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4화
라온이 눈을 비빈 뒤에 서랍장 위에 있는 다람쥐를 보았다.
‘다람쥐가 맞는데….’
내가 꿈이라도 꾸는 건가?
다시 보아도 특별한 게 없다. 마법이나, 주술, 투기 혹은 오러까지 어떠한 기운도 없는 평범한 다람쥐. 이 녀석이 말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나만 바라보면 조금 부끄러운데.”
다람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슬쩍 돌렸다.
“허….”
다람쥐의 조곤조곤한 어조를 듣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역시 꿈이 아니었다.
“너 대체 뭐야.”
“네가 내 이름을 불러줬잖아.”
다람쥐가 부끄럽다는 듯 작디작은 손을 밑으로 내리며 옅게 웃었다.
다람쥐라는 개체가 이렇게 표정 변화가 자유롭다는 건 처음 알았다.
“오랜만이야. 라온.”
“멀린….”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에 느꼈던 대로 저 다람쥐 안에는 멀린의 영혼이 깃들어 있었다.
“역시 네 목소리로 내 이름을 들을 때가 가장 흥분돼.”
멀린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니, 올리려 했겠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다람쥐였기에 머리 부근의 털을 비비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그 집착녀?
라스가 기겁을 하며 멀찍이 떨어졌다.
-안 죽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곳까지 찾아왔다니! 진짜 감당이 안 되는 미친 것이니라!
녀석은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냐며 턱을 떨었다.
-끄으으윽, 트라우마가 떠오르느니라.
라스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침대 위에서 쓰러졌다.
‘안 죽은 걸 알았으면 말을 좀 해주지.’
라온이 버둥거리는 라스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왔는데 어딜 보는 거니.”
멀린이 서랍장 위에 걸터앉은 채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번에는 농염한 척하려는 듯 보였지만, 복실복실하게 흔들리는 꼬리털만 보였다.
“안 죽었던 건가?”
“내 걱정을 해줬던 거야? 기뻐!”
“후….”
한숨이 절로 나온다. 대화가 안 통하는 것을 보면 멀린이 확실했다.
“거기서 대체 어떻게 살아나온 거지?”
“토끼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데, 사람이면 구명줄 하나는 있어야지.”
멀린이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손을 저었다.
“그래도 네 할아버지 덕분에 꽤 많은 것을 희생했지만.”
그녀는 말을 이어가며 씁쓸한 표정이 되어갔다. 기쁨에 이어 아쉬움까지. 다람쥐의 모습으로 저렇게 표정을 잘 드러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금면사도 살아 있는 건가?”
“‘금면사’는 죽었어.”
“음….”
멀린의 어조가 조금 이상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넌 살아남기 위해서 그 다람쥐의 모습이 된 건가?”
“아니. 내 몸은 다른 곳에 있지. 왜 보고 싶어?”
“그럴 리가 있겠냐.”
라온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얼마 대화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피곤해졌다.
“그럼 그 모습은 뭐지?”
“육황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천천히 이 다람쥐에게 내 사념을 담는 방법을 사용했어. 이 아이의 육체도, 영혼도 건드리지 않으니 아무도 모를 수밖에.”
마나나, 마법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이 다람쥐를 이용하여 공격할 생각도 하지 않았기에 모두가 평범한 다람쥐라고만 여겼던 것 같다.
“내가 육황회의에 간다는 이야기는 없었을 텐데? 거기다 오웬에서 열리는 것도 최근에 퍼진 거고.”
“네가 이번 회의의 당사자니까 당연히 올 거라 생각했어. 혹시 몰라서 육황 전체에 의심받지 않을 작은 동물들을 뿌려놨고.”
멀린이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배시시 웃었다.
“미친….”
그 말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이거 좀 무서운데….’
움직임을 예측한 건 물론이고, 어떠한 상황에도 대비할 수 있도록 육황 전체에 작은 동물들을 뿌려놨다는 말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끄으으윽!
라스는 듣기 싫다는 듯 귀를 막았다. 아무래도 저 녀석도 이런 집착에 시달린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는?”
“가족이 함께 있는 건 당연한 거잖아.”
멀린은 그런 걸 왜 물어보냐는 듯 웃었다.
“이런 모습이라 그곳에 있을 때처럼 안아줄 수 없는 게 아쉽네.”
“헛소리를….”
“그럼 널 누가 침대에 눕혔다고 생각해? 네가 가면을 쓰고 있을 때는 내 무릎을 베고 자기도 했어.”
“으음….”
솔직히 기억이 나진 않았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깨어나니 바닥에 누워 있던 것만 떠올랐다.
“쓸데없는 소리는 됐고, 솔직하게 말해. 왜 왔어.”
“네가 걱정되어서.”
멀린의 들뜬 목소리가 처음으로 낮게 가라앉았다.
“너희 수장도 가볍게 꺾는 가주님이 옆에 있는데 걱정할 필요는….”
“타천이 널 노리고 있어.”
글렌의 이야기를 꺼내려 할 때 멀린이 고개를 저었다.
“날 노린다고?”
라온이 멀린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 때문에 찾아온 가주님이 에덴에 괴멸적인 피해를 입혀서 그런 건가?”
“아니.”
멀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람쥐의 모습인 그녀가 천천히 적응되기 시작했다.
“네 장래 때문에.”
“미래?”
“타천은 네가 앞으로 에덴의 대의를 이루는데 가장 큰 적이 될 것 같다며 이번 기회에 죽일 생각이야.”
“이번 기회?”
“그도 여러 가지로 많은 힘을 소모해서 마음대로 못 움직이거든.”
그녀는 이번만 버티면 괜찮을 거라며 웃었다.
“회의 중 언제 노릴지는 나도 모르겠어. 네 할아버지 같은 육황의 수장들이 근처에 있을 때는 아니겠지.”
그 말이 맞을 거다. 아무리 타천이 은밀하게 노려도 글렌의 눈을 피할 수는 없으니까.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동물의 몸까지 빌린 거야?”
라온이 다람쥐의 모습이 된 멀린을 가리키며 눈매를 좁혔다.
“당연하지. 가족이잖아.”
멀린이 머리를 쓱쓱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멀린이 전력을 다해 백혈교와 에덴을 막아줄 때도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정보까지 내어 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 것 같기에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저기 나는….”
“아, 하나 더 있어.”
멀린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이건 오는 길에 들은 건데, 데루스 로베르트의 입에서 네 이름이 나왔어.”
“뭐?”
갑자기 데루스의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기에 거칠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가 널 이상하게 보는 게 마음에 걸려서 우연인 척 접근해봤는데, 한 마디에 네 이름이 두 번 나왔어. 라온과 라온 지그하르트. 조금 이상하지?”
“그 이후에는?”
“기막 때문에 듣지 못했어. 더 접근했다가는 이 육체가 찢어졌을 거야.”
그녀는 다람쥐의 청각을 조금이라도 더 키워놓을 걸 그랬다며 입맛을 다셨다.
“라온과 라온 지그하르트. 두 번이라고…?”
라온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보통 사람의 이름을 한 마디에 두 번씩 넣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거기다 라온과 라온 지그하르트라는 말에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그 자식 전생의 나와 지금의 내가 관계있다고 의심하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멀린의 말을 통해 떠오르는 예측 중에서 가장 확률이 높아 보였다.
‘생각해보자.’
내가 암살을 몇 번을 했지?
처음은 녹전귀의 뒤를 노렸을 때지만 외부인은 누구도 보지 못했다. 두 번째는 4사도를 베었을 때였고, 꽤 많은 사람이 목격했다.
‘그것만으로는 날 알아차릴 수 없어.’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로베르트 가문에서 배운 암살기가 아니라, 지금까지 익힌 검술을 응용한 암살 검을 사용했다.
그곳에 있던 무인들의 수준으론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확신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겠군.’
데루스를 만났을 때 놈에게 확신이 있었다면, 분명 속을 떠보는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상황만 따지면 데루스의 의심 정도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이제 좀 알겠어.’
처음 만난 데루스의 시선이 이상했던 건 요난 가문의 일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전생의 라온이라 생각하며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왜 의심하는 거지? 이름이 같다고 비교할 미친놈은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데루스가 자신을 전생의 라온이라고 의심하는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데루스의 의심을 피할 방법을 생각해야 해.
후우우우.
라온이 폐에 있는 산소를 모조리 뿜어내고 눈을 감았다.
‘의심하는 데루스가 할 행동은….’
뻔해. 마티오를 시켜서 나한테 아직 암살자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살피겠지.
마티오는 자신을 세뇌하고, 암살자 훈련을 시킨 데루스의 최측근이자, 음지의 집사다.
놈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암살자의 흔적을 확인할 게 분명했다.
‘의미 없는 짓이지만.’
라온이 입술을 깨문 채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다 지웠거든.’
로엔이 암살자라는 것을 파악한 뒤에 자그마한 흔적도 드러나지 않게 암살자가 할 법한 행동이나 움직임을 모조리 지웠다.
실비아 덕분에 마음가짐까지 암살자에서 검사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마티오가 자신을 직접 세뇌하고 교육한 교관이라고 해도 절대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머릿속으로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를 그렸다. 몸을 쓰는 법을 여러 방향으로 점검한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은 끝났니?”
서랍장을 갉아 먹던 멀린이 어색하게 웃었다. 다람쥐의 본능을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 고마워.”
라온이 멀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착각 때문에 진행된 일이지만, 정말 큰 도움을 받았다. 진심을 담아 감사하다고 말했다.
“가족 사이에는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란다.”
멀린은 언젠가 실비아가 했던 말을 똑같이 말했다. 가슴이 쓰렸다.
“그런 말은 안 해도 돼.”
그녀가 서랍장에서 내려와 자신의 손 위에 작은 손을 얹었다. 작디작은 손가락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
잠시 아주 잠시 이대로 멀린을 이용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랜드 마스터 급의 마법사가 주는 일방적인 애정을 이용하면 앞으로의 일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아니, 아니지.’
라온이 스스로의 뺨을 거세게 쳤다. 살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고요한 방을 울렸다.
“라온?”
-이, 이제 너도 미친 것이냐?
멀린과 라스가 눈을 부릅떴다.
‘맞아. 미친 짓이야.’
저런 멀린을 이용한다면 환생하고 나서도 복수심을 불태우게 만드는 데루스 로베르트와 다를 바가 없다.
설사 적이라고 해도 사람의 인생을 조롱하는 짓만큼은 해서는 안 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 정보를 알려줘서 고마워. 하지만 난 네 가족인 록타 데포르트가 아니야. 그의 영혼은 내게 흡수됐다.”
라온이 멀린을 보며 정신세계에서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없어. 난 네 원수지 도움을 줄 대상이 아니야.”
“록타가 마지막에 한 말이 있어?”
“너를….”
라온이 눈을 감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아직 기억 속에 머물러 있었다. 특별한 말은 아니었지만,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걱정했다. 네겐 죄가 있지만, 그 죄를 저지른 이유가 있다고 했었다.”
“그래. 그렇구나….”
멀린에게서 돌아올 원망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라온. 역시 넌 록타야.”
멀린이 방긋 웃었다. 배 터지게 해바라기 씨를 먹은 다람쥐가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록타는 기사라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거든.”
“난 록타가 아니라니까!”
“전에도 말했잖아. 록타의 혼이 깃든 이상 내게 넌 록타야.”
“난 라온 지그하르트다.”
“이름은 그렇게 불러줄게. 라온.”
“크으….”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좀 괜찮나 싶었더니, 또 우기기가 시작되었다.
“내 사랑이 일방적이라고 해도 상관없단다. 말했듯이 가족이란 그런 거니까.”
“난 네 가족이 아니….”
“아, 시간이 다 되어가네.”
멀린의 목소리가 떨리고, 다람쥐의 털이 쭈뼛 섰다.
“이 이상 사념이 지속되면 이 아이에게도 부담이 되거든. 이번에도 살아남기를 바랄게.”
그녀가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귀여운 다람쥐의 모습이지만 실제 멀린의 인사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사라지면 이 아이에게 먹이를 좀 챙겨주렴. 그런 거래였으니까.”
그 마지막 말이 끝나자, 다람쥐의 눈동자가 맑아졌다.
끽?
정신을 차린 다람쥐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다가 침대 구석으로 숨어버렸다.
-미친 집착이니라. 무서울 정도였느니라….
라스가 멀린이 있던 서랍장 위를 보며 턱을 떨었다.
‘그럴지도.’
-대체 왜 네 주변에는 미친 놈들 뿐인지 모르겠느니라!
‘음….’
라온은 차마 네가 ‘제일 이상해’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똑똑.
고개를 젓고서 침대 아래로 들어간 다람쥐를 부르려고 할 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부단주님! 왜 안 오시는 거예요! 우리가 입장할 차례라구요!”
도리안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도리안 잠시 들어와 봐.”
“네?”
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 견과류 있어?”
“그런 거야 당연히 있죠. 땅콩? 아몬드? 호두? 피스타치오? 해바라기 씨? 잣? 호박 씨? 캐슈넛? 전부 있어요.”
오랜만에 느끼지만 정말 대단한 준비성이다.
“해바라기 씨랑 땅콩으로.”
“옙!”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배 주머니에서 견과류가 가득 담겨 있는 원통을 꺼내 해바라기 씨와 땅콩을 주었다.
“나오렴.”
침대 밑으로 땅콩과 해바라기 씨를 천천히 건네자, 다람쥐가 하나씩 입에 물며 천천히 침대 밖으로 나왔다.
“엑? 다람쥐? 다람쥐가 왜 여기에 있어요?”
“정이 고파서.”
쓰게 웃고서 손바닥 위의 해바라기 씨까지 볼 주머니에 넣은 다람쥐를 들어 올려 창가에 내려놓았다. 녀석은 잠시 뒤를 돌아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정원 쪽으로 사라졌다.
라온은 해가 떨어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겉옷을 걸쳤다.
“가자.”
* * *
도리안을 따라 연회장으로 향하자, 다른 이들은 보이지 않고, 지그하르트 검사들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우리가 마지막이었군.’
본래 연회는 계급과 연배가 낮은 쪽이 먼저 입장하기에 지그하르트는 가장 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야, 라온. 많이 컸다? 나를 기다리게 만들고?”
리메르가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인상을 찌푸렸다.
“부단주가 감히 단주를… 커헉!”
“네가 시간을 더 끌어.”
물론 시비를 걸기 전에 셰릴에게 옆구리를 얻어맞고 옆으로 짜졌지만.
“라온. 무슨 일 있었어?”
루난이 다가와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별일 없었어.”
라온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민되는 일이지만, 누군가에게 터놓을 이야기도 아니었다.
“가주님. 전부 모였습니다.”
셰릴이 우측 대기실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문이 열리고 글렌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복이 아니라, 평소와 같은 제복이었지만, 그게 더 잘 어울려 보였다.
“가자.”
그는 잠시 이쪽을 쳐다보며 눈매를 좁히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셰릴을 필두로 지그하르트 검사들이 대답하고서 글렌의 뒤를 따라 연회장의 문 앞에 섰다.
“지그하르트의 영웅들을 환영합니다.”
문을 지키는 기사들이 바닥을 향해 창을 내리찍고서 연회장의 문을 열었다. 동시에 안쪽에 있던 사회자들의 웅장한 외침이 연회장을 휩쓸었다.
[북방의 패왕 글렌 지그하르트 님과 지그하르트의 영웅들이 입장하십니다!]
분주하던 연회장의 분위기가 일순간에 가라앉으며 모든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저 남자가 북멸왕 글렌 지그하르트.”
“자, 장난이 아닌데? 무슨 사람의 기세가….”
“으으, 숨이 막혀.”
“백혈교주와 타천을 홀로 압도했다는 말이 진짜였던가.”
“전보다 더하군. 눈을 제대로 볼 수가 없어….”
글렌을 마주한 사람들은 그의 패기에 억눌려 시선을 들지도, 눈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턱을 떨었다.
‘무시무시하지.’
본래 강자들은 자신이 가진 기운을 어느 정도 갈무리하지만, 글렌은 오히려 그 힘을 드러내는 성격이었기에 모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거 좋네.’
라온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끼며 옅게 웃었다.
‘나한테 관심을 주는 사람이 없잖아.’
글렌이 모든 시선을 가져가니, 억지로 존재감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이곳에 온 목적을 편하게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이곳의 주인으로서 먼저 단상 위에 앉아 있던 레크로스 국왕이 옆자리를 가리키며 빙긋 웃었다. 그 좌측에는 이미 데루스가 앉아 있었다.
라온은 단상 위로 올라가는 글렌의 등을 보는 척하며 데루스를 살피다가 놈과 눈이 마주쳤다.
데루스는 또 본다는 듯 빙긋 웃었다. 놈의 가식적인 웃음을 보자 다시 머리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 멍청이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낀 라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걱정하지 마.’
이제 괜찮으니까.
라온이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치솟던 분노를 가라앉혔다. 데루스에게 자그마한 구김도 없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숙였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데루스의 표정이 살짝 굳어진 게 보였다.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뒤편에 있는 두 집사를 살폈다.
‘우측이로군.’
좌측에 있는 노집사는 양지의 일을 담당하는 심부름꾼이었고, 우측에 있는 친근한 인상의 중년 집사가 진짜 실세이자, 정체를 숨긴 마티오가 분명했다.
‘세상일은 이래서 모르는 거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멀린이라는 변수 덕분에 상대를 시험하게 된 건 저쪽이 아니라 이쪽이었다.
라온은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야. 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