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06화 (306/653)

제306화

암시장주 로젤린은 고민하는 라온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설화검협이라….’

협이라는 글자가 좋지만은 않지.

협이라는 이명이 붙은 무인들은 악인에게 자비가 없는 대신,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운 성향을 가지고 있다. 공명정대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다.

대단하고 멋지게 보이겠지만, 실제로 그들만큼 불편하게 사는 사람들은 없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써야 하니까.’

협객들은 다른 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 이름을 얻었기에 필연적으로 사람의 시선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술자리도 조심해야 하고, 유흥도 함부로 즐길 수 없으며, 제멋대로 힘을 사용하기도 어렵다.

본인에게 급한 일이 있더라도 눈앞의 불의부터 해결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협은 그 고고한 뜻만큼이나 다루기 쉽지 않은 이명이었다.

‘이 아이 역시 다를 건 없군.’

라온도 원하는 요구를 말하라고 판을 깔아주니, 오히려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당연하겠지.’

이번에 에덴 지부를 찾기 위해 암시장은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용했다.

광풍단의 살림을 도맡아 한다는 라온이 그런 걸 모를 리가 없으니,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이다.

로젤린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요구를 들어준다는 말을 한 거지만.’

암시장주가 한 약속은 암시장의 맹세와 다를 바가 없다.

무슨 요구를 해도 들어줘야 하지만, 어린 나이에 설화검협이라는 고고한 이명을 가진 라온이라면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으리라 예상하고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손해 없이 이득만 있는 일이야.’

북멸왕의 신뢰를 받게 될 테니까.

글렌 지그하르트가 라온을 소중히 여기는 건 확실하다. 라온에게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북멸왕도 만족스러워 할 것이다.

‘흐음….’

옆에서 쏘아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니, 데닝로즈가 너무하는 거 아니냐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살았기에 암시장을 운영할 수 있는 거란다.’

진정한 고수는 조건이 아니라, 상대의 심리를 조율하는 법.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이런 삶을 고수했기에 지금 규모의 암시장을 만들 수 있었다.

“저어….”

라온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네. 말씀하세요.”

로젤린이 입맛을 살짝 다신 후에 미소를 지었다.

‘이제 때로군.’

라온은 분명 다시 거절할 테니, 그 모습을 칭찬하면서 부드럽게 상황을 넘기면 된다. 항상 해오던 일이니 자신 있었다.

“힘드시면 나중에….”

“일단 육황오마의 정보가 필요하겠네요.”

“어….”

그는 예상과 다르게 곧은 눈동자를 빛내며 요구사항을 말했다.

“유, 육황오마라고요?”

“예. 그들의 상세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인원, 위치, 성향, 무력 수위까지. 다른 건 몰라도 마스터 이상의 강자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빠지면 안 됩니다.”

라온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또박또박 말했다. 지금까지 시간을 끈 건 이 말을 생각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정보들은 지그하르트 본관이 아니라, 별관으로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로젤린의 입이 떡 벌어졌다.

‘또 있다고?’

육황오마의 정보는 한 줄당 금화 하나를 넘어설 정도로 값이 비싸다. 특히 라온은 고수에 대한 정보를 말했기에 말 그대로 천금이 있어도 부족하다.

아니, 돈이 있어도 주지 못하는 정보도 많다. 지금 저 요구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불사조의 위치를 찾고 싶습니다.”

“부, 불사조….”

불사조는 분명 존재하는 몬스터지만, 환상이라 생각될 정도로 조우하기 어렵다.

강함을 떠나서 드래곤이 더 흔하다고 여겨지는 희귀한 존재를 어떻게 찾아달라는 건지 모르겠다. 갑자기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으…”

로젤린은 라온의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보고 턱을 떨었다.

‘이, 이 아이가 협?’

잘못 생각했다. 지금 보니 라온의 눈동자는 욕심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설화검협이 아니라, 설화검욕이라고 불러야 했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더?’

로젤린이 억지로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

데닝로즈도 이 정도로 많은 요구를 할 줄은 몰랐는지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과 물건을 좀 찾고 싶습니다.”

“어, 어떤 사람과 물건이죠?”

“이건 가문으로 돌아간 뒤에 제대로 정리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아, 그, 그래요.”

얼굴은 웃지만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떨렸다.

‘저것도 보통 일이 아닐 거 아니야.’

저 아이가 쉬운 일을 맡길 리가 없다. 육황오마에 대한 정보 수준은 아니더라도 어려운 일이 될 게 분명했다.

후룩.

로젤린은 목이 타는 듯한 느낌에 차를 마셨다. 조금 전까지 청아하기만 했던 차 맛이 더럽게 썼다.

‘미치겠군.’

지금 이 짧은 시간에 얼마만큼의 돈이 빠져나갈지 정확히 계산이 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고.’

자신과 데닝로즈가 라온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으니, 글렌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지금 제안을 취소하겠다고 하면 기껏 쌓은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안 할 수도 없어.’

지부장 수준이 아니라, 암시장주의 이름으로 직접 선언했으니 무조건 들어주어야 했다. 생각지도 못한 외통수에 눈앞이 껌껌해졌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라온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걱정하지 마시길.”

로젤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천문학적인 손해를 어떻게 메꿔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물론 답은 나오지 않았다.

“부단주님의 요청을 들었으니, 이만 가봐야겠군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빨리 본부로 돌아가서 계산을 해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단주님. 몸조리 잘하세요.”

데닝로즈도 고개를 꾸벅이며 일어섰다. 그녀 역시 라온의 요구에 충격을 받았는지 살짝 다리가 떨렸다.

“암시장주님. 지부장님.”

두 사람이 방을 나가려 할 때 라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젤린과 데닝로즈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창가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은 라온의 붉은 눈이 진중한 이채를 발했다. 루비 같은 그 눈동자를 멍하니 보고 있을 때 그의 입술이 열렸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

글렌 지그하르트처럼 가라앉은 라온의 음성에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하아….”

로젤린이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기대하죠.”

그녀는 옅은 미소를 흘리고서 살짝 고개를 숙인 뒤에 방을 나섰다. 데닝로즈도 무언가를 느끼고 굳어진 얼굴로 그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저택을 나선 뒤 마차를 탈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나서야 로젤린이 입매를 비틀어서 말아 올렸다.

“제대로 당했구나.”

라온은 단순히 욕심이 많아서 그런 부탁을 한 게 아니다. 이쪽의 심리를 전부 파악하고 거절할 수 없는 칼을 내민 것이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꺾인 게 얼마 만인지.’

한참 아래라고 생각해서 특별한 준비를 안 했다고는 하지만 저런 어린아이에게 머리채를 잡힐 줄은 몰랐다. 그저 강하기만 한 무인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 같다. 이미 상당한 위험도지만, 단계를 하나 높여야 할 것 같았다.

“넌 어떻게 보았느냐.”

로젤린이 데닝로즈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그는 이 짧은 시간에 무학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한층 더 성장한 듯합니다. 전에 없는 여유와 긴장이 보입니다.”

데닝로즈가 멀어지는 저택을 돌아보며 눈매를 좁혔다.

“긴장이 보이는데 성장했다고?”

“예.”

그녀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본 라온 지그하르트는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겼죠. 하지만 오늘 본 그는 달랐습니다.”

“어떻게?”

“본인이 실패할 수 있다는 점과 항상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는 없다는 점을 알게 된 듯합니다.”

“그런가.”

로젤린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데닝로즈를 쓰다듬었다.

‘성장한 건 너도 마찬가지로구나.’

본래 데닝로즈는 우유부단하여 판단을 넘기거나 미루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 일을 겪으며 그녀도 조금 성장한 듯싶었다.

“그러면 남자로서는 어떠냐?”

“예에?”

데닝로즈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인물, 무력, 집안, 성격에 심계까지.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데, 네가 마음이 있다면 내가 매파를 해보마.”

로젤린은 진심이라며 데닝로즈의 손을 어루만졌다.

“이렇게 보여도 내가 맺어준 부부만 100이 넘을 게다.”

“저, 전 사부님을 모셔야지요. 사부님이 은퇴하실 때까지는 혼인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데닝로즈는 검은 안대만 제외하고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 하는 애들이 제일 먼저 가더구나.”

로젤린이 픽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 자두 같은 얼굴빛이나 감추고 말하던가.”

“사부님!”

*     *      *

라온은 우보의 백약이 든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피식 웃었다.

‘이렇게 당할 줄은 몰랐겠지.’

처음에는 양심상 당연히 거절하려 했지만, 로젤린의 눈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다정하고 인자해 보이지만, 절대 요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눈빛. 노련한 장사꾼의 그것이었기에 이용해 보기로 마음먹고, 제대로 성공했다.

‘상상 이상의 소득이네.’

육황오마의 정보를 사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고, 돈으로 살 수 없는 비밀스러운 정보들도 많았다. 그 모두를 얻지는 못해도 적당한 것들은 알 수 있을 테니, 어마어마한 이득이었다.

-흐흥!

라스가 얼음꽃 팔찌에서 흘러나와 씩 웃었다.

-악마 같은 네놈에게도 약간의 배려는 있는 모양이구나. 바로 약속을 지키려 들다니.

‘자비?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 할망에게 부탁한 불사조의 위치는 본왕의 몸보신을 위해 찾는 게 아니더냐. 맛난 것을 먹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녀석이 허공을 올려보며 쩝 입맛을 다셨다.

-불사조 고기는 야들야들하면서도 바삭하고, 입맛을 돌게 하는 효과까지 있지. 오랜만에 몸보신을 할 생각을 하니, 벌써 기대가 되는구나.

‘너 불사조도 먹어봤어?’

-당연하느니라. 자주 먹지는 못했지만, 좋아하는 별식이었느니라. 햐!

라온이 히죽이는 라스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드래곤에 불사조까지. 이 식충이는 진짜 안 먹어본 몬스터가 없는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난 불사조를 사냥할 생각이 없는데.’

-뭐?

‘불사조를 찾는다기보다는 불사조가 있는 곳을 찾는 거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불사조를 보고도 불사조를 안 먹는다니! 눈앞에 밥이 있으면 먹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

라스는 최상급을 넘어선 환상의 몬스터를 보고 차려둔 밥상이라는 미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손님. 저희는 불사조를 취급하지 않습니다.’

-야. 인마!

라온은 얼굴을 들이미는 라스를 밀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불사조를 찾는 이유는 그놈의 사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강해지기 위해서였다. 불사조는 잡아도 그만, 잡지 않아도 그만이다.

파삭!

과자를 씹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도리안이 침대에 옆으로 누운 채 배 주머니에서 꺼낸 과자를 먹고 있었다. 저 감자칩 같은 건 훈련생 시절 때부터 먹던데, 대체 언제 끝나는지 모르겠다.

“암시장주와의 심리 싸움에서 이기다니, 진짜 대단하시네요.”

“너 아직 안 갔냐?”

“진짜 너무해….”

도리안이 들고 있던 과자를 툭 떨어뜨렸다.

“내가 이긴 게 아니야.”

“원하는 거 다 얻으신 거 아니에요?”

“이번엔 저쪽이 날 너무 무시했거든.”

로젤린이 마음먹고 찾아왔다면 제대로 된 요구를 입에 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한참 아래라고 생각하고, 성격도 착각을 했기에 얻어낸 이득이었다.

“그건 그렇고 넌 집에 안 가냐?”

“예?”

“죽다가 살아났잖아. 휴가를 받아서 잠깐이라도 다녀오지?”

로젤린이 도리안의 배 주머니를 보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했던 게 생각나서 말해보았다.

“그, 글쎄요. 딱히 갈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도리안이 헤헤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나중에 가보죠. 뭐.”

그는 머리를 긁적이고서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사정이 있는 건가.’

아직도 타인과의 거리감은 어렵다. 특히 가족관계는 조심해야 하기에 잡을 수가 없었다.

“흠….”

라온은 손에 쥔 우보의 백약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건 어쩐다.”

불의 고리의 회복력이 있어서 이 영약까지 먹을 필요는 없었다.

-어쩌긴 뭘 어째! 욕심 그득한 네놈이 먹을 거면서. 근데 무슨 맛이냐?

‘…….’

라스는 본체로 현신해서 모든 힘을 소모한 뒤부터 더 식탐이 강해졌다. 식욕에 미쳐가는 것 같았다.

‘그래. 그게 좋겠네.’

라스가 욕심 그득하다고 하니 약간의 반발심이 고개를 들었다. 우보의 백약을 들고, 다시 윗층으로 올라가서 글렌의 방에 노크를 했다.

똑똑.

이번에는 소리가 다 울리기도 전에 로엔이 문을 열어주었다.

“다시 오셨군요.”

“가주님께 드릴 게 있습니다.”

“들어오십시오.”

그는 손에 들린 목갑을 보고서 기쁜 얼굴로 옆으로 물러나 주었다.

“뭘 드릴 건데?”

“좋은 거냐?”

셰릴과 리메르도 어쩐지 기대가 되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라온은 세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앞으로 향했다.

“뭐지?”

글렌이 또 왜 찾아왔냐는 듯 귀찮은 눈빛으로 내려보았다.

“아직 내상이 치유되지 않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라온이 앞으로 우보의 백약을 내밀었다.

“암시장주가 주고 간 우보의 백약입니다. 저보다는 가주님이 복용하시는 게 나을 듯하여 가져왔습니다.”

글렌은 백혈교주와 타천의 무력을 홀로 버텼다. 뒤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 피하지도 않고 몸으로 견뎌냈다.

그가 아무리 강해도 아직 내상이 치료될 때가 아니다. 받은 게 있다면 그만큼 주어야 하는 법. 그에게 이 영약을 넘기기로 결정했다.

‘난 불의 고리와 나태가 있으니까.’

낮에는 불의 고리를 이용하여 치유할 수 있고, 밤에는 나태의 회복 효과가 자연스레 발동된다. 일주일이면 대부분 회복할 수 있을 테니, 지금의 자신에게 우보의 백약은 필요 없었다.

“오오!”

“라온!”

“허허.”

리메르와 셰릴, 로엔은 방긋 웃으며 잘했다는 듯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쿠구구구!

다만 정작 영약을 준 글렌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분노한 듯 차디찬 눈동자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음….’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잘못 걸린 느낌인데.’

조금 전 찾아갔을 때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아서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는데, 잘못 생각한 모양이다. 분위기가 점차 싸늘해졌다.

“내가 자만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건….”

“건방진 녀석. 여전히 주제를 모르는구나. 내상? 네가 날 걱정하려면 100년은 이르다.”

“그게 아닙니다. 저는 회복할 수 있지만, 가주님은….”

“필요 없다.”

글렌이 차가운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약은 지금 이 방을 나가는 대로 네 입에 넣도록. 일주일 뒤에 가문으로 돌아가는 날. 네 회복이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벌을 내릴 것이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다시 우보의 영약을 챙긴 뒤에 일어섰다. 그는 고개를 꾸벅인 뒤에 방을 나섰다.

뚜벅.

라온의 발걸음 소리가 사라지자마자, 방문 앞에 있던 세 사람이 몸을 획 돌렸다.

“이 영감탱이가! 저렇게 보내면 어떻게 해요!”

“맞아요! 일단 받아주는 척을 하던가! 아니면 고맙다고 하던가!”

“정말이지 답답합니다.”

리메르, 셰릴, 로엔이 차례로 글렌에게 악을 질렀다.

“정말 가주님은… 음?”

더 따지려던 그들은 이마를 부여잡은 글렌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크으, 저리 착한 아이가 있을 수가 있나….”

글렌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그의 기파가 퍼지며 방에 있는 물건들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진동했다.

“누구보다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서 나를 걱정하다니, 천사가 아니더냐!”

“아니, 그니까 그걸 알면 좀….”

“이렇게 있을 수는 없겠어.”

그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손아귀에서 황금빛이 뿜어지며 방이. 아니, 건물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허억! 여, 여기서 보고를 여시면 안 됩니다!”

로엔이 다급하게 달려가서 글렌의 팔을 붙잡았다.

“가주님 건물이 무너질 겁니다! 거기다 보고의 보안에도 문제가 생길 거구요!”

셰릴 역시 보법을 밟아서 글렌의 손가락을 막았다.

“놓아라. 지금 라온에게 선물을 주지 않는다면 대체 언제….”

“외부에서 보고를 열면 문제가 생기는 건 가주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그하르트 보고는 영지 내부에서만 열 수 있게 설계된 마법 창고다. 다른 곳에서 함부로 열었다간 좌표가 꼬여서 보안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괜찮다. 노리는 놈은 모조리 죽이면 그만이다. 그보다 라온에게….”

글렌은 상관없다는 듯 손을 뻗었다.

“에휴….”

리메르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나도 모르겠다.”

그는 깍지 낀 손으로 뒤통수를 잡으며 방을 나갔다.

“오랜만에 도박장이나 가야지.”

“야! 말리라고!”

*     *      *

일주일 뒤.

라온이 저택 밖으로 나왔다. 광풍단 만이 아니라, 아직 가문으로 복귀하지 않은 천검대와 공검대가 줄을 맞춰 서 있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글렌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후우….’

다행히 통과한 모양이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우보의 백약을 아끼기 위해서 불의 고리를 미친 듯이 운용하고 숙면을 취한 덕분에 일주일 만에 몸 상태가 상당히 회복되었다.

더 높은 경지의 무인과 싸우는 건 무리지만, 어중간한 마스터는 가볍게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몸 상태가 돌아왔다.

“그럼 복귀한다.”

글렌의 손짓에 저택의 정문이 열렸다. 지그하르트 검사들이 외부로 나감과 동시에 주변에서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아!”

“지그하르트!”

“라온! 라온! 라온!”

“광풍단! 광풍단!”

“라온 님!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광풍단! 앞으로 평생 응원하겠습니다!”

저택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라온과 광풍단을 보며 환호성을 터트렸다.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지그하르트에 줄을 대려는 상인들이 대기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란세빌과 결계 안에서 백혈교에 잡혀 있던 인질들이었다.

자신과 광풍단 덕분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곳까지 찾아와서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우오….”

“아, 이거 참.”

“별거 아니었는데.”

광풍단 검사들은 얼굴을 어색해하면서도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는지 손을 흔들며 히죽였다.

“음….”

라온 역시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감사하다는 말이 이렇게 가슴을 울리는 줄은 이번 생이 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말씀이 맞았군.’

마음으로 따르게 만드는 검사.

지그하르트 검사답게 살아가라는 말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다. 옳은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준 그녀에게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라온이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이야아아아아!”

“북멸왕! 북멸왕!”

“글렌 지그하르트!”

글렌은 누구보다 큰 환호를 받았지만, 그는 그 소리에 답하지 않은 채 말을 몰았다.

라온은 글렌의 등을 모습을 보며 제천검의 검병을 꽉 움켜쥐었다.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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