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7화
라온은 사방에서 쏘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차게 웃었다.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있군.’
광풍단이 입장할 때 내뿜었던 광기에 잠시 위축되었지만, 관객들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무시가 담겨 있었다. 나이, 경험, 명성을 따지며 광풍단 검사들을 얕잡아보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해.’
광풍단은 다른 세력의 무인들보다 어리다. 이곳에서만큼은 최연소. 나이의 차이만큼 수련한 시간이 다르기에 저들이 광풍단을 만만하게 보는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나이가 다가 아니지.’
경험의 격이 다르니까.
광풍단이 겪은 실전과 훈련은 그 어떤 세력의 경험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들은 일이 년 정도의 차이라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수라장을 헤쳐왔다.
-이제 네놈이 무서워지려고 하느니라.
라스가 얼음꽃 팔찌 위로 올라와서 눈매를 찡그렸다.
-본왕도 부하들을 편하게 두지 않는 편이지만, 네놈 정도는 아니니라. 마계에서 부하를 가장 험하게 다룬다는 엔비 놈도 너를 보며 혀를 내두를 것이니라!
이틀 동안 광풍단의 수련을 보았던 라스는 겁에 질린 것처럼 턱을 떨었다.
‘그래?’
라온은 헛바람을 흘리는 라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라스가 질릴 정도의 훈련을 했는데 져서는 안 되지.’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가문에서 했던 훈련들보다 강도를 높였음에도 광풍단은 한 명도 낙오하지 않고, 몸과 정신 아래에 가라앉은 잠재 능력을 끌어올렸다.
광기를 두르고, 전력을 다 끌어낼 수 있게 된 광풍단을 우습게 보았다간 단숨에 승패가 결정 날 것이다.
“흐음.”
라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광풍단의 눈을 보았다. 노란 광기가 눈동자의 중심에 아릿하게 박혀 있었다.
‘저 광기가 향하는 게 나라니 이거 웃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
광풍단은 곧 싸우게 될 육황의 무인들이 아니라, 이틀 동안 고생시킨 자신을 후려 패고 싶은 것 같았다.
“지금부터 대진표를 공개하겠습니다!”
대련장에 올라간 사회자가 손짓을 하자, 마법사들이 허공에 익스퍼트 급 대진표를 공개했다. 참여자의 숫자가 많았기에 128강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만들어졌다.
“우와아아아아!”
“삼왕자님은 여섯 번째네! 야수연맹이랑 싸우신다!"
“제이나 공주님! 꼭 이겨주세요!”
“이름값이 장난이 아니네. 재미없어 보이는 게 하나도 없어!”
대부분 명성 있는 무인과 마법사들이었기에 관객들은 환호를 지르며 대회의 시작을 기다렸다.
‘우리 쪽 첫 대결은….’
라온은 환호 속에서 가장 먼저 싸우는 광풍단의 이름을 찾았다.
‘버렌이로군.’
광풍단의 맏형 역할을 하는 버렌이 처음이라니, 만족스러운 대진이었다.
‘그리고 상대는 리켈 로베르트인가.’
로메르트 가문의 직계는 아니지만 화려한 검술로 나름 명성을 알린 20대 초반의 검사다. 본래의 버렌이라면 버거운 상대지만, 이번 훈련을 통해 성장했으니,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어….”
“저, 저 사람은 나보다 훨씬 세 보이는데….”
“으음….”
“마, 망했다.”
대진표를 보고 본인의 상대를 확인한 광풍단 검사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미 패배라도 한 것처럼 여기는 관객들의 반응에 위축된데다, 명성을 떨치는 선배들에 비해 본인들이 이름값이 초라하다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들 주목.”
라온이 손뼉을 쳐서 광풍단의 시선을 모았다.
“너희도 알고 있겠지? 지금 이 대련장 안에서 지그하르트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없다는 걸.”
“으음….”
“젠장….”
광풍단이 이를 갈았다. 반쯤 미쳐있는 상태에서도 자존심이 상한 듯한 표정이었다.
“화낼 게 아닌데?”
라온이 분노하는 광풍단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이틀 만에 볼이 홀쭉해진 버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너희를 위한 무대야.”
양팔을 펼쳐서 사위에 가득한 구경꾼들을 가리켰다.
“너희를 만만하게 보고 벌써 패배를 점치는 저 건방진 얼굴들을 경악으로 물들게 만들면 재밌지 않겠어?”
“아!”
“그건….”
그 말을 들은 광풍단 검사들의 눈동자에서 광기를 지우며 열기가 타올랐다. 그들은 관객들을 보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맞아. 재밌겠네.”
눈 밑이 시꺼매진 마르타가 관객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 멍청이들의 입이 떡 벌어지는 꼴을 보면 오늘 저녁 반찬이 필요 없겠어.”
“꼭 보고 싶네.”
“심장 떨리는데?”
광풍단은 광객들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광기보다 흥분이 조금 더 떠오른 듯한 표정이었다.
‘온도가 조금 부족해.’
지금 상태도 나쁘지 않지만, 제대로 된 활약을 보이려면 약간의 광기가 더 필요해 보였다.
“내가 보기에는 너희들 모두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를 만났거든.”
라온이 광풍단을 보며 턱을 치켜올렸다.
“광풍단끼리 만나는 게 아닌 이상 혹시라도 졌다가는….”
광풍단 이상의 광기가 타오르는 눈동자로 입매를 말아 올렸다.
“가문으로 돌아가는 대로 지금까지 했던 훈련을 한 달 동안 진행한다.”
“끄윽!”
“꺼억….”
“크흡….”
광풍단이 숨이 멎은 듯한 신음을 흘렸다. 그들의 눈동자에 가라앉았던 광기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쿠구구구구!
라온은 살기보다도 섬뜩한 광기를 마주하며 미소를 지었다.
“딱 좋은 온도야.”
* * *
“오웬 왕국 찰리 위빈의 승리!”
“우와아아아아아!”
발카르의 기사를 상대로 승리한 오웬 왕국의 젊은 기사가 두 손을 올리며 관객들의 환호에 보답했다.
잠시 승리의 순간을 즐긴 그는 미소를 간직한 채 대련장을 내려갔고, 쓰러진 기사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버렌 지그하르트 그리고 리켈 로베르트!”
“우오오오! 지그하르트 대 로베르트야!”
“검술 가문의 대결!”
“그래도 승부는 쉽게 나지 않을까?”
“그렇지. 리켈은 한참 전에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른 검사잖아. 백수검이라는 이명도 있고.”
관객들은 시작도 전에 리켈의 승리를 점쳤다. 지금까지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 대부분 승리했기에 그들의 판단에는 거침이 없었다.
“후우.”
리켈 로베르트는 대련장으로 올라와 짧게 숨을 뱉었다.
‘버렌 지그하르트라.’
가볍겠군.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는 19살짜리 꼬마였다. 그래도 직계라고 무력단체의 조장을 꿰찼지만, 자신의 상대는 절대 아니었다.
‘어차피 지그하르트야. 글렌 하나밖에 없는 곳이니까.’
최근 글렌이 백혈교주와 타천을 압도하기 전까지 지그하르트는 육황에서도 말석으로 치던 가문이다. 글렌이 강한 것이지, 다른 이들이 강한 게 아니기에 볼 것도 없었다.
‘빠르게 끝내는 게 좋겠지.’
토너먼트였기에 지그하르트의 애송이 따위에게 시간과 체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끝낸 뒤 다음 전투에 대비해야 했다.
저벅.
반대편에서 버렌이라 불린 아이가 올라왔다. 이름을 부른 지 한참 지났는데, 지금 올라오는 것을 보니 긴장이라도 한 것 같았다.
‘긴장까지 했다면 더 쉽겠는데.’
옅은 미소를 지으며 올라온 버렌을 살폈다. 가는 푸른 머리카락에 눈빛은…. 저놈 눈빛이 왜 저래?
‘아예 색이 변했는데?’
버렌의 눈동자에서 입장할 때보다 더 지독한 광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대련이 아니라, 실전. 그것도 목숨이 경각에 담긴 실전을 치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 야, 양쪽 다 준비되셨습니까?”
사회자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마른침을 삼켰다.
“예.”
버렌은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준비됐소.”
눈매를 좁힌 리켈 로베르트까지 고개를 끄덕이자, 사회자가 대련장 아래로 내려갔다.
“그럼 여섯 번째 대결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가 손을 내리자마자 리켈 로베르트가 땅을 박찼다.
‘최대한 빠르게!’
버렌의 눈빛에 등골이 오싹했다. 단번에 끝내기 위해서 좌측으로 짓쳐 들어 검을 내리쳤다. 파도를 본뜬 백파검의 강렬한 검격이 대각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쩌어엉!
기습이 무색하게도 버렌은 가볍게 검을 틀어서 백파검의 초식을 쳐냈다.
“그래봤자다!”
리켈이 손목을 휘돌리며 두 번째 검격을 쏘아냈다. 조금 전보다 더 강한 오러와 흐름이 어린 백파검의 백수호영이라는 초식이었다.
치이이잉!
하지만 이번에도 리켈의 검격은 버렌의 방어를 뚫어내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제법이군. 한 수는 있다는 건가?’
어리다고 해도 지그하르트의 직계. 가볍게 봐서는 안 될 모양이다.
고오오오오!
리켈이 차분히 호흡하며 단전의 오러를 절반 이상 끌어 올렸다.
“이것도 한번 막아 봐라!”
좌측으로 뛰어들어 검을 내리쳤다. 더욱 빠르고, 강맹해진 검격이 버렌의 허리를 노렸다.
“흐읍!”
버렌은 조금 전과 격이 달라진 검을 보고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옆으로 살짝 물러선 뒤 차가운 바람이 이는 검격을 쏘아냈다.
쩌어어엉!
검술의 위력은 호각. 버렌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은 채 리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리켈이 턱을 떨었다. 오러를 6할 이상 끌어냈음에도 버렌이라는 놈은 밀려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버렌의 입에서 탁한 연기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절대 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 특히 당신들한테는….”
그가 이를 바득 갈고서 뛰어들었다.
“건방진 자식!”
리켈이 오러를 전력으로 끌어내며 검을 내질렀다. 은빛 칼날이 물결치며 강대한 검기의 파도를 일으켰다.
‘이건 못 막을 거다!’
적이 회피하거나 방어할수록 그 힘과 변화가 강해지는 백파검의 절기였다. 다음 상대를 위해 아껴둔 초식이지만, 지금은 가릴 때가 아니었다.
“이제 끝… 어?”
리켈이 눈을 부릅떴다. 버렌은 피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강대한 검기를 뚫고 돌진했다.
“어, 어떻게 검술의 파훼법을!”
“파훼법? 그딴 건 몰라!”
버렌의 입술에서 광기에 찬 기합이 터져 나왔다.
“지면 죽는단 말이다!”
그와 함께 검이 떨어져 내린다.
콰아아아앙!
그의 검에 실린 어마어마한 의지와 기운이 리켈의 절기를 깨부수고 그의 어깨에 박혔다.
“끄헉!”
리켈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검을 놓친 그는 파도를 맞은 돛단배처럼 흔들리는 눈빛으로 버렌을 올려보았다.
“어. 어어?”
“리켈이 졌어….”
“이, 이게 말이 돼?”
“나이 차이가 한두 살 나는 것도 아니고!”
“뭐, 이런….”
관객들은 상상도 못 한 장면을 목격하고 턱을 파르르 떨었다. 쩍 벌어진 그들의 눈동자는 버렌만을 바라보았다.
“너, 너는 대체….”
리켈이 손을 떨며 버렌을 불렀지만, 그는 본인의 손만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게….’
라온의 훈련을 받다가 죽기 싫어서 광기에 휩싸인 채로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어느새 리켈이 쓰러져 있었다.
‘내가 어떻게 이긴 거지?’
리켈은 꽤나 이름을 알린 검사다. 이번 대회에서도 우승 후보는 아니지만 8강까지는 가볍게 갈 사람이라 여겨졌던 사람을 너무 쉽게 꺾어버렸다.
“버, 버렌 지그하르트의 승리!”
사회자의 승리 선언을 들으며 버렌은 뒤를 돌아보았다. 라온이 잘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 또 우리한테 뭐한 거야!’
이 마왕 자식아!
* * *
콰아아앙!
마르타는 버렌과 달리 처음부터 상대에게 달려들어 검격을 내리쳤다. 야수연맹보다도 사나운 공격에 방어로는 제일이라는 발카르의 기사가 갑옷이 찢긴 채 바닥을 굴렀다.
“이걸로 10전 10승인가.”
마르타까지 승리한다면 광풍단은 10번의 대결에서 10번 모두 승리한 격이 되었다. 지금까지 전부 승리한 건 광풍단이 유일했다.
“이거 맞아?”
“과, 광풍단이 이렇게 셌다고?”
“아직 어린 애들인데 어떻게….”
“이, 이런 말이 좀 그렇지만 지그하르트 검사들 미친개 같지 않아?”
“그러니까. 광풍이 아니라, 광견….”
관객들은 이제 헉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입술을 떨고 있었다.
-흐음.
라스가 기사의 흉갑을 갈라버린 마르타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본래 수련과 싸움을 통해 성장한 힘은 바로 실력으로 전환되지 않고, 육체와 정신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가 천천히 떠오르지.
‘맞아. 무력의 성장 방식은 계단형이니까.’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처럼 능력치가 있는 게 아니라면 대부분 무인들의 성장은 계단형이다. 바로바로 오르는 게 아니라, 적응하는 시간이 있어야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네놈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계단에 억지로 석고를 발라서 끌어올렸다. 다른 사람들은 알면서도 하기 힘든 일인데, 이 지독한 놈….
‘내가 지독한 게 아니라, 애들이 잘 따라와 준 덕분이지.’
실력을 끌어내는 건 교관만 독하다고 되는 게 아니다. 광풍단 검사들 모두가 따라와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잘 따라와? 다 죽을 뻔했는데?
라스가 턱을 떨며 아직 대련장에 있는 마르타를 보았다.
-소고기 소녀가 원래 사납기는 하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저게 광견이지 인간이냐고!
녀석의 말에 대련장을 보았다. 승리했음에도 마르타의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샛노랗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딱 좋네.’
라온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인간에게는 약간의 광기가 필요하거든.’
-약간?
라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건 약간이 아니라, 그냥 광녀가 아니더냐!
* * *
오웬 왕궁 최상층.
본래 왕실에 관련된 중요 안건을 논하는 회의장에 다섯 명의 초월자가 모였다.
“오늘 4강까지 진행된다고 했던가?”
영화의 대마법사 체임버가 본인의 적발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입맛을 다셨다.
“예. 내일 준결승과 결승이 진행될 겁니다. 저희도 그곳에 있겠지요.”
데루스가 옅은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투 따위 해봐야 의미 없는 일이다. 익스퍼트고 마스터고 가릴 것 없이 전부 우리 애들이 전부 올라가 있겠군.”
야왕 오그람이 테이블 위에 있던 술잔을 단숨에 피운 뒤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리 쉽지 않을 거요. 다른 이들이라고 놀고 있던 게 아니니까.”
레크로스 국왕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의 눈빛에서도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너희 옛날부터 우리 밥집이었잖아.”
체임버가 오그람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이번에도 탈탈 털리는 거 아니야?”
“그 주둥아리 닫아라.”
오그람이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가루로 만들고서 눈을 부라렸다.
“저희 검사들도 쉽게 밀리지는 않을 겁니다.”
데루스가 옅은 미소를 짓고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최근에 깨달음을 얻은 친구들이 좀 있거든요.”
“깨달음? 어설픈 깨달음으로 찌르는 꼬챙이 따위는 단련된 육체를 뚫어내지 못해.”
오그람이 데루스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 잘난 육체는 매번 우리 마법에 뚫리더만.”
체임버가 오그람을 보며 킥킥 웃었다.
“너는 닥치라고!”
상성 상 밀리는 건 사실인지 오그람은 체임버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마스터 결투에서는 자신 있습니다.”
데루스의 바다처럼 맑은 눈동자에 확연한 신뢰가 비쳤다.
“파랑검을 말하는 것이겠구려. 확실히 그의 성장은 눈이 부셨지. 다만….”
레크로스 국왕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보리니 키튼 경도 새로운 경지에 올랐소. 그 둘이 붙는다면 재밌는 대결이 되겠소.”
“흥. 그 꼬맹이들은 나름 괜찮더군. 하지만 가로나의 손에 잡힌다면 걸레가 쥐어짜이듯 사지가 분질러질 거다. 놈은 드레이크를 맨손으로 찢어버렸으니까.”
오그람도 자신 있다며 솥뚜껑만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나이를 먹어도 똑같네. 다들 질리지도 않나.”
체임버가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침묵을 유지하는 글렌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저씨는 어때? 광풍단이라고 하던가? 그 아이들이 어디까지 올라갈 거라 생각해?”
“…….”
글렌은 관심 없다는 듯 대답하지 않고 턱을 괸 채 가만히 있었다.
“하여튼 재미없다니까.”
체임버가 짧게 혀를 차고 고개를 돌렸다.
“당연하겠지. 승산이 없다는 건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오그람이 글렌을 보며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마스터 결투에 나가는 라온이라는 아이도 납치당했던 녀석이잖아. 무인이 납치라니 나라면 혀 깨물고 죽었다. 4강에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단 꼬마는 하나도 없겠어. 생긴 것들도 어리숙하잖아.”
“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멀린과 10사도라면 누구도 빠져나가기 쉽지 않아요.”
데루스는 글렌의 편을 들어주며 입맛을 다셨다.
“물론 지금의 설화검협이 4강에 오르기는 조금 힘든 것도 사실이지요. 몇 년 뒤라면 모르겠지만….”
“커흠, 제 생각은 조금 다르지만, 대결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십시다.”
레크로스 국왕이 손을 저으며 뒤쪽을 보았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서류를 가지고 와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4강? 개소리들을 하는군.”
육황의 수장들 앞에 서류들이 놓이고, 시종들이 모두 떠났을 때 글렌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라온과 광풍단은 나이를 초월하는 경험을 쌓았다. 한 번의 패배를 경험한 아이들의 의지는 이전보다 더 두껍게 타오르고 있지.”
살기가 담긴 듯한 그의 서늘한 목소리에 다른 수장들의 입이 꾹 다물렸다.
“무력으로도, 정신으로도 절대 밀리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렌의 섬뜩한 시선에 수장들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우리 아이들이 가장 귀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