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00화 (300/653)

제300화

붉은 뇌전이 어둑한 하늘을 뒤덮는다.

천공을 노니는 뇌룡이 강림한 듯 세계가 적광으로 번쩍였다.

거미줄처럼 번지던 뇌기가 결계 위로 응집되며 장대한 선을 이루었다.

쿠르르르릉!

대륙을 울리는 천둥소리가 꺼지기도 전에 쇠사슬처럼 꼬인 벼락이 태음결계를 관통했다.

콰와아아아앙!

무적을 논하던 태음결계가 종잇장처럼 찢겨나간다. 라스의 냉기도 굳건히 버텨내던 달과 별의 문양들이 조각나 바닥에 처박혔다.

붕괴하는 결계의 위로 한 남자가 내려선다. 천하를 굽어보는 붉은 눈이 사위를 짓눌렀다.

어둠에 겁먹고 숨었던 달이 상서로운 빛을 일으키며 그의 뒤를 받치고, 일그러졌던 별빛이 제 자리를 되찾아 아롱져 떨어진다.

마기가 어그러뜨렸던 천하의 균형이 한 사람의 존재에 의해 맞춰지고 있었다.

“글렌 지그하르트….”

백혈교주는 홀로 세계를 압도하는 남자를 보고 이를 갈았다.

“기척도 없이 나타나다니, 천기까지 바꾼 겁니까?”

타천은 지금도 번쩍거리는 적색 하늘을 올려보며 눈매를 파르르 떨었다.

“미, 미친….”

“글렌 지그하르트!”

“부, 북멸왕이 직접 왔다고?”

“이런 건 생각도….”

백혈교와 에덴의 간부들은 글렌에게서 피어나는 패기에 짓눌려 허리조차 펴지 못했다.

“버러지들이 선을 넘었구나.”

글렌의 낮은 음성이 대지에 차오른 어둠을 털어 냈다.

“지금부터 움직이면 죽는다.”

그의 음성이 하나의 선언이 되어 대지를 울렸다.

“아….”

5사도가 진혼검에 당한 가슴의 통증을 참지 못하고, 가는 신음을 흘린 순간 그의 얼굴 중앙에 붉은 선이 돋아났다.

푸카아악!

선이 두껍게 번지며 5사도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재생의 공능조차 발휘되지 않는다. 즉사였다.

검을 휘두르는 것도, 오러를 운용하는 과정도 없다. 그저 5사도를 베었다는 결과만 있을 뿐이었다.

라온이 글렌의 등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북멸왕….’

대륙 전쟁을 제패하고, 뇌신이라 불린 남자. 현시대 천하제일에 가장 가까운 검사의 이름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놈보다도 더 강한 건가.’

데루스 로베르트를 못 본 지 20년이 지났지만, 그가 지금의 글렌보다 더 강해졌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역시 본왕의 라이벌이니라.

라스가 힘 빠진 음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왕이 본체를 가져올 수만 있었어도 좋은 승부가 되었을 텐데.

녀석은 본체를 꺼낼 수 없는 게 아깝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라온 지그하르트.”

허세를 부리는 라스를 무시할 때 글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달고, 납치나 당하다니 한심하구나. 그래도….”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착각 같지만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잘 버텨주었다.”

그 한마디가 가슴에 스며든다. 처음으로 느껴지는 따스함 때문일까 코가 맵다. 시야가 물기로 흐릿해지는 것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검을 들 기력도 없는 늙은이가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와?”

백혈교주가 상체를 일으켰다. 신비로운 존재감만 가득하던 그녀에게서 무형의 기운이 피어났다.

“이곳까지 행차하시다니, 손자가 꽤나 귀한 모양이군요. 그런데….”

타천이 손을 들어 올리며 눈매를 좁혔다. 그의 기파가 찰나의 순간에 이 지역을 전체를 뒤덮었다.

“혼자 오신 모양입니다?”

글렌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타천의 입매가 가늘게 말려 올라갔다.

“그래서?”

글렌이 턱을 살짝 치켜올렸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표정. 교만의 마왕이 힘을 넘겨준 건 타천이 아니라, 글렌처럼 보였다.

“스스로 무덤을 찾아오셨으니, 합당한 대우를 해드려야죠.”

타천이 양손을 펼치며 백혈교주의 가마에 눈길을 보냈다.

“좋아. 이번만큼은 손을 잡도록 하지.”

가마의 발이 부드럽게 걷히고, 백혈교주의 얼굴이 드러난다.

첫눈처럼 투명한 피부를 지닌 흑발흑안의 절세미녀였다.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핏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코를 간지럽히는 달큰한 향기가 피어났다.

‘저게 백혈교주인가.’

행동거지와 다르게 나이는 20대 중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보고만 있어도 머리가 멍해진다. 존재 자체로 매혹술을 펼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디서 봤던가?

정확히 떠오르지는 않지만, 어쩐지 외모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지부가 망가지는 건 뼈 아프지만, 북멸왕의 목숨을 가져간다면 큰 이득이 되겠지요.”

타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서 살기가 뚝뚝 흘러내린다. 그의 양손에서 빛과 어둠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북쪽 구석에 처박혀 있으면 제 수명까지는 살 수 있었을 텐데.”

백혈교주의 주변으로 새하얀 기운이 돋아난다. 극에 이른 혈기. 자연의 마나보다 더 짙은 순도를 가진 혈기가 하늘 끝까지 타올랐다.

‘크윽!’

라온이 가슴을 움켜쥐며 무릎을 꿇었다. 불의 고리를 운용해도 백혈교주와 타천이 일으키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숨을 쉴 수가 없다. 목구멍이 물에 젖은 종이로 꽉 막힌 것 같았다.

저들이 이전에 보여준 기세는 지금의 티끌조차 되지 않았다.

글렌은 백혈교주와 타천의 기운을 홀로 감당하면서도 평온했다. 알현실의 옥좌에 앉아 있을 때처럼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후욱….”

라온은 억지로 입을 벌려서 가는 호흡을 이어갔다.

‘이 싸움은 숨이 끊어져도 봐야 해.’

글렌 지그하르트, 백혈교주, 타천. 육황오마의 수장이자, 대륙의 정점에 오른 자들의 대결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눈에 담아서 소화한다면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떨어져 있거라.”

글렌이 살짝 턱을 튼 채 말을 건넸다.

“그리고 잘 봐두거라.”

그의 말이 닿음과 동시에 백혈교주와 타천의 기세가 사그라들며 숨을 쉬기 훨씬 편해졌다.

‘도와주시는 건가.’

평소의 그라면 알아서 버티라고 놔둘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알현실에 있는 글렌과는 조금 다른 사람을 보는 기분이었다.

“오마의 둘이라.”

글렌이 얼음장처럼 서늘한 눈으로 백혈교주와 타천을 향해 턱짓했다.

“손 풀기로 나쁘지 않군. 오라.”

“이 늙은이가….”

“흐음!”

글렌의 오만한 음성에 백혈교주와 타천이 인상을 찌그러졌다.

“여전하시군요.”

타천이 가늘게 웃었다. 교만함이 깃든 미소에서 살의가 흘러넘쳤다. 유형화된 살기가 땅을 시꺼멓게 물들였다.

“30년 전과 같다고 생각하지 마. 넌 늙었고, 우린 더 강해졌으니까.”

백혈교주의 주변으로 백혈이 번진다. 대지가 녹아내리고, 하늘이 비명을 질렀다.

쿠구구구구!

세 명의 절대자들의 기운이 경합하며 천지가 무너질 듯 요동쳤다.

화아악!

시작은 백혈교주다. 그녀의 손이 맞닿은 순간 바닥에서 혈기의 불길이 치솟았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화력의 불꽃이 글렌의 전신을 휘감았다.

치이이잉!

타천은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신성과 마성. 빛과 어둠이 교차하며 뻗어나가 글렌의 상체를 노렸다.

백혈교주와 타천의 공격은 라스의 빙계처럼 찰나의 순간에 발동되었다. 기운을 일으킨 순간이 이미 글렌의 몸에 닿아 있는 느낌이었다.

글렌은 상체와 하체를 동시에 노리는 두 괴물의 공세를 보고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감정 따위는 사치라는 듯 담백한 눈빛으로 발을 굴렀다.

쿠웅!

가볍게 뻗어낸 걸음에 대지의 축이 뒤틀리고, 붉은 벼락이 일어선다. 강렬한 뇌전에 허공이 이지러지며 백혈교주와 타천이 일으킨 불꽃과 빛이 녹아내렸다.

“준비 운동 따윈 필요 없다.”

글렌이 백혈교주와 타천을 내려보며 손짓했다.

“전력으로 와라.”

“혈폭!”

백혈교주가 다시 두 손을 모은다. 그녀의 주변에서 타오른 혈기가 부풀어 오르며 그 모습을 변화시킨다.

쩌어어어억!

대지가 갈라지고, 지부의 영역을 모두 뒤덮는 새하얀 해일이 일어섰다. 혈기의 물결 하나하나가 강환보다 더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혈기로 이런 현상을 일으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적이지만 감탄이 나오는 무력이었다.

치이이이잉!

타천이 손을 올렸다. 그의 손아귀에 치솟은 백색의 구체가 번지며 빛으로 이루어진 천여 개의 검이 현현했다.

성검. 하나하나가 극강의 검세를 지닌 검술이자, 마법이었다.

천 개의 칼날이 쏟아지고, 혈기의 해일이 몰아친다. 피할 공간 따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글렌은 현실을 벗어난 무시무시한 공세를 앞에 두고서도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진뢰.”

벼락 그 자체를 담아낸 듯한 적광이 명멸하는 진천검으로 하늘과 땅을 갈랐다.

쩌어어어억!

하늘을 지배하는 성검과 대지를 뭉개는 혈폭이 천하만물 모든 것을 베어버릴 칼날과 정면에서 맞부딪쳤다.

힘과 힘을 격돌에 에덴의 건물들이 뭉개져 가루가 되고, 땅거죽이 속살을 드러냈다.

쿠와아아아앙!

웅장한 파공음이 천하를 뒤덮는다. 불길처럼 번지는 벼락이 혈기의 물결을 지우고, 빛의 검을 깨부순다.

백혈교주와 타천을 홀로 감당하는 절대적인 무력. 글렌에게 대륙제일이라는 칭호는 조금도 과하지 않았다.

“그 정도 실력으로 건방을 떤 건가.”

글렌이 한심하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성격이 급해지셨군요.”

“이제 시작일 뿐이야.”

타천과 백혈교주가 차게 웃으며 검은빛과 혈기를 끌어 올린다. 점점 더 증폭되는 기운. 둘 역시 아직 전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이번엔 내가 가도록 하지.”

글렌의 왼발이 땅을 짓누름과 동시에 그의 몸이 타천의 앞에서 치솟았다. 공간을 격하는 보법. 태화보의 완성형이었다.

치리리링!

글렌이 거슬리는 것을 치우듯 진천검을 내리그었다. 단순하면서 빠른 검격이기에 무엇보다 강력했다. 빛살처럼 뻗어나간 칼날이 타천의 목에 닿는 순간 어둠이 일어났다.

쿠루루루!

어둠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진천검을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잘 잡고 있어.”

백혈교주의 손아귀에 용의 꼬리 같은 거대한 채찍이 잡혔다. 백혈기로 이루어진 혈편이었다.

치이이이잉!

떨어지는 채찍이 수백 갈래로 나뉘며 글렌의 전신을 휘감았다.

화아아아아!

위기의 순간에도 글렌의 가라앉은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진천검에 태양처럼 진한 적광이 깃들며 어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마도가 밀려?”

타천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선 순간 글렌의 검이 길쭉한 원을 그렸다.

빠지지직!

검형과 함께 뿜어진 강대한 뇌전이 지평선처럼 뻗어나갔다.

쩌어어어엉!

뇌기의 검격이 수백 줄기의 혈편을 가르고, 타천의 어둠마저 베어버렸다.

쿠와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힘의 여파에 에덴의 지부가 통째로 무너지고, 대지가 가뭄 난 논처럼 갈라졌다.

글렌이 바스러지는 대지를 보며 혀를 찼다.

“좁군.”

그가 오른발을 앞으로 뻗으며 진천검을 쳐올렸다. 뇌전과 폭풍이 몰아치며 백혈교주와 타천을 뒤로 밀어냈다.

터엉!

글렌이 다시 태화보를 밟아 백혈교주의 앞으로 짓쳐 들었다.

쿠우웅!

백혈교주도 그걸 알아차리고 혈기로 검을 만들어 막아섰다. 타천이 입술을 핥으며 어둠을 일으켜 그사이를 파고들었다.

쩌저저저정!

백광과 적광 그리고 흑광이 끝없이 맞부딪치며 장대한 빛무리를 이뤘다.

인간을 벗어난 세 절대자는 점차 지부에서 멀어져 텅 빈 들판의 하늘에서 각자의 무력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상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세 사람의 힘의 여파가 뻗어 나와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쿠우웅!

무너진 대전 쪽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라온이 거친 숨을 내쉬며 뒤를 돌았다. 멀린이 눈을 부릅뜬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야. 이게….”

“네년이 납치한 새끼 때문에 북멸왕이 직접 왔다. 크으….”

서리의 기둥에서 벗어나 지혈을 하며 금면사가 이를 갈았다.

“그리고 납치한 이유마저 망했지.”

그가 손가락을 들어 올려 라온의 얼굴을 가리켰다.

“저놈이 네 용을 역으로 먹어 치웠다.”

“뭐…?”

멀린의 고개가 기계처럼 딱딱하게 돌아갔다. 가면을 쓰지 않은 라온을 본 그녀의 눈동자가 터질 듯이 일그러졌다.

“록…타?”

“미안하게 됐어.”

라온이 울렁이는 속을 부여잡고 인상을 찌푸렸다.

‘속일 수가 없군.’

멀린을 잘 이용하면 이 상황을 더 쉽게 벗어날 수 있겠지만, 록타의 혼이 흡수되었기 때문인지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정신세계의 대결에서 내가 이겼다.”

“아….”

멀린이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가면 속 시선이 탁하게 풀렸다. 넋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크으!”

글렌의 위압에 짓눌려 있던 10사도가 멀린의 비명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지금이다. 라온 지그하르트를 확보해.”

그의 지시에 백혈교주의 가마를 들고 있던 남녀노소가 동시에 움직였다.

“…….”

반대편에 있던 절혼검이 손을 뻗자, 에덴의 간부들 역시 달려오기 시작했다.

“젠장….”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버틸 힘이 없는데.’

라스의 기운을 소모하느라 온몸이 만신창이다. 제천검을 들어 올릴 힘도 없었다.

‘그래도 방해가 되어선 안 돼.’

지금 글렌은 오마의 수장 둘과 싸우는 중이다. 그에게 짐이 될 수는 없었다.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다. 지끈거리는 심장의 고통을 참으며 두 검을 들어 올렸다.

‘죽어도 그냥 죽지는 않아!’

우측에서 달려온 노인과 좌측에서 접근해온 검은 오크의 투구를 향해 억지로 검을 내리치려고 할 때였다.

바람이 불었다.

머리를 간지럽히는 에메랄드빛 바람과 함께 키가 큰 엘프가 눈앞으로 나타났다.

쩌어어엉!

그의 손에서 뻗어나간 익숙한 검결이 푸른 폭풍이 되어 노인과 검은 오크 투구를 동시에 쳐냈다.

“아….”

라온이 흩날리는 붉은 머리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꼴이 말이 아니네.”

리메르가 뒤를 돌며 싱긋 웃었다. 걱정과 분노가 모두 깃들어 있는 미소였다.

“지그하르트의 광검!”

“…….”

10사도와 절혼검이 리메르를 노리고 동시에 움직인다.

“나만 온 게 아닌데?”

리메르가 어깨를 으쓱인 순간 10사도의 목으로 송곳처럼 얇은 검이 찔러 들어왔다.

“크윽!”

10사도가 다급하게 창대를 휘돌려 막아냈지만, 그의 목젖에서 가는 핏물이 흘러내렸다.

“단번에 끝을 낼 생각이었는데.”

푸른 세검을 든 남자가 공중제비를 돌아 땅에 내려섰다. 머리를 곱게 넘긴 노집사 로엔이었다.

“제 실력이 좀 녹슨 모양입니다.”

“살왕인가….”

10사도가 목을 부여잡은 채 이를 바득 갈았다.

쩌어어엉!

바위가 깨부숴지는 소리에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색이 다른 두 자루의 쌍검을 든 보랏빛 머리칼의 여성이 절혼검을 정면에서 막아섰다.

쿠구구구!

여검사는 몸집이 2배 이상 큰 절혼검을 힘으로 밀어내는 경이로운 무력을 보여주었다.

“라온.”

천검대주 셰릴이 두 검을 내린 채 고개를 돌렸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그녀는 입매를 살짝 올려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라온이 세 사람을 보며 턱을 파르르 떨었다. 심장이 거칠게 뛴다. 글렌의 목소리를 듣고서 꾹 참았던 감정이 폭발할 듯 울렁였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 잡아!”

10사도는 모두에게 지시를 내린 뒤에 창대를 말아쥐고 로엔에게 돌진했다.

“…….”

절혼검도 눈매를 살짝 좁힌 뒤에 사기와 투기를 끌어 올린 채 셰릴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내가 말을 잘못 했네.”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우리만 온 게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그의 비웃음과 동시에 허공에 십수 개의 차원문이 열린다.

우우우우웅!

갈라진 차원마다 지그하르트의 문양을 새긴 검사들이 뛰쳐나온다.

천검대, 백련대, 공검대, 적결대, 격호단 자주 만났던 무력단체만이 아니라, 외부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검사들까지 한 자리에 모였다.

쿠구구구구!

검사들은 눈빛에 차디찬 냉기를 담은 채 에덴의 지부를 둘러쌌다.

어느새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는 포위망이 형성됐다.

마지막으로 돋아난 차원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나타났다.

버렌, 마르타, 루난. 못 본 사이에 어른스러운 눈빛을 지니게 된 광풍단이 달려 나왔다.

“광풍단! 부단주를 호위하라!”

리메르의 외침에 광풍단이 광풍진을 일으키며 라온의 앞을 막아섰다.

그들은 고생했다, 걱정했다, 다행이다라고 입을 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는 굳건한 등으로 말을 대신했다.

쿠구구구구!

수백의 지그하르트 검사들이 일으킨 검기가 군기가 되어 요동친다. 하나 된 기파가 천지를 휩쓸었다.

라온이 피나도록 검병을 말아쥐었다.

‘난 혼자가 아닌 건가.’

목줄과 함께 목이 잘려 나간 전생과 달리 지금 내 옆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 검은. 내 삶은 이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라온.”

리메르가 아직 떨리는 오른손을 잡아서 적을 가리키도록 만들었다.

“고생했으니까. 가장 맛있는 부분은 넘기마.”

그가 씩 웃었다. 셰릴과 로엔 다른 검사들 모두가 이쪽을 보며 검을 다잡았다.

“지그하르트의….”

마른침을 삼켰다. 속에서 치솟는 웅심을 담아 외쳤다.

“적을 멸하라!”

라온의 낭랑한 음성과 함께 지그하르트가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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