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5화
라온은 글렌의 방문 앞에 서서 눈매를 좁혔다.
‘비밀 이야기라도 하시는 건가?’
조금 전 내부의 소음이 사라졌다. 누군가가 소리를 지우기 위해서 기막을 설치한 것 같다.
‘조금 전 그 사람 때문인가?’
이곳으로 올라오면서 암시장 간부로 보이는 노파와 눈을 마주쳤는데, 그녀와의 대화 내용을 감추기 위해서 내부의 소리를 막은 모양이다.
툭.
노파의 얼굴을 확실히 기억해두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로엔이 나왔다. 평소와 같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와는 천지차이네.’
세검 한 자루로 10사도를 몰아붙였던 차디찬 암살자는 사라지고, 마을을 돌아다니는 동네 할아버지만 남아 있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덕분에요.”
라온이 주먹을 쥐었다가 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요. 들어오시지요.”
로엔이 옆으로 나오며 길을 비켜주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고개를 꾸벅이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리메르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고, 셰릴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가운데로 걸어가 글렌의 앞에 섰다. 그는 가주전 알현실에 있을 때처럼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아니, 노파와 이야기가 잘못되었는지 표정이 평소보다 더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
목소리가 조금 갈라진 것을 보니, 내상이 다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았다.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감사 인사?”
“예.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온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와주리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그 고마움은 훨씬 컸다. 글렌을 보자, 죽음을 마주했던 때가 생각나 지금도 가슴이 떨렸다.
“널 위해서가 아니었다.”
글렌이 눈동자가 겨울을 담은 듯 차갑게 내려앉았다.
“버러지들에게 지그하르트를 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었을 뿐이다.”
“억….”
이유는 모르겠지만, 글렌의 말이 끝나자마자 리메르가 갑자기 본인의 이마를 탁 쳤다.
“그렇다고 해도 제가 가주님 덕분에 살게 된 건 달라지지 않습니다. 저와 제 동료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답이었기에 라온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라온 지그하르트. 넌 자만하고 있다.”
글렌의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졌다. 검기와도 같은 날카로운 기파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 나이에 그 무력. 분명 나쁘지 않은 성취지. 허나 네 위에는 수없이 많은 강자가 있다. 그들은 나이가 어리다고, 재능이 넘친다고 봐주지 않는다.”
맞는 말이다. 스스로의 성장에 과신하여 뒤를 생각하지 않고 움직였다.
‘너무 단순하게 달려들었어.’
웬만한 사도급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7사도를 베긴 했지만, 그 뒤에 튀어나온 10사도와 멀린의 등장은 자신의 예측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그런 괴물들은 계획 자체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처음부터 벗어날 구멍을 만들고 움직였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라온이 글렌의 꾸짖음을 받아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하아….”
셰릴이 평소와 달리 한숨을 내쉬고서 등을 돌려 창밖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다시는 이런 기적이 없을 것이다.”
글렌이 턱을 괸 채로 인상을 찌푸렸다. 눈빛이 더 서늘한 빛을 띠었다.
“네 주제를 넘어서는 행동은 하지 말도록. 무력이 따르지 않는 참견은 그저 의미 없는 희생일 뿐이니까.”
“흐읍.”
로엔이 입을 틀어막은 채 눈을 내리감았다. 글렌을 하늘처럼 여기는 그에게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것도 맞는 말이야.’
세 사람이 갑자기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글렌의 말은 옳았다. 무력이 모자란 채로 남을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건 동반 자살하겠다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마음만으로 이룰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가주님의 말씀을 뼛속에 새기겠습니다.”
라온은 진심으로 글렌의 충고를 받아들이며 눈을 내리감았다.
‘그러고 보니 가주님은 괜찮으신가?’
그가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았고, 지금 표정도 좋지 않았기에 조금 걱정이 되었다.
“가주님, 내상은 괜찮으십니까?”
“크흠, 신경 쓸 것 없다.”
글렌의 얼굴이 바싹 마른 나뭇잎처럼 심하게 굳어졌다. 아무래도 아직 내상이 낫지 않은 것 같았다.
“…너는 괜찮으냐?”
“나쁘지 않습니다. 일주일 정도 지나면 복귀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조금 전에 말한 것을 잊었나?”
그의 목소리에 무거운 위엄이 서렸다. 강한 압력에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자만하지도, 주제를 넘지도 말라고 했지. 넌 죽다가 살아났다. 몸이 다 회복될 때까지 확실하게 쉬도록!”
“음, 알겠습니다.”
“그래도….”
글렌의 가라앉은 음성이 약간 떨리는 것처럼 들렸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아….”
고개를 홱 들었다. 글렌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기에 입이 떡 벌어졌다.
다만 글렌의 표정은 조금 전과 다를 바 없이 냉랭했다. 지나가는 안부 인사처럼 한 말이었겠지만, 그에게서 처음으로 듣는 걱정에 코끝이 시렸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푹 숙였다.
“크흠.”
글렌은 헛기침을 하고서 의자에 등을 깊게 묻었다.
“오.”
“음!”
“크으.”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리메르와 셰릴, 로엔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낮은 탄성을 흘렸다.
“더 할 말이 없다면 이만….”
“있습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백혈교주와 타천이 살아서 도망간 것 같습니다.”
라스가 그런 일로 거짓말을 할 리 없으니, 둘이 살아 있다는 건 사실이다. 최대한 빠르게 글렌에게 알려야 했다.
“알고 있다.”
글렌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둘을 한 번에 제거하려 했던 건 내 실수였다. 타천만 노렸어야 했거늘 욕심을 부리다 틈이 벌어졌다.”
그는 예상과 달리 본인의 실수를 인정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남이 아닌, 본인에게 가하는 짜증이었다.
‘정말이지 모를 사람이야.’
본래 높은 위치에 있을수록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얼버무리는 법이다.
데루스 로베르트 역시 본인의 실수를 어떻게든 부하에게 떠넘기는 밴댕이였지만, 글렌은 누구보다 높은 위치에 있음에도 본인의 실수를 자연스럽게 인정했다.
그의 무력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이냐?”
“아뇨. 하나 더 있습니다. 마르타에게….”
라온은 마르타에게 들었던 백혈교주에 대한 이야기와 스스로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말해주었다.
“미친!”
“빌어먹을….”
“후우….”
모두에게 충격이었는지 리메르가 이를 바득 갈았고, 셰릴이 턱을 떨었으며, 로엔이 질끈 눈을 감았다.
“으음.”
글렌도 차가운 안색을 깬 채 낮은 신음을 흘렸다.
“마르타는 어떤 상태지?”
“밥을 먹고 잠이 들었습니다.”
마르타는 희망이 있다는 말을 믿고, 밥을 먹은 뒤에 자고 있었다.
“하아.”
그는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고 햇볕이 스며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가 백혈교주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적발에 푸른 눈을 가진 어린 소녀였고, 두 번째는 금발에 보라색 눈을 가진 20대 여인이었다. 네 생각대로 백혈교주는 타인의 몸을 갈아타는 이혼술을 사용할 수 있다.
“역시….”
“다만 평범한 이혼술과는 조금 다르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이혼술은 타인의 육체에 들어가는 술법이다 보니, 가지고 있던 힘의 대부분을 잃고, 육체의 능력도 전부 사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괴물의 이혼술에는 그런 단점이 없다.”
글렌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백혈교주에 대한 분노가 치미는 것 같았다.
“백혈교주는 이혼술을 사용하여 새로운 육체에 안착하자마자 본래 가지고 있던 무력과 주술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제약 자체를 받지 않지.”
“하….”
“다만 네 덕분에 그 비밀이 약간은 풀린 느낌이구나.”
“예?”
“원인 없이 결과가 이루어질 수 없는 법. 마르타와 같은 목걸이를 차고 있다는 점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다는 뜻이겠지.”
그는 라스와 마찬가지로 인과율을 말하며 눈매를 좁혔다. 아무래도 강자들은 그 법칙을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혹시 마르타의 어머니를 구할 방법이 있습니까?”
“본래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글렌이 담담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무력만이 아니라 정신력도 백혈교주를 압도할 정도라면 가능성이 없진 않아 보이는구나.”
“그렇군요.”
라온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글렌이 저런 말을 할 정도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백혈교주를 제압해야 하니, 그 가능성이 무척 희박하겠지만.
“라온 지그하르트.”
“예.”
“훌륭하다.”
글렌은 갑자기 칭찬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백혈교주의 비밀이 풀린다면 그 절반 이상은 네 공이 될 것이다. 수고했다.”
“아, 아닙니다. 전 그냥 도울 방법이 있나 싶어서….”
그저 마르타를 위로하기 위해서 그리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머리를 굴렸을 뿐이다. 이런 칭찬을 받기에는 과분했다.
“동료를 생각하는 건 언제나 옳은 일이다. 그 마음을 잊지 말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마르타가 깨어나면 너희들이 잘 챙겨주도록 해라. 가문으로 복귀하면 그 아이를 부르도록 하지.”
“예.”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야.’
혹여나 백혈교주의 딸이라고 마르타를 좋지 않게 생각할까 봐 걱정했지만, 글렌은 그녀를 걱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냉정하면서도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이만 나가보도록 해라.”
글렌은 평소처럼 파리를 쫓듯 손을 휘휘 저었다.
“예.”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일어섰다.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날카로우면서도 인간적인 조언을 해준 글렌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떠오르는 건 얼마 전 그의 입에서 피가 흐르는 장면뿐이었다.
“오, 오래 사셔야 합니다.”
라온은 그 말을 뱉고서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아이고! 오래 사시라니, 그게 여기서 나올 말이냐고! 내가 보기엔 저 녀석도 문제야!”
리메르가 라온이 나간 문을 보며 한숨을 뱉었다.
“기분 나쁘지만, 오늘 너랑 좀 통하네. 아, 답답해.”
셰릴이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씩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로엔은 우리가 이해하자며 리메르와 셰릴의 어깨를 두드렸다.
“크으….”
세 사람은 앞에서 들린 신음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글렌이 왼쪽 가슴을 움켜쥔 채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허억!”
“가, 가주님?”
“혹시 내상이!”
리메르와 셰릴, 로엔이 깜짝 놀라서 글렌에게 다가갈 때 그가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오래 살라니….”
글렌은 감격한 눈빛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마르타를 생각하는 마음도 그렇고, 너무 순수하고 착하지 않느냐.”
“…….”
세 사람의 시선이 또 한 번 굳어졌다.
* * *
라온은 숙소로 돌아와서 자리를 잡고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고리가 공명하며 전신에서 일어나던 지독한 통증이 가라앉고, 육체의 회복이 가속화되었다.
‘확실히 달라.’
만화공도, 글래시아도 뛰어난 연공법이지만 불의 고리는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파열된 혈관과 찢어진 피부가 조금씩 재생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고오오오오!
시간조차 잊고 연공에 몰두하여 네 줄기의 마나회로를 회복시켰을 때 방문 앞으로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걸음 소리 뒤로 노크와 도리안의 음성이 이어졌다.
“부단주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이라는 소리에 눈을 떴다. 도리안 뒤로 두 사람이 서 있는 게 느껴졌다.
‘올 손님이 있던가?’
라온이 일어서서 문을 열었다.
“안색이 좀 좋아지셨네요.”
씩 웃는 도리안 뒤에서 두 명의 여성이 다가왔다. 앞에 있는 사람은 글렌의 방에서 나왔던 노파였고, 그 옆에 선 사람은 암시장 그란세빌 지부장 데닝로즈였다.
“하아아….”
데닝로즈가 입을 틀어막으며 균형을 잡지 못하고 벽에 어깨를 부딪쳤다.
“다행이에요. 정말로….”
그녀는 가슴을 움켜쥔 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부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부단주님이 살아 있는 모습을 보고 힘이 빠진 거랍니다.”
노파가 데닝로즈의 등을 두드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음….”
라온이 눈을 내리감은 채 옅은 숨을 뱉는 데닝로즈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다고 했었지.’
광풍단에게 그간의 사연을 들을 때도 데닝로즈의 이야기가 나왔다. 에덴의 지부를 찾기 위해서 밤새 암시장의 요원들을 운용했다고 하던데 그 긴장이 지금에 와서야 풀린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 수 있었습니다.”
라온이 데닝로즈에게 목례하듯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데닝로즈가 고개를 저었다.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고, 담담한 눈빛이 되는 걸 보면 역시나 평범한 정보상이 아니었다.
“부단주님이 아니었다면 저부터 7사도에게 농락당한 채 죽었을 테니까요.”
그녀는 보답을 했을 뿐이었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분은….”
라온은 데닝로즈의 어깨를 꼭 잡고 있는 노파를 보았다. 지부장을 저렇게 대하는 것을 보면 예상대로 암시장의 간부가 분명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암시장을 운영하고 있는 로젤린이라고 합니다.”
노파는 귀족처럼 고아한 자세로 인사를 해왔다.
“암시장주?”
암시장 지부가 아니라, 암시장을 운용한다고 했다. 즉, 이 노파가 대륙 전역에 퍼진 암시장의 주인이라는 뜻이었다.
“예. 과분하게도 제가 암시장을 맡고 있지요.”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광풍부단주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합니다.”
라온이 로젤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과분이라…. 그럴 리가 없지.’
암시장을 지금의 크기로 만든 게 지금의 암시장주이자, 눈앞에 있는 로젤린이다. 암시장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쥔 그녀에겐 그저 겸손의 말일 뿐이었다.
“일단 들어오십시오.”
문 앞에 세워둘 수는 없기에 두 사람을 안으로 불러서 테이블 앞에 앉혔다.
“도리안. 미안하지만 차 좀 가져다….”
“옙.”
도리안은 대답은 하고서 나가지 않았다.
“아, 여기 있네.”
배 주머니에서 찻잔 세 개와 주전자를 꺼냈다. 주전자에 붉은 찻잎을 넣자, 갑자기 주전자가 끓어 오르며 김을 내뿜었다.
치이이익!
주전자에서 묵직하면서도 청아한 차향이 흘러나와 방을 덥혔다.
‘하여튼.’
라온이 피식 웃었다. 언제 보아도 신기한 주머니와 도구들이다. 오랜만에 감탄이 나왔다.
“벤자르 녹차에요. 잘 말려서 향이 좋을 거예요.”
도리안은 집사라도 된 듯 씩 웃으며 세 사람의 찻잔에 차를 부어주었다.
“이쪽 분도 보통 가문이 아니셨군요.”
로젤린이 도리안의 배 주머니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차를 한 입 마시고서 품에서 목갑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건….”
“우보의 백약이랍니다.”
“우보의 백약? 이걸 왜….”
“부단주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라온의 입이 떡 벌어졌다. 우보는 약선이라 불리는 영약 제조의 장인이다. 그가 제조하는 백약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치료약인데 이런 귀한 물건을 선물로 줄 줄은 몰랐다.
“제게 이걸 왜….”
“부단주님이 납치를 당하신 데에는 저희의 책임도 있었답니다. 도움을 드리기는커녕 역으로 도움만 받았으니, 이 정도 성의는 보이는 게 맞겠지요.”
그녀가 백약이 든 목갑을 앞으로 내밀었다.
‘음….’
라온은 백약이 아니라, 로젤린을 보았다. 평온한 눈빛. 어떠한 사심도 없는 맑은 눈동자였지만 그걸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살짝 눈동자를 돌려 데닝로즈를 보았다. 그녀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백약을 보며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둘의 반응이 조금 다르군.’
로젤린은 자신이 아니라, 가주 글렌을 보고 우보의 백약을 넘겼다면 데닝로즈는 정말 걱정을 하여 약을 주는 느낌이었다.
다만 두 사람 다 이 정도는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같아 보였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숙인 후 목갑을 잡아서 앞으로 가지고 왔다. 가볍지만, 묵직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요.”
로젤린이 가볍게 손을 젓고서 차를 한 입 마셨다.
“차 맛이 좋네요.”
“감사합니다!”
도리안이 주전자를 든 채 히죽 웃었다.
-맛있다는 뜻인가? 너도 먹어보아라!
라스가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끼어들어서 찻잔을 가리켰다.
‘너랑은 안 맞아.’
-그건 본왕이 결정하는 것이니라!
‘후우….’
한숨을 내쉬고 차를 한입 마셨다.
-쯧! 밍숭맹숭하구나
라스는 혀를 차고 얼음꽃 팔찌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거 뭐 애를 키우는 것도 아니고, 어이가 없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죠.”
로젤린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빙긋 웃었다.
“다음이라면….”
“이 아이에게 임무를 완수했을 때의 보상을 말씀하지 않으셨더군요. 아니, 그럴 기회가 없었죠. 뭐든 해드린다고 했다 하니 그 약속을 지켜야지요.”
“아….”
그런 말을 했었고, 실제 부탁할 것도 생각했었다. 다만 그 말을 입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괜찮습니다.”
라온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 구출을 위해서 암시장 전체가 힘을 썼다고 들었습니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았으니, 그 이상은 과합니다.”
정말이다. 욕심이 과하면 독이 되는 법. 모두가 살아남았으니, 지금은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그걸 받으면 양심이 없는 거지.’
그란세빌에서 7사도를 처리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약속된 보수와 정보를 받았겠지만, 상황이 더럽게 꼬이며 역으로 암시장의 도움도 받았다. 본래의 보수라면 모를까. 추가 요구를 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이 아이는 암시장의 지부장이자, 제 후계자 중 한 명입니다.”
로젤린이 데닝로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희가 지그하르트처럼 근본 있는 단체는 아니라도 후계자가 한 말을 어길 수는 없지요.”
그녀가 라온을 직시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원하시는 것을 말씀해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