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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12화 (312/653)

제312화

쿵! 쿵!

데루스 로베르트를 본 순간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수십 명이 동시에 치는 북소리처럼 전신을 울리는 거대한 박동이었다.

찌직.

라온이 볼 안쪽 살을 강하게 씹었다. 쇠를 핥은 듯한 피 맛이 입안을 적셨다.

‘크으으….’

강한 고통을 느껴도 머리가 차가워지지 않았다. 뇌리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손과 발에 힘이 가득 차올랐다.

‘참아야 해. 무조건 참아야 해.’

데루스 로베르트는 자신이 아는 그 누구보다 의심이 많고, 조심스러운 인간이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살기나 분노를 일으켰다간 골치 아파진다.

‘제발. 제발.’

다행히 데루스와의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놈이 더 다가오기 전에 정신을 차려야 했다.

‘제기랄!’

억지로 감정을 누르려고 했지만, 탄성을 지닌 고무처럼 오히려 더 강하게 치고 올라왔다.

-네놈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냐.

라스가 옆으로 다가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저 멀대를 보고 왜 그런 분노를 끌어 올리는 것이냐.

‘으음….’

라스와 놀아줄 정신도 없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에만 집중했다.

-으음, 그러고 보니 이 분노는 네놈이 본왕을 불렀을 때와 결이 같은….

‘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라스를 보자마자, 녀석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불의 고리!’

라온이 짧게 숨을 뱉어내고서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우우우웅!

일곱 개의 고리가 공명하며 끓어오르던 감정을 가라앉혔다.

분노로 붉게 물들던 머릿속을 푸른 파도가 쓸어내린 듯 뇌리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불의 고리조차 잊어버리다니….’

정신이 아예 나갔었어.

불의 고리를 운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분노한 것을 보면 놈에게 복수하겠다는 의지가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아니, 정신을 못 차리는 게 당연한 건가?’

20년이 지났어도 데루스 로베르트에게 목이 날아갔을 때의 광경은 아직 생생하다.

무너지는 내 몸, 더러운 벌레를 보는 듯한 데루스의 차가운 눈동자 그리고 뒤집힌 달까지. 죽었을 때 본 기억은 아직도 머릿속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사람의 인생을 제멋대로 가지고 놀다가 쓸모가 다했을 때 처분한 원수를 보고 이성을 유지하라는 건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후우우.

라온이 느릿하게 호흡하며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운용했다. 전력으로 고리를 공명시키며 영혼의 격을 가라앉혔다.

전투할 때처럼 혼을 드높이는 게 아니라, 그림자에 몸을 숨기듯 모든 것을 감췄다. 가진 힘 이상이 드러나지 않게 모든 기운을 꼭꼭 내리눌렀다.

-네놈, 오늘 이상하느니라.

라스가 대체 무슨 일이냐며 눈매를 좁혔다.

‘별거 아니야.’

라스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라스가 있어서 다행이야.’

요 솜사탕이 미리 데루스 로베르트의 존재를 말해주고, 불의 고리에 대한 힌트까지 준 덕분에 제대로 마주치기 전에 감정의 폭발을 멈출 수 있었다.

이런 때까지 도움을 주다니, 아낌없이 주는 라스의 영업은 오웬 왕국에서도 이어지는 것 같았다.

“허, 천검성까지 오셨군요.”

삼왕자가 다가오는 데루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천검성. 그래. 저 망할 놈의 이명이었지.’

천검성은 하늘에 닿은 검의 성인이라는 뜻을 가진 이명이다.

진짜 데루스가 어떤 놈인지 안다면 천검성이 아니라, 쓰레기라고 불러야겠지만 놈은 누구보다 고고한 이명을 가지고 있었다.

라온은 거의 근접한 데루스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은 느꼈을 수도 있어.’

자신이 아는 데루스라면 조금 전 격해진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렸을 수도 있다. 어떤 질문이 나오더라도 당황하지 않도록 다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천검성을 뵙습니다!”

삼왕자는 데루스 앞으로 걸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글렌에게 인사를 했을 때와 같은 수준의 예의였다.

“천검성을 뵙습니다.”

셰릴과 리메르는 무릎은 꿇지 않고, 고개만 숙였다. 라온은 놀란 표정을 연기하며 두 사람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그리어 님과 지그하르트의 영웅분들이시군요. 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데루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이로 보나, 지위로 보나 한참 아래인 삼왕자와 지그하르트 검사들 모두에게 존댓말을 했다.

‘이런 점이 역겹지.’

음지에서 암살자와 세작, 노예를 다루는 놈이 겉으로는 모든 사람에게는 존엄이 있다면서 항상 존댓말을 하는 점이 더럽게 역겨웠다.

“북멸왕께서는 안 보이시는군요.”

“전하와 차를 즐기고 계십니다.”

삼왕자가 알현실을 돌아보며 웃었다.

“북멸왕과 묵검존의 티타임이라니, 이건 안 갈 수가 없겠군요. 음?”

데루스가 빙긋 웃었다. 바로 알현실로 향하려던 그와 눈을 마주쳤다.

“금발적안. 설마 당신이….”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합니다.”

토할 것처럼 울렁거리는 속을 꽉 부여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설화검협!”

데루스가 손뼉을 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설화검협의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남쪽에서도 새로운 영웅의 이야기로 떠들썩했었죠.”

“과찬이십니다.”

“직접 보니 그 소문들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겠습니다. 확실히 발군의 성취입니다. 동 나이대에는 상대가 없을 듯하군요. 그런데….”

그의 푸른 눈동자가 은은한 검은빛을 토했다.

‘이 자식….’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놈의 밑에서 썩었던 난 알 수 있다. 저 눈빛은 무언가 걸리는 점이 있다는 뜻이다.

“조금 전에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시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그 말과 함께 내려오는 데루스의 음습한 시선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꽉 조여들었다.

‘역시 알고 있었어.’

감정적으로 격해졌던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데루스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의심을 담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미리 준비해놓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뇨.”

라온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필사적으로 감정을 가라앉혔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묵검존을 뵈었을 때 가주님과는 다른 결의 기세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심장을 뚫을 듯한 예리함에 긴장하여 저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진 모양입니다.”

“허어! 벌써 그분들이 가진 무학의 결을 느낄 정도라니, 정말 대단하시군요.”

데루스가 헛바람을 흘렸다.

“아닙니다. 두 분께서 스스로를 드러내 주신 덕분입니다.”

미소를 지으며 데루스의 시선을 살폈다. 얼굴은 웃지만, 눈은 웃지 않는다. 놈의 안구 속 깊은 곳이 짧게 번들거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놈을 가까이에서 받들었던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놈은 이번 일이 아니라, 그 전부터 자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역시 나를 노리고 있던 건가?’

의심을 풀었다는 안도가 다가오기 전에 다시 위기감이 뇌리를 적셨다.

‘하긴 계획을 깨부쉈으니까.’

요난 가문을 먹겠다는 데루스의 오래된 계획을 사정없이 깨부쉈으니, 놈이 저런 반응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날 죽이고 싶겠군.’

지금은 웃고 있지만, 데루스는 지금 당장 자신의 목을 비틀고 싶을 것이다.

‘아니 이미 진행 중이려나.’

라이벌 가문에서 나온 최연소 마스터에 본인의 계획마저 부쉈으니, 자신을 노리는 계획은 이미 실행 중일 가능성도 있었다.

“저희 막내가 설화검협의 열성 팬입니다. 나중에 연회에서 가벼운 대화라도 한 번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데루스는 뒤에 있던 소년을 앞으로 데려왔다. 은발의 푸른 눈. 데루스와 비슷한 외모지만 아직 순수함이 찬 눈빛이 뜨겁게 반짝였다.

“레, 레폰 로베르트라고 합니다!”

전생에선 보지 못한 아이다. 나이대를 보니, 자신이 죽은 이후에 태어난 것 같았다.

‘역시 대단해.’

살기 가득한 속마음을 감추고, 부드럽게 웃으며 아들을 소개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조금 전 폭발하여 모든 것을 망칠 뻔한 자신이 꼭 배워야 할 자세였다.

“라온 지그하르트입니다.”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자, 레폰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어, 어! 저, 저는 그 성자님을 구하셨던 전투에서. 아니, 하분 성에서부터 병사들을 구한 그 전투부터 라온 님을….”

“레폰. 라온 님과 대화는 나중에 하고 일단 검존께 인사부터 하자꾸나.”

“아, 예!”

“나중에 뵙죠.”

데루스는 덜덜 떨며 입을 여는 레폰을 데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두 사람 뒤에 데루스와 비슷한 외모의 청년이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눈빛과 입매에는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이놈도 왔군.’

저놈은 알고 있다. 데루스의 셋째 아들이자, 현재 대륙십이성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카디스 로베르트였다.

라온은 로베르트 검사들과 스쳐 지나간 뒤 왕성 밖으로 나갔다.

“이쪽으로 오시죠. 오웬 왕성의 자랑인 검묘부터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삼왕자는 활짝 웃으며 지그하르트 일행을 이끌었다.

라온은 그 뒤를 따라가며 주먹을 펼쳤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찢어진 상처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다행이야.’

뒤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 복수심이 꺼지지 않아서. 그리고 네가 20년 전보다 더 높은 곳에서 있어 줘서.’

데루스가 은퇴하든가, 죽을까 봐 걱정했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놈은 더 강해져서 더 높은 위치에 서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라온이 피에 젖은 손을 털며 미소를 지었다.

‘하늘에서 땅으로 추락시켜 줄 테니까.’

*     *      *

로엔은 씁쓸한 향의 차를 즐기는 글렌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굉장히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군.’

글렌은 무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지만, 실제 그의 속마음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건 모두….’

맞은편에 있는 오웬의 국왕 레크로스와 왕성까지 안내해주었던 삼왕자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그저 건강하게만 크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광풍부단주를 보니 그 생각이 조금은 바뀌더군요.”

레크로스가 차를 부드럽게 흘려넘기고서 미소를 지었다.

“19살에 마스터 중급을 넘어서는 무력. 본래 마스터는 단계별로 큰 차이가 나는 경지지만, 저 아이는 상급에게도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는 놀랍다는 듯 짧게 헛바람을 흘렸다.

“어떻게 저런 친구를 키우신 겁니까? 비법을 좀 알려주시지요.”

로엔이 레크로스 국왕의 말을 들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칭찬 덕분이지.’

오웬의 삼왕자로 모자라, 오웬의 국왕인 레크로스마저 라온을 칭찬하고 있으니, 글렌의 기분은 이미 하늘로 떠오른 상태였다.

손을 살짝 떠는 것을 보니, 곧 참지 못하고 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크음, 그 아이가 알아서 한 거지. 난 딱히 한 게 없소.”

글렌은 입을 막은 채 헛기침을 하며 손을 저었다. 별거 아니라는 듯한 제스처였지만, 뒤에서 보면 입가에는 이미 깊은 우물이 피어나 있었다.

‘어쩔 수 없는 팔불출이시라니까.’

손주 앞에서 억지로 감정을 숨기는 부작용 때문인지, 글렌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라온의 칭찬만 들었다 하면 헛기침을 하며 입매를 끌어 올리는 건 자동반사나 마찬가지였다.

‘이젠 솔직해지셔도 좋으련만.’

리메르의 말대로 마음을 터놓고 손주 사람을 밝혀도 좋겠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글렌을 모셨기에 그의 생각도 이해가 갔다.

‘그래도 세 사람이 함께하는 모습은 보고 싶군.’

이룰 건 모두 이뤘기에 미련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글렌이 라온, 실비아와 더 가까워져서 함께 밥을 먹고 웃는 모습은 꼭 보고 싶었다.

로엔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글렌과 라온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을 때 시종장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전하. 천검성과 로베르트 가문이 도착했습니다.”

“예정보다 도착이 빠르군.”

레크로스 국왕이 입맛을 다시며 일어섰다.

“아무래도 자리가 하나 추가될 듯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소.”

글렌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국왕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응접실을 나섰다.

“천검성이라….”

로엔이 응접실 문을 바라보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가주님께서 재능으로는 발군이라 말한 적이 있었죠. 지금쯤이면 몰라볼 정도로 발전했겠군요.”

천검성 데루스 로베르트는 현 육황의 수장 중 가장 어리고 약했지만, 글렌은 그를 가장 높이 평가했었다.

“그랬었지.”

글렌이 빈 찻잔을 내려놓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예상이 조금 잘못된 듯하구나.”

“예? 그게 무슨….”

“그의 재능은 내 예상을 뛰어넘었어.”

그는 천천히 열리는 응접실의 문을 돌아보았다. 미소를 짓는 데루스 로베르트를 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     *      *

검묘는 검의 무덤이라는 음울한 뜻과 달리 밝은 곳이었다.

푸른 수목이 찬란한 생기를 발하고, 각종 검의 조각들이 우아한 분위기를 가꿔냈다. 무덤이라기보다는 잘 가꾼 정원처럼 보였다.

“허….”

라온은 검처럼 다듬어진 수풀을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이거 평범하게 만든 게 아니야.’

지금 눈앞에 있는 수풀의 검은 정원 가위로 다듬은 게 아니다. 수풀의 끝에서 느껴지는 예검의 기세. 이건 진검으로 검술을 펼쳐서 검의 모양을 만든 게 분명했다.

‘대단하네.’

-어이.

검의 수풀을 보며 헛바람을 흘릴 때 라스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까 그놈 누구냐.

‘뭐?’

-그 얍실하게 생긴 멀대와 무슨 관계냐고 물었다.

라스의 눈빛이 서리를 녹인 듯 시퍼렇게 번쩍였다.

-네놈이 끌어 올린 분노의 감정은 처음 본왕을 부를 때와 비슷할 정도였다. 그놈이 네 분노의 대상인가?

‘음….’

이럴 때는 예리하네.

괜히 분노의 군주가 아닌지 라스는 분노의 감정을 느낄 때만큼은 날카로운 감을 가졌다.

그래도 말해줄 수는 없지.

라스와 관계가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환생에 대해 말하는 건 시기상조였다.

어떻게 해서든 얼버무리는 게 좋겠어.

라온이 마음을 정하고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원수는 맞아.’

그것까지는 속일 수가 없어서 솔직하게 말했다.

-그럴 줄 알았느니라. 다만 좀 이상하군.

라스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저놈은 네놈을 처음 보는 느낌이었는데? 거기다 당시의 네놈은 한참 어리지 않았더냐. 저놈과 무슨 원한을 쌓은 것이냐.

‘…….’

-말해보아라.

‘으, 음식.’

머리를 굴려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라스가 그나마 넘어갈 법한 단어를 꺼냈다.

-음식이라고?

‘어렸을 때 저놈이 내, 내 스튜의 마지막 그릇을 가져갔거든. 너도 알다시피 그때의 나는 가문에서 없는 취급을 받을 때라 잘 몰랐을 거야.’

라온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안 통하겠지?’

내가 생각해도 미친 소리니까.

라스가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이건 좀 선을 넘었다. 말해놓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크윽, 이 자식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녀석의 입 모양을 보니 호통이 나올 기세였다.

-그런 일이면 빨리 말해야 할 것 아니냐!

‘어?’

-어릴 때는 음식에 대한 집착이 강하지. 더군다나 마지막 그릇이라니! 대가리를 깨지 않은 것이 용하구나!

‘…….’

라온이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라스는 음식에 관해서는 예상을 뛰어넘는 바보였다. 고마우면서도 슬퍼졌다.

-진즉에 말했으면 본왕이 도와주었을 텐데! 하여튼 답답한 놈이로다!

‘…그러냐.’

-음식에 대한 원한은. 그것도 마지막 그릇에 대한 원한은 깊고도 깊지. 저놈이 인간 중 드물게 강하다고 해도 네놈은 꼭 그 복수를 해야 할 것이니라!

라스는 도와줄 테니, 그 원한을 꼭 갚으라고 중얼거렸다. 힘내라고 외치는 건 덤이었다.

“하….”

라온은 주먹을 부르르 떠는 라스를 보며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

가만히 있어도 퍼주는 라스가 도와준다는 건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만 이런 식으로 녀석의 도움을 끌어내다니, 인생이라는 건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크으으. 본왕이 다 열받느니라. 만약 본왕 앞에서 마지막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챙기는 놈이 있다면 대가리를 깨고, 세포 하나하나까지 모두 얼려버렸을 것이니라.

‘그, 그렇지….’

고맙기도 하고, 좀 안쓰럽기도 해서 오늘 저녁에 열릴 연회에서는 라스의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어야겠다.

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행을 따라갔다. 검묘의 하얀 길을 따라 쭉 올라가니, 바닥에 박혀 있는 검이 보였다. 주인을 잃은 지 한참 지났는지 칼날은 녹슬었고, 검병은 다 찢어져 있었다.

‘음?’

검은 한 자루가 아니었다. 이곳저곳에 세월을 탄 검들이 무수히 박혀 있었다.

지금까지 빛을 잃지 않은 명검도 있고, 다 낡아 빠진 보급형 검도 가득했다.

“이건….”

“여기가 진짜 검묘입니다.”

삼왕자가 뒤를 돌며 큼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꽂힌 검들은 오웬을 위해 싸웠던 영웅들의 검입니다. 그랜드 마스터든, 오러를 운용할 수 없는 병사든 오웬의 깃발 아래 검을 들었다면 모두 이곳에 검을 꽂을 수 있게 됩니다.”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자부심이 넘쳐 보였다. 언젠가 그도 이곳에 검이 꽂힐 거라는 기대감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뿌득.

라온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삼왕자의 말을 듣자, 전생의 기억들이 만화경처럼 떠올랐다.

로베르트를 위해 인생을 바쳤지만, 그 끝은 솥에 삶아지는 개였을 뿐인 지독한 세월이.

‘다르군.’

병사조차 이름을 남기는 오웬과 로베르트 가문에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었다. 가라앉혔던 분노가 다시 끓어 올랐다.

‘조금 이르지만 시작해야겠군.’

-무엇을?

‘복수.’

당장에 놈을 노릴 수는 없으니 주변부터 천천히 갉아먹어야 한다.

‘그 시작은….’

라온은 비웃음을 흘리며 지나간 카디스를 떠올리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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