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9화
“아….”
도리안은 5사도와 가마 노인을 베어버린 라온을 보며 턱을 파르르 떨었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혼자라도 살아남기를 바랐던 라온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을 저질러 버렸다.
“이 바보! 멍청! 띨빡이 자식아!”
살 수 있는 기회를 걷어 차버린 라온에게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욕을 못 하네.”
라온은 도리안을 보며 피식 웃었다.
“지, 지금 웃음이 나와요? 이제 도련님도 못 산다구요! 다 죽을 거예요!”
도리안은 오랜만에 도련님이라고 말하며 눈동자를 떨었다.
“비굴하게 살아남아 봐야 의미 없어.”
“그, 그렇지만 도련님은 저희와 다른….”
“똑같아.”
라온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 삶도, 너와 이들의 삶도 하나다.”
“그, 그건….”
“사람들은 언제나 결과를 보지. 몇 살에 익스퍼트에 오르고, 몇 살에 검기를 썼는지를 따져서 강함의 순위를 매기잖아.”
전생의 난 살기 위해서 결과를 쌓았고, 지금의 난 더 나아가기 위해 결과를 냈다.
‘하지만 결과가 전부가 아니었어.’
라온이 허리를 폈다. 대륙의 꼭대기에 선 백혈교주와 타천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더러운 과정을 거쳐서 저들과 같은 결과를 낸다고 해도 난 행복해질 수 없을 거야.”
도리안과 인질들을 죽이고 살아남아서 그랜드 마스터. 아니, 그 이상의 위치에 오른다고 해도 오늘의 일은 평생 가슴에 남은 채 지워지지 않을 거다.
그런 응어리를 남기고 살아가느니, 이곳에서 죽는 게 나았다.
‘이젠 후회 따위는 남기지 않아.’
어긋난 삶은 한 번으로 충분하니까.
이번 삶은 혼자가 아니다.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만한 과정을 거쳐서 결과를 이룰 것이다.
“너희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불의 고리를 운용하여 영혼의 격을 드높였다. 목소리에 의기가 깃드는 게 느껴졌다.
“난 꺾이지 않는다.”
라온은 더운 피가 흘러내리는 제천검과 진혼검으로 백혈교주와 타천을 겨눴다.
‘음?’
하지만 두 괴물의 반응은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웃는다고?’
둘 괴물은 흥겹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피를 흘리면서 쓰러진 5사도와 노인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이쪽만 지그시 바라보았다.
“조금 실망인데, 난 결과가 다라고 생각하거든.”
백혈교주가 가볍게 손을 저었다.
“전 더 마음에 드는군요. 좋은 과정 없이는 훌륭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까요.”
타천은 좋은 소리를 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안 드신다면 이대로 물러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지. 저 아이에게 사도만 둘을 잃었거든. 손실이 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저희 쪽이 더 심하죠. 마스터 급만 자그마치 넷을 잃었으니까요.”
이번에도 둘은 자신을 평가하고만 있었다. 미쳤다는 말로도 저 둘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역시 너도 알고 있었나 보네.”
백혈교주가 타천을 보며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절 너무 무시하시는군요. 교주께서 아시는데 제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타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면서 왜 내기를 받아들인 거지?”
“멀린이 가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아이가 어떤 녀석인지 제대로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보게 된 감상은?”
백혈교주의 뜨거운 시선이 붉은 발을 뚫고 타천에게 박혔다.
“검에 대한 재능도 뛰어나고, 배포도 좋으며, 마지막에 보여준 의기도 마음에 듭니다. 멀린의 말대로 희생을 하더라도 데려올 가치가 있는 아이입니다.”
타천의 가면 속 눈동자가 짙은 색으로 번들거린다. 조금 전과 달리 욕망이 가득 차오른 눈빛이었다.
“그럼 늦었네. 내기는 이미 끝났으니까. 저 아이는 이제 본교 소속이잖아.”
백혈교주가 가마에서 등을 젖힌 채로 턱을 치켜올렸다.
“그건 아닙니다. 아직 멀린이 인정하지 않았으니까요.”
“멀린이 소중하게 여기던 혼을 저 아이가 먹었는데 놔둘까? 오히려 죽이자고 할 것 같은데?”
“글쎄요.”
타천이 그건 본인도 알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두 번째 내기를 하는 건 어때?”
“내기를 참 좋아하시는군요.”
“이 복잡한 상황을 풀려면 내기만 한 게 없으니까.”
백혈교주가 재생에 열을 올리는 5사도와 가마 노인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직 라온의 검을 제대로 못 봤거든. 각자 한 명씩 보내서 누가 먼저 저 아이를 제압하는지를 겨루는 건 어때? 재밌을 것 같지 않아?”
“기습으로 찌르는 것만 보았으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둘 다 이쪽으로 오거라.”
백혈교주의 부름에 5사도와 노인이 가마 쪽으로 다가갔다.
가슴이 뚫린 노인은 덤덤했지만, 진혼검에 목이 뜯겨나간 5사도는 지독한 살기를 담은 채 라온을 노려보았다.
“제대로 당했구나.”
백혈교주가 5사도의 목을 가볍게 훑어내리자, 멈추지 않았던 핏물이 그치고, 상처가 불에 지진 듯 아물었다.
라온이 그 모습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저걸 바로 아물게 만든다고?’
혈기의 천적인 요기가 가득 담겨 있는 상처를 단숨에 치료하다니, 백혈교주는 단순히 무력만 강한 게 아니었다. 신비로운 능력까지 보유한 있는 괴물이었다.
“당했으니, 갚아주는 게 좋겠지.”
백혈교주가 손가락을 들어 라온을 가리켰다.
“네 후배가 될 아이이니, 너무 거칠게 대하지는 말거라.”
“…알겠습니다.”
5사도는 대답과 달리 짙은 살기를 피워냈다.
“그 수준이라면….”
타천이 좌측을 보며 눈짓을 보내자, 금면사가 앞으로 나왔다.
“할 수 있겠죠?”
“물론입니다.”
금면사가 타천에게 고개를 꾸벅이고 5사도의 옆에 섰다.
“먼저 라온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자가 승자다. 죽이지만 않으면 상관없으니 마음대로….”
“그 내기 나도 껴도 되나?”
라온은 한 발 앞으로 나오며 백혈교주의 말을 끊어버렸다.
“뭐?”
“흐음?”
백혈교주와 타천은 거부하지 않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건 기회야.’
저 둘은 여전히 이 상황을 하나의 유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둘의 무력. 무슨 짓을 해도 지금의 우위가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저런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거다.
‘그걸 이용해야 해.’
이 내기도 진지하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무력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서 진행하는 놀이일 뿐이었다. 저들이 방심한 틈을 노려야 한다.
‘라스. 저 결계를 뚫을 수 있어?’
-지금 상태라면 구멍을 내는 건 가능할 거다. 지금이 때인가?
‘아니, 넌 힘을 모아 둬.’
-음?
‘놈들이 날 무시해서 시간을 줬잖아. 그걸 낭비할 수는 없지.’
이 지역은 카멜룬 바로 앞이고, 근처에 오웬과 발카르도 있다. 결계를 뚫고 나가기만 한다면 모두가 살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진다.
‘그래도 티끌뿐이지만.’
라온은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냉정하게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떻게 참여한다는 거지?”
백혈교주가 말해보라는 듯 턱을 끄덕였다.
“내가 저 둘을 꺾는다면 너희가 물러나라.”
지금 자신의 무력은 마스터 중급. 5사도와 금면사는 상급이다. 저쪽 입장에서 질 수가 없는 내기였다.
“흐음….”
백혈교주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생각해?”
“이전에도 말했지만 전 저 아이의 배포가 마음에 듭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럼 나도 허락하지.”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의 말을 믿으면 안 돼.’
백혈교주와 타천은 백혈교와 에덴의 정점에 선 괴물들이지만 언제든지 약조를 어길 수 있는 악의를 가지고 있다.
이 내기에서 이긴다고 해도 절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이 싸움에 직접 끼어든 건 스스로 벗어나기 위한 길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도리안.”
라온이 보고에서 꺼내 온 검을 도리안에게 넘겨주었다.
“이, 이건….”
“네가 저들을 지켜.”
이제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사람들을 가리켰다.
“너도 지그하르트의 검사로서 의지를 보여라.”
“아, 알겠어요.”
도리안은 당황하면서도 검을 받았다. 겁먹은 모습을 최대한 숨긴 채 사람들 앞에 가서 검을 뽑아 들었다.
“많이 기다리게 했군.”
라온이 5사도와 금면사 앞에 서서 두 검을 고쳐 잡았다.
“깜찍하게 잘도 속였구나.”
금면사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말했잖아. 돌아올 거라고.”
“흥. 그 말을 누가 믿는단 말이냐.”
“어쨌든 아까 편들어줘서 고맙다.”
“닥쳐!”
그가 짜증이 가득 돋아난 눈빛으로 이를 갈았다.
“그래. 지금 떠들어 둬.”
5사도가 금면사와 라온 사이로 끼어들며 혈기를 일으켰다. 강대한 혈기가 바위 같은 주먹을 휘감았다.
“시작하면 둘 다 부숴줄 테니까.”
그는 라온만이 아니라, 금면사에게도 강대한 기파를 쏘아냈다.
“차라리 네놈과 일대일로 싸우고 싶군.”
금면사가 바닥에 침을 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시작하거라.”
백혈교주의 손짓과 함께 금면사와 5사도가 동시에 땅을 박찼다.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는 듯 검과 주먹에서 강대한 기운이 치솟았다.
라온은 송곳처럼 파고드는 검격과 망치처럼 쏟아지는 권격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 싸움은 통과점.’
이번 전투는 계획의 일부분일 뿐이다. 몸은 다쳐도 상관없지만, 최대한 오러 소모가 적도록 빠르게 끝내야 한다.
쿠웅!
진각을 밟았다. 만화공과 글래시아를 동시에 운용하여 제천검으로 금면사의 검격을 쳐내고, 진혼검으로 5사도의 권격을 갈랐다.
쿠구구구!
검과 검 그리고 권이 부딪치며 일어난 장대한 충격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흥!”
5사도는 코웃음을 치며 어깨에서부터 회전력을 일으켜 주먹에 담아냈다. 강대한 전사경이 깃든 권강이 가슴을 찔러왔다.
“쯧.”
금면사가 짧게 혀를 차고서 휘돌린 검을 내리쳤다. 칼날처럼 예리한 투기가 휘감긴 검격이 머리를 향해 쏟아졌다.
‘지금!’
라온이 태화보를 밟았다. 왼발이 대지를 밀어낸 순간 시야가 변한다. 한순간에 공간을 격하고 두 사람과 거리를 벌렸다. 정신세계에서 껍질 하나를 벗은 태화보의 발현이었다.
“음?”
“윽!”
좌우에서 동시에 달려들던 5사도와 금면사는 사라진 라온 대신 서로를 향해 검과 주먹을 부딪쳤다.
쩌어어엉!
두 사람의 무력은 호각. 서로 열 걸음씩 물러섰다. 바닥에 찍히는 깊은 족적이 그 충격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 자식!”
“제대로 안 보는….”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춘 순간 태화이보를 걸었다. 시위를 당긴 화살이 나아가듯 찰나의 순간에 금면사의 앞으로 파고들었다.
“날 무시하는 거냐!”
“네가 익숙하니까.”
라온이 입술을 씹으며 진혼검을 내질렀다. 짧은 칼날 위로 타오른 불꽃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금면사의 어깨를 노렸다.
“이미 파악한 검술이다!”
금면사가 사선으로 검을 그어 내렸다. 투기가 파도처럼 번지며 회천의 불꽃을 지워버렸다.
하지만 그건 속임수. 진짜는 그 뒤다.
쿠웅!
단전에서 부터 끌어 올린 기운을 오른손으로 뽑아냈다. 푸른빛이 명멸하는 제천검의 칼날이 금면사의 가슴으로 쏘아졌다.
라온 지그하르트 류 검식.
제1형 서리연.
“그것도 아는 검술이다!”
금면사가 중심을 낮췄다. 아래에서부터 검을 올려 중단에서 내린다. 투기를 두른 두 줄기 검격이 서리연의 첫 번째 칼날을 막아섰다.
쩌어어엉!
검과 검이 부딪치며 강대한 충격이 일어났다.
“어?”
금면사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의 검은 서리연의 첫 일격을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뒤로 튕겨 나가버렸다.
“어째서….”
“간단해.”
라온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서리연의 두 번째 칼날을 내질렀다.
“더 강해졌으니까.”
“이익!”
금면사가 투기를 끌어 올려서 방비를 갖추려 했지만, 두 번째 칼날이 더 빨랐다. 록타의 혼을 흡수하여 성장한 글래시아의 냉기가 붉은 투기를 뚫고 금면사의 가슴에 박혔다.
‘제대로 먹혔군.’
금면사가 이미 알고 있는 검술을 예측 범위를 벗어난 위력과 속도로 펼쳤기에 만들어진 결과였다. 그가 방심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커헉!”
냉기의 창날에 찍힌 금면사가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대로 자빠졌다.
터엉!
라온은 금면사에게 거둔 승리를 만끽할 새도 없이 바로 뒤를 돌았다.
“건방진 놈!”
5사도가 그림자처럼 붙으며 주먹을 날려왔다. 회색 기류가 치솟은 주먹이 심장을 향해 쏘아져 왔다.
치리리링!
몸을 돌린 회전력을 이용하여 진혼검을 올려쳤다. 만화공의 불꽃이 요기와 어우러지며 열기를 드높였다.
쩌어어어엉!
강대한 충격.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5사도가 왼쪽 주먹으로 다른 권격을 쏘아냈으니까.
‘흐름을 봐야 해….’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공명시켰다. 뻗어오는 5사도의 주먹이 조금씩 느려진다. 주먹에 가득 찬 주름과 상처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혈기의 흐름이 눈에 비쳤다.
‘강과 변 그리고 쾌.’
5사도의 주먹에는 강함과 빠름, 다채로움이 뒤섞여 있었다. 열 개로 번진 주먹이 전신의 급소를 노려왔다.
‘전부 피할 수는 없어.’
지금 상태에서 저 주먹을 모두 피하는 건 불가능한 일. 회피를 포기했다. 판단이 빠른 만큼 오러의 움직임도 쾌속했다.
화아아아아!
라온은 제천검을 휘돌리며 만화공 염주벽을 펼쳤다.
쿠구구구궁!
염주벽을 두드리는 5사도의 권격에 전신에 충격이 울렸다. 속이 뒤집히려는 것을 참고 앞으로 나아가며 진혼검을 꺾었다.
후우우우욱!
붉게 물든 칼날에서 더 짙은 색의 불꽃이 피어난다. 꽃봉오리를 떠난 화염의 조각들이 거센 폭풍이 되어 5사도의 목을 향해 쏘아졌다.
“두 번이나 당하지는 않는다!”
5사도는 직선으로 뻗어오는 화염 폭풍을 보고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전방으로 강대한 권격을 뻗어내며 만화공 화령을 순식간에 지워버렸다.
터억!
5사도의 주먹이 화령을 제압하는 순간 라온이 한 발 더 내디뎠다.
치이이잉!
화령을 쓴 뒤 검집에 넣어둔 진혼검을 뽑았다. 붉은 칼날 위로 환상의 묘리가 스며들며 원망과 절규의 음율을 터트렸다.
라온 지그하르트 류 검식.
제3형 은검몽.
5사도의 감각이 극도로 저하됨과 동시에 은검몽의 묘리가 어린 진혼검이 놈의 목을 향해 나아갔다.
“크윽!”
5사도는 순식간에 정신을 차리고, 왼손으로 목을 방어하고 오른손으로 권격을 내질렀다. 놀라운 반응. 이 짧은 순간에 공격과 방어를 모두 행하는 걸 보면 괜히 마스터 상급에 오른 괴물이 아니었다.
‘다만 그 반응이 널 죽일 거다.’
내가 노리는 건 네 목이 아니니까.
첫 기습과 이후에 이어진 전투에서 계속 목을 노려왔으니, 5사도의 머릿속에는 목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을 것이다. 이건 목의 방어를 유도하는 착각의 검이었다.
치이이잉!
거짓된 칼날 뒤에 숨었던 은검몽의 검격이 5사도의 심장을 향해 뻗어나갔다.
“이익!”
5사도가 다급하게 공격하려던 권격을 회수했지만, 이미 늦었다. 진혼검은 이미 목표를 향해 이를 드러냈으니까.
뿌드득!
진혼검이 혈기를 가르고, 5사도의 왼쪽 가슴에 박혔다. 요기로 놈의 심장을 부수려는 찰나 손에서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
“이게 무슨….”
“거기까지.”
백혈교주가 손을 뻗고 있었다. 혈기도 운용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몸을 멈추게 했는지 모르겠다.
“이 이상 사도가 죽는 건 사양이라서.”
그녀가 가볍게 손을 젓자, 가슴에 구멍이 난 5사도가 가마 쪽으로 끌려갔다.
“악양귀에게 들었던 대로 정말 경지 이상의 무력을 발휘하는군요.”
타천은 바닥에 쓰러진 금면사를 보지도 않은 채 박수를 보냈다. 그의 눈동자에 깃든 욕망이 더 진하게 타올랐다.
“내기는 라온 님이 이겼는데, 보내드릴 겁니까?”
그가 백혈교주를 보며 물었다.
“아니.”
백혈교주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지.”
붉은 발에서 그녀의 시선이 느껴진다. 타천 그 이상의 욕망을 휘감은 눈동자가 심장을 찌르는 듯 파고들었다.
“저런 보석을 놓아줄 수는 없잖아?”
“역시 그렇군요. 같은 생각입니다.”
타천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라온이 백혈교주와 타천을 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이기면 보내준다고 했잖아!”
“약속을 꼭 지켜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사실 약속은 어기라고 있는 거잖아.”
“너희가 그러고도 오마의 수장이냐!”
“그래서 오마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타천은 라온을 조롱하듯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대신이라고 하기엔 뭣 하지만 선택권을 드리지요.”
그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에덴과 백혈교 어디로 갈지 직접 선택하세요.”
저것도 개소리다. 하나를 고르면 다른 쪽에서 죽을힘을 다해 공격할 테니까.
“제기랄!”
라온은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무릎을 꿇었다. 절망을 연기하는 겉모습과 달리 속은 그 어느 때보다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라스. 네 힘을 넘기고 그걸 쓰게 해줘.’
-그거?
‘네가 본체의 모습으로 처음 사용했던 기술 있잖아.’
단 한 순간에 시야 전체를 얼려버렸던 대규모 냉기 기술. 그걸 사용한다면 저 둘도 묶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빙계를 말하는 건가?
‘그게 정신세계를 한 번에 얼려버린 거라면 맞아.’
-음, 세상에는 인과율. 원인과 결과라는 것이 있느니라. 하고 싶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
‘안 된다는 거야?’
-힘들다는 것이다.
라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본왕이 네게 줄 수 있는 기운에 한계가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네 몸은 망가질 것이니라. 지독한 고통에 혼절할 수도 있느니라.
‘괜찮아. 버틸 수 있어.’
전생의 경험 덕분에 고통에는 익숙하다. 죽지만 않는다면 견딜 수 있었다.
-쯧, 하여튼.
라스가 혀를 쯧 차고서 팔목에 달라붙었다.
-본왕에게 몸을 맡겨라. 넘기라는 게 아니라, 본왕이 일으키는 흐름을 그대로 따라와라.
녀석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혼에 붙은 분노를 통해 어마어마한 기운이 밀물처럼 스며들어왔다.
-지금이다!
라스가 마나회로를 흐르는 냉기를 통해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라온은 그 흐름을 따라 전신을 가득 채운 라스의 기운과 오러를 동시에 운용했다.
‘크으으윽!’
이가 악물린다. 무시무시한 기운이 마나회로를 통과하며 온몸이 찢어질 듯 아리고, 단전이 폭발할 것처럼 출렁였다.
-계속 가거라!
‘알아!’
혈관도 파열되었는지 시야가 시뻘게지고, 온몸에 극심한 통증이 일어났지만, 꾹 참고 끝까지 기운을 운용했다.
-상상해라. 저들 모두가 얼어붙는 모습을!
귓가를 울리는 라스의 음성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녀석이 본체의 모습으로 보여주었던 빙계를 떠올리며 양손에 모인 기운을 모조리 터트렸다.
후우욱!
자그마한 소리조차 없다. 시간도, 공간도 무시한 채 치솟은 냉기가 백혈교주와 타천을 비롯한 백혈교와 에덴의 고수들을 모조리 얼려버렸다.
-제대로 그렸구나.
“도리안!”
라온이 피를 토하며 일어섰다. 한순간에 운용한 강대한 힘 때문에 내상이 극심했지만, 지금은 상처를 치료할 때가 아니었다.
“사람들을 데리고 와!”
“아, 예!”
무거운 걸음으로 결계로 향했다. 아직 오러가 남았다. 라스가 추가로 보내주는 냉기를 운용하여 이 결계를 깨부숴야 했다.
‘라스 이번에는 그 파도.’
-알겠느니라.
라스를 따라 손을 뻗었다. 손아귀에서 일어선 차디찬 해일이 결계를 내리쳤다.
뿌드드득!
대지가 뭉개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결계에 푸른 금이 돋아났다. 하지만 끝내 깨지지는 않았다.
‘라스의 힘으로도 못 뚫는다고?’
라온은 회복되는 결계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다른 건 몰라도 라스가 보는 눈은 틀린 적 없다. 결계에 틈도 만들 수 없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쉽겠군요.”
뒤에서 들린 부드러운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백혈교주와 타천을 얼리고 있던 거대한 얼음이 한순간에 녹아 있었다.
“제가 이 안에 있으면 결계는 더욱 단단해지거든요. 지금이라면 누구도 깰 수 없다고 자신합니다.”
타천이 빙긋 웃었다.
“그 정도의 힘을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방심했다간 저도 한동안 꼼짝도 못 할 뻔했어요. 마스터 중급이 어떻게 한순간이지만 그랜드 마스터도 넘어서는 힘을 운용한 건지 정말 궁금하군요.”
가면의 새빨간 입술이 기묘하게 꺾여 올라갔다.
“아직 세공이 안 된 보석이라 여겼는데 아니었어.”
백혈교주가 턱을 들어 올렸다. 발을 살짝 걷고 직접 시선을 보낸다. 흑진주 같은 검은 눈동자를 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크으….”
라온이 이를 악물었다. 뒤를 돌아보니 도리안과 인질로 잡혔던 사람들이 슬픈 눈동자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끝난 건가….’
계획한 건 모조리 망가졌다. 라스에게 도움을 받아도 현재 자신의 육체와 오러로 저들을 막는 건 무리였던 것 같다.
‘이제 도박밖에 남지 않았군.’
마지막 남은 방법은 하나. 죽을 각오를 한 채 라스에게 몸을 넘기는 일뿐이었다.
‘라스.’
-…본왕의 부하도 있으니, 노력해보마.
라스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긴장이 흘렀다.
“넌 내 거야.”
“안될 말입니다. 지금 걸 본 이상 절대 보낼 수는 없어요.”
백혈교주와 타천의 눈동자에 깃든 욕망이 유형화된 듯 사이한 빛을 번들거린다. 두 괴물은 절대 놓칠 수 없다며 거대한 손을 뻗어왔다.
“후욱….”
라온이 머리를 움켜잡으려는 두 괴물의 손아귀를 보며 피나도록 주먹을 말아쥐었다.
‘라스. 너에게….’
라스에게 몸을 넘겨주려고 할 때 갑자기 백혈교주와 타천이 멈춰 섰다.
“설마….”
“이런.”
두 사람은 눈을 부릅뜬 채 하늘을 올려보았다. 저들이 놀라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지?’
라온이 떨리는 고개를 들어 그들의 시선을 따라갔다. 어둑한 밤하늘에서 황금빛 별이 번쩍였다.
‘금색 별?’
별의 붉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온 세상이 시뻘겋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