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98화 (298/653)

제298화

타천은 천공에 세워진 계단을 밟듯이 천천히 내려왔다. 신성과 마성. 혼돈과 질서가 한 몸에 어우러진 듯한 괴이한 기운이 그의 전신에서 피어났다.

라온이 인간을 벗어난 듯한 존재감을 일으키는 타천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역시 타천이 온 건가.’

에덴에서 백혈교주를 막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른 자는 두 명이지만 활동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니, 이곳에 올 사람은 처음부터 타천으로 정해져 있었다.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군.’

타천이 가진 마나가 너무 거대하여 역으로 그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대해를 마주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라온이 억지로 시선을 내린 후 라스를 툭 쳤다.

‘섞였다는 건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이니라.

라스는 타천에게서 고개를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저놈에게 마왕 중 하나의 기운이 깃들어 있느니라.

‘…마왕이라고?’

마왕이라고 하자마자, 하분 성에서 마주친 슬로스가 떠올랐다. 하늘을 부술 듯한 압도적인 기파. 마스터 중급에 오른 지금도 그의 앞에서는 제대로 서 있지 못할 것 같았다.

-재밌는 건 저놈의 절반은 순수한 신성이라는 점이겠지. 타천이라고 했던가? 이름 한번 잘 지었구나.

라스가 타천을 올려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저런 짓을 할 미친놈은 딱 하나뿐이니라.

‘그 미친놈이 누군데?’

-프라이드.

라스가 타천을 노려보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짜증이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교만>의 군주이니라.

‘교만….’

라온이 교만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 이름을 듣기만 해도 등골에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자주 말했었어.’

라스는 프라이드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 늘어놓았고, 그때마다 그리 좋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녀석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프라이드는 라스와 비등할 정도로 강한 마왕인 것 같았다.

‘그럼 나랑 너처럼 저놈의 몸에 프라이드가 묶여 있는 건가?’

-그건 아니다. 저놈에게서 프라이드의 존재 자체는 느껴지지 않느니라.

라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허….’

라온이 검병을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에덴의 수장이 마왕과 관계가 있었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었기에 백혈교주가 나타난 것보다도 더 당황스러웠다.

‘그럼 저 여자는 어때?”

가마 안에서 여유롭게 타천을 바라보는 백혈교주를 가리켰다.

-모르느니라.

‘어?’

-저건 본인의 힘을 철저하게 감추고 있느니라. 평소라면 모르겠지만, 기운이 달려서 그 속까지 볼 수가 없느니라.

라스는 축 처진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중요할 때는 도움이 안 된다.

투욱.

타천이 존귀함을 드러내며 땅으로 내려섰다. 얼굴에서 빛이 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존재 자체가 반짝인다.

만약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이었다면 신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후….”

라온이 폐 속에 차오른 탁기를 뱉었다.

‘이미 기호지세야.’

이걸 기회로 삼아 적들에게 주눅 들지 말고, 상황을 파악해서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를 해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혈교주.”

타천이 백혈교주가 자리한 가마로 다가갔다. 미청년의 얼굴이 새겨진 가면이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그새 또 모습이 바뀌셨군요,”

그는 붉은 발 안에 있는 백혈교주를 보며 고개를 살짝 틀었다.

“때가 돼서 말이야.”

백혈교주는 타천을 보고서도 당황하지 않고, 권태로움이 흐르는 웃음을 흘렸다.

“직접 보는 건 오마 협약 이후 처음인가?”

“아뇨. 그 이후에 한 번 뵈었습니다.”

“아아, 그러네.”

두 사람은 오랜만에 지인을 만난 것처럼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다만 둘의 음성 깊은 곳에는 피를 얼릴 정도로 서늘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부르셨다면 제가 찾아갔을 텐데, 어쩐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타천이 가마 쪽으로 한 발 걸어가며 소매를 쓸어내렸다. 가면 때문인지, 혹은 분위기 때문인지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넘치는 듯 보였다.

“가지고 싶은 게 있어서.”

“가지고 싶은 것이라면….”

“저 아이.”

백혈교주가 붉은 발 밖으로 손가락을 뻗어 라온을 가리켰다.

“내가 데려가고 싶은데?”

“흐음.”

타천이 고개를 돌려 라온을 바라보았다. 가면의 입매가 기묘하게 꺾여 올라갔다.

“안타깝게도 그 부탁은 들어드릴 수 없겠군요.”

“왜?”

백혈교주는 이번에도 라온을 맡겨둔 것처럼 당당하게 물었다.

“에덴의 일원은 모두 환원을 위해 모였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동지를 넘기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타천은 금면사가 백혈교주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그리고 저 투구는 특별해요.”

“특별하다고?”

“저 푸른 용의 투구는 제가 만든 게 아닙니다. 멀린이 처음부터 끝까지 제작했죠. 투구도, 투구를 쓴 자도 제 것이 아닌데 어떻게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말한 뒤 고개를 저었다.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긴장되어서 죽겠군.’

예상과 다르게 두 괴물이 너무 침착해서 끼어들 틈이 나오지 않았다. 불의 고리를 운용하여 머리를 맑게 만든 뒤 기회를 기다렸다.

“멀린이라.”

백혈교주가 가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더더욱 빈손으로 갈 수가 없겠는데? 우리 계획에 갑자기 끼어들어서 라온을 채간 게 그년이었거든.”

“아, 그런 일도 있었군요.”

타천은 그런 줄은 몰랐다는 듯 짧게 입맛을 다셨다. 다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뭐 어쩌라고’를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저 아이는 이미 투구를 썼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요. 에덴은 동지를 넘기지 않습니다.”

라온은 동지라는 말을 들으며 헛바람을 흘렸다. 백혈교주 앞에서 저런 소리를 하다니, 미쳤다고 해야 할지 고맙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 나와 내기 하나 하지.”

백혈교주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내기라고 하신다면?”

“저 아이가 에덴의 일원이라고 말했으니, 당연히 그와 관련된 내기야.”

그녀는 간단하면서 재밌을 거라고 말을 이었다.

“흐음.”

타천이 다시 뒤를 돌아 라온을 보았다. 고민을 하는 듯 가면을 살짝 쓸어내렸다.

라온은 백혈교주와 타천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지금이 기회야.’

타천과 백혈교주를 이간질하기 위해서는 저 내기를 받아들이는 게 유리하다. 무조건 받게 해야 했다.

“나는 당신들의 소유가 아니오. 내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분은 오직 공주님뿐이오.”

도발하듯 목소리를 거칠게 긁었다.

‘먹혀야 하는데.’

프라이드의 힘을 받았다고 했으니, 예의 바르게 보여도 실제로는 오만한 성격일 것이다. 백혈교주에게 한 치도 밀리지 않는 걸 보면 이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다.

“전 동포를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다만 그건….”

타천의 눈매가 살짝 좁혀졌다.

“어디까지나 그가 환원을 목표로 둔 일원일 때죠.”

그가 고개를 돌려 백혈교주를 보았다.

“말씀해보시죠. 어떤 내기를 하겠다는 겁니까?”

“간단해. 저 아이가 정말 투구의 혼에 먹혔다면 난 손을 떼겠어. 하지만 저 아이가 투구의 혼을 이겨냈다면 내가 데리고 갈게.”

백혈교주는 여유롭게 손을 저었다.

“그럼 너희의 일원도 아닐 테니 상관없잖아?”

“그가 투구의 혼에 먹혔는지, 먹히지 않았는지는 어떻게 알아보실 겁니까?”

“그야 방법이 있지.”

그녀는 정확하게 알아볼 방법이 있다며 웃었다.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다만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예. 교주께서 생각하신 방법 이후에 멀린의 인정까지 받는다면 허가하죠.”

“좋아.”

백혈교주는 자신이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보여 주시죠. 어떻게 저 아이가 투구에 먹혔는지 아닌지를 파악할지.”

타천이 마음대로 해보라는 듯 손을 펼쳤다.

라온은 백혈교주와 타천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둘 다 본인이 진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어.’

저들은 내기가 어떻게 돌아가든 서로에게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내기의 결과가 어떻게 정해지든 자신을 빼앗기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러면 편하지.’

록타가 어떤 행동을 할지는 이미 전부 머릿속에 박아두었다. 그의 혼을 흡수했기에 말과 행동으로 정체를 들킬 일은 없었다.

가장 좋은 결과는 에덴과 백혈교의 전쟁. 그 목표를 떠올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좋아.”

백혈교주가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옆으로 시선을 보내자, 5사도가 앞으로 나왔다.

5사도가 혈기를 운용하자, 그의 발밑에서 치솟은 회색 웅덩이에서 회색 기운에 휩싸인 남자가 솟구쳤다.

후우우우!

혈기가 풀어지며 그의 모습이 드러난다. 하늘거리는 초록 머리와 강아지 같은 순박한 눈동자. 모를 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왜? 저 녀석이 어째서 여기에….’

도리안. 눈동자가 풀린 녀석을 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가 이곳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허억….’

라온은 당황을 숨기기 위해서 혀끝을 짓씹었다.

-뭐냐! 왜 네 주머니가 저기 있는 건데!

‘설마 그때….’

멀린이 개방한 상자에 몸이 빨려갈 때 도리안이 무언가를 던졌던 게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 이후에 10사도에게 잡힌 것 같았다.

“이 아이가 라온에게 대륙추종향을 뿌려 준 덕분에 우리가 이곳까지 올 수 있었거든.”

백혈교주가 도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더듬이처럼 튀어나온 머리카락이 가라앉았다.

‘대륙추종향. 그거였군.’

나한테 뿌린 걸 10사도에게 들킨 거야.

백혈교는 도리안에게 있는 대륙추종향을 이용하여 이곳까지 찾아온 게 분명했다.

‘더럽게 꼬였어.’

도리안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대륙추종향을 뿌렸겠지만, 상황은 최악으로 흘러갔다. 예상치도 못한 일이라 머리가 탁해졌다.

“큰일을 했군요.”

타천은 상황을 알았음에도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만. 그가 프라이드라는 놈의 힘을 받았다는 게 실감이 되는 성격이었다.

“이제 내가 무슨 내기를 할지 알겠지?”

백혈교주가 손가락을 가리키자, 5사도가 도리안을 데리고 라온의 앞에 섰다.

“라온이 이 아이를 죽인다면 내 패배를 인정하지. 다만 이 아이를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데리고 가겠어.”

그녀는 본인이 이길 것이라는 걸 확신한 듯 미소를 지었다.

‘젠장….’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투구를 써서 다행이다. 만약 표정이 드러났다면 단번에 들켰을 것이다.

‘방법이 없어.’

도리안이 있다면 라스에게 몸을 맡기는 것도 쉽지 않다. 녀석이 폭주하면 가장 가까이에 있을 도리안부터 죽일 테니까.

“나쁘지는 않지만, 조금 애매하군요.”

타천이 도리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의 혼을 먹었다고 해서 바로 그 사람이 되는 건 아닙니다. 저 아이는 바로 어제 투구를 썼죠. 아직은 완벽하게 혼과 육체가 맞닿았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이 나서야 해.’

라온은 내기가 마음에 안 드는 듯한 타천을 보며 입매를 꽉 깨물었다.

“그걸 떠나서 내가 왜 저 아이를 죽여야 하는 거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도리안을 노려보았다.

“나는 기사다.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검을 휘두르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록타가 했었을 법한 말을 읊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발….’

표정은 당당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타천이 내기를 반대하기를 바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연기 같지 않아?”

붉은 발 안쪽에서 백혈교주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아무래도 내기는 내가 이긴 것 같은데.”

“아뇨.”

타천이 고개를 저었다.

“저 투구에 깃들어 있던 혼은 드래고니안이자, 기사단장이었던 록타 데포르트. 기사로서 저런 말을 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흐응.”

“그러니 말을 제대로 해야겠죠.”

그가 도리안의 옆으로 다가갔다. 제복 상의에 거꾸로 박힌 검의 문양을 가리켰다.

“이거 보이시죠? 이 거꾸로 박힌 검은 저희들의 가장 큰 적을 뜻하는 문양입니다. 즉, 당신이 모시는 멀린의 적이죠.”

타천은 지그하르트의 문양을 어루만지고서 빙긋 웃었다.

“얼마 전에 멀린이 가슴에 큰 부상을 입었는데, 그것도 이들의 소행이었습니다.”

“후….”

라온이 분노한 척을 하며 낮은 숨을 뱉어냈다.

‘저건 거짓이 아니야.’

셰릴이 멀린을 쫓아낼 때 쌍검으로 검격을 날렸던 게 생각났다. 타천은 그때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저 검사는 저희들의 적이자, 멀린을 다치게 만든 원흉 중 하나입니다. 이 정도라면 이유가 되겠지요?”

충분하다. 멀린만이 세상의 중심인 록타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도리안을 베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록타가 아니라, 라온 지그하르트. 절대로 도리안을 벨 수는 없었다.

“그럼 더 쉽게 해 줄까?”

백혈교주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가 허공에 퍼짐과 동시에 도리안의 큼지막한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어? 여, 여긴 어디… 어헉!”

도리안은 기이한 가마와 주변을 둘러싼 백혈교도와 투구를 쓴 귀신들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마지막으로 10사도를 본 그는 납치되었던 때가 생각난 듯 턱을 파르르 떨었다.

‘지독한 놈.’

이건 도와주는 게 아니라, 칼로 찌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백혈교주는 분명히 자신이 투구에 먹히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

불안감에 끝없이 눈동자를 굴리던 도리안이 라온을 보고 멈춰 섰다. 푸른 용의 투구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제복과 검을 보고서 눈을 부릅떴다.

“부, 부단주님?”

녀석의 순박한 목소리를 들으니 전신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위기감이 머릿속에 경종을 울렸다. 자칫 잘못하면 이곳에서 모두 죽을 수도 있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남자의 소속은 저희의 주적 중 하나인 지그하르트. 이 자를 베는 것이 멀린을 위한 일입니다.”

“…그렇군.”

라온이 검병을 꾹 말아쥐며 도리안을 보았다.

“아!”

도리안은 투구 속에서 비치는 자신의 눈을 보고서 입을 꾹 다물었다. 겁에 질린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알아봤어.’

오랜 기간 함께 지냈기 때문에 도리안도 자신이 투구에 먹히지 않았다는 걸 알아본 것 같았다.

“그럼 내기는 받아들이는 거지?”

백혈교주가 히죽이며 타천을 향해 손짓했다.

“예. 마지막에 말씀드린 대로 멀린의 확인만 끝난다면 보내드리죠. 다만 쉽게 움직일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요. 저희가 시간은 말하지 않았죠?”

타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아, 난 빨리 결정 났으면 좋겠는데.”

백혈교주가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자, 가마를 매고 있던 노인이 앞으로 나왔다. 다리를 지탱하는 사람이 세 명이 되었어도 가마는 흔들리지 않았다.

우우우우!

노인이 발을 구르자, 바닥에서 벽처럼 길쭉한 혈기의 통로가 열렸다. 탁한 혈기 속에서 10명의 남녀가 솟아올랐다. 모두 도리안처럼 눈동자가 풀린 사람들이었다.

“기사는 불의를 못 참는다고 하지? 지금부터 1분에 한 명씩이야.”

웃음기 섞인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노인이 가장 앞에 있던 청년의 목에 이를 박아넣고 살점을 뜯었다.

뿌드득!

목을 잃은 시체에서 뿜어진 핏물이 라온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교주께선 여전하시네요. 뭐, 확실히 빨리 처리된다면 저도 나쁘지 않지요.”

타천은 바닥을 적시는 시뻘건 핏물을 보며 아이처럼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아아악!”

도리안은 옆에 서 있던 사람의 목이 한순간에 사라진 걸 보고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의 동공이 끝없이 흔들렸다.

뿌드득.

라온이 제천검의 칼날을 부러질 정도로 세게 쥐었다.

‘저놈도 알고 있어.’

타천 역시 자신이 투구에 먹히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면서 놀리는 것이다. 알면서 이 상황을 즐기는 것이다.

“후후후.”

“하하하.”

두 괴물의 웃음소리가 인간의 것으로 들리지 않았다. 사람을 먹이로 생각하는 마귀의 미소를 본 것처럼 심장이 꽉 조여졌다.

“후욱….”

들이마시는 숨결에서 죽음의 감각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싸움이 일어나면 빠져나가기엔 좋겠지만 그건 자신을 살릴 생각이 있을 때다.

백혈교주와 타천 모두 자신을 가지지 못한다면 상대에게 넘어가기 전에 죽일 놈들이었다. 예상을 벗어난 최악의 순간이었다.

크으….

라온이 겁에 질린 도리안과 아무것도 모르는 아홉 명의 사람을 차례로 보며 거친 숨을 뱉었다.

“뭐해? 1분 다 지나가는데?”

“기사답게 멀린의 적을 베어 주십시오.”

백혈교주와 타천은 지루하다는 듯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푸칵!

노인은 1분이 다 지나지도 않았는데, 두 번째 여자의 심장을 깨부쉈다. 여자는 본인의 죽음도 알지 못한 채 쓰러져 갔다.

“둘이네.”

“얼마나 갈까요?”

미친놈들이다. 전생과 현생을 모두 포함해서도 본 적 없을 정도로 정신이 나간 놈들이다.

자신을 데리고 가고 싶다면서 그 이후의 일 따위는 생각지도 않는다. 지독할 정도의 오만이었다.

다만 반항할 수는 없었다. 공기가 말해준다. 이곳에서 허튼짓을 하면 죽는다고.

절대자들이 일으키는 무형의 기운에 전신의 털이 쭈뼛 섰다. 머릿속으로 자기 위안밖에 안 되는 생각이 하나씩 떠올랐다.

저들은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었어.

내가 아니었어도 혈교의 먹이가 되었을 거라고.

난 할 일이 있어. 저들 때문에 여기서 죽을 수는 없잖아.

그리고 도리안은, 도리안은….

라온이 도리안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도리안은 가족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녀석이고, 가장 많은 마음을 드러낸 녀석이다. 거짓으로나마 버린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방법. 빠져나갈 방법이….

여기서 도리안을 죽이지 않는다면 타천이 자신을 죽일 테고, 도리안을 죽이지 않는다면 백혈교주가 자신을 노릴 것이다.

라스에게 몸을 넘긴다고 해도 도리안은 죽는다. 빠져나갈 곳이 없는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도리안이 라온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이 멍청한 자식아!”

그가 악을 지르며 입술을 씹었다. 핏물이 방울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처음부터 네가 마음에 안 들었어! 잘난 척만 하다가 이런 꼴이 될 줄 알았다. 너랑 함께하면서 즐거웠던 적은 단 하루도 없다고!”

도리안의 눈동자가 찌그러진 것처럼 흔들거렸다.

“제대로 알아둬! 나만이 아니라, 너같이 건방진 놈을 좋아할 사람은 한 명도 없어!”

“…….”

“왜 입을 닫고 있냐! 죽여! 넌 할 줄 아는 게 입 놀리는 것밖에 없잖아! 건방 떨면서 죽이라고!”

라온이 검병을 더욱 강하게 말아쥐었다.

‘도리안….’

도리안의 눈동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각오를 다진 눈빛.

저 멍청한 겁쟁이 녀석은 용기를 쥐어짜서 죽여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보통 죽기 전에 하는 날카로운 원망이나 욕 대신 텅 빈 비난만 해댔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이다.

“하!”

라온이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저 녀석은 욕도 제대로 못 하네. 그렇지만 용감해.’

나보다 훨씬.

스스로를 더럽히며 도망칠 길을 찾던 자신보다 훨씬 대단한 녀석이었다.

‘비굴하게 살아봐야. 의미 없지.’

쥐새끼처럼 사는 삶은 전생으로 충분하다. 이번 삶은 그렇게 끝내지 않을 것이다.

도리안이 용기를 내준 덕분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재밌게 되어가는데.”

“이래서 인간이 흥미로운 거죠.”

백혈교주와 타천이 미소를 지었다. 둘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사이한 웃음을 흘렸다.

라온은 이제 그 둘을 보지 않았다. 도리안과 인질로 잡힌 사람들 사이로 향하며 제천검을 쥐었다.

‘라스. 분노를 받을게. 잠시라도 좋으니까….’

-필요 없느니라. 본왕도 열받았으니까.

라스가 울먹이는 도리안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멍청하고 둔해도 본왕의 부하이니라.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도움을 주겠노라.

‘고마워.’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도리안과 인질들의 중심에 섰다.

“멍청한 자식이라.”

“윽….”

도리안이 죽음을 각오하고 눈을 감았다.

“후.”

라온이 두 자루 검을 동시에 뽑았다. 좌수 진혼검에서 설풍검결이 몰아치고, 우수 제천검에서 광아검이 이를 드러냈다.

쩌어억!

진혼검이 도리안을 잡고 있던 5사도의 목에 박히고, 제천검이 노인의 가슴을 꿰뚫었다.

푸카아아악!

두 검을 동시에 뽑자, 5사도의 목에서 살벌한 양의 핏물이 뿜어지고, 노인이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더럽게 사느니.”

라온이 푸른 용의 투구를 벗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는 절대자들 앞에서도 그 색을 잃지 않았다.

“차라리 이곳에서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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