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4화
라온은 눈이 충혈된 마르타를 보며 턱을 떨었다.
“너희 어머니가 전장에 있었다고?”
마르타는 단 한 번도 본인의 사연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분위기상 10사도가 그녀의 마을을 공격했다고 추측했을 뿐이다.
그들이 잡아간 사람들은 혈귀들의 먹이가 되기 때문에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엄마를 봤다는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래.”
마르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꺼먼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우리 엄마가 있었어.”
“누구였는데?”
“…….”
마르타는 대답하지 않고, 천장에 달린 마법 등을 올려다보았다.
“더 젊어지고, 예뻐졌지만 분명히 우리 엄마였어. 내가 모를 수가 없다고….”
그녀는 잘못 봤을 리가 없다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르타?”
이름을 부르자, 그녀의 시선이 내려온다. 절망과 공허함이 담긴 듯 눈동자가 탁 풀려 있었다.
“백…혈교주.”
“…뭐?”
라온이 신음을 흘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름에 순간 머리가 텅 비어서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
루난도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바닥에 놓여 있던 물병이 쓰러지며 둔탁한 소리가 흘렀다.
“백혈교주가 우리 엄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어.”
마르타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죽어가는 듯한 눈동자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외모가 닮았다는 거야?”
“닮은 게 아니라. 백혈교주가 우리 엄마야.”
“그게 무슨 소리….”
라온은 고개를 젓다가 마르타의 손에 들린 낡은 물방울 목걸이를 보았다.
‘저건….’
훈련생 시절 여름에 거친 훈련을 할 때 그녀의 목에서 튀어나왔던 목걸이다. 굉장히 아끼는지 튀어나오자마자 다시 옷 속에 넣는 모습을 몇 번 봤었다.
‘저걸 분명 봤는데. 아!’
라온이 떨리던 다리를 잡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백혈교주. 그녀가 가지고 있었어….’
백혈교주가 혈신을 소환하고 글렌과 전력을 다해서 부딪칠 때 그녀의 드레스 밖으로 목걸이 하나가 튀어나와 흔들렸었다.
색은 다르지만, 마르타의 손에 잡혀 있는 목걸이와 똑같은 형태였다.
‘그러고 보니….’
외모도 비슷해.
백혈교주도 마르타는 같은 흑발흑안이었다. 이제 떠오른다. 백혈교주를 보고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바로 앞에 있는 마르타였다.
마르타의 외모는 성격과 다르게 단아한 느낌을 주지만, 그녀가 조금 더 나이를 먹고 농염함을 드러낸다면 백혈교주와 흡사한 외모가 될 것 같았다.
‘그럼 백혈교주가 진짜 마르타의 엄마라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확신이 진짜라는 생각이 뇌리를 거세게 두들겼다.
라온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대체….’
고민 상담을 해주겠다고 했지만, 마르타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전생에 정상적인 삶을 살지 않았던 게 이럴 때 발목을 붙잡는다.
‘라스. 어떻게 해야 하지? 해줄 말 없어?’
-바, 밥을 먹여야 하나?
‘…….’
라스도 정상적인 삶을 살아오지 않았기에 역시나 도움이 되질 않는다.
“마르타. 백혈교주가….”
“그녀는 우리 엄마가 아니야.”
마르타는 갑자기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며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얼굴과 몸은 분명 우리 엄마가 맞지만, 그 속에 있는 건 다른 년이야.”
그녀가 바닥을 긁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우리 엄마는 더럽게 웃지 않아. 남을 죽이긴커녕 욕도 못 하는 사람이야. 우리 엄마가 혈귀 놈들의 대가리가 됐을 리가 없다고!”
“…….”
루난이 다가가서 마르타의 떨리는 손을 꼭 잡아주었다. 평소의 마르타라면 쳐냈겠지만, 그녀는 조용히 루난의 온기를 받아들였다.
라온이 목을 매만지며 눈매를 좁혔다.
‘그럼 마르타 어머니의 육체에 백혈교주의 혼이 들어간 건가?’
에덴의 투구를 직접 겪었기에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령술이든, 혈술이든, 주술이든 그 정도 수준의 괴물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혼을 옮기는 방법을 만들었을 것이다.
-맞다.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라.
라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쯧 찼다.
-마계에도 그런 기생충 같은 것들이 꽤 많지. 놈들은 더러운 영혼으로 건강한 육체를 탐하는 아귀들이니라.
‘…너도 똑같이 내 몸을 빼앗으려고 했잖아.’
라온이 입맛을 다셨다. 따지고 보면 라스도 별다를 건 없었으니까.
-보, 본왕은 네놈의 소원을 듣고 온 거라니까! 네놈이 원했다고!
‘난 안 그랬는데?’
-했다고! 이 망할 악귀 자식아!
‘뭐, 그러던가.’
-끄아아아아악!
라스가 머리를 부여잡은 채 비명을 질렀다.
‘좀 비켜봐.’
라온은 버둥거리는 라스를 밀어놓고, 손가락을 매만졌다.
‘그럼 백혈교가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도 그걸 위해서였나?’
백혈교는 마을이나 도시를 습격한 뒤 그곳에 살던 사람의 절반은 죽이고, 절반은 본부로 데리고 간다.
지금까지는 교리 같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마르타의 말을 듣고 보니, 백혈교주의 혼이 들어갈 육체를 찾기 위해서라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 되돌릴 방법도 있어?’
-끄응,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하지. 다만 상황에 따라 다르니라.
‘상황? 그게 뭔데.’
아예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라는 말이었기에 라스를 붙잡았다.
-육체 주인의 영혼을 집어삼켰는지 혹은 가둬두었는지에 따라 다르다는 말이니라.
라스는 놓으라고 버둥거리며 말을 이었다.
-너도 이번에 겪었잖느냐. 네놈은 반쪽짜리 용의 혼을 흡수했기에 되돌릴 수 없지만, 만약 그 정신세계에 주인의 영혼을 가둬둔다면 살아날 가능성도 있느니라.
‘음, 그럼 마르타의 엄마가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다는 뜻이네….’
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을 벌레만도 못하게 보는 백혈교주가 영혼을 살려둘 리 없었다.
-그게 또 그렇지는 않느니라.
‘음?’
-전에 인과율에 대해 말했지.
‘그래. 원인과 결과.’
-강한 힘에는 그만한 반동이 있느니라. 사악하다고 무조건 육체의 혼을 죽인다는 보장은 없다. 어떤 계약과 조건이 걸렸을지 모르니까.
라스는 목덜미를 떠는 마르타를 보며 결과는 알 수 없다고 중얼거렸다.
“으음.”
라온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괜한 희망을 줄 수는 없어서 마르타에게 라스의 말을 전할 수가 없었다.
‘뭔가 확신을 줄 만한 게 있다면….’
속으로 한숨을 내쉴 때 마르타의 손에 잡힌 목걸이가 보였다.
‘잠깐….’
좀 이상한데.
마르타의 어머니가 백혈교주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면 저 목걸이를 차고 있을 리가 없었다. 예쁘지도, 비싸지도 특별한 능력도 없는 낡은 목걸이니까.
본인과 관계도 없는 낡은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는 걸 보면 라스의 말대로 마르타 어머니는 백혈교주에게 밀려서 정신세계에 갇혀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우우우우웅!
허리에 차고 있던 진혼검이 갑작스럽게 진동을 일으켰다. 그 말이 맞다는 것처럼.
“마르타.”
라온이 주먹을 말아쥐고 일어섰다.
“구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닐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 목걸이.”
마르타가 쥐고 있는 물방울 목걸이를 가리켰다.
“백혈교주도 그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었어.”
그 말에 마르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죽어가던 눈동자에 옅은 빛 한 방울이 돋아났다.
“정말 백혈교주에게 네 어머니의 혼이 먹혔다면 그 목걸이를 착용할 이유가 없잖아.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희망이 없는 건 아니야.”
라스와의 대화를 그대로 말해주니, 마르타 눈동자가 조금 더 밝아졌다.
‘아, 잠깐.’
라온이 마르타의 눈을 피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백혈교주가 살아 있는지도 모르는데….’
-살아 있다.
라스가 그게 뭐 별일이냐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그놈도, 반쪽짜리 프라이드도 살아갔느니라.
* * *
상업도시 카멜룬 외곽.
고풍스러우면서도 화려한 저택 앞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도로를 지나가던 상인이 저택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는지 바로 옆에 있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이곳은 빈집 아니었습니까? 무슨 일로 이렇게 모여 있는 겁니까?”
“이곳에 북멸왕께서 묵고 계시다네.”
노인은 별관의 가장 윗층을 올려보면서 짧게 숨을 뱉었다.
“부, 북멸왕이면 글렌 지그하르트?”
노인의 시선을 따라가던 상인이 기겁하며 물러섰다.
“쓰읍! 함부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다니, 조심하게!”
“아, 죄, 죄송합니다.”
“그분이 이곳에 계시니 어떻게 해서든 줄을 서려는 잡상인들이 모여든 것이지.”
노인은 부질없는 짓이라며 피식 웃었다.
“근데 왜 북멸왕이 카멜룬에 온 거죠?”
“그것도 모르나? 자네 대체 어디서 뭘했던 건가.”
“로베르트에서 오늘 올라왔거든요.”
상인은 남쪽에서 가져온 향신료들을 보여주었다.
“아, 그러면 모를 만하군.”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서쪽을 가리켰다.
“에덴 놈들이 카멜룬 서쪽에 지부를 설치해놨었거든. 그곳에서….”
노인은 카멜룬 전체에 퍼진 소문을 모두 말해주었다.
“호, 혼자서 백혈교주와 타천을 상대했다구요? 북멸왕이? 허어….”
상인이 입을 떡 벌렸다. 이전에는 글렌 지그하르트를 대륙제일인으로 치는 사람이 많았지만, 지그하르트의 활동이 멈추면서 다른 절대자들을 더 위로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최근에는 북멸왕을 뒷방 늙은이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홀로 오마의 수장 둘을 상대할 무력이 되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게 다가 아니야.”
노인이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그의 손자인 라온 지그하르트도 북멸왕에 못지않은 업적을 이뤘네. 납치된 상태에서 인질들을 구하기 위해 5사도를 죽이고, 금면사라는 마스터 상급의 검사도 베었다고 하더군. 그것도 백혈교주와 타천 앞에서.”
그는 젊은 검사의 기개가 대단하다고 말하며 씩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그 친구가 더 대단하다고 봐. 이제 20살도 안 된 무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 그러네요.”
상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그하르트라….’
최근 지그하르트는 그리 큰 이름을 떨치고 있지 않았다. 중앙에서 큰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육황에서도 중급 정도로 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북쪽의 검은 더 차갑고 강해졌다는 소문이 돌 것이다. 역시나 지그하르트의 이름은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상인은 돌린 채 뒤에 가서 선 뒤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자네 갈 곳이 있는 것 아니었나?”
노인이 상인의 배낭을 가리키며 눈매를 좁혔다.
“어르신 말씀을 듣다 보니, 지금 장사가 중요할 때가 아니네요.”
상인이 피식 웃으며 주저앉았다.
“현재의 천하제일인과 미래의 천하제일인일 지도 모르는 사람이 이곳에 있다면 얼굴은 봐야지요.”
* * *
저택 최상층에서 아래에 모여든 사람들을 내려보던 노파가 방긋 웃으며 뒤를 돌았다.
“모두 가주님을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군요.”
그녀는 중앙에 앉아 있는 글렌을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인사라도 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다들 좋아할 텐데요.”
“철새처럼 언제든지 날개를 돌릴 수 있는 자들이다. 의미 없다.”
글렌은 의자에서 일어서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지그하르트와 거래를 열려면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었는데, 이제 와서 길을 트려는 자들과는 만날 이유가 없었다.
저들이 아니라도, 거래를 트려는 사람은 수없이 많으니까.
“그렇겠지요.”
노파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자네는 왜 온 것이지? 암시장주.”
글렌이 노파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대륙 전체에서 손꼽히는 정보 단체 암시장의 주인이 바로 이 인자해 보이는 노파이다.
중앙에 한정되던 암시장을 지금의 규모로 일궈낸 사람이 이 노파였기에 방심할 수가 없었다.
“우리의 거래는 끝났을 텐데.”
“거래는 끝났죠. 하지만 은혜는 남았습니다.”
암시장주가 글렌의 앞으로 다가가서 허리를 굽혔다. 힘든지 살짝 목을 떨면서도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은혜?”
“예. 그란세빌은 저희가 꽤 공들여서 운용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상업의 카멜룬처럼, 유흥의 그란세빌로 만들려고 했었죠.”
“그래서?”
“그걸 위해서 암시장의 많은 인재를 그란세빌로 파견 보냈습니다. 제 후계자 후보 한 명도 보냈지요.”
“안대를 쓴 여아를 말함인가?”
글렌이 눈매를 좁혔다. 이번 일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선 암시장의 지부장이 떠올랐다.
“그렇습니다.”
암시장주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광풍부단주 덕분에 7사도에게서 살아남은 아이지요. 라온 님을 어떻게 해서든 구해야 한다고 제게 매달렸습니다.”
그녀는 다정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글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 아이를 구해주어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북멸왕이시여.”
“그 아이는 고마울 정도로 진심이었지. 다만….”
글렌은 암시장주를 지그시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암시장주의 감사는 받기 어렵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으니까.”
“절 너무 경계하시는군요. 이번만큼은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소녀의 마음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소녀라.”
글렌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다만 자네나 그 아이가 감사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도 이곳으로 오고 있으니, 광풍부단주에게 함께 인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암시장주는 글렌을 올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광풍부단주를 예상보다 더 아끼고 있군.’
글렌 정도의 위치라면 다른 이들의 인사를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공을 자연스럽게 넘기는 모습을 보니, 라온이라는 아이를 소중히 여기는 게 분명했다.
‘하긴 그게 아니었다면 구하러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지그하르트를 무시했다는 핑계를 댔지만, 가주가 직접 움직인 것을 보면 라온이라는 아이를 후계자급으로 여기는 게 분명했다.
‘그럴만해.’
라온 지그하르트는 19살에 마스터 중급에 오르고, 사도 셋과 마스터급 귀신 다섯을 잡은 괴물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후계자 끄트머리 급에 올라갈 기량은 충분했다.
“가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암시장주가 허리를 혀며 글렌을 바라보았다.
“뭐지?”
“이번 일을 통해서 암시장도 에덴과 백혈교의 견제를 받게 될 거라 생각됩니다.”
“그렇겠지.”
“에덴과 백혈교를 상대하는데 임시로 연합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정보를 줄 테니, 무력을 빌려달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저희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은 하겠지만, 상위 사도 급은 희생이 극심할 듯해서….”
“알겠네.”
글렌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후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암시장주가 고개를 숙였다.
‘이것도 라온 때문인가.’
본래 글렌의 성격은 독보. 이런 연합 제안을 쉽게 받아들였을 리가 없다.
그는 아직도 라온을 납치한 백혈교와 에덴에 대한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 것 같았다.
‘라온에게 선물을 준비해야겠군.’
미리 선을 대놔서 나쁠 건 없으니, 그의 몸 상태를 좋게 할 선물을 챙겨두는 게 좋아 보였다.
“전 그럼 서류를 준비한 뒤 넷째와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암시장주는 고개를 꾸벅이고서 방을 나섰다.
“나쁘지 않겠군요.”
외곽에 서 있던 셰릴이 앞으로 나오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 쪽 정보는 북과 중앙에 한정되어 있으니, 암시장의 힘을 빌린다면 꽤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고, 피할 수 없다면 멸망시켜야지요.”
로엔이 허리춤의 세검을 어루만졌다. 인자하기만 했던 그의 눈빛에 섬뜩한 살의가 일어났다.
“진정 좀 하세요.”
셰릴이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음, 실례했습니다.”
로엔이 민망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다만 눈빛에 맺힌 살기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전 라온 도련님께 위해를 가한 놈들을 가만히 놔둘 수가 없군요. 굳은 몸을 좀 풀어놔야 할 듯 합니다.”
그는 전성기의 능력을 되돌려야겠다며 검병을 쥐었다.
“이해해요. 만약 라온이 잘못되었다면 저도 대륙을 헤집으면서 돌아다녔을 테니까.”
셰릴도 섬뜩한 눈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렇지.”
글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벌레 같은 것들은 살려둘 이유가 없다. 보고가 뜨는 대로 확실하게 지우도록.”
“예!”
“알겠습니다.”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섬뜩한 눈빛을 빛냈다.
“하….”
리메르가 로엔과 셰릴, 글렌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맨날 나보고 팔불출이라더니, 지들이 더하네.’
예전에 뭘 애를 그리 챙기고 다니냐고 하던 사람들이 이젠 라온 때문에 대륙을 뒤집을 기세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진짜 이상하다니까.’
셰릴은 딱히 아이를 좋아하지 않고, 로엔은 인자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냉정한 성격이다. 저 둘이 라온에게 빠졌다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하긴 매력은 있지.’
라온은 아이답지 않게 누군가에게 어리광을 부리지도, 도움부터 요청하지도 않는다. 천재 따위가 아니라, 위를 보며 달리는 노력가였기에 저들의 마음을 끌어당겼을지도 모르겠다.
“저….”
리메르가 글렌에게 말을 걸려고 할 때였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광풍부단주. 라온 지그하르트입니다. 가주님을 뵙고 싶어서 왔습니다.”
노크 이후에 조금 긴장한 듯한 라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어?”
살기를 일으키고 있던 로엔과 셰릴의 기세가 촛불처럼 훅 꺼졌다.
“제가 문을 열겠습니다.”
“잠깐!”
로엔이 평소처럼 문으로 다가가려 할 때 리메르가 기막을 쳐서 소리를 막았다.
“가주님.”
그는 글렌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또 냉정한 척하실 생각이죠?”
“음….”
“이번 일을 겪었으니까 잘 아실 텐데요. 무인으로 사는 이상 위험한 일은 수시로 찾아와요. 진심을 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구요.”
리메르는 드물게도 진지한 눈빛으로 글렌을 쏘아보았다.
“이제 속마음을 좀 밝히세요. 손주 아낀다고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윽….”
글렌이 처음으로 리메르를 보며 어깨를 움찔했다.
“뭐, 저 주정뱅이의 말은 무조건 반박하고 싶지만, 이번만큼은 맞는 말이네요.”
셰릴이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문 앞에 선 로엔이 방긋 웃었다.
“저도 가주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으니까. 많은 거 안 바랍니다.”
리메르가 한숨을 쉬며 검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걱정! 걱정했다는 한마디는 꼭 해주셔야 합니다!”
그는 부탁한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고서 문 앞으로 다가갔다.
“잠깐!”
글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리메르, 셰릴, 로엔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크흠.”
그는 바싹 긴장한 음성으로 헛기침했다.
“지, 지금 내 목소리 괜찮으냐? 이상하지는 않지?”
“…….”
또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서 인상을 찌푸리던 세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멍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