! 익스퍼트랑 마스터가 같냐?”

“맞아. 설화검협은 납치당하고, 공주님처럼 구출 받았잖아!”

“납치를 떠나서 실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아래야.”

소수의 관중들이 라온도 우승 후보라고 말했지만, 다른 이들의 이름값에 묻혀서 금세 잠잠해졌다.

라온은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대진표를 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첫 상대는 발카르의 흑현갑 마티스인가.’

마티스는 갑옷이라는 이명답게 방어의 스페셜 리스트로 그가 호위한 마법사들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는 전설을 가진 기사였다.

‘다음은 보리니 키튼이겠군.’

16강에서 흑현갑을 꺾은 뒤 바로 다음에 만나는 상대는 우승 후보라 불리는 오웬 왕국의 보리니 키튼이었다.

보리니 키튼을 꺾은 뒤에 내일 준결승에서는 참룡수 가로나, 결승에서는 파랑검 카디스 로베르트와 싸우게 될 것 같았다.

‘강자들이 앞쪽에 모였어.’

이름난 강자들 대부분이 앞쪽에 몰려 있어서 뒤에 이름이 박힌 카디스 로베르트는 쉬운 상대를 만나게 되었다.

‘이것도 너희들이 만든 건가?’

우연일 가능성도 분명 있지만, 심판 역할을 하는 마티오를 보니 로베르트 놈들이 건드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앙?”

마르타가 대진표를 보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너한테 너무 불리한 거 아니야?”

그녀는 앞쪽에 몰려 있는 강자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뒤쪽은 짠 것처럼 한산하잖아.”

“난 오히려 고마운데?”

라온이 다시 대진표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뭐?”

“강자와 골라서 싸울 기회를 주다니, 고마워서 돈이라도 주고 싶을 정도야.”

본래 친목회에 참여하려고 한 이유도 다른 세력의 강자와 붙고 싶었기 때문인데 자연스럽게 강자들과 싸우는 구도가 만들어져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오늘 마지막 상대도 딱 좋아.’

보리니 키튼은 지금의 자신도 우습게 볼 수 없는 강자. 타천의 공격을 유도하기에 최고의 상대였다.

“진짜 너란 인간은….”

마르타가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관객석을 지켜보던 그녀가 입매를 비틀며 고개를 돌렸다.

“근데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네 승리를 점치는 사람이 별로 없잖아. 우리야 이름값이 바닥이었지만, 넌 왜 무시를 당하는 거야?”

“멀린한테 납치됐었잖아.”

라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납치? 시발! 무슨 개소리야! 10사도랑 멀린이 납치하는데 버틸 놈이 여기에 어디 있다고! 저기 대진표에 있는 사람 중에 도망칠 수 있는 놈은 아무도 없어!”

그녀는 대진표를 가리키며 대신 화를 내주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저들이 보는 건 납치를 당했고, 구출을 받았다는 결과뿐이니까.”

마르타의 말대로 이곳의 누구라도 똑같이 납치당했겠지만, 결국 당한 건 자신뿐이다. 여기서 그런 말을 해봐야 의미 없었다.

“그래도 너희 덕분에 내 이름값도 같이 올라갔어.”

라온이 가라앉은 눈으로 대련장을 보았다.

“이제 내 차례야.”

“윽….”

제천검의 검병을 쥐며 차디찬 미소를 흘렸다. 마르타는 본인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가장 높은 곳에 두고 올게.”

*     *      *

“지루해! 회의 지루해!”

체임버가 회의장 테이블 위에서 발장구를 치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정말이지. 그 주둥아리는 한시를 쉬질 않는군.”

오그람이 체임버를 노려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그럼 이런 대책 회의가 재밌을 줄 알았나?”

“오랜만이라 잊고 있었어. 이럴 줄 알았으면 국왕이나 보낼걸.”

체임버는 발카르의 국왕을 심부름하는 아이처럼 말하며 헤헤 웃었다.

“심심한데 결과가 어떻게 됐나 볼까?”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서 허공에 마나의 선을 이었다.

테이블 위로 대련장에 떠 있던 익스퍼트급 4강 대진표와 이제부터 시작할 마스터 급 대진표가 그려졌다.

“오, 아저씨 손녀랑 우리 공주님이 올라갔네. 너희 셋째는 부전승? 바로 결승이잖아! 행운인데?”

관심 없다는 듯 무시하고 있었지만, 정작 대진표가 떠오르자, 다들 선명해진 눈동자로 대진표를 바라보았다.

“이런 빌어먹을!”

“음….”

오그람과 데루스는 익스퍼트급 4강 대진에 야수연맹의 이름이 없다는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 8강전에서 지그하르트끼리 부딪쳐서 둘 다 탈락한 모양인데?”

체임버는 그 아래의 대진표까지 가져온 뒤 깔깔 웃었다.

“얘들 바보네! 왜 지들끼리 싸워서 양패구상을 하지? 양보하면 되잖아!”

“아니.”

글렌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만족스러움이 깃든 미소를 지으며 버렌과 루난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이거면 됐다.”

“흥. 머리에 검만 박힌 검사들은 이해를 못 하겠다니까.”

체임버가 눈을 흘기고서 마스터 급 대진표를 위로 올렸다.

“어? 여기서도 아저씨 손자랑 우리 애랑 붙네!”

그녀는 마티스의 이름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이걸 어째? 우리 마티스는 이명이 흑현갑인데.”

“흑현갑?”

“검이 아니라 갑. 극강의 강도를 지닌 흑철로 만든 갑옷만큼이나 단단하다는 뜻이지.”

체임버가 마티스 옆에 있는 라온의 이름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마티스는 마스터 상급의 검도 버텨냈던 아이인데, 라온이 그 방어를 깰 수 있으려나?”

“그 둘의 다음 상대는 저희 보리니 키튼 경이로군요.”

레크로스 국왕이 보리니 키튼의 이름을 보며 웃었다. 그의 상대는 다른 이들보다 급이 떨어졌기에 벌써 위로 올라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가 올라와도 재밌겠군요.”

“다 의미 없는 일이다.”

오그람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셋 중 누가 올라와도 결국에는 내일 가로나에게 뜯겨나갈 테니까!”

그는 확신을 담은 눈으로 진한 미소를 흘렸다.

“흐음, 저희 아이는 운 좋게도 대진이 편하군요.”

데루스는 16강 마지막 자리에 위치한 카디스의 이름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이 영감. 지금이라면 취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오그람이 차게 웃으며 턱을 들어 올렸다.

“흑현갑에, 창첨검 그리고 참룡수까지 꺾고 우승을 하겠다? 그 아이가 나름 천재인 건 인정하겠지만 이건 불가능한 일이야.”

그는 안 된다는 듯 손을 저었다.

“검을 뺏기고 창피를 당하기 전에 여기서 물러나.”

“오그람. 못 본 사이에 혀가 길어졌구나.”

글렌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위에 있던 진천검을 더 앞으로 밀었다.

“네 아들에 대한 자신이 그리도 없나?”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지그하르트의 아이들을 믿는다.”

글렌의 담백한 음성에 회의장에 패기가 아닌 따스한 기운이 퍼져 나왔다.

“이야. 아저씨! 못 본 사이에 더 멋있어졌는데!”

체임버가 헤헤 웃으며 글렌의 옆으로 다가갔다.

“차가움 속에 부드러움이 녹아 있는 듯 하군요. 저도 지금의 글렌 님이 더 좋아 보이는군요.”

레크로스 국왕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보기 좋네요.”

데루스가 밝게 웃으며 진천검을 내려보았다. 다만 입매와 달리 그의 눈동자에는 자그마한 웃음기도 비치지 않았다.

*     *      *

“그럼 16강의 첫 번째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 설화검협 라온 지그하르트 대 흑현갑 마티스 키세름! 대련장으로 올라와 주십시오!”

사회자의 부름에 라온이 대련장으로 향했다. 반대편에서 키는 평범하지만, 드워프처럼 단단한 체구의 기사가 올라왔다.

‘기세가 굳건해.’

이곳에 있는 대륙십이성보다 나이는 좀 많아 보이지만, 실력만큼은 그에 밀리지 않았다. 마스터 중급. 제대로 단련한 검기가 느껴졌다.

“두 분 다 준비되셨습니까?”

사회자가 양쪽을 번갈아 보며 눈을 빛냈다.

“예.”

“준비되었소.”

라온과 마티스는 사회자가 아니라,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번째 결투! 시작합니다!”

사회자는 다시 대련장으로 내려가 손을 쳐올렸다.

고오오오!

결투가 시작되었지만 라온도, 마티스도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를 바라보며 고요하게 기세를 드높였다.

‘강하군.’

빈틈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장인이 두드려 만든 방패나 갑옷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못 뚫을 건 아니지만.’

전력을 다해서 만화공의 절기나, 직접 만든 검술을 사용하면 충분히 저 방어를 깰 자신이 있었다.

‘다만….’

그래서는 여기 온 의미가 없지.

이곳에 온 이유는 다른 이들의 검술을 보고 아직 미숙한 광아검과 설풍검결을 발전시키기 위함이다. 이런 좋은 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다.

‘뚫는 맛이 있겠어.’

광아검은 적의 빈틈을 만들어내는 감각검이고, 설풍검결은 적의 흐름과 호흡을 끊어버리는 절검이다.

앞에 있는 마티스는 두 검술을 성장시키는데 더할나위 없이 좋은 상대였다.

‘그건 그렇고 참 더럽게 쳐다보네.’

등 뒤에서 마티오의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방해하지는 않지만, 저 시선만으로도 짜증이 일었다.

‘역시 저건 치워야겠어.’

다음 상대인 보리니 키튼과의 대결에서는 저 시선을 지워버릴 수 있을 거다.

“준비는 된듯하니….”

라온이 다시 마티스에게 집중하며 땅을 박찼다.

“시작해봅시다!”

마티스의 우측으로 파고들어 광아검 백수탄을 내쳤다. 맹수가 사냥감에 송곳니를 박아넣는 듯한 일격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흠!”

마티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검날을 사선으로 들어 올렸다. 굳건한 오러가 숨결처럼 따라붙었다.

쩌어어엉!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튀긴 시뻘건 불똥이 허공을 가득 채웠다.

찌지지직!

라온도, 마티스도 충격파에 밀려나지 않은 채 서로를 향해 검을 밀어냈다.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광아검을 극성으로 끌어냈음에도 마티스의 균형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거대한 바위에 검을 내리친 느낌이었다.

‘보기보다 더 단단해.’

라온이 맞물린 제천검을 비틀어 내린 뒤 광아검 혈아참을 올려쳤다. 본래 내려치는 검격이지만, 숙달된 지금은 어디에서도 혈아참을 펼칠 수 있었다.

화아아아아아!

열화의 기운이 담긴 사나운 칼날이 마티스의 오러를 불태웠다. 하지만 그는 찰나의 순간에 더 짙은 강기를 일으켜 혈아참의 검격을 차단했다.

콰아아앙!

갈라진 강기가 대련장의 구석으로 떨어졌다. 만약 마법으로 보호되는 대련장이 아니었다면 바닥에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야수연맹보다 더한 힘으로, 오웬보다 더 날카로운 검격을 내리치는 19살이라니….”

마티스가 살짝 떨리는 입술을 뗐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납치 따위로 판단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어.”

마티스가 검을 휘돌린 뒤 자세를 다잡았다.

“허나 아직은 아니야. 오늘 승리는 양보할 수 없다.”

“그거야 해봐야 아는 일이죠.”

라온이 자세를 낮췄다. 만화공을 일으키며 태화보를 밟았다. 불의 악마와도 같은 족적을 남기며 마티스의 정면으로 돌진했다.

콰아아아앙!

연속으로 쏟아지는 광아검의 검세가 화염 폭풍이 되어 마티스를 몰아붙였다.

쩌저저저정!

광아검의 공세가 매서워지고 있음에도 마티스는 물러서지도, 밀려나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모든 검격을 막아냈다. 갑옷이라는 이명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무력이었다.

‘이제 바꿀 때로군.’

라온은 글래시아를 운용하며 설풍검결을 펼쳐냈다. 냉기를 담은 바람이 폭포수처럼 떨어져 내렸다.

쩌어어엉!

검술 흐름이 180도로 달라졌음에도 마티스의 방어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열기가 안 되니 냉기인가? 단순하군.”

“단순한지는 끝난 뒤에 말씀하시죠.”

라온이 칼날에 어린 서리만큼이나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땅을 박찼다.

*     *      *

마티스는 끝없이 쏟아지는 라온의 검격을 차단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조잡하군.’

방어를 뚫지 못해서 검술을 바꾼 듯하지만, 처음 보였던 불의 검술보다 훨씬 성취가 떨어졌다.

‘아직은 어린아이라는 건가.’

방어를 깨지 못한다는 다급함에 더 약한 검술을 사용하다니, 실력 자체는 대단하지만, 경험 부족은 어쩔 수 없었다.

‘아니, 당연한 일이지.’

자신이 검을 휘둘러 온 시간은 라온의 나이보다도 많다. 실력만이 아니라, 경험에서 큰 차이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19살인 저 아이가 여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게 대단했다.

‘적당히 끝을 내야겠군.’

미숙한 검술이지만 그 위력만큼은 쉽게 볼 수 없다. 이 이상 충격을 받았다간 다음 전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빠르게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음?’

완벽한 방어로 라온의 검술을 제압한 뒤 반격을 가하려 했지만, 이상하게 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무슨….’

아니, 틈이 보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라온의 검술에 방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쩌어엉!

강대한 충격과 함께 손목이 밀려났다.

‘내가… 밀렸다고?’

하지만 놀랄 시간도 없었다. 라온의 검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쩌저저저정!

검과 검이 연달아 맞부딪치며 팔이 울리고, 다리가 휘청였다.

‘여기서 성장했다는 건가?’

힘이 더 강해진 게 아니다. 검술의 성취가 어처구니가 없는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너, 너 대체….”

“아직입니다. 끌어올리려면 멀었어요.”

라온은 비웃음이나, 가벼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진중한 눈빛. 지금 이 순간 온 정신을 집중하여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쿠우우웅!

마티스가 검면을 비틀어서 중정검의 혈철궁을 만들었지만, 냉기에 휘감긴 라온의 검술은 오러의 흐름을 가르고 내부에 강대한 충격을 일으켰다.

“크읍!”

참으려고 했지만 뼈가 울리고,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에 입술을 뚫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 자식은 대체 뭐지?’

분명 어설펐다. 자신에게 절대 통하지 않을 검술이었는데, 어느새 초식과 오러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방어하기 버거운 검술이 되었다.

‘이대로라면 아무것도 못 하고 밀릴 거야!’

이렇게 버티기만 하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진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크아아아!”

마티스가 기합을 내지르며 진각을 밟았다. 땅을 가리킨 검날을 위로 치켜올리며 오러를 모조리 폭발시켰다.

쿠와아아아아!

방어가 곧 공격. 방어 자세를 취한 검에서 극강의 파동을 일으키는 중정검의 절기 중류포가 쏟아졌다. 섬광처럼 나아간 강기의 나선이 라온의 복부를 노렸다.

쿠우웅!

라온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빠르게 파고들어 두 손으로 잡은 검을 내리쳤다. 칼날 위에서 피어나는 푸른 벼락이 중류포와 맞부딪친다.

찌지지지직!

그가 쥐고 있던 칼날의 냉기가 빛무리처럼 번지며 중류포가 굴절되며 꺾여나갔다.

‘이 미친!’

흐름을 비틀었어!

이제 알겠다. 왜 이렇게 방어가 힘들었는지, 왜 점점 놈의 검세를 막기 어려웠는지.

라온의 검술은 그저 강력한 게 다가 아니라, 이쪽의 흐름을 어그러뜨리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세상에 흔하지 않은 절검의 능력이었다.

“젠장!”

마티스가 뒤로 물러서며 중정검의 방어 초식을 펼쳤지만, 라온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짓쳐들어와 완성되지 않은 방어를 깨부수고 왼 주먹으로 복부를 후려쳤다.

뻐어어억!

흑철로 만든 갑옷이 찌그러지고, 복부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일어났다.

“꺼어억….”

숨을 쉬기는커녕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이 무슨 힘이….’

복부에 오러를 집중해서 방어했음에도 머리가 멍해질 정도의 고통. 주먹으로 제일이라는 야수연맹의 마스터보다 더한 위력이었다.

터어어억!

라온은 틈을 놓치지 않고, 검면으로 마티스의 뒷목을 가격했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대련장에 쓰러졌다.

“수고하셨습니다.”

라온은 당연하다는 듯한 여유로운 자세로 마티스에게 목례를 취했다. 제복에 묻은 먼지 조금. 그게 흑현갑이라 불리는 발카르의 마스터를 쓰러뜨린 대가였다.

….

관객도, 심판도, 사회자도 아무말도 못한 채 멍하니 대련장의 라온만을 바라보았다.

“내,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흑현갑 마티스가 저렇게 쉽게?”

“아니, 압도하는 건 흑현갑이었잖아.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야?”

“거, 검술이 조잡해 보였는데….”

“싸우면서 검술이 발전했어.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관객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넋이 나간 표정으로 헛바람을 흘렸다.

“믿을 수가 없군….”

“마티스의 방어를 저런 식으로 깨는 건 처음 봐.”

“실력이 발전한 거 맞나? 숨기고 있던 거 아니야?”

대기자들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처, 첫 번째 대결의 승자는 라온 지그하르트 검사입니다! 상처 하나 없는데, 이걸 어렵게 이겼다고 해야 할지, 가볍게 꺾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사회자가 목소리를 떨면서 라온의 승리를 외쳤다.

라온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서 대련장으로 내려갔다.

“다음 시합은 창첨검 보리니 키튼 경 대 철심창 그라톤 보렌 경입니다!”

두 번째 대결을 치를 무인들이 대련장에 올라왔음에도 관객들은 여전히 라온의 전투만을 떠들어댔다.

라온은 아직도 열기가 가시지 않은 대련장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타천은 다음을 노리겠군.’

8강 전 상대는 지금 대련장에 올라간 보리니 키튼이 될 테고, 첫 번째 결투처럼 쉽게 끝나지 않을 거다.

‘놈에게는 최고의 기회라는 뜻이지.’

강자끼리의 맞대결은 본인들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조차 집중시킨다. 즉, 기습하기에는 최고의 기회. 타천이 이곳에 있는 모두를 날려버릴 순간을 놓칠 리가 없었다.

‘물론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야.’

라온이 찬 미소를 흘리며 두 번째 결투의 시작을 지켜보았다.

‘네 기습은 내가 잘 이용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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