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11화 (311/653)

제311화

라온은 깎아지른 듯한 성벽을 눈앞에서 보며 눈매를 좁혔다.

‘기사들의 왕국 오웬이라…….’

더할 나위 없는 이름이네.

기사들의 왕국이라는 이름답게 왕성에 다가갈수록 서릿발 같은 기세가 강해진다. 개인의 검기가 아니라, 함께 쌓아올린 군기가 물결치고 있었다.

“마중 나왔나 본데?”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성문 앞을 가리켰다. 그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거인이 드나들어도 문제 없을 법한 거대한 성문 앞에 서 있는 청년과 중년인이 보였다.

‘저들은…….’

그리 변하지 않은 두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들의 이름이 바로 떠올랐다.

5년 전 지그하르트에 찾아왔었던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과 타르탄 공작이었다.

“북멸왕을 뵙습니다!”

삼왕자 그리어와 타르탄 공작은 글렌이 성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본인들의 왕국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오랜만이로군.”

글렌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삼왕자와 타르탄 공작에게 일어나라 손짓했다.

“저희가 지그하르트에 간 이후 처음이니 5년 정도 된 듯합니다.”

“그대가 그리 성장한 모습을 보니, 시간이 흐르기는 흐른 모양이야.”

“아, 아닙니다! 라온 검사에 비하면 전 아직 애송이에 불과합니다!”

갑작스러운 칭찬을 들은 삼왕자가 얼굴을 붉히며 뒤에 있는 라온을 가리켰다.

“크흠, 그런가.”

글렌은 헛기침을 하면서 삼왕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상할 정도로 부드럽고 인자한 느낌의 두드림. 평소의 글렌이 아닌 듯 보였다.

“예. 아마 이야기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지만, 라온 검사가 제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습니다.”

삼왕자는 카멜룬 근처 언덕에서 백혈교와 싸웠던 때를 말해주었다. 진혼검의 첫 실전이었던 전투였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군.”

글렌은 뒤를 한 번 돌아보며 눈매를 좁혔다. 왜 말을 하지 않았냐고 꾸짖는 듯한 눈빛이었다.

“저 아이는 필요한 말을 제외하곤 하지 않으니.”

“이전에도 느꼈지만 라온 검사님은 무인의 귀감이 되는 분입니다. 겉으로만 겸양을 떠는 자들과 다릅니다.”

“커험, 그저 말수가 적은 거지만,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

글렌은 조금 더 큰 헛기침을 하고서 삼왕자의 어깨를 더 힘을 주어서 주물렀다. 삼왕자는 평소에 글렌을 존경했는지 좋아서 죽을 듯한 표정이었다.

“음…….”

라온은 옅은 미소를 짓는 글렌과 삼왕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외로 죽이 잘 맞네.’

이상하게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대화가 잘 통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무력은 확실히 성장했군.’

카멜룬에서 만났을 때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삼왕자의 성취는 발전해 있었다.

마스터까지는 아직 거리가 멀지만,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엔 확실히 발을 디뎠다.

‘다만…….’

라온이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왕성을 보며 감탄하는 버렌과 멍하니 하늘을 보는 루난 그리고 심상 공부에 빠진 마르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쪽의 성장이 더 눈부시지.’

5년 전 밑에서 삼왕자를 지켜보았던 버렌, 루난, 마르타는 조금이지만 삼왕자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 있었다.

오웬 왕국에서 전력으로 밀어주는 삼왕자보다 저 셋이 더 빠르게 성장했다는 건 그만큼 수라장을 헤쳐왔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저 녀석들은 멈출 생각도 없어.’

본인을 위해서든, 동료를 위해서든 버렌과 마르타, 루난은 지금도 강해지겠다는 욕심으로 가득하다.

검계현신을 사용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저 열정이 꺼지지 않을 테니, 앞으로는 더 차이가 벌어질 것이다.

“북멸왕께서도 대단하셨지 않습니까. 이번에 홀로 백혈교주와 타천을 무찌른 이야기를 듣고 피가 끓어 올랐습니다.”

삼왕자는 좋은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서 글렌의 활약상을 말하며 활짝 웃었다.

“그런가.”

하지만 글렌의 안색은 본인의 칭찬을 듣고서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삼왕자의 어깨에서 손을 뗀 후 시선까지 돌렸다.

“음,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시죠.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그렇겠네요.”

분위기가 바닥에 깔린 것을 느낀 타르탄 공작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삼왕자의 어깨를 잡았다. 삼왕자가 실수를 알아차리고 옆으로 물러섰다.

쿠구구구구!

거대한 성문이 반으로 갈라져 열리자, 왕성에서 뻗어 나오는 기파가 불길처럼 일어났다.

성문 앞에서 열을 맞춘 기사들에게서 뿜어지는 기세였다.

‘강해.’

괜히 왕궁에 있는 게 아닌지, 줄을 맞춰 선 기사들 한 명 한 명은 고수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무력을 갖추고 있었다.

‘오길 잘했어.’

다른 육황의 자제들뿐만이 아니라, 이들과 대련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득일 것 같았다.

“라온 검사.”

기대감에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옆으로 삼왕자가 다가왔다. 이전보다 더 성숙해진 눈빛이지만, 웃는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몸은 괜찮소? 납치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을 많이 했소.”

처음 와서 몸을 걱정하는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성격도 그대로인 것 같았다.

“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 다른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내 판단은 다르오.”

삼왕자의 푸른 눈동자가 깊은 바다처럼 진한 이채를 띄었다.

“난 라온 검사가 얼마나 강하고 현명한지도, 에덴과 백혈교가 얼마나 사악한 놈들인지도 알고 있소. 정말 운만 좋았다면 지금 이곳에 라온 검사는 있지 않았을 거요.”

“음…….”

좀 아쉽네.

라온이 살짝 눈매를 찡그렸다. 삼왕자는 아쉽게도 자신을 제대로 봐주고 있었다.

-왜 아쉬운 것이냐?

라스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놈을 인정해주니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럼 왕자와 제대로 싸우기 힘들잖아.’

-무슨…….

‘지금쯤이라면 삼왕자도 오웬의 비기를 배웠을 텐데, 그걸 보기 힘들다고.’

삼왕자는 이미 자신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런 상태라면 대련을 한다고 해도 비기를 숨길 가능성이 높았다.

‘무학을 빼내기 가장 좋은 상대는 날 무시하는 놈들이야.’

에덴에 납치된 이후 설화검협의 명성에 거품이 끼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며 무시하는 시선들이 다시 나타났다.

친목회에서 시비를 걸어오는 건방진 육황의 자제들을 밟아주며 무학을 빼낼 생각에 기대했는데, 삼왕자의 눈빛을 보니 오웬 쪽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네놈은 대가리에 기름이라도 바른 것이냐. 뭐가 이렇게 잘 굴러가는 건지…….

라스는 징한 놈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왕자님은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냈다고 말하고 싶지만, 꽤 위험한 상황이 많았소. 백혈교는 정말 어디에나 있더군. 이전에는…….”

삼왕자는 계속 백혈교와 싸워왔는지 혈기만 봐도 구역질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와 잡담하다 보니, 어느새 왕성의 중심에 들어와 있었다.

고귀해 보이는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검을 쌓아 올린 듯한 빗금으로 가득한 철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곳이 전하의 알현실입니다.”

타르탄 공작이 두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열기를 띤 눈빛에서 그가 현 국왕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보이는 듯했다.

“음…….”

라온이 웅장한 철문을 올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안쪽에서부터 수백 년 동안 칼날만을 벼린 듯한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글렌에게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기파였다.

쿠구구궁!

타르탄 공작이 노크하자, 알현실의 문이 부드럽게 열리고 그 내부가 드러났다.

따스해 보이는 갈색 기둥들 앞에 기사들이 서 있었는데, 지금까지 본 자들과는 격이 다른 강자들이었다. 국왕을 수호하는 최강의 방패, 오웬의 근위 기사단이었다.

고오오오오!

강대한 기운을 두른 기사들의 벽을 지나자, 중앙 왕좌에 앉아 있는 중년인이 보였다. 금발에 푸른 눈. 삼왕자와 비슷한 인상이었지만, 조금 더 날카롭고 곧았다.

“크으…….”

라온이 중년인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강렬해.’

중년인이 기파를 뿜어내는 것도 아니건만 팔에 닭살이 올라온다. 그저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기운이 이미 하늘에 닿아 있었다.

무력이 낮은 자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마스터 이상에 오른 자들은 모두 중년인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오웬의 국왕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왕이라고 왕국의 최강자는 아니다. 오히려 왕이 강하지 않은 왕국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오웬은 다르다. 오웬의 왕은 항상 최강이었으며 최전선에서 검을 들어왔다.

‘묵검존 레크로스.’

지금 저 왕좌에 앉아 있는 중년인도 마찬가지. 저 남자가 당대 오웬의 국왕이자, 최강의 기사라 불리는 묵검존 레크로스 알버른 드 오웬이었다

-역시.

라스가 레크로스를 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너희 영감 정도는 아니지만, 제대로 쌓아 올린 무력이다. 인간들도 나름 발전했군.

녀석은 감탄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에게 이 정도 인정을 받았다는 건 레크로스의 무력도 하늘에 닿아 있다는 뜻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레크로스가 왕좌에서 일어나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본래 왕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지만, 글렌을 대우하기 위해서였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북멸왕.”

“그렇구려. 전쟁 이후 처음이니, 길었군.”

레크로스와 글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글렌과 레크로스가 유일하게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은 진짜인 것 같았다.

“백혈교주와 타천을 동시에 베었다고 들었는데, 헛소문이 아니었군요. 이젠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올라가신 듯합니다.”

레크로스는 극한까지 다듬은 예리한 기파와 달리 부드러운 인상과 음성을 가졌다.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과찬이오. 묵검존 역시 그때와는 몰라볼 정도요.”

글렌은 묵검존을 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가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뜻이었다.

“이쪽이야말로 과찬이십니다. 늙었는지 검이 제멋대로 나갑니다.”

“새로운 경지에 오른다는 자랑을 그리도 하는구려.”

“이런 걸 알아줄 사람이 가주님뿐이지 않습니까.”

레크로스는 고개를 저은 후 글렌의 뒤편을 살폈다. 그의 눈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셰릴이나, 로엔, 리메르가 아닌 라온이었다.

“허…….”

레크로스의 푸른 눈동자가 타원으로 말려 들어갔다.

“자네가 라온 지그하르트인가?”

“인사가 늦었습니다. 광풍부단주 라온 지그하르트라 합니다. 폐하.”

라온이 손을 가슴에 올린 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셋째보다 1살 어리다고 들었는데, 그럼 19살인 건가?”

“그렇습니다.”

“설화검협에 관한 소문을 듣긴 했지만 19살에 벌써 마스터 중급에 올랐을 줄이야. 아니, 그 정도가 아니로군. 마음먹고 싸우면 그 이상의 무력도 발휘하겠어.”

레크로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에덴의 소굴에서 어떻게 버텼나 했더니 그 이유가 있었군.”

“허어!”

“마, 마스터 중급?”

“19살에 마스터 중급이라니…….”

기둥 앞에 서 있던 근위 기사들에게도 라온의 경지는 놀라웠는지 무표정을 깨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

“우리 셋째도 어디에 내놔도 밀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저 친구는 반칙 수준이지 않습니까.”

레크로스가 다시 글렌에게 시선을 돌리며 헛바람을 흘렸다.

“저런 손자가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시겠습니다.”

그는 부럽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는 아니고, 열심히는 하는 아이지요.”

글렌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그의 목소리가 삼왕자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보드라워졌다.

“그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 친구가 이대로 성장한다면 육황오마의 균형도 깨질 듯합니다.”

19살에 마스터 중급에 오른 건 묵검존에게도 놀라운 일인지 그는 라온을 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질투나, 질시가 아닌 흥겨운 시선. 다른 세력의 인재가 강한 것도 좋아하는 것을 보면 듣던 대로 성격 자체가 대범한 것 같았다.

“커험! 아시지 않소. 유망주라고 떠들던 자들 중 실제로 빛을 내는 건 극소수라는 것을. 저 아이에겐 아직 먼 일이오.”

글렌은 입에 주먹을 대서 헛기침을 한 뒤 눈매를 좁혔다. 칭찬이 마음에 안 드는 건지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여전히 엄하시군요. 그러니 저런 아이를 키운 걸지도 모르겠지만.”

레크로스는 글렌과 달리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라온을 바라보았다.

“앞으로도 정진하게나. 훌륭한 무인을 마주하는 건 큰 기쁨이니.”

“감사합니다.”

라온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차나 한잔하시겠습니까? 서쪽에서 들어온 좋은 찻잎이 있습니다.”

“좋소.”

레크로스의 제안에 글렌이 고개를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어.”

“예! 전하!”

“지그하르트의 손님들께 왕궁을 소개해드리도록.”

“알겠습니다!”

삼왕자는 몸을 돌려서 지그하르트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라온은 삼왕자를 따라가기 전에 뒤를 돌아 미소를 짓는 글렌과 레크로스를 보았다. 글렌이 저렇게 웃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서 뭔가 신기했다.

-흐음……

복도를 지나 다시 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라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하나가 더 오고 있구나.

녀석은 복도 밖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밝은 듯하면서도 음습한 기질이다. 아까 그놈보다 더……

‘음?’

대답을 하려다가 멈춰 섰다.

갑자기 심장이 거칠게 뛴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저벅.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왕궁의 복도에서 오직 하나의 발걸음 소리만 들려왔다. 너무나 익숙하고 듣고 싶지 않았던 소리가 귀를 울렸다.

“으…….”

턱이 덜덜 떨려서 윗니와 아랫니가 마구잡이로 부딪쳤다. 주먹을 끝까지 말아쥐어 손아귀에서 핏물이 맺혔다.

라온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푸른빛 제복을 입은 검사들의 중심에서 한 남자가 다가온다.

서리를 빗은 듯한 은발, 차갑기 그지없는 푸른 눈 그리고 해를 보지 않고 산 듯한 새하얀 피부와 깎아지른 듯한 이목구비까지.

데루스 로베르트.

죽었다가 살아나도 잊지 못한 그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