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5화
-크으으으!
라스가 들뜬 신음을 흘렸다.
-끝내주는군. 입안에서 맛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느니라!
‘그거 다행이네.’
라온이 다 비운 접시 위에 포크를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이게 음식이고, 이게 예술이니라! 요즘 것들은 레시피대로 만들기만 하지. 그 안에 정성과 철학을 담을 줄을 모르느니라.
음식을 만들 때 철학까지 담아야 하다니, 요즘 셰프들은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더 가져오거라! 아직 본왕은 배가 고프니라!
라스는 이미 빵빵해진 솜사탕 배를 두드리며 연회장 외곽에 있는 뷔페를 가리켰다.
‘이게 10그릇짼데?’
-고작 10그릇이니라!
‘에휴, 끝이 없네.’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뷔페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또 쳐다보는군.’
데루스의 뒤에 선 마티오의 시선이 느껴진다. 조금 전까지 자연스럽게 봤다면 지금은 노골적인 눈빛이다. 이쪽의 반응을 보기 위한 시선이었다.
“음?”
라온은 자연스럽게 마티오를 돌아보았다. 그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렸다.
‘이게 가장 좋지.’
상대가 강하게 쳐다보는데 모른 척하는 건 악수다. 의심하는 게 아니라, 왜 쳐다보는지 궁금하다는 반응을 하는 게 가장 좋았다.
‘멀린이 큰 도움이 됐네.’
멀린이 아니었다면 마티오의 시선 때문에 실수 하나는 했을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의심을 벗어난다면 그녀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끄으윽….
라스가 이를 바득 갈면서 단상 위에서 와인을 즐기는 데루스를 노려보았다.
-네놈의 양이 적은 것도 다 저 멀대 놈 때문이니라! 음식의 원수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느니라!
녀석은 데루스에게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아무래도 도와준다는 말은 진짜인 듯싶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저기 있는 파이를 좀 담아봐라. 블루베리가 본왕을 유혹하고 있느니라.
라온은 피식 웃고서 음식을 담은 뒤에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다.
“그거 가지고 돼? 팍팍 좀 먹어.”
“이거 11그릇짼데.”
“고작 11그릇이지.”
마르타가 요리가 담긴 그릇을 보고는 라스와 같은 소리를 하며 눈매를 좁혔다.
“너야 그렇다 치고 다른 녀석들은 오지를 않네.”
그녀의 말대로 루난은 발에 못을 박아놓은 듯 아이스크림 코너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버렌은 오웬의 기사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알아서 하겠지.”
라온은 손을 젓고서 파이를 한입 물었다. 바삭한 시트지 사이에 스며든 블루베리의 달콤함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크으으으! 파티쉐의 정성이 가득 들어간 맛이니라! 본왕의 성에 데리고 가고 싶도다.
만족해하는 라스를 보다가 눈을 내리감았다.
20년이 지났어도, 환생까지 했어도 눈만 감으면 그 시절이 떠오른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암살 기술을 배웠고, 훈련 때는 한 달 넘게 제대로 자지도 못한 채 사냥개나 선배 암살자에게 쫓겼으며, 부모에게 사랑을 받을 나이에 단검을 꼬나쥐고 임무에 나갔던 전생.
그 악독한 일들을 명령한 건 데루스 로베르트였지만, 실행시킨 건 음지의 집사 마티오였다.
어린 시절에는 폭력으로 협박했고, 세뇌에 당한 이후에는 자유로 협박했던 마티오의 기계 같던 얼굴이 떠올랐다.
‘놈도 살려둘 수는 없지.’
복수의 대상은 데루스 로베르트만이 아니라, 그가 일궈놓은 음지의 세력도 포함이다. 놈들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부숴버릴 것이다.
‘다만 지금은 무리야.’
지금 마티오의 경지는 로엔에게도 밀리지 않는 수준이고, 암살 기예를 익혀서 상대하기는 더 까다로운 놈이었다.
‘지금 최선은 놈의 기운을 파악해두는 것.’
라온은 마티오의 시선을 이용하여 그가 가진 기운을 탐색하는 데 주력했다. 불의 고리까지 운용하여 놈의 기운을 느끼려 할 때 라스의 시선이 뒤쪽으로 홱 돌아갔다.
-둘이 더 왔구나.
라스의 중얼거림과 함께 외부가 분주해졌다.
쿠웅!
잠시 후 연회장 밖에 있던 기사들이 창으로 바닥을 내리찍는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영화의 대마법사 체임버 님과 발카르의 영웅분들이 입장하십니다!]
그 외침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지금 도착했는지 예복이 아니라 마법사들은 로브를, 기사들은 갑옷을 두른 채 연회장에 입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입장했지만 모두의 시선을 끄는 건 그 중심에 선 붉은 단발의 아름다운 여성이다. 그녀는 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당당한 걸음으로 연회장의 중심을 걸었다.
젊디젊은 외모였지만 그녀에게서는 바다를 담아낸 듯한 거대한 마나가 출렁이고 있었다.
“나 왔어!”
적발의 여성은 단상 위에 있는 육황의 수장들에게 손을 흔들고서 활짝 웃었다.
‘이 여자가 영화의 대마법사 체임버.’
대륙에서 딱 세 명만 있다는 대마법사 중 한 명으로 발카르의 왕실마법사단장을 맡고 있는 초월자였다.
‘나보다도 어려 보이는군.’
본래 강할수록 노화가 느려지지만, 체임버는 그 경우가 심했다. 현재 나이가 오웬 국왕이나, 데루스보다도 많을 텐데 겉으로는 20대 극초반으로 보였으니까.
“진짜 글렌 아저씨도 왔네?”
체임버는 글렌을 아저씨라 부르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 가벼운 입은 여전하군.”
“그렇지. 뭐.”
글렌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체임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글렌의 옆자리에 앉았다.
“하.”
라온이 입을 떡 벌렸다. 글렌에게 아저씨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존재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초월자들은 하나같이 이상해.’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온 자들을 살폈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역시 왔군.’
발카르의 왕녀 제이나는 당연하게도 연회에 참석해 있었다.
‘내가 오는 줄 몰랐나 본데.’
알았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테니, 자신이 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듯싶다.
“흡!”
체임버만큼이나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가던 제이나가 라온과 눈을 마주치고서 짧은 비명을 질렀다.
“제이나?”
“왕녀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제이나를 바라보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손을 부르르 떨고서 처음과 달리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며 걸어갔다.
‘이득이 하나 더 늘겠는데.’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싸가지 왕녀에게서 무엇을 얻을지를 생각할 때, 입구에서 사나우면서도 강대한 기파가 치솟았다.
‘그러고 보니….’
라스는 분명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고 말했다.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 아직 소개를….”
“그딴 건 필요 없다.”
바닥이 부서질 듯한 울림과 함께 상의 없이 코트만 입은 거한이 안으로 들어왔다. 키는 2m가 넘어 보였고, 눈매는 맹수처럼 부리부리했으며,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굳건한 기세를 피워냈다.
‘야수연맹주 야왕 오그람!’
맹수와도 같은 사나움과 예의 따위는 가져다 버린 태도 그리고 비룡의 코트에 박힌 사자의 문양을 보면 서쪽의 수많은 부족들을 하나로 통일한 야수연맹의 맹주. 야왕 오그람이 분명했다.
고오오오오!
그에게서 뿜어지는 야성적인 기파에 연회장이 다시 한번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글렌 지그하르트.”
오그람은 다른 무엇도 보지 않은 채 단상으로 다가가 글렌의 앞에 섰다.
“오랜만이로군. 오그람.”
글렌은 침착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거만한 얼굴은 그대로인가.”
“네 건방진 눈빛도 똑같구나.”
“크하하하!”
오그람이 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도 안 변했군. 남들이 한물갔다고 할 때도 난 믿지 않았어.”
그는 단상 위로 뛰어올라 데루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체임버나 오그람의 특이한 등장에도 글렌이나, 데루스, 레크로스 국왕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려니 하는 느낌이었다.
‘육황 중 다섯이라.’
한 명만 움직여도 대륙이 들썩이는 여섯 명의 초월자가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연회장이 진동이 이는 것 같았다.
-재밌구나.
라스가 다섯 명의 초월자를 보며 히죽 웃었다.
-인간 주제에 저런 힘들을 쌓다니, 그 짧디짧은 생에 비하면 너희들의 가능성은 인정해줄 만하구나.
녀석은 감탄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라….’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발카르 왕국과 야수연맹 쪽 사람들을 살폈다.
‘대륙십이성도 하나씩 왔군.’
발카르 쪽에도, 야수연맹 쪽에도 대륙십이성에 올라가 있는 천재들이 하나씩 와 있었다.
‘얻어갈 게 늘었네.’
새로운 인물들의 등장으로 친목회에서 얻어가야 할 것들이 더 많아졌다. 특히 최강의 육체를 지녔다는 야수연맹 쪽의 무학은 꼭 보고 싶었다.
-음식이나 더 가져다 먹어라! 사람이 더 늘었으니, 얼마 못 버틸 것이니라!
‘음?’
라스의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발카르 왕국의 마법사와 기사들은 자리에 앉아서 가볍게 식사를 즐겼지만, 야수연맹의 무인들은 라스의 말대로 음식을 거덜 내고 있었다.
-빨리!
‘에휴.’
마음껏 먹어주겠다고 약속을 했기에 뷔페 쪽으로 움직이려 할 때 단상 쪽에서 초월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재밌겠네. 난 찬성.”
데루스의 말에 체임버가 손을 들어 올리며 발장구를 쳤다.
“상관없다. 우리 아이들이 네놈들의 보물을 모조리 쓸어가겠군.”
오그람은 돼지 다리를 통째로 씹으며 히죽 웃었다.
“그럼 결정되었군요.”
데루스가 다행이라는 듯 두 손을 맞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레크로스 전하께서 말씀해주시죠.
그는 중앙에 앉아 있는 레크로스에게 미소를 지었다.
“알겠소.”
레크로스 국왕이 왕좌에서 일어나 단상의 끝에 섰다.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존재감에 연회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연회는 잘들 즐기고 있는가.”
“예!”
회장에 있는 모두가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육황회의에서 다섯이 모이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기에 이번에는 특별한 행사를 하나 준비 중이다.”
“특별한 행사라고 하신다면….”
“훗날 대륙에 우뚝 설 젊은 무인과 마법사들을 위해 결투대회를 열기로 했다.”
결투 대회를 한다는 말에 연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익스퍼트급과 마스터급으로 나뉘어 진행하고, 승자에게는 젊은 무인 중 최강이라는 명예와 함께 우리가 내리는 부상이 있을 것이다. 내일모레부터 예선을 시행할 테니, 참여자는 내일까지 등록을 하도록.”
레크로스 국왕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연화장에 있는 무인들을 살폈다.
“결승전은 우리도 관람할 테니,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결투대회!”
“그것도 육황 분들이 보신다고?”
“직접 선물도 주신다잖아!”
“미쳤어! 무조건 참여해야지!”
다섯 세력의 무인들은 각자 모여서 대회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재밌겠네.”
마르타가 쥐고 있던 포크를 구기며 눈빛을 불태웠다.
“엘리트들 밟는 맛이 나겠어.”
그녀는 본인도 엘리트라는 것을 잊고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다른 세력의 무학을 볼 찬스로군. 오길 잘했어.”
버렌은 역시 들뜬 눈빛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음….”
루난은 대회에는 관심 없이 접시에 여섯 층으로 쌓은 구슬 아이스크림을 보며 무엇을 먼저 먹을지만 고민하는 듯 보였다.
-라온! 본왕도! 본왕도 저거!
라스는 루난의 아이스크림 첫 번째 층에 쌓아둔 민트초코를 보며 강아지처럼 혀를 내밀었다.
“…….”
라온이 라스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지 철이 안 드는 마왕이었다.
“설화검협은 당연히 참여하시겠죠?”
아이스크림을 가져가기 위해서 뷔페로 걸어갈 때 은발의 청년이 길을 막았다. 데루스의 아들이자, 대륙십이성의 5위에 위치한 카디스 로베르트였다.
“에덴, 백혈교에 이어 남북맹까지 몰아붙였다는 무력을 제 눈으로 보고 싶은데, 꼭 참여하셨으면 좋겠군요.”
카디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옆에서 볼 때는 친근한 웃음이겠지만, 앞에서 보면 눈이 웃지 않아 비웃는 듯 보였다.
“파랑검의 눈을 채울 수 있을지 겁이 나네요.”
라온이 카디스와 시선을 마주하며 싱긋 웃었다.
“소문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충분하겠지요. 즐거운 시간이 될 겁니다.”
‘역시 비웃는 게 맞군.’
카디스는 확실히 날 무시하고 있었다. 아집이 있던 어렸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기서는 시비를 받아주는 게 좋겠지.’
카디스는 거만하고 건방진 성미답게 남의 도발은 참지 못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역도발로 응수해보기로 했다.
“전 비슷한 수준의 상대와 싸우는 걸 즐기는데, 이번에 그 시간이 올지는 모르겠군요.”
‘너 따위로는 내 즐거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도발하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감이 대단하시군요.”
“별로 없었는데, 파랑검께서 인정을 해주시니, 약간 생기더군요.”
“으음.”
본인이 했던 말을 이용하니, 카디스는 말을 잇지 못하고 신음을 삼켰다.
“결투에서 꼭 만났으면 좋겠군요.”
그의 목소리가 뚝뚝 끊어졌다.
“가능하실지 모르겠지만, 즐겁게 해주신다면 얼마든지.”
라온이 고개를 꾸벅이고서 카디스를 스쳐 지나갔다.
그의 표정이 깨지거나, 기세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잔잔했던 분위기가 파도치기 시작했다.
‘당연하겠지.’
도발하러 왔다가 훨씬 어린 자신에게 역도발을 당하고 할 말도 찾지 못했으니, 지금 카디스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을 것이다.
‘아!’
라온이 접시에 아이스크림을 담으려다가 우뚝 멈춰 섰다.
-음? 안 담고 무얼 하는 것이냐!
라스는 빨리 안 푸고 뭐 하냐는 듯 어깨를 두드렸다.
라온은 두 가지 색이 섞인 아이스크림을 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잘하면….’
* * *
연회가 끝난 뒤 데루스 로베르트의 숙소.
다리를 꼰 채로 앉아 있는 데루스 앞에 마티오가 서 있었다.
“어땠지?”
“아직 확정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본 바로는 아니라고 보입니다.”
마티오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아니다?”
“암살자들은 특유의 걸음걸이가 있습니다. 언제라도 대상을 암살할 수 있도록 뒤꿈치가 아니라, 항상 앞꿈치로 걷죠. 그게 또 티가 나지 않아야 하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걸음처럼 보입니다.”
그는 직접 신발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라온 지그하르트의 구두는 전체가 다 닳아 있었고, 걸음 역시 평범한 검사나 기사의 그것이었습니다.”
“구두까지?”
데루스가 눈매를 좁혔다. 걸음걸이야 사람들의 눈이 많으니 바꿀 수 있다지만, 구두도 똑같이 닳아 있다는 건 이전에도 그렇게 걷는다는 뜻이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암살자들은 티가 나지 않게 주변 경계를 하지만 그에게서는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뷔페에 10번 넘게 왕복하면서 음식만 즐기더군요. 꽤 대식가였습니다.”
마티오가 의외라는 듯 눈매를 찡그렸다.
“마지막으로 제가 노골적으로 볼 때도 부자연스러운 반응은 없었습니다. 전투는 보지 못했지만, 일상생활에서만큼은 암살자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흐음….”
데루스가 주먹에 턱을 괸 채로 입맛을 다셨다.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 지그하르트의 전투를 보면 확정 지을 수 있나?”
“예. 전력을 발휘해야 하는 전투라면 절대 숨길 수 없을 겁니다.”
“널 결투대회의 심판으로 넣어놨다. 가까이에서 그놈의 상태를 확실하게 살피도록.”
“알겠습니다.”
마티오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방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
데루스가 손짓하자, 문이 열리고 카디스 로베르트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도발하려다 역으로 도발 당했더군.”
“그걸 또 다 들으셨군요. 민망하게시리.”
카디스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미소를 지었지만 눈동자에는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우승할 수 있겠지?”
질문하는 데루스의 눈동자에 어둠이 깃들었다.
“야수연맹이 올 줄은 몰랐지만, 상관없습니다. 십이성의 상위 4명도 꺾을 준비를 마쳤으니까.”
“그럼 하나 더 추가하지.”
“말씀하십시오.”
“라온 지그하르트와 만난다면 놈의 팔을 베어라.”
“호오.”
카디스의 입매가 길게 올라갔다.
“글렌이 왔던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다른 이를 그 입에 올렸다면 네 주둥이를 부쉈겠지만, 글렌만큼은 다르지.”
데루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옅게 웃었다.
“이미 그의 심중을 떠보았다. 죽인다면 모를까. 팔을 자른 정도로는 움직이지 않아. 절격을 써서 팔이 붙더라도 예전처럼 움직일 수 없게 하도록.”
“명령대로 하겠나이다.”
카디스가 어투와 달리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답을 잘 모르겠다면….”
방에 홀로 남은 데루스는 달빛이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문제 자체를 지우는 것도 방법이지.”
* * *
라온은 연회가 끝난 뒤 광풍단을 데리고 왕궁 외곽으로 향했다.
“어딜 가는 거야. 우리가 들어가도 돼?”
버렌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일 모레가 친선 대련이잖아. 조금이라도 쉬고 수련을 해야지.”
마르타가 내일 검술 점검을 위해 자야 한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
루난은 이전에 먹었던 아이스크림만 생각하는지 콧노래를 불렀다.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였다.
“다 왔어.”
라온은 불안해하는 광풍단 검사들을 안심시키며 작은 정원 근처에 있는 문 앞에 섰다. 단단한 걸쇠로 잠겨 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잘 관리된 연무장이 나타났다.
“여기는….”
“연무장이네?”
“우리 수련하라고 구해온 거야?”
친선전을 위해 수련할 공간이 필요했는데 모두 잘 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삼왕자님께 부탁드려서 빈 연무장을 빌려달라고 했어.”
라온이 즐거워하는 광풍단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우와아아아!”
“역시 우리를 생각하는 건 부단주뿐이라니까!”
“넓어서 전부 쓸 수 있겠는데.”
광풍단원들은 연무장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부터 해야겠지?”
“그래. 새벽부터 바로 수련하자고.”
“수련복이랑 장비도 준비….”
쿠우웅!
내일 수련하자고 말하던 광풍단은 거칠게 문이 닫히는 소리에 움찔 놀라서 문을 돌아보았다.
라온이 연무장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라, 라온?”
“문이 잠겼는데?”
“무, 문을 왜 잠가?”
광풍단 검사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라온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내일? 내일은 없어.”
라온은 그 말을 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타오를 듯한 시뻘건 안광이 번쩍였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로베르트 가문에 지는 꼴은 절대 못 보거든.”
로베르트 가문의 검술 파훼법은 알려줬다간 정체를 들킬 수 있으니, 이전처럼 강한 검세로 정신과 육체를 깨우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쟤 또 왜 저래!”
“갑자기 왜 미친 건데!”
“저, 저거 집중력 강화훈련을 할 때의 눈이잖아!”
마르타와 광풍단은 턱을 파르르 떨며 뒤로 물러섰다.
“아, 아니 수련하는 건 좋은데, 일단 좀 쉬자고. 방금 밥 먹었잖아.”
“그래. 밤도 늦었으니까. 내일부터 하자.”
“지금 우리 수련복도 안 가져왔고, 수련검도 없어서….”
반면 버렌과 몇몇 검사들은 어떻게든 설득하기 위해서 손을 저었다.
“걱정 마.”
라온이 손가락을 튕기자, 옆으로 도리안이 빠르게 다가왔다.
“있지?”
“흑, 네.”
도리안은 코를 훌쩍이고 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 안에서 현 광풍단 검사들의 수련복과 수련검이 줄줄이 나왔다.
“하나 더 있잖아.”
“크흑….”
녀석은 눈물을 훔치고서 배 주머니에서 흑환까지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흑환!”
“저거 안 부쉈어?”
“이런 제기랄!”
광풍단이 흑환을 보며 기겁하고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의지를 다진 녀석들이라고 해도 흑환만큼은 무서운 것 같았다.
라온이 흑환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 내가 착각을 좀 했군.”
그 말에 창백해지던 광풍단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훈련할 생각은 있지만 라온과 함께하는 지옥 훈련만큼은 모두가 피하고 싶어 했다.
“그, 그래. 너무 성급했어!”
“수련하는 건 좋지만 결투 직전이니까 너무 빡세게 하는 건 별로라고.”
“차, 차분하게 가자.”
광풍단은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식은땀을 닦으며 라온에게 다가갔다.
“아니, 그게 아니야. 육황 중 다섯이 참가하니까. 로베르트 가문을 만나기 전에 다른 놈들과 마주할 가능성도 높아.”
라온에게서 퍼지는 기세가 가시처럼 날카롭게 갈렸다.
“즉, 그 넷 모두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야.”
“어….”
“아….”
이제 본인들이 어마어마한 착각을 했다는 걸 알아차린 검사들이 입을 떡 벌렸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 이틀이면 충분하니까.”
광풍단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과 반대로 라온의 입가에는 섬뜩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가 제천검을 검집째 들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지금부터 죽여…아니, 훈련을 시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