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09화 (309/653)

제309화

“글렌 지그하르트.”

로드라 불린 금발의 노인은 글렌을 올려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내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오.”

“찾아온 이유라….”

글렌은 노인을 굽어보며 가늘게 고개를 저었다.

“드래곤들과의 거래는 이미 끝났을 텐데.”

“다 알고 있으면서 말장난을 치다니 당신답지 않구려.”

질책을 하는 듯 노인의 눈빛에는 옅은 화가 어려 있었다.

“나다운 게 뭐지? 우리가 그런 것을 논할 정도로 친했던가?”

글렌이 손등에 턱을 괴며 차게 웃었다.

‘귀찮은 놈이 왔군.’

눈 앞의 금발 노인은 드래곤. 그것도 모든 드래곤들을 통솔하는 드래곤 로드였다.

올 때마다 좋은 소리를 가져오지 않으니, 저 얼굴을 보고 있으면 짜증만 돋아났다.

“후우, 좋소. 내 입으로 말해드리지.”

드래곤 로드가 짧게 혀를 차고서 허리와 목을 세웠다. 고귀함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녹인 듯한 우아한 몸가짐이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당신의 무력은 이 대륙의 균형을 무너뜨릴 정도요. 세계의 중재자인 우리 드래곤조차 넘어설 정도니까.”

그는 조금 분한 듯한 눈빛으로 글렌을 바라보았다.

“지그하르트의 선조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어떻게 인간이 그런 힘을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힘은 어긋나있소.”

“어긋나 있다?”

“당신들의 힘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세계의 중심을 망가뜨리지. 인과율조차 벗어나는 힘이라는 뜻이오.”

“드래곤들의 힘도 균형을 깨뜨리지 않나? 최강의 종족이 하는 말치고는 우습군.”

글렌이 드래곤 로드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우리는 기나긴 세월에 걸쳐 천천히 힘을 쌓고 있소. 고작 100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하늘에 닿는 당신들과는 다르오.”

드래곤 로드가 손가락으로 길쭉한 선을 그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혈육이 납치당해도 이곳에서 죽치고 있으라는 말인가? 구할 힘이 있음에도?”

“넓게 보셔야 하오. 혈육이라고 해봐야 세계의 시선에서는 티끌밖에 되지 않소. 당신처럼 하늘에 닿은 자가 생각해야 하는 건 대의. 세계의 흐름과 균형이오.”

“지랄을 하는군.”

“그게 무슨….”

“개소리라고 했다.

글렌의 미소가 진해지며 그에게서 지독한 살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해츨링이 사냥당하거나, 다치면 드래곤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그 종족을 멸망시키면서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해츨링은 500살을 넘지 않은 어린 드래곤으로 모든 드래곤의 보호를 받는다. 해츨링을 건드렸다가 드래곤 무리에게 멸망 당한 왕국이나 가문도 여럿이었다.

“그, 그건….”

드래곤 로드가 대답하지 못하고 눈매를 찡그렸다.

“우리는 인간과 다르잖소! 드래곤에겐 이 대륙의 균형을 수호하고 어그러짐을 중재하는 사명이 있기에….”

“결국 너희는 되고 우리는 안 된다는 이중적인 태도인가. 대륙의 수호자이자, 중재자가 하는 말치고는 우습군. 하긴 매번 그런 식이니 그때 그놈도 놓쳤겠지. 아니, 도망갔다는 게 옳은 말인가.”

“크윽….”

“대의니, 대륙의 균형이니. 전에는 그 혓바닥에 속아주었지만, 이번에는 달라.”

글렌은 서늘하다 못해 섬뜩한 눈빛으로 드래곤 로드를 노려보았다.

“내 손자는 네놈들의 해츨링 수백 마리보다 더 귀한 녀석이다. 내 행동에 후회는 없으니, 그만 입 닫고 나가도록.”

“잘 알고 있을 텐데.”

드래곤 로드는 물러서지 않고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에겐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소. 이번 일 덕분에 그 짧은 시간이 더 줄었겠지.”

“…….”

“글렌 지그하르트. 당신이 남기고 간 원인은 거대한 결과가 되어 이 가문을 덮치게 될 것이오. 지금부터라도 잘 생각….”

“또 개소리.”

글렌의 건조한 음성이 드래곤 로드의 목구멍을 막았다.

“내가 쌓은 업보는 모두 내가 가져간다.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아.”

“그, 그런 일을 하면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의 진중한 눈빛에는 자그마한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이전에도 지금도 난 정해진 길 따위는 걷지 않았으니까.”

“으음….”

“하나 더.”

글렌의 시선이 드래곤 로드를 향했다. 굳게 가라앉은 눈빛에서 오싹할 정도로 예리한 기파가 뿜어졌다.

“혹시라도 우리 아이들을 건드린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대륙이 무너지건, 멸망하건 상관없이 세상에 있는 모든 드래곤의 목을 베어버릴 테니까.”

그는 당장이라도 싸울 듯 검병으로 손을 가져갔다.

“후우, 결국 이렇게 되는군. 우린 당신과 싸울 생각은 없소. 다만….”

드래곤 로드가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의 뒤편 갈라지며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차원이 열렸다.

“내 충고를 무시했다간 분명 후회하게 될 거요. 글렌 지그하르트.”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차원 속으로 사라졌다.

“후회?”

글렌은 드래곤 로드가 사라진 공간을 보며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후회 따위는 항상 안고 있다.”

*     *      *

찌지이이잉!

연무장을 뒤덮었던 검은 구슬이 갈라지고, 라온과 도괴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크음.”

도괴가 사라지는 검계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검은 칼날의 개수를 늘렸는데, 적응하는 속도가 더 빨라지다니….”

첫 대결 때보다 더 진지하게 검계를 열었는데, 라온은 이전보다 훨씬 쉽게 검계를 파훼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단순히 강해진 게 다가 아니야.’

이놈 검계에 다가가고 있어.

소리로도 잡을 수 없도록 특별하게 숨겨둔 칼날의 위치까지 파악한 것을 보면 라온은 단순히 경지와 오러만 올라간 게 아니라, 검계현신의 진의에 걸음을 내디딘 게 분명했다.

‘미친놈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군.’

라온은 이제 19살인 꼬맹이다. 남들은 간신히 검기를 날릴 때건만 이 괴물은 마스터 중급에 오른 것도 모자라서 검계에도 접근했다.

육체에서 혼이 쭉 뽑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네놈, 에덴에서 대체 무얼 하고 온 것이냐.”

아무리 생각해봐도 납치된 놈의 무력 수위가 아니다. 영약을 먹고, 누군가에게 검술 수련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음….”

라온이 당황한 도괴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련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멀린에게 영약 2개를 빼냈고, 금면사와 싸우며 실전 감각을 키웠으며, 가면을 써서 영혼까지 흡수했다. 따지고 보면 이곳에 있을 때보다 더한 수련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후우, 머리가 아프군. 질린다. 질려.”

도괴는 술이나 마셔야겠다고 중얼거리며 연무장을 떠났다.

“흐음.”

라온이 제천검을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아쉽네.’

이제 막 흥이 올랐는데, 끝나서 살짝 입맛이 썼다. 조금 더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내일은 단주님을 찾아다녀야겠는데.’

-귀때기를?

‘그래. 오러가 얼마나 늘었나 보자면서 가볍게 몸을 풀면 좋을 것 같아.’

-…또 곡소리가 들리겠군.

라스는 귀때기의 명복을 빈다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그냥 적당히 할 거야.’

-본왕이 장담하지. 네놈의 적당히와 귀때기의 적당히에는 민트초코와 쿠앤크 수준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쿠앤크가 나은 거지?”

-무슨 헛소리냐! 당연히 민트초코 압승이지!

‘아닐 텐데.’

라스와 잡소리를 하며 홀로 검술 수련을 하려 할 때 연무장 문이 다시 열리고 비연회주 채드가 들어왔다.

“비연회주님?”

“라온 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채드가 앞으로 다가와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예. 오랜만이네요.”

라온이 고개를 숙이며 채드의 상태를 살폈다.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어색한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채드가 그란세빌에 대한 정보를 줄 때 10사도는커녕 7사도에 관한 내용도 없었다. 아무래도 납치 사건 때문에 고생을 했던 것 같다.

‘사실 비연회 잘못은 아니지.’

그란세빌 암시장 지부장인 데닝로즈도 사도와 멀린이 있다는 건 몰랐으니, 이 먼 곳에 떨어진 비연회주가 그들의 존재에 대해 알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다만 그 일을 떠나서….’

여전히 채드를 신뢰할 수는 없었다. 그의 행동에는 여러 가지로 의심할 부분이 너무 많았으니까.

“죄송합니다.”

채드는 그 지위가 무색하게도 바로 고개를 숙였다.

“제가 조금 더 자세히 알아봤어야 했는데, 실수하여 라온 님께 폐를 끼쳤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라온이 손을 저었다. 사과하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렇게 정중한 사과를 할 줄은 몰랐다.

“암시장 사람들도 몰랐으니, 비연회가 10사도나 멀린의 존재를 아는 건 무리죠.”

“그렇다고 해도! 저는 비연회주로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채드가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고 고개를 내렸다.

‘절대 밉보여서는 안 돼!’

이번 일을 통해 확신했다. 가주님이 가문에서 가장 아끼는 사람은 아들이나, 딸이 아닌 막내 손자 라온 지그하르트다. 이 사람에게 잘못 보였다간 비연회주고 뭐고 하루아침에 목만 남는다.

“이러지 마십시오.”

라온이 채드의 어깨를 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역시 이 사람은 이상해.’

말했듯이 이번 일은 비연회의 잘못이 아니다. 사과를 할 수는 있지만 이렇게 과하게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신뢰를 얻으려고 이렇게 나오는 것 같은데….’

생각하면 할수록 채드의 행동과 말은 과하다. 의심할 수 밖에 없다.

‘카룬이나, 발데르인가? 아니 다른 직계 쪽일 수도 있어.’

외부의 전쟁이 끝났으니, 다시 내부에서 시비나, 사건을 일으킬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이걸 받아주십시오.”

채드가 목갑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보약입니다. 체력과 정신력을 북돋아 주는 물건이죠. 다 나으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가져왔습니다.”

그는 품에서 책자도 하나 꺼냈다.

“이번 육황회의에서 주의할 사람이나, 상황을 적어놓았습니다. 참고해주십시오!”

“어….”

“그럼 저는 이만.”

채드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좋아. 완벽해.’

실수를 저지른 건 어쩔 수 없었지만, 후 대처는 완벽했다. 라온의 표정을 보니 잘 먹힌 것 같았다.

‘그럴 수 밖에.’

값비싼 보약에, 육황회의에 관한 정보도 주었으니, 좋아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이다.

채드는 결과에 만족하면서 5연무장을 떠났다.

라온은 멀어지는 채드의 등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하지?’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라. 친하지도 않은 것이 이리 잘해주는 것을 보니 1순위로 경계해야 할 놈이니라.

라스도 채드를 보며 이상하다고 중얼거렸다.

‘역시.’

암살자 교육을 받을 때도 이유 없이 베푸는 친절은 믿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라온은 채드가 준 보약을 만지며 눈매를 좁혔다.

‘채드….’

주의해야 할 사람이야.

*     *      *

일주일 뒤.

지그하르트 정문 양쪽에 수많은 검사들이 정렬해 있었다. 오웬으로 떠나는 글렌을 배웅하기 위한 배치였다.

‘음….’

라온도 출발 준비를 마치고, 중앙에 서서 광풍단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르타도 괜찮아 보이네.’

마르타에게 해주었던 말이 도움이 되었는지 그녀에게서 포기나 절망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활력이 넘치는 듯 보였다.

“버렌이랑 루난은 여전하고.’

버렌은 육황회의에 참석한다는 것만으로 기뻐서 히죽거렸고, 루난은 날카로운 눈빛을 버리고 예전처럼 맹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머리 위에 작은 나비가 날아와 앉아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근데 이 녀석들….’

그동안 수련을 한 건가?

2주 동안 연무장에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서 놀고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광풍단 검사들은 이 짧은 시간에 오러와 경지 모두를 상승시켰다.

확연히 발전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보니,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수련한 모양이다.

‘대단한데.’

검사들의 성취를 보니 게으름을 부린 건 사실 자신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감탄과 대견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대단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라스가 머리 위에서 광풍단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무력함을 알게 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들은 강해지는 법이니까.

‘무력함?’

-눈앞에서 네놈이 납치당하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 그때의 절망감이 저 애송이들을 움직이는 동력원이 된 것이지.

‘…그런가.’

광풍단이 어떤 생각으로 휴식 시간에도 검을 휘둘렀는지 알 것 같아 심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가주님께서 나오십니다!”

뒤에서 들려온 웅장한 목소리에 양옆에 선 검사들도, 출발을 위해서 대기하던 검사들도 모두 무릎을 꿇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라온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패도가 실린 걸음 소리와 함께 글렌이 옆을 스쳐 지나간다. 성장할수록 느껴지는 가공할 무력이 어깨 위로 흘러가 소름이 돋아 오르게 만들었다.

“일어나라.”

글렌은 이번에도 가장 앞에 서서 말에 올라탔다. 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그는 부하들의 앞에 서서 먼저 길을 뚫는 성향의 수장인 것 같았다.

수하들을 무조건 먼저 보내는 데루스 로베르트와 정반대였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글렌이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눈빛이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그하르트가 무엇을 담고 있는지만 보여주어라.”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좌측에서 로엔이 따랐고, 우측에서 셰릴이 움직였다.

천검대는 거대한 검기를 일으키며 그를 수호했다.

의심조차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글렌을 따르는 그들의 모습은 자신을 위하는 광풍단을 보는 듯했다.

라온은 가장 앞에 있는 글렌을 보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가주가 될 생각은 없지만, 가주님처럼은 되고 싶어.’

그의 절대적인 무력을 닮고 싶은 게 아니라, 누구보다 앞에서 싸우며 등으로 동료를 이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라온은 글렌의 등을 눈과 머리에 새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     *      *

“우와아아아아!”

“지그하르트 만세!”

“글렌 지그하르트!”

“북멸왕! 북멸왕! 북멸왕!”

오웬 왕국 지근에 있는 토르틴 시에 도착했을 때 시민들이 나와서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아니, 글렌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환호했다.

수많은 사람의 시선은 모두 글렌에게만 쏠려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재앙 그 자체인 백혈교주와 타천을 홀로 무찔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그하르트 검사들은 마치 글렌의 칭찬이 본인들을 향한 것처럼 자부심 넘치는 걸음으로 도시를 가로 질렀다.

“이야아아아아!”

“북멸왕! 북멸왕!”

“글렌 지그하르트!”

사람들의 환호와 손짓에서 반응하지 않고, 숙소로 향하던 글렌이 뒤를 돌았다. 그는 라온을 보며 앞으로 나오라는 듯 손짓했다.

“부르셨습니까.”

라온은 글렌의 옆에 서서 걸음을 맞췄다.

“이 환호가 들리느냐.”

“예.”

“저들이 지금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부르짖는 건 모두 나 때문이다.”

글렌은 차가운 눈으로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내가 백혈교주와 타천을 눌렀기에 저런 환호가 나오는 것이다.”

그 말이 맞다. 환호의 대부분은 글렌의 이름이었으니까.

“그럼 내가 없어진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건….”

무엇을 묻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서 일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 환호는 흙바닥에 깔리고, 지그하르트에. 아니, 내게 짓눌렸던 악의가 불길처럼 일어날 것이다. 그들 모두가 지그하르트를 노린다면 너는 어떻게 할 테냐.”

“…….”

라온이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글렌은 본인이 죽은 뒤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자신에게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할 겸 그 미래를 그려보았다.

‘예전이라면 떠났겠지.’

에덴에 납치되기 전이었다면 별관 사람들만 데리고 가문을 나왔을 것이다. 자신에게 지그하르트는 별 의미도 없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라.’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머리에 박혀 있던 지그하르트가 크게 달라졌다.

가문 그리고 사람. 별관을 떠나 이젠 지그하르트라는 이름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가문이 실망스럽다면 더러운 부분을 잘라낼지언정 떠날 수는 없었다.

‘그럼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해야겠지.’

작을지언정 이 가문에 도움이 될 일을 하고 싶었다.

“저는 굴리겠습니다.”

“굴린다? 무슨 의미지?”

“가문에 있는 검사들을 죽기 직전까지 굴려서 강하게 만들겠습니다. 글렌 지그하르트라는 가주 한 명이 아니라, 지그하르트라는 이름을 겁내도록.”

라온이 서서히 가라앉는 태양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해는 가라앉았다가도 다시 떠오릅니다. 가문의 이름 역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가주님이 사라져서 가문이 잠시 가라앉더라도 다시 떠오를 수 있도록 모두를 굴려서 깨어지지 않을 단단한 발판을 만들겠습니다.”

“그 말은 네가 가주라도 되겠다는 게냐.”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제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정말 가주 자리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냐.”

글렌은 무언가 딱딱한 고갯짓을 하고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관심이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음….’

라온은 쩝 입맛을 다시고서 다시 뒤로 돌아왔다.

‘마음에 차지 않은 건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솔직하게 말했고 그에 대한 후회는 없으니까.

*     *      *

그날 밤.

토르틴 시를 둘러 싸고 있는 뒷산에서 거대한 울림이 일었다.

“후우….”

글렌이 반으로 쪼개진 거대한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옅은 숨을 뱉어냈다.

“어찌 그리 현명한지.”

라온에게 미래에 관한 질문을 하고 돌아올 답은 하나라고 여겼다.

본인이 강해져서 가문의 벽이 되겠다는 대답. 진부하지만 그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답이었다. 누구라도 그리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온은 달랐다.

‘모두를 굴리겠다니….’

홀로 강해진다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강해지겠다는 뜻. 개인이 아니라, 가문으로서 성장하겠다는 말에 가슴이 크게 울렁였다.

‘그건 깨달음 얻은 이후의 목표였으니까.’

자신은 한참 헤매고 나서야 도달했던 진짜 목표에 라온은 벌써부터 도착해 있었다. 기꺼워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라온을 꽉 안아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정말 대견한 아이지 않느냐?”

“그럼요.”

“물론입니다.”

글렌의 물음에 양옆에 서 있던 셰릴과 로엔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은 이번 일을 통해 가문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듯하네요.”

셰릴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예. 무력만이 아니라, 정신도 함께 성장하고 계십니다.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군요.”

로엔 역시 글렌을 보며 흥겨운 웃음을 흘렸다.

“내 손주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크게 될 녀석이다. 라온이 어떤 아이인지 모두가 알아야 하는데.”

글렌은 짜증이 돌은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일단 오늘 그 아이가 한 말은 적어놓아라. 모두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말이야.”

“후우….”

리메르는 글렌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일단 댁이 손주를 아끼는 것부터 알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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