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4화
“으….”
투구를 쓴 이후로 죽은 듯이 멈춰있던 라온의 입술에서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멀린은 턱을 부르르 떠는 라온을 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거의 끝났나 보네.”
육체에 자극이 생겨난 걸 보니, 정신계에서 벌어지던 록타와 라온의 싸움이 끝난 것 같았다.
‘예측했던 것보다 정신력이 더 강할 줄이야….’
본래 예상은 록타가 육체에 적응이 끝나는 대로 깨어나는 것이었지만, 육체 장악에만 3시간이 넘게 걸린 걸 보니 라온의 정신력은 예상보다 훨씬 단단했던 것 같다.
‘그래도 승자는 록타였지만.’
라온의 눈동자는 붉은색. 가면 속 안구에서 푸른 빛이 반짝이는 걸 보니, 승자는 록타로 결정되었다.
‘불혼수를 먹여두길 잘했군.’
미리 영약에 불혼수를 먹여두지 않았다면 정신 세계의 전투가 훨씬 더 길어져서 록타가 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가지고 있는 영약 대부분을 써버렸지만 일이 예상대로 흘러가 주어서 만족스러웠다.
우우웅!
멀린이 염력으로 의자에 앉아있던 라온을 공중으로 들어 올린 후 바닥에 눕혔다.
혼이 육체를 차지하는 지금부터는 외부의 자극이 전혀 없어야 하기에 의자에 앉아있는 것보다 바닥에 누워있는 게 훨씬 나았다.
‘드디어 만나는 건가….’
록타는 자신을 지키는 기사이기 이전에 평생을 함께했던 가족이었다. 수백 년 세월을 지나 록타와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요동쳤다.
일주일 넘게 잠을 자지도, 휴식을 취하지도 못했지만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보고 싶을 뿐이었다.
멀린이 라온의 안전을 확인한 후 물러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절혼검은 처음과 똑같은 자세로 라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넌 어때?”
“…….”
절혼검은 멀린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은 채 라온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뭔가 간질간질하지 않아?”
“…….”
그 말에 절혼검의 어깨가 아주 살짝 흔들렸다.
멀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절혼검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미안하지만.”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은은한 푸른 빛을 발하는 용의 투구를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쪽도 절박해. 양보할 수는 없어.”
* * *
“크흥….”
라스는 밤탱이가 된 눈매를 동그란 손으로 어루만지며 코를 훌쩍였다.
“본왕에게 주먹을 날린 놈은 네가 다섯 번째이니라.”
“다섯 번? 많이 얻어맞고 다녔네.”
라온은 열대과일 맛 솜사탕처럼 푸르딩딩해진 라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진짜 마왕 맞아?”
“제대로 들어라! 주먹을 먹인 놈이 아니라, 날린 놈이다! 그 다섯 중에서도 이렇게까지 본왕을 팬 놈은 네놈이 처음이니라!”
라스가 악에 받친 듯 빽 소리쳤다.
“끄으윽, 몇 대를 맞았는지 셀 수가 없느니라!”
“아, 내가 세고 있어. 정확하게 294대야.”
“어….”
본인이 그렇게까지 맞았을 줄 몰랐는지 라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294대? 294대라고? 그렇게 때리려고 해도 못 때리겠다!”
“너는 모르겠지만, 그 모습 타격감이 장난이 아니야.”
라온이 으르렁거리는 라스를 보며 옅게 웃었다.
라스는 동그란 주제에 속이 꽉 들어찼고, 크기도 적당해서 치는 맛이 있었다. 최상급 샌드백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랄까. 약간 중독성 있는 타격감이었다.
“본왕이… 마계의 군주인 본왕이 인간 따위에게 294대나 맞다니. 이건 꿈이니라. 꿈이어야 하느니라….”
라스는 서러운지 통통한 팔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떨었다. 조금 전 압도적인 강함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던 존재는 열대과일 맛 솜사탕이 된 현실에 절망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내 복수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라온은 낑낑대는 라스를 보며 차게 웃었다.
“아, 아직 시작도 안 했다니! 설마 또 때리려는 것이냐! 294대나 후려 패놓고 또 치려고 하다니, 네놈의 양심엔 털이라도 난 것이냐!”
맞기는 싫은지 라스의 주절거림이 평소보다 2배 이상 빨라졌다.
“나도 양심은 있지. 더 안 때려.”
“그, 그럼….”
“아까 삼시세끼 민트초코를 먹인다고 했지?”
“어….”
라스의 눈동자가 진자처럼 흔들렸다. 맞는다고 할 때보다 더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오늘부터 식사는 나딘 빵 하나. 다른 건 일절 입에도 안 댈 거야.”
“이 또라이 놈아! 본왕은 민트초코를 좋아하기라도 했지! 그 빵은 고무 맛만 나서 네놈도 싫어하지 않느냐!”
“난 괜찮아.”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생에서부터 맛을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인지 배를 채울 수만 있다면 맛 따위는 상관없었다.
“어….”
라스는 라온의 눈빛을 보고서 조금 전 말이 진심이란 것을 깨달았다.
“안 돼! 그것만은 안 되느니라!”
녀석은 절대 안 된다고 외치며 분노와 냉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본체를 현현하는데 너무 많은 힘을 소모했기 때문인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나딘 빵은 고문이니라! 생고무도 그것보다는 낫단 말이다!”
라스는 그 약한 힘으로라도 반항을 하려는 듯 냉기의 주먹을 쏘아냈다.
“인간계에는 이런 말이 있어.”
라온이 턱을 삐딱하게 틀며 오른 주먹을 들어 올렸다.
“가는 주먹이 고와야 오는 주먹이 곱다.”
그 말과 함께 덤벼든 라스를 후려쳤다. 라스는 고무공처럼 튕겨서 구석에 처박혔다.
“끄흐억, 더, 더럽게 아프게 치면서….”
라스는 대자로 뻗은 채 입을 떡 벌렸다.
“약하게 친 거야.”
라온이 피식 웃었다. 적당히 하지 않았으면 지금 라스는 아예 찌그러져서 접혀있었을 것이다.
“나, 나딘 빵만은 안 된다. 차라리 본왕을 때려라….”
라스는 그 말을 남기고 눈을 내리감았다. 실신하면서까지 메뉴 변경을 원하다니, 음식에 대한 집착만큼은 놀라울 정도였다.
“아직 말을 덜 했는데.”
앞으로 민트초코도 안 먹겠다고 하려 했지만, 충격으로 라스가 정말 죽을지도 몰라서 일단 삼갔다.
라온이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마뱀처럼 생긴 새끼 용이 바닥에 납작 달라붙어 있었다. 패배를 인정하고 공간을 빼앗긴 록타였다.
“이제 네 차롄가. 맞고 시작할래? 아니면 바로….”
“나는 이미 패배를 인정했소. 사라지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다면 말하시오.”
록타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눈을 내리감았다.
“사라져?”
“혼의 싸움에서 패한 자는 승자의 영혼에 흡수되어 사라지게 되지. 즉, 지금의 나는 때릴 가치도 없소.”
그는 마지막에는 기사처럼 가고 싶은지 덤덤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처음 등장했을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라온이 록타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확실히 희미해졌군.’
300대 가까이 얻어터져도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라스와 달리 록타의 모습은 반투명하게 변해 있었다.
처음에 록타가 말했듯이 패자는 승자의 혼에 흡수되어 사라지게 되는 게 이 세계의 규칙인 것 같았다.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묻지. 밖에 있는 멀린은 진짜 멀린인가?”
“그렇소.”
“어떻게 몇백 년 전의 인간이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살아 있는 게 아니오.”
“그럼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건가?”
“당시 우리와 동맹을 맺은 마법사가 멀린 님이 돌아가신 후 얼어붙은 시체에서 혼을 회수했소.”
“그럼 그 마법사가 에덴의 선조 같은 놈이었고, 그 후예가 지금 이 시대에 멀린의 혼을 가면에 심었다는 건가?”
처음 멀린을 보았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느꼈다. 새하얀 손과 입술은 절대 노파의 그것일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소.”
록타는 멀린의 목소리를 통해서 그렇게 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정확한 사정까지는 모르겠소. 계속 이곳에 갇힌 채로 가끔 공주님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듣는 게 전부였으니까.”
“음….”
그 말이 맞다. 록타에게 들어야 할 정보는 에덴이 아니라, 이 세계에 관한 내용이었다.
“네 영혼이 내게 흡수되면 무엇이 바뀌는 거지?”
“영혼의 격이 크게 상승할 것이오. 내가 사용하던 능력도 발휘할 수 있을 테고.”
“능력?”
“단순히 말하자면 오러가 상승하고, 내가 사용하던 검술과 냉기 운용법을 익히게 되어 무학적으로도 더 높은 경지에 오르실 수 있을 거요.”
록타는 죽음이 다가온 것을 느낀 듯 담담한 눈빛으로 여러 정보를 말해주었다. 반항한다던가 시간을 끌 줄 알았기에 의외였다.
“여기서 더 성장이라….”
라온이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라스와의 내기에서도 이겼는데 추가로 록타의 혼을 흡수하여 능력치와 무력이 성장한다니 1석 2조가 아니라 1석 3조라고 해도 모자랐다.
“하나 더. 이 정신세계는 어떻게 발전시키는 거지?”
라스에게 이곳이 검계현신을 이룰 힌트라고 들었기에 조금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경험이오.”
“경험?”
“같은 경험을 해도 사람마다 느끼고 깨닫는 바가 다르지. 이 세계는 본인이 겪은 수많은 경험을 토대로 쌓아 올리는 건물과도 같소. 위를 본다면 더 높은 곳으로 갈 테고, 아래를 본다면 더 굳건해질 것이오.”
록타는 본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이 세계가 변한다고 말했다.
‘라스의 말이 맞았군.’
찌그러진 솜사탕의 말대로 많은 경험을 쌓고 이곳을 발전시킨다면 언젠가 자신만의 세계를 검계현신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너에 대해서다.”
라온은 그 뒤로 록타의 성격과 취향에 대해 물었다. 이 세계가 끝난 뒤에 멀린에게 록타인 척 연기하기 위해서였다.
“내 이름은 말씀드렸듯이 록타 데포르트요. 블루 드래곤….”
록타는 의외로 이것도 전부 제대로 말을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멀린의 목적은 뭐지?”
라온은 록타의 개인정보에 대해 들은 후 멀린에 대해 물었다.
“날 살리고, 예전처럼 함께 하는 거요.”
“함께 한다고? 전생처럼 학살을 하려는 건가?”
로엔그린은 멀린이 몬스터를 부려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말했다. 놈들은 그걸 또 현세에 재현하려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오. 그저 나와 함께 사는 것뿐이오. 난 그분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니까.”
록타가 눈동자를 아래로 축 내렸다.
“가족으로서 함께 산다고?”
그러고 보니….
라온이 지금은 사라진 얼어붙은 성이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이 무너질 때 그 안에도 멀린의 방과 같은 통나무집이 하나 있었다.
“멀린 님은 시르켄 왕국의 공주님이었소. 많은 것을 잃었고 마지막에 남은 가족은 나뿐이었지.”
“시르켄이라면 너희가 다른 왕국을 무너뜨리고 세웠다던 왕국인가.”
“맞소. 다만 우리가 세우기 전에 멸망한 왕국이기도 했지. 음, 자세하게 설명할 시간은 없겠소.”
록타는 거의 희미해진 본인의 몸을 보며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공주님은 불쌍하신 분이오. 그분께도 여러 사정이 있어서….”
“그 말을 하려고 친절하게 대답해준 건가.”
라온이 차가운 눈빛으로 록타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대답을 잘해주나 했는데, 이 세계에서 나간 뒤 멀린을 챙겨달라 부탁하려는 것 같았다.
“사정은 누구에게나 있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겐 사정이 있다. 그 말로 이해를 해주기에 멀린은 너무 먼 곳까지 와버렸다.
“그렇겠지. 큰 죄를 지었다는 건 나도 공주님도 알고 있소. 다만 그분은 그저….”
록타는 마지막 말을 남기지 못하고 서리 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신기하게도 그리 아쉬워 보이는 눈빛은 아니었다.
쿠웅!
록타가 완전히 사라지자, 정신세계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뭐지?”
“뭐긴 뭐겠느냐. 반쪽이가 네놈의 혼에 완전히 흡수되면서 이 세계의 혼돈이 다 끝난 거지.”
라스가 굼벵이처럼 기어와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현실로 돌아간다는 건가.”
“그렇느니라.”
라온은 지진이라도 난 듯 뒤흔들리는 본인의 세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많은 것을 얻었어.’
라스에게 승리한 내기의 보상과 록타를 흡수하면서 얻게 될 능력까지. 예상 이상의 수확이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서 아직은 작고 미약한 자신의 세계를 눈에 담았다.
더 많은 경험을 통해 이 작고 미약한 공간이 검계현신까지 이룰 수 있는 곳으로 변모하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나중에 다시 오마.”
“그….”
흔들리는 세계 속에서 사고가 끊기려 할 때 라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저, 정말 나딘 빵만 먹는 건 아니지? 응?”
이 순간에도 먹는 생각을 하다니, 그저 민트초코를 마음껏 먹고 싶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것 같다.
정말 대단한 놈이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해주기로 했다.
응. 맞아.
* * *
“으음….”
라온이 눈을 떴다. 천장에 새겨진 마법진을 다 살피기도 전에 노파의 가면을 쓴 멀린이 얼굴을 들이 밀었다.
“날 알아보겠어?”
그녀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다급함이 느껴졌다. 기대감과 광기로 가득 젖은 음성이었다.
라온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흔들리는 멀린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공…주님이십니까?”
록타의 어조를 따라하며 목소리를 살짝 떨었다.
“아….”
멀린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뒤로 자빠졌다. 가면 속 눈동자가 격하게 진동했다.
“록타. 록타. 록타!”
그녀는 라온을 껴안으며 록타의 이름을 끝없이 부르짖었다.
“드디어 만났어! 드디어 다시….”
“죄송하지만 아직 기억이 혼잡합니다. 라온 지그하르트의 기억과 제 기억이 뒤섞여서….”
라온은 계속 록타의 어조를 연기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잘 모르습니다.”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거야. 원래의 너처럼.”
멀린이 목을 꽉 끌어 안은 채로 흐느꼈다. 의외로 산뜻한 봄꽃 내음이 풍겼다.
‘이 여자 진심이로군.’
라온이 덜덜 떠는 멀린의 팔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마지막 남은 가족이라더니, 멀린은 반가움을 넘어서 이 상황을 기적처럼 여기고 있었다.
“공주님은 괜찮으십니까?”
“난 신경 쓰지 마.”
멀린이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배고프지?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준비해놨어.
-음식?
라스는 이와중에도 음식을 따졌다. 정말이지 징하다.
”어서… 아.”
멀린은 라온에게 손짓을 하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공주님?”
라온이 멀린을 붙잡고 상태를 살폈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극심한 피로에 정신이 완전히 풀려버린 것 같았다.
‘피로에 의한 기절이라니.’
생각해보니 멀린이 쉬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밥도 직접 차려주고 계속 무언가를 준비해오며 끊임없이 움직였었다.
이 여섯 개의 마법진에 깃든 거대한 마나량을 보면 이것도 혼자서 진행하는 게 아니었을 거다.
‘무리했군.’
지난 시간 동안 잠 한숨 자지 못하고 마법 준비를 하다가 긴장이 풀리며 기절한 게 분명했다.
라온이 멀린을 안아 들고 일어났다.
“…….”
절혼검은 용의 투구를 쓸 때와 마찬가지의 자세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공주님을 쉬게 해드려야겠소. 비키시오.”
라온은 멀린을 최대한 소중하게 안아 들고 턱짓을 했다.
“…….”
절혼검은 바로 비켜주지 않고 자신의 투구 속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무감정한 그의 금안에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빛이 스며들어 있었다.
“비키라는 말 못 들었소?”
“…….”
두 번을 말하고 나서야 절혼검이 뒤로 물러섰다. 그가 비켜나자 벽에 들어왔을 때처럼 출구가 생겨났다.
“고맙소.”
라온은 절혼검에게 고개를 까딱이고서, 통로를 빠져나갔다.
“…….”
절혼검은 라온이 멀린을 데리고 방을 빠져나갈 때까지 석상처럼 서 있었다. 회전하던 통로가 다시 닫힐 때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 * *
라온은 통나무 방으로 돌아와 멀린을 침대에 눕힌 뒤 노파의 가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안 열어보느냐?
작은 솜사탕으로 돌아온 라스가 멀린의 가면을 가리켰다.
‘깨어나면 귀찮아져.’
혹시라도 가면을 만졌다가 멀린이 깨어나게 되면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테니, 마음대로 움직이기 힘들어진다.
그녀가 기절한 지금 록타의 기억을 살펴서 확실한 대본을 짜놔야 한다.
-독한 놈이라니까. 본왕은 궁금해서라도 벗겨보았을 것이니라.
라스가 ‘그러니까 사람을 294대나 때리지’라고 중얼거렸다.
‘그건 네가 맞을 짓을 한 거고.’
라온이 피식 웃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집중해야 하니까. 조용히 있어.’
지금 록타의 기억은 허공에 떠다니는 구름처럼 희미한 상태다. 집중해서 그 기억을 잡아두어야 멀린을 확실하게 속일 수 있다.
-흥. 할 말도 없느니라.
라스는 삐졌다는 티를 내듯이 고개를 홱 돌렸다. 원래 저런 놈이기에 신경쓰지 않고 집중하려 할 때 눈 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와의 내기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0포인트 상승합니다.]
[특성 <독 저항력>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특성 <나선력>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라스와의 내기에서 승리한 보상을 알려주는 메시지였다. 상당히 많은 양이었지만 메시지는 아직도 한참 남아 있었다.
[분노에게 여덟 번째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8연승의 효과로 추가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근력이 3포인트 상승합니다.]
[민첩성이 3포인트 상승합니다.]
[감각이 4포인트 상승합니다.]
연승 메시지. 라스에게 여덟 번 연속으로 승리하여 추가로 능력치가 상승했다는 메시지였다. 단번에 대량의 능력치가 상승하며 등골에 희열과도 같은 전율이 치솟았다.
-어억….
라스가 메시지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능력치도 능력치지만, 여덟 번을 연속으로 패배했다는 것에 경악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메시지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드래고니안 록타 데포르트의 혼을 흡수하셨습니다.]
록타의 혼이 흡수되며 얻게 된 보상들이 그 밑으로도 카펫처럼 펼쳐져 있었다.
-끄으으윽!
라스가 메시지를 이를 바득 갈았다.
-이 지랄이 나는데 어떻게 입을 다물란 말이냐!
녀석의 눈동자가 위아래로 거칠게 파도쳤다.
-왜 본왕은 294대를 얻어맞고 능력치까지 뺏겨야 하는 건데! 이 악귀 같은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