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5화
-이렇게는 못 산다! 밥도 못 먹고, 맨날 능력치만 뺏기고! 살아도 사는 것 같지가 않으니라!
‘조용히 좀 해봐.’
라온은 울부짖는 라스를 손등으로 밀어버리고, 록타의 혼을 흡수하여 얻게 된 보상을 확인했다.
[모든 능력치가 10포인트 상승합니다.]
[<글래시아>의 성취가 대폭 상승합니다.]
[수속성 친화력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수속성 저항력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설풍검결>이 뇌리에 각인됩니다.]
메시지를 보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라스와의 내기에서 승리하고 받은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보상이었다.
‘모든 능력치 10이 또 올라갔어.’
모든 능력치 10포인트가 한 번 더 올라가며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의 희열이 찾아왔다.
‘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겠군.’
모든 능력치 20포인트에, 근력과 민첩성은 3포인트씩 더 올라갔기에 현재의 육체에 적응하려면 훈련과 시간이 필요했다.
후우우우.
라온이 글래시아의 성취 상승 메시지를 보며 단전의 냉기를 끌어올렸다. 더 짙어진 푸른 냉기가 손아귀에서 작은 폭풍을 일으켰다.
‘더 진해진 것 같은데.’
냉기의 위력이 투구를 쓰기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게 피부에 와닿았다.
-젠장….
라스가 이마를 찡그리는 걸 보니 냉기의 격이 높아진 건 확실했다.
피익!
라온이 손아귀에서 피어나는 냉기를 지우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살짝 균형이 어긋나겠는데.’
지금까지 일부러 만화공과 글래시아의 균형을 맞춰왔는데, 록타의 혼이 스며들며 냉기의 성취와 양이 열기를 뛰어넘게 되었다.
수속성 친화력과 수속성 저항력까지 올라가게 되면서 그 차이는 더 크게 벌어졌을 것이다.
아무래도 달라진 육체 능력을 점검하면서 냉기의 운용법도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라온이 눈을 내리감고 조금 전 머리에 그려졌던 검술을 떠올렸다. 북해의 바람을 담은 듯 서늘하면서 단호할 정도로 끊어치는 특이한 검술이었다.
‘설풍검결이라.’
검술의 진의까지 알게 된 건 아니지만 그 형태와 구결은 확실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나쁘지 않아.’
아니, 꽤 뛰어난 검술이야.
설풍검결의 속성은 적의 검술을 끊어버리는 절검. 지금까지 익혔던 검술과는 결이 다르기에 빨리 펼쳐보고 싶었다.
능력치에 수속성 강화 그리고 검술까지 많은 보상을 얻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무학의 경지.’
뛰어난 강자인 록타와 싸웠기 때문인지, 그의 혼을 흡수했기 때문인지 막혀 있던 벽이 완벽하게 바스러지며 마스터 중급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이젠 그놈과도 제대로 싸울 수 있겠지.’
지금이라면 마스터 상급의 무력을 가진 금면사와 붙어도 호각. 아니면 꺾을 수 있을 것이다.
‘좋은 걸 주고 갔군.’
라온이 푸른 용의 투구를 쓸어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록타는 마지막에 보여준 불안한 감정과 달리 가지고 있던 많은 능력을 넘겨주고 갔다.
‘그 대가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네 주인은 최대한 고통 없이 끝내주마.’
멀린에게 사정이 있다고 해도 가만히 놔둘 수는 없다. 죗값은 치러야 하는 법. 언젠가 그녀를 처리할 때 고통 없이 보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기억을….”
-끄으으!
록타가 남긴 기억들과 설풍검결을 되새기려고 할 때 라스의 신음이 들려왔다.
-이 모기 같은 놈!
‘갑자기?’
-네놈은 여름 모기처럼 본왕의 능력치와 특성을 쪽쪽 빨아먹지 않느냐!
‘또 그 소리네.’
라온이 피식 웃었다.
-네놈이 인간의 평균 수명까지만 살아도 본왕의 본체는 뼈만 남을 것이니라!
녀석은 그날이 두려운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자업자득이야.’
먼저 몸을 차지하겠다고 덤비지만 않았어도 내기 보상은 빼앗기지 않았을 거다. 전부 본인의 잘못이었다.
-빌어먹을….
라스도 그걸 알기 때문인지 통통한 팔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음….”
라온이 라스의 동그란 뒤통수를 모며 입맛을 다셨다.
‘마왕이라는 놈이 저러고 있으니까 조금 안쓰럽긴 하네.’
우아하면서도 고고했던 본체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쭈글쭈글해진 솜사탕이 조금 불쌍해 보였다.
‘알겠어. 나딘 빵은 취소할게.
그 말을 하자마자, 라스의 흐느낌이 단번에 사라졌다.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매를 좁힌 채 동그란 눈동자를 두르륵 굴렸다.
-저, 정말이냐?
‘그래.’
-후우! 살았느니라! 능력치 100을 뺏기는 것보다 나딘 빵이 더 싫으니라.
라스는 다행이라면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놈 같은 마귀에게도 양심은 있구나.
‘대신.’
라온이 헤헤 웃는 라스를 툭 치면서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민트초코는 없어.’
-그,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민트초코 안 먹는다는 소리.’
-왜!
‘맛없으니까.’
-네놈은 시원함과 단맛이 동시에 입안을 가득 채우는 그 즐거움을 모른다는 것이냐?
민트초코가 그랬나? 전혀 모르는 맛이다.
-민트초코의 맛을 모르는 네놈이 불쌍 하느니라!
‘몰라도 상관없으니까. 선택해. 나딘 빵을 안 먹고 식사를 할지. 나딘 빵을 먹고 민트초코를 먹을지.’
라온은 아무거나 고르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 악마도 그런 선택지는 내밀지 않을 것이니라!
라스의 눈동자가 파도를 맞은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그건 어머니와 아버지를 고르라는 질문과 똑같은 수준이니라! 이 불효막심한 놈!
‘마족이 불효….’
라온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광기는 라스뿐이다.
* * *
라온은 창문으로 달빛이 스며드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이곳이 밤이니, 실제로는 날이 밝아 있을 것이다.
‘어디….’
침대에 누워 있는 멀린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한참은 못 일어나겠군.’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마나를 운용하여 몸이 상해 있었다. 못해도 이틀은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이젠 나가도 되겠지.’
록타의 기억과 설풍검결을 되새기며 방에서 반나절 이상을 보냈기에 멀린을 두고 나가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라온은 낮은 숨을 흘리는 멀린을 잠시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지나는 에덴의 귀신들이 멀린을 본 것처럼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예의를 갖췄다. 완전히 에덴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록타라면 무시했겠지.’
록타는 기사로서 자존심이 강한 자이니, 귀신들의 인사조차 받지 않았을 것이다.
라온은 그들의 인사를 무시하고, 대전 밖으로 나갔다. 금면사와 대련을 했던 결계 끝으로 가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역시 달라졌군.’
많은 능력치가 상승했기에 육체의 움직임이 예전보다 빠르고 강맹해졌다.
‘강하다고 다 좋은 게 아니지만.’
하수를 상대할 땐 육체의 힘과 속도가 크게 올라가도 상관없지만, 고수와 싸울 때는 강함보다 육체가 완벽하게 통제되는 게 중요하다.
누구와 싸워도 무리가 없도록 지금 육체의 한계를 확실하게 파악해야 했다.
라온이 제천검을 뽑았다. 평소에 연습하는 검술이 아니라,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설풍검결을 펼쳐보았다.
후우우웅!
글래시아을 운용하여 첫 번째 초식이 펼치자, 검에서 차디찬 바람이 피어나 허공에 은빛 선을 그렸다.
굳건하면서도 서늘한 기운을 품은 검격은 적이 어떤 공격을 해와도 쳐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기세를 피워냈다.
치이잉!
두 번째 초식은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검격인데, 이 검술은 빠르면서도 오러가 꽉 조여져 있어서 방패처럼 깨지지 않는 호흡을 가졌다.
라온은 설풍검결을 모조리 다 펼쳐내고서 검을 내렸다.
‘이게 절검인가.’
절검은 단절시키는 검. 적이 사용하는 무학의 흐름을 끊어버리고 치명적인 역습을 가하는 섬뜩한 특징을 지녔다.
불의 고리를 이용하여 상대를 분석할 수 있는 자신에게는 광아검 급으로 효율이 뛰어난 검술이었다.
‘설풍검결과 광아검을 합치면 재밌는 게 만들어지겠는데.’
광아검은 상대의 틈을 만드는 검술이고, 설풍검결은 상대의 호흡을 끊어버리는 검술이다. 이 둘의 묘리를 조화시킨다면 어마어마한 검술이 만들어질 것 같았다.
라온은 설풍검결을 연거푸 펼쳐서 육체의 변화를 파악하고, 검술을 몸에 새긴 후에 뒤를 돌았다.
“언제까지 구경할 생각이지?”
텅 빈 지붕 위를 올려보며 눈매를 좁혔다.
“본래 기사의 수련은 함부로 지켜보는 게 아니오.”
“검술에는 관심 없어. 네가 빠져나가나 안 나가나 관찰했을 뿐이다.”
지붕 한쪽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금면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평소보다 살짝 힘이 빠진 목소리로 손을 저었다.
“공주님을 놔두고 이곳을 떠날 생각은 없소.”
“공주라….”
금면사가 용의 투구 속 라온의 눈동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
“하긴 정말 공주긴 했지. 몇백 년 동안 불리지 않은 공주.”
“조롱하는 것이오?”
라온이 금면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감정이 격해진 척 연기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니,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금면사는 평온한 눈빛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할 일이 없다면 대련 한번 어떻겠소.”
“대련?”
“그렇소. 몸이 잘 적응되지 않소. 이럴 때 제대로 된 전투를 벌이면 적응이 빨라지겠지.”
라온은 조금 고조된 목소리로 도발하듯 검집을 두드렸다.
‘어떻게 되려나.’
금면사는 멀린을 제외하면 에덴에서 유일하게 대화를 나눈 놈이다. 이 녀석이 속는다면 거리낌 없이 행동할 수 있었다.
“…….”
금면사는 대답하지 않고 라온을 지그시 굽어보았다.
“별로 당기지 않는군. 다른 사람을 알아봐.”
그는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에 살짝 짜증이 묻어나왔다.
‘먹혔어.’
라온이 볼 안쪽을 씹었다. 금면사의 태도는 어제와 확연하게 달랐다. 그는 자신을 라온이 아니라, 록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럼 다른 질문이 있소.”
“뭐지?”
“무기와 갑주를 구할 수 있는 보고는 어디에 있소? 이 검과는 잘 맞지 않아서.”
라온이 제천검과 진혼검을 가리켰다.
“대전 안에 있다. 투혼식을 한 방 바로 옆이지.”
금면사는 빨리 사라지라는 듯 손을 휘휘 젓고서 지붕 위에 누웠다.
“고맙소.”
라온이 천천히 등을 돌렸다. 대전으로 향하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이제 대놓고 움직여도 되겠군.’
금면사를 속여넘겼으니, 생각을 알 수 없는 절혼검만 조심하면 무서울 게 없었다.
-너 정말 뭐 하는 놈이냐.
라스가 라온을 쭉 훑어내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왜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것이냐!
‘기본 소양이지.’
-네놈이 연극단이나 서커스 단원도 아니고 연기가 왜 기본 소양인데!
물론 검술 가문의 기본 소양이 아니라, 암살자의 기본 소양이다. 암살을 위해서는 남녀노소 그 어떤 모습으로 변해도 완벽한 연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검을 구하려는 것이냐. 기사라면 모든 검을 쓸 수 있는 법. 딱히 다른 무기를 사용하는 연기까지는 할 필요 없을 텐데.
‘검을 노리는 게 아니니까.’
금면사에게는 검과 갑주를 구하기 위해 보고를 알려달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보고의 위치를 이미 알고 있었고, 검과 갑주를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원하는 건 그 보고 안에 있는 다른 물건이다.
-그, 그게 무엇이냐?
‘보면 알 거야.’
라온은 긴장한 라스에게 고개를 젓고서 대전으로 들어갔다. 투혼식을 진행했던 벽 바로 옆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우우우웅!
라온이 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 바닥에서 차원이 열리며 검은 고블린의 투구를 쓴 무인 두 명이 나타났다.
“진무 보고에 들어갈 수 있는 분은 8성 좌나, 8성 좌에게 허가를 받은 분뿐입니다.”
“내가 7성이었던가?”
멀린은 이전에 처음부터 7성이라고 자랑하듯 말을 했었다.
“그렇습니다.”
고블린 투구의 무인들은 음성의 고조 없이 대답했다.
‘이놈들 강해.’
고블린 투구를 쓰고 있는 것과 달리 상당한 기파가 전해져왔다. 저 투구에 깃든 영혼은 평범한 고블린이 아닌 것 같았다.
“공주님은 지금 실신하신 상태다. 그분을 지킬 검과 갑주가 필요하다.”
“보고에 들어갈 수 있는 분은 8성 좌나, 8성 좌에게 허가를 받은 분뿐입니다.”
고블린 투구의 무인들은 처음과 같은 말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쯧.”
라온이 짧게 혀를 찼다. 7성이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의 방비는 생각보다 더 단단했다.
‘멀린이 깨어나서 쫓아다니기 전에 챙겨야 하는데… 음?’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때 뒤쪽에서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빠르게 고개를 돌리니, 절혼검이 소리 없이 서 있었다.
‘이놈은 진짜….’
자신의 감각을 뚫고 오다니, 대단하다는 말로도 모자랐다. 아무래도 감각을 흩뜨리는 무학이 있는 것 같았다.
“…….”
절혼검은 잠시 라온을 바라보다가 앞으로 가서 문에 직접 손을 댔다.
우우우우웅!
문이 만화경처럼 갈라지며 은은한 빛을 내뿜는 통로가 열렸다.
“…….”
절혼검은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몸을 비켰다.
“들어가라는 뜻이오?”
“…….”
그는 대답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맞다는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는데 나름 자신 있지만, 이 남자만큼은 예외다. 말도 없고, 반응도 없기에 그의 사고를 파악하는 건 아예 불가능했다.
이번 도움에는 손해가 없기에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고맙소.”
라온이 고개를 꾸벅이고서 안으로 향했다. 절혼검이 허가했기 때문인지 고블린의 투구를 쓴 무인들도 앞을 막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후우우웅!
보고 내부는 외부에서 본 방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무기와 갑옷, 방패를 비롯한 최상급 무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라온은 무구들을 쭉 둘러본 뒤에 뒤를 돌았다. 절혼검은 들어올 생각이 없는지 통로가 다시 닫혔다.
‘무기를 가져가는 걸로 의심이라도 하려는 것 같은데 소용없을 거야.’
난 아무것도 챙겨갈 생각이 없으니까.
라온은 갑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지각색의 마나가 느껴지는 최상급 갑주들을 지나 몬스터 형태의 투구 두 개가 놓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악어 형태의 투구를 들며 빙긋 비소를 지었다.
‘이걸 찾고 있었지.’
록타의 혼을 흡수한 이후 다른 투구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곳에 몬스터의 혼이 깃든 투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금면사에게 보고의 위치를 물어본 것이다.
-네, 네놈 설마!
‘맞아.’
라온이 빙긋 웃었다.
‘다른 투구에 있는 놈들도 먹어 치워야지.’
록타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투구의 혼까지 모조리 쪽쪽 빨아 먹을 생각이었다.
날 납치한 걸 후회하게 해주마.
* * *
상업 도시 카멜룬 근처의 작은 언덕.
라온이 백혈교와 첫 교전을 벌였던 그 장소에 피를 칠한 듯 붉은 빛을 띤 가마가 올라와 있었다.
가마는 특이하게도 남녀노소. 아름다운 여자와 건장한 남자 그리고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노인이 다리를 하나씩 맡고 들고 있었다.
가마의 좌석에는 붉은 발이 쳐져 있었고, 그 안에 있는 백혈교주는 반쯤 누운 채 황갈색 대지를 내려보았다.
“이 땅에서 내 아이들이 사라져갔구나.”
그녀는 피 한 방울 없는 땅을 아련하게 바라보며 눈을 내리감았다.
“걱정하지 말라. 혈신께서 너희 모두를 품어주실 테니.”
그녀가 짧은 기도를 끝내고 눈을 뜨자, 사인의 가마꾼들이 언덕 끝으로 나아갔다. 날이 밝았기에 카멜룬만이 아니라, 한참 떨어져 있는 다른 도시까지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하.”
백혈교주는 무저갱처럼 시꺼먼 시선으로 언덕 아래를 굽어보았다. 카멜룬 근처를 살피던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옅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깜찍하구나.”
그녀는 카멜룬 옆에 떨어진 들판을 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저런 곳에 숨어 있었다니.”
“찾으신 겁니까?”
뒤에서 석상처럼 서 있던 10사도가 가마 옆으로 다가갔다.
“그래. 보이지 않느냐?”
백혈교주가 투명할 정도로 하얀 손가락을 들어 올려 텅 빈 들판을 가리켰다.
“음….”
10사도는 기감을 높였음에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듯 눈매를 찡그렸다.
“네겐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구나.”
백혈교주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새하얀 기류가 피어나 10사도의 시선으로 스며들었다.
“아!”
10사도가 탄성을 터트렸다. 백혈교주의 기운이 안구를 적시자, 평범했던 들판 위로 세워진 거대한 진법이 눈에 들어왔다.
해와 달, 별이 그려진 진법은 들판을 모두 덮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이건….”
“태양과 달이라. 그의 솜씨겠지.”
백혈교주가 진법에 새겨진 해와 달의 문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자꾸나.”
그녀의 턱짓에 가마가 앞으로 움직인다. 가마꾼들의 발이 땅을 넘어 허공에 닿았음에도 가마의 움직임은 처음과 똑같이 부드러웠다.
“내 것이라 점을 찍었다면….”
백혈교주는 가마의 팔걸이에 턱을 괸 채 흥이 오른 미소를 흘렸다.
“어디에 있더라도 찾아와야 하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