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3화
삼왕자가 두 번째로 안내해준 곳은 연무장이었다. 다만 평범한 연무장이 아니라, 오웬 왕국의 적을 말살하는 최강의 공격대 은기사들이 수련을 하는 장소였다.
라온이 눈매를 좁힌 채 은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오싹할 정도로 날카롭군.’
왕실을 수호하는 근위 기사가 단단한 기둥이나 방패라면 은기사들은 끝없이 갈고 닦은 검처럼 보였다.
왕도로 오면서 본 기사들과 확연히 다른 무력. 은기사들이 뿜어내는 예기에 닭살이 올라올 정도였다.
‘좋은데.’
은기사들이 펼치는 검술은 오웬 왕국 특유의 예검과 정검을 극대화한 초식들이었다. 검술 경지가 많이 상승한 덕분인지 그들이 펼치는 검술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건 꽤 도움이 되겠어.’
가진 실력을 모두 드러내지 않았지만, 워낙에 뛰어난 검술인지라 공부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우측에서 누구보다도 느릿하게 검을 내지르는 청년을 보았다. 바다를 닮은 청발에 갈색 눈동자. 젊어 보이지만 가지고 있는 기운이 다른 기사들과 격이 달랐다.
다만 그의 기운은 처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꽤 오래전이지만 감지한 기억이 있었다.
“역시 보는 눈이 좋네.”
리메르가 옆으로 다가오며 씩 웃었다.
“저 녀석이 보리니 키튼이다.”
“보리니 키튼?”
“대륙십이성의 보리니 키튼. 너 이전에 천재라 불렸던 녀석들이지.”
그가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한 자루 칼처럼 고고한 기세를 뿜어내는 청발의 청년을 가리켰다.
“알고 계셨군요!”
삼왕자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분이 창첨검 보리니 키튼 경입니다. 광검께서도 아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리메르가 보리니 키튼을 알고 있다는 게 기쁜지 큼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대륙십이성 정도는 알고 있죠. 술집이나, 도박장에서도 맨날 나오는 이야기가 대륙십이성 중에 누가 센지라서.”
리메르는 알고 싶지 않아도 도박장에 다니면 다 알게 된다고 중얼거렸다.
“왕자님도 한 번 가보실랍니까? 제가 어른의 세계를….”
“그 입 좀 닫아.”
셰릴이 인상을 찌푸리며 팔꿈치로 리메르의 허리를 후려쳤다.
“커억!”
리메르가 허리를 움켜쥐고 뒤로 이탈했다.
“음.”
보리니 키튼이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검을 내린 채 다가왔다.
“왕자 저하.”
그는 먼저 삼왕자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알고 계시겠지만, 지그하르트의 손님분 들입니다.”
“은기사단의 보리니 키튼이라고 합니다.”
보리니 키튼은 너무 과하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허리를 숙였다.
“지그하르트 천검대주 셰릴이다.”
일행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셰릴이 그의 인사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검대주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빈말이 아닌 듯 보리니 키튼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그리고 저분은….”
“아, 신경 쓰지 마.”
그가 아직도 허리를 부여잡고 있는 리메르를 보았지만, 셰릴이 시선을 가렸다.
“광풍부단주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합니다.”
그다음 차례라고 할 수 있는 라온이 셰릴의 옆으로 다가가 보리니 키튼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제 어디서 봤는지 알 거 같네.’
가까이서 보니 보리니 키튼의 기척을 느꼈던 때가 떠올랐다.
카멜룬 근처 언덕에서 백혈교와 전투를 벌일 때 멀리서 떠올랐던 기척이 지금 눈앞에 있는 보리니 키든과 똑같았다.
“라온 지그하르트….”
보리니 키튼의 눈동자가 크게 출렁였다.
‘이 정도로 성장했다니.’
삼왕자를 몰래 호위할 때 멀리서 라온을 관찰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나이를 뛰어넘는 강함과 우아함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예 사람이 달라진 듯 보였다.
‘어처구니가 없군.’
당시의 라온과 자신 사이에는 거대한 산이 몇 개나 있었건만 지금 그 산들이 모조리 뚫려 있었다. 아직 20살도 안 된 어린 검사는 이미 자신을 턱밑까지 추격해 있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설화검협이라는 이명을 받고 맹활약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에덴에 납치당했다고 하여 어느 정도 경시한 것도 사실이다.
허나 지금 본 라온은 누구에게도 무시 받을 만한 수준의 무인이 아니었다. 저 나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고 지나쳤겠지.’
상대의 무력을 파악하는 오웬 특유의 감각기를 익히지 못했거나, 자신의 무력이 조금만 낮았다면 라온의 실력을 파악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머리가 아찔했다.
“보리니 경?”
“아, 예.”
삼왕자의 부름에 보리니 키튼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은기사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쉽게도 단장님은 현재 부재중이십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대신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보리니 키튼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따라오라고 말했다.
“흐음.”
라온은 보리니가 소개하는 연무장 시설이나 기사가 아니라, 그의 등만을 바라보았다.
‘어떨까….’
하분 성에 가기 전에는 보리니 키튼의 기척도 제대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큰 차이가 났지만, 지금은 아니다.
경지는 여전히 저쪽이 높지만, 전력으로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따라잡았다.
‘오길 잘했네.’
라온이 검병을 툭툭 건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겠어.’
* * *
데루스 로베르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 빙긋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맛과 향이 좋군요. 처음에는 씁쓸하다가 끝맛은 달달한 걸 보면 벨벳 산호를 제대로 말린 모양입니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서 짧게 입맛을 다셨다.
“로베르트에 사는 저도 구하기 힘들 정도인 최고급 벨벳 산호차라니, 대단하군요.”
“알아봐 주시는구려.”
레크로스 국왕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는 글렌과 달리 차 맛을 알아주는 데루스에게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 이곳으로 오는 길에 설화검협을 만났습니다.”
데루스는 다시 찻잔을 들어 올리며 글렌을 보았다.
“가주님의 얼굴이 밝아지신 이유가 있더군요. 지금까지 본 어린 검사 중에서도 발군이었습니다.”
“역시 천검성도 그리 생각하시는구려.”
레크로스 국왕이 서로 비슷한 생각을 했다며 미소를 지었다.
“19살에 마스터 중급이라니, 누구라도 그리 생각할 겁니다. 이미 두 분의 무학의 결이 다른 것도 파악했더군요.”
“결을?”
“예. 전하의 예리하면서도 곧은 기세를 느끼고 긴장했다고 한 걸 보면 제대로 본 듯합니다.”
“허어….”
레크로스 국왕은 헛바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무서운 재능이구려.”
“예.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검사입니다.”
데루스는 라온을 칭찬하며 글렌을 살폈다.
‘무표정. 아니, 조금은 기뻐하는 건가.’
글렌의 표정은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차가워 보이지만, 입매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아닌 척하지만, 라온을 아끼는 듯 보였다.
“대륙십이성도 하위 4명은 꺾을 듯하고 중위 4명과는 비등할 겁니다.”
데루스는 조금 더 강한 칭찬을 하며 글렌의 반응을 보았다.
‘음, 아닌가?’
대륙십이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당연히 모두 같은 경지는 아니다.
나이와 재능, 무학의 차이로 그 안에서도 하위 4명, 중위 4명, 상위 4명으로 순위가 나뉘어 있다.
그중 중위 4명은 이미 대륙 전체에 그 이름과 무력을 알린 중견급 무인이건만 그들과 비교해주었음에도 글렌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내 생각도 비슷하오.”
레크로스 국왕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리니 녀석이 딱 중위인데, 그 아이와 좋은 승부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소.”
“예. 저희 카디스 녀석과도 재밌는 싸움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데루스는 카디스에 대한 말을 꺼내며 다시 글렌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눈빛은 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음, 내 착각이었던 것 같군.’
보리니 키튼과 카디스 로베르트는 라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명성과 업적을 이룬 무인들이다.
그들과 비교해주었음에도 표정에 변화가 없는 것을 보니, 글렌은 라온을 그리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다.
‘하긴 저 냉혈한이 누군가를 챙기는 건 말이 안 되지.’
자신이 아는 글렌은 손자는커녕 친자식도 챙기는 인간이 아니다. 이번에 에덴을 친 것도 지그하르트를 무시한 것에 화가 났을 뿐이지 라온을 구할 생각은 없을 게 뻔했다.
‘계획을 시작해도 되겠군.’
데루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이렇게 모인 것도 인연이니, 재밌는 대회를 하나 열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대회?”
“무슨 대회를 말하는 거요?”
글렌과 레크로스가 동시에 데루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젊은 무인들이 이렇게 모이는 것도 흔하지 않으니, 토너먼트 친선전을 여는 겁니다. 익스퍼트 급과 마스터 급으로 나눠서 열면 재밌을 듯하군요.”
데루스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설화검협이 대륙십이성과 싸우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니, 저희 아이도 참여시키겠습니다.”
“파랑검 카디스? 그는 중위에서도 가장 높은 순위지 않소?”
파랑검 카디스 로베르트는 대륙십이성에서 5위로 지금 라온이 상대하기엔 조금 버거운 상대였다.
“어차피 친선 대회이지 않습니까.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흐음, 재미는 있겠구려. 그럼 우리도 창첨검을 보내도록 하겠소.”
“가주님은….”
“좋소.”
글렌도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되는군요. 젊은 동량 중 누가 가장 위에 설지가.”
데루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모았다.
“데루스 님?”
로엔이 눈매를 좁히며 데루스를 불렀다.
“장갑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 말대로 검은 장갑 안쪽에서 몇 방울의 피가 흘러나왔다.
데루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미소를 지었다.
“아, 별것 아닙니다.”
그가 손을 쓱 훑어내리자, 핏물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이 이야기는 연회 때 전하도록 하죠. 아이들에게 줄 선물도 모으는 게 좋겠습니다.”
“흐음, 좋소.”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연회 때 다시 뵙지요.”
데루스는 글렌과 레크로스 국왕에게 고개를 숙이고서 응접실을 떠났다.
“나도 가보도록 하겠소.”
글렌이 빈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편히 쉬시길.”
그는 마중을 나온 레크로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응접실을 나섰다.
“음….”
로엔이 글렌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으며 눈매를 좁혔다.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지신 듯 한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라온의 칭찬을 들어서 기뻐하던 글렌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유를 모르겠군.’
글렌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라온에 대한 문제만큼은 그의 의중을 잡을 수가 없었다.
“가주님.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로엔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기막을 친 채 글렌의 옆으로 붙었다.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화가 안 난단 말이냐.”
“그 말이라면….”
“라온을….”
“라온을?”
“대륙십이성 따위와 비교하지 않았더냐! 가진 재능과 협의가 격이 다르거늘! 성격 역시 라온 쪽이 몇 수는 위지!”
글렌이 눈매를 찡그리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가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허….’
미래의 초월자라는 대륙십이성과의 비교를 해도 만족하지 못하다니, 아무래도 손주 사랑으로 가득 찬 할아버지를 너무 얕본 모양이다.
다만 그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면 몰라도 미래에 대륙십이성은 라온의 발밑에 있을 자들이니까.
로엔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입니다. 이번에 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 * *
데루스 로베르트는 바로 숙소로 돌아와 두 집사를 방으로 불렀다.
“마티오.”
“예.”
그의 부름에 좌측에 있던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항상 복면을 쓰고 있는 음지의 집사였다.
“네가 키운 암살자들을 알아볼 수 있나?”
“물론입니다.”
마티오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살자에겐 특유의 몸짓과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건 세월로도 지울 수 없죠. 특히 제가 키운 녀석이라면 무조건 알아볼 수 있습니다.”
“20년 전이고 다른 무학을 익혔다고 해도?”
“제가 가르친 교육은 새의 각인 효과를 이용했기에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자신감 있는 눈동자를 빛냈다.
데루스가 옅게 웃으며 장갑을 벗었다. 손등에 새겨진 검흔에서 말라붙은 핏물이 맺혀 있었다.
“음?”
그는 장갑을 잡은 채로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다.”
데루스는 눈매를 좁힌 채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혹시 라온을 기억하나?”
“…그 라온 말입니까?”
“그래.”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티오가 눈빛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부터 직접 키웠고, 사냥개 주제에 주인의 손등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새긴 놈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지금부터 라온 지그하르트를 감시해라.”
데루스가 손등에 붙은 피딱지를 떼어내며 차디찬 미소를 지었다.
“놈에게서 네가 키운 암살자의 흔적을 찾아봐.”
“…알겠습니다.”
라온 지그하르트와 그림자 라온이 관계있다고 여기는 굉장히 허무맹랑한 명령이었음에도 마티오는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주인이 지시한 대로 따르는 개와 마찬가지의 반응이었다.
데루스는 새로운 장갑을 끼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기회는 만들어놨으니까.”
* * *
라온은 숙소로 돌아와 예복으로 옷을 갈아있었다.
-안 쉬는 것이냐?
라스는 옷을 왜 갈아입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영식이 있거든.’
-흥. 인간들은 매번 그런 귀찮은 행사를 치르더군. 이해할 수 없는….
‘연회라서 다양한 요리도 나올 거야.’
-무얼 하는 것이냐!
코웃음을 치던 라스는 어느새 문 앞에 서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본왕이 연회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당장 가자꾸나! 음식이 다 식느니라!
‘아직 시간 안 됐어.’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보고 있으면 정말 심심할 틈이 없는 마왕이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라스.’
-식사 때냐?
‘아직 1분도 안 지났어….’
시간이 안 됐다고 한 지 1분 만에 저 소리를 하다니, 아까 마지막 스튜에 속은 것도 그렇고 음식에는 제대로 미친 녀석이었다.
‘그게 아니라, 오늘 본 국왕이랑 내 원수 기억하지?’
-당연히.
‘그 둘 중에 누가 더 강해?’
라스의 말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데루스였지만, 혹시나 해서 다시 물어보았다.
-그건 확실히 말해줄 수 있느니라. 네 마지막 한 그릇을 훔쳐 간 도둑놈이 더 강하다.
‘…역시 그런가.’
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사이에 경지를 뛰어넘었군.’
20년 전 데루스는 육황에서 가장 약한 수장이라 평가받았다. 나이가 제일 어렸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 격차를 뛰어넘은 모양이다.
지랄 맞은 성격과 달리 재능이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시간의 벽을 넘어 다른 육황의 수장을 따라잡을 정도일 줄은 몰랐다.
-걱정하지 마라.
‘응?’
-본왕이 그놈에게 복수할 기회를 열어주겠노라.
라스가 눈썹은 찡그린 솜사탕의 모습으로 어깨를 두드렸다.
-네놈이 나딘 빵을 먹고도 멀쩡하고, 맛 좋은 음식들을 보고도 수련이나 하는 미친놈이 된 것도 다 그 악마 놈 때문이겠지.
‘어….’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다. 암살자 훈련을 받은 덕분엔 음식의 맛을 신경 쓰지 않게 된 거니까.
-음식의 분노는 곧 본왕의 분노! 그놈의 면상에 주먹을 후릴 수 있게 도와주겠노라!
‘허.’
입을 열 때마다 음식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도 이 녀석이 분노의 군주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능력치나 특성이라도 주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그렇지.’
라온이 피식 웃었다. 능력치와 특성에 짠돌이인 라스가 퍼줄 리가 없었다.
‘그럼 대체 뭘….’
라스에게 다시 물어보려고 할 때였다. 창가 아래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어린 다람쥐가 창문 앞으로 올라와 있었다.
“다람쥐?”
검묘와 정원에서도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들을 보았지만, 사람을 무서워하는 다람쥐가 창가로 다가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툭툭.
다람쥐는 열어달라는 듯 손으로 창문을 두드렸다.
‘누가 키우던 다람쥐인가?’
혹시나 해서 기감을 펼쳐봤지만, 다람쥐에게서 특별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저 다람쥐에 이상한 기운이 있어?’
-평범한 다람쥐 같지만, 아주아주 미세한 마나의 기척이 있느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길들인 것 같다.
라스도 정확하게는 모르겠다며 인상을 찡그렸다.
“음….”
라온이 진혼검의 검병에 손을 올린 채 창가로 다가갔다. 혹여나 위험한 짓을 하면 바로 벨 수 있도록 경계하며 창문을 열었다.
툭.
다람쥐는 작게 열린 창문 사이로 몸을 밀어 넣고 안으로 들어왔다. 익숙한 모습으로 바로 아래에 있는 서랍장으로 내려왔다.
“넌 대체….”
“빨리 좀 열지 그랬니.”
다람쥐의 입에서 사람의 말을 흘러나왔다. 어색하지만 또박또박했으며 누군가가 떠오르는 어투였다.
라온은 사람처럼 히죽 미소 짓는 다람쥐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멀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