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8화
라온이 도괴를 보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육황회의라면 그…….”
“말 그대로 육황의 수장들이 한곳에 모여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을 상의하는 자리다.”
도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데루스 로베르트 밑에 있을 때도 육황회의가 열린 적이 있었다.
물론 음지에 속한 자신은 회의장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지하에 처박혀 있었지만.
“갑자기 왜 육황회의가 열리는 거죠?”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때가 안 됐을 텐데.’
육황회의가 주기적으로 열리는 건 알고 있지만, 지금은 아직 그때가 아니었다. 본래 정해진 규칙이 깨진 것을 보면 보통 일이 아니다.
‘음? 잠깐.’
설마…….
육황회의 개최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머릿속으로 합당한 이유 하나가 떠올랐다.
“알아차린 표정이로군.”
도괴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 굵직한 손가락 끝이 향하는 건 라온이었다.
“그래. 너 때문이다.”
“라온 때문에?”
리메르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매를 좁혔다.
“저 녀석 덕분에 에덴이 카멜룬 지척에 지부를 설치했었다는 것과 백혈교가 중립도시의 사람들을 대놓고 납치하며 진법을 설치했다는 게 드러났지 않느냐.”
도괴가 왜 당연한 걸 설명해야 하냐며 혀를 찼다.
“점차 활동이 잦고 격해지는 에덴과 백혈교의 처리에 관한 회의다.”
“아, 그렇겠네.”
리메르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영감이 그걸 어떻게 알았대? 원래 이쪽 일에는 관심 없잖아.”
그는 도괴를 보며 의외라고 중얼거렸다.
“왜일 것 같으냐.”
“어?”
“네놈이 연락도 없이 일주일 동안 놀러만 다니니까! 나한테까지 짬이 돌아왔지 않느냐!”
도괴가 리메르를 노려보며 빠득 이를 갈았다.
“업무에 관심이 없으니, 육황회의가 왜 열리는지도 모르고 있었겠지! 이 쓸데없이 귀만 큰 자식아!”
라온은 주먹을 부르르 떠는 도괴와 에헷 하고 웃는 리메르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맞는 말이네.’
원래라면 리메르가 육황회의가 왜 열리는지 모를 리가 없다. 휴가 동안 신나게 노느라 정신이 빠져 있던 것 같다.
“아하하하. 할 말이 없네.”
리메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패를 들킨 도박꾼의 표정이었다.
“네놈이 자주 가는 도박장에도 안 보이던데, 대체 어디를 다녀온 것이냐.”
“이 동네는 끗발이 안 좋아서.”
그는 손가락을 슥슥 비비며 입맛을 다셨다. 눈동자가 반쯤 돌아갔다.
“에휴…….”
라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귀때기는 가문을 말아먹든, 가문을 드높이든 할 미친놈이니라. 저런 놈들은 중간이 없지.
‘그럴지도.’
다만 도박으로 구박받는 리메르를 보고 있으니, 평화가 느껴졌다. 이제야 가문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네놈은 이따가 나를 보고.”
도괴가 리메르에게 주먹을 들어 올린 뒤에 라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대련 상대를 찾는다고 했지?”
“예.”
“본래 육황회의에는 각 세력의 수장만이 아니라, 이제 막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는 애송이들도 따라온다. 가문의 동량들에게 친목회를 열어주는 거지.”
“아….”
육황회의에 관심이 없었기에 그런 점까지는 알지 못했다.
“친목회라고 쓰고 잘난척 모임이라고 읽어.”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내가 더 잘났소. 네가 더 잘났소. 하면서 어린 것들이 어른 흉내를 내거든. 보고 있으면 꽤 재밌지.”
“뭐, 틀린 말은 아니다.”
도괴는 리메르에게 이를 드러내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친목회에서 애송이들끼리 대련도 열린다. 나이는 어리지만, 최상위 무학을 제대로 익힌 놈들이 올 테니, 대련하기에 딱 좋은 곳일 거다.”
“거기다 남자 놈들은 여자 앞에서 폼 잡고 싶어서 어떻게 해서든 잘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잖아.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시비를 걸어 올걸.”
“그건 그렇겠네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보여.’
어린 무인들은 참을성이 적고, 그 힘을 발휘할 곳이 많지 않다. 육황이라는 절대 세력의 어린 무인. 그것도 남녀가 모두 모이게 된다면 어떤 이유로든 자웅을 겨루게 될 것이다.
“괜찮겠네요.”
그들과의 무력 차이는 심하게 나겠지만, 다른 육황의 최상급 무학을 눈과 몸으로 겪을 수 있으니, 경지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너는 강제 참가지만.”
“강제 참가요?”
“그래. 가주전에서 너는 무조건 참가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일주일 뒤에 출발이니 준비해.”
도괴는 거부하려면 알아서 따지라고 중얼거렸다.
“가주님도 가시는 겁니까?”
“가주님은 한 번도 직접 가신 적이 없다. 전부 대리자를 보냈지. 저 양아치 자식도 한 번 다녀왔었다.”
“아, 그랬지.”
그가 리메르를 가리켰고, 리메르는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위치는 어디죠?”
“오웬이다.”
“오웬…….”
오웬이라고 하니, 수련생 시절에 만난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이 떠올랐다. 카멜룬에서 본 이후로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 그도 많은 성장을 이뤘을 것이다.
“육황회의는 네 생각보다 도움이 될 거야.”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작은 원을 그렸다.
“그곳에 애들만 오는 건 아니니까.”
그는 기대하라고 말한 뒤 연무장 담벼락을 올랐다.
“어딜 가는 것이냐! 네놈은 나와 할 말이 있다고!”
“아, 나 좀 놔둬! 영감들이 날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건데!”
도괴는 멍하니 서 있다가 급히 리메르를 뒤쫓았지만, 그는 이미 담벼락 아래로 뛰어내렸다.
“크으….”
도괴는 리메르가 사라진 담장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어떻게 점점 애가 되어가는 건지.”
“원래 저런 사람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말썽꾸러기 꼬마를 보는 기분이다.”
“그럼 꼬마 대신 도괴 님이 제 상대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라온이 옅게 웃으며 도괴의 앞으로 다가갔다.
“납치당했을 때 조금 깨달은 것들이 있거든요, 정리 좀 하고 싶습니다.”
“나참.”
도괴가 헛웃음을 흘리며 눈매를 찡그렸다.
“널 처음 보았을 때 늘어난 오러를 보고 내 눈이 잘못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납치된 놈이. 그것도 에덴에 끌려간 놈이 더 강해져서 돌아온다는 게 말이 되냐!”
“말이 안 되긴 하는데 어쩌다 보니.”
라온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네놈에게 벼르고 있던 건 알고 있겠지?”
도괴가 차게 웃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물론입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제천검의 검병을 꽉 말아쥐었다.
“와라.”
도괴가 손가락을 까딱이자마자, 진각을 밟았다. 상처를 회복하여 더 두껍고 넓어진 마나회로 사이로 만화공의 열기가 질주한다.
강대한 기운은 찰나의 순간에 전신을 휘돌아 제천검 위로 시뻘건 불길을 일으켰다.
“음!”
이전과는 달라진 오러 운용 속도에 도괴의 눈동자가 부풀었다. 손아귀에 조금 힘을 뺀 채로 제천검을 끝까지 뽑아냈다.
치리리링!
검집을 거칠게 긁으며 뻗어나간 칼날이 청아한 검명을 터트렸다. 한층 성장한 청우의 울림이 적괴의 고막을 향해 쏘아졌다.
캬앙!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와 위력의 청우였지만, 도괴는 검을 가볍게 털어내는 것으로 소리에 담긴 오러의 파동을 베어버렸다.
“네놈….”
다만 도괴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못 볼 것을 마주한 듯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오러 수준만 오른 게 아니라, 검술 경지 자체가 오르다니, 그곳에서 대체 무얼 처먹고 온 것이냐!”
“아직 놀라긴 이릅니다.”
라온이 태화보를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사선으로 도괴를 베려는 순간 허공에서 칼날이 쏟아졌다.
시꺼먼 칼날에서 대지를 쪼갤 듯한 강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투웅!
가람보법을 응용하여 자세를 다잡은 뒤 제천검을 올려 쳤다. 은빛 칼날 위로 스며든 광아검의 사나운 이빨이 포효를 터트렸다.
쩌어어어엉!
대지를 부수는 듯한 도괴의 검격과 하늘을 가를 듯한 라온의 검격이 중심에서 맞부딪쳤다.
캬아아앙!
두 검이 튕겨 나감과 동시에 라온과 도괴가 보법을 밟으며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화아아아아!
라온은 검날 위로 만화공의 불꽃을 회전시키며 그어 내렸다. 하늘을 가득 채운 태양이 검이 되어 떨어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크음!”
도괴가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휘돌렸다. 칼날이 부채꼴로 번지며 수십 개의 검은 선을 그렸다.
쩌어어어억!
검과 검이 정면에서 맞부딪치며 라온과 도괴가 동시에 밀려났다.
피익!
도괴의 소매가 길게 찢어져서 흩날렸다.
“너….”
그가 큼지막하게 베인 소매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 싸웠을 때와 같은 짓을 한 건가?”
“맞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제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보여드릴 수 있으니까요.”
도괴와 삼약을 할 때 사용했던 검술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에게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예상 이상으로 놀란 듯했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강해졌구나. 짜증이 나서 네 머리털을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야.”
“그거 다행이네요. 전 숱이 많아서.”
“건방진 것도 더해졌군.”
도괴가 서늘한 웃음을 흘리며 검을 앞으로 겨눴다.
“제대로 시작해보지.”
“물론입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만화공을 극성으로 운용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땅을 박차고 검과 검이 서로의 목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쩌어어어엉!
* * *
“크으!”
리메르는 5연무장 뒤편에 세워진 나무 위에서 라온과 도괴의 싸움을 지켜보며 탄성을 흘렸다.
“좋구만.”
허리춤에 있던 술병을 꺼내서 한입 들이켰다.
시원하면서도 달달한 술로 목을 적시니, 정신이 확 깨어났다. 술은 맛있고, 날씨는 좋고, 싸움 구경까지 하고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건 그렇고.”
리메르는 도괴를 밀어붙이는 라온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저 녀석 또 강해졌네.”
에덴 지부에서 만났을 때도 강해져서 놀랐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성장했다. 아파서 골골대기만 하던 녀석이 어떻게 경지가 올랐는지 모르겠다.
“어디서 초고수의 무력을 빨아 먹기라도 하는 건가?”
말이 안 되지만 정말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저런 어처구니가 없는 성장은 불가능하니까.
‘지금이라면 상급도 때려잡겠는데.’
현재 라온의 경지는 마스터 중급이지만, 저 녀석이 전력을 발휘하면 마스터 상급도 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끔찍하네.’
볼 때마다 경지가 높아지는 19살짜리 괴물이라니, 보고만 있어도 머리털이 쭈뼛 섰다. 적이었다면 매일 악몽을 꾸었을 것이다.
‘저 영감탱이도 등골이 오싹하겠는데.’
라온이 지금 속도로 성장한다면 도괴가 전력을 다해야 할 날도 머지않을 듯싶다. 자신이 저 앞에 서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육황회의라….”
리메르가 열기와 냉기를 동시에 일으키는 라온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재밌겠는데?’
지금 지그하르트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이유는 오롯이 가주님 덕분이다. 라온이 협의를 보여주었다고 하지만, 결국 납치를 당했고, 타인에 의해 구출되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즉, 라온은….’
회의장에서 무시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이번 사건 전까지 라온은 사도와 에덴의 귀신들을 연달아 격파하며 대륙 전체에 명성을 떨쳤지만, 납치 이후 그의 무력에 관한 말들이 쏙 들어갔다.
요즘에는 전부 글렌의 이야기만 떠들고 있었고, 라온의 무력은 회자되지 않았다. 육황회의에 간다면 라온에게 시비를 걸 녀석이 한 수레는 될 것이다.
‘아, 기대되네.’
저 괴물 자식이 건방진 육황의 자제들을 어떻게 밟을지 기대가 되어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라온을 막으려면 대륙십이성은 불러와야지.’
지금 라온을 막으려면 미래의 절대자로 점을 찍었다는 대륙십이성은 데리고 와야 한다. 어설픈 것들은 라온에게 검을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할 테니까.
리메르가 씩 웃으며 얼마 남지 않은 술병을 비웠다.
“따라가야겠는데.”
어차피 글렌은 육황회의에 참석하지 않으니, 대리인이 될 셰릴을 따라가서 재밌는 구경이나 해야겠다. 육황의 잘난 것들이 라온의 발에 깔리는 모습을 즐기고 싶었다.
“이 망할 자식! 좋다! 끝까지 가보자!”
도괴가 이를 바득 갈면서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그가 밟은 대지에서부터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라온을 휘감았다.
“흐음.”
라온은 도괴의 검계에 끌려가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두 눈을 빛냈다. 꼭 무언가를 탐색하는 것처럼.
“허?”
리메르가 검은 구슬 속으로 사라진 라온을 보면서 헛바람을 흘렸다.
‘설마 벌써 검계를 탐색하는 거야? 그러면….’
대륙십이성도 절반쯤은 깔고 가겠는데.
* * *
지그하르트 가주전 알현실.
글렌은 고개를 숙인 마르타를 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괜찮으냐.”
“예.”
마르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맑으면서도 곧았다. 흔들림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 괜찮습니다.”
눈동자와 머리 색. 그리고 외모까지. 이번에 본 백혈교주와 꼭 닮아 있었다. 라온의 예측대로 현 백혈교주의 육체는 마르타의 혈육이 분명했다.
“정말이냐?”
“예.”
마르타는 똑 부러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님께서도 엄마를 구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보다 엄마가 더 힘들 테니, 슬퍼하고 절망할 시간 따위는 없습니다.”
그녀의 눈동자는 섬뜩한 정도로 진중한 빛을 뿌렸다. 자신과 라온의 말을 완벽하게 신뢰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글렌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우울해한다면 혼쭐이라도 낼 생각이었는데, 맑은 눈빛을 보니 대견하기만 했다.
“한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보아라.”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르타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네 성취는 나이를 제외하더라도 뛰어난 편이다. 그 이상의 속도로 발전하는 건 구멍 뚫린 모래성이 될 것이다.”
“하지만 라온은….”
“라온은 당대의 내가 와도 비교할 수 없다. 걷는 속도가 다른 아이이니, 따라잡을 생각보다는 뒤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를 생각해라.”
글렌이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가 떴다.
“네 장점은 적의 약점을 파악하는 본능적인 후각과 타이탄 오러를 이용한 공방일체의 검술이다. 넌 그 장점에만 집중하여 힘을 키우고 있지만, 지금은 더 많은 것을 볼 때다.”
“많은 것이라면….”
“다른 무학도 보고 배우며 스스로 장단점을 파악해라. 하나에 집중하기에 넌 아직 어려. 더 높고 멀리 가고 싶다면 지금은 많은 것을 봐두거라.”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었다.
“이번에 육황회의가 열릴 것이다. 너도 따라가도록.”
“알겠습니다. 하나만 더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말하거라.”
글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르타가 입술을 꾹 깨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저도 검계현신을 쓸 수 있을까요?”
“검계현신은 지그하르트 핏줄만이 사용할 수 있는 혈계 무학이다. 옅은 피라도 섞여 있지 않다면 불가능하다… 라고 생각했지만, 그걸 깬 녀석이 있지 않느냐.”
“단주님….”
“그 녀석은 지그하르트의 피에 담겨 있는 흐름을 속성력을 극대화시켜서 상쇄했다. 직접 물어본다면 힌트를 알 수도 있겠지. 다만 그리 추천하지는 않는다.”
그는 정 궁금하면 리메르를 찾아가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마르타는 허리를 쭉 편 당당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가보거라.”
“예.”
그녀는 머뭇거림 없이 등을 돌린 뒤 알현실을 나섰다.
“당당한 모습을 보니 좋군요.”
셰릴이 마르타가 나간 문을 보며 시원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예. 걱정했는데, 오히려 마음이 굳어지신 듯합니다.”
로엔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니어가 딸을 잘 들였어. 앞으로가 더 기대가 되는 아이다.”
글렌도 마르타와의 대화가 만족스러웠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라온한테도 좀 저렇게 해보시죠. 오늘 딱 좋았는데.”
“크흠!”
로엔이 눈매를 좁히자, 글렌이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렸다.
‘그걸 누가 모르겠나.’
당연히 그렇게 하고 싶다. 누구보다 부드럽게 대해주고 싶지만, 라온만 보면 몸과 얼굴이 굳어졌다.
“가주님.”
셰릴이 앞으로 나와서 글렌의 앞에 섰다.
“이번 육황회의도 제가 다녀오면 되겠습니까?”
글렌은 지금까지 열린 육황회의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가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그녀가 먼저 나섰다.
“라온과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오려면 제가….”
“아니.”
글렌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내가 간다.”
“예?”
“음!”
셰릴과 로엔이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글렌이 직접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둘 다 경악한 표정이었다.
“가주님이 직접 가신다구요?”
“정말이십니까?”
“한 번은 갈 때가 되었지.”
글렌은 별일 아니라는 듯 눈을 내리감았다.
“자랑도 좀 하고.”
“예?”
“그건… 음?”
그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젓다가 눈매를 찡그렸다.
“셰릴, 로엔.”
글렌이 굳어진 표정으로 두 사람을 불렀다.
“잠시 나가 있도록.”
“예.”
두 사람은 글렌의 굳은 표정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알현실을 나갔다.
치이이잉!
침묵에 잠긴 알현실에서 글렌이 턱을 치켜들었다.
“나오도록.”
그 나지막한 음성이 사라지기 무섭게 문 앞의 공간이 갈라진다.
치이이잉!
종이처럼 찢어진 차원 속에서 황금을 녹인 듯한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걸어 나왔다. 이 세상 존재가 아닌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에 압도적인 마나의 흐름이 함께 했다.
“오랜만이오.”
금발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으며 알현실의 중앙으로 걸어왔다. 그의 목소리는 다른 세계에서 들려오는 듯 가늘게 울렸다.
“그래. 오래도 되었지.”
글렌이 노인을 내려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로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