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3화
후우우우!
은빛 서리 폭풍이 사그라들며 라스의 모습이 드러난다.
라온이 마른침을 삼키며 눈매를 좁혔다.
‘…저게 라스의 본 모습인가?’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건 라스의 눈이다. 가늘면서도 깊은 눈매 속에서 유리구슬 같은 하늘색 눈동자가 은은한 빛을 뿌렸다.
눈 다음으로 보이는 곳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장발이다. 그 색은 북해처럼 진청색으로도 빛났고, 남쪽의 바다처럼 에메랄드색을 띠기도 했다.
얼굴선은 가늘면서도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블랙홀처럼 사람의 시선을 빨아들였다.
‘그때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군.’
마계 제일인 줄은 모르겠지만, 이 대륙에서는 따라갈 존재가 드문 외모였다.
미에 대한 관심이 없는 자신이 보아도 예쁘다거나 잘생겼다는 표현이 보다, 신비롭다나 아름답다는 단어가 튀어나올 정도였다.
‘저게 그 먹보 솜사탕의 본모습이라니.’
외모와 성격이 이렇게 매치가 안 되는 놈은 처음이다. 외모에 대한 고정관념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았다.
‘엔시아는 저놈을 보면 뭐라고 하려나.’
다른 무엇보다도 엔시아가 라스를 보고 뭐라 말할지가 궁금해졌다.
다만 옥에 티라고 할까.
아쉬운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로는 복장이 좀 이상했다. 라스는 신화 속에 나오는 천사라도 되는 것처럼 주름이 져서 치렁치렁해 보이는 군청색 의복을 입고 있었다.
두 번째로는 뿔과 날개가 없었다. 마왕 하면 검은 뿔과 날개가 있어야 하건만 그 둘 모두 보이지 않는 게 좀 아쉬웠다.
“이 모습은 참으로 오랜만이로구나.”
라스가 본인의 길고 하얀 손가락을 펴며 가는 미소를 지었다. 녀석이 천천히 시선을 올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네놈 덕분에 별 지랄을 다 하게 되었어.”
“그게 네 본 모습인가?”
“그러하다. 본왕의 말대로 마계 제일의 얼굴이지 않느냐.”
“마계를 안 가봐서 모르겠네.”
라온이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흥. 그럴 줄 알았느니라. 네놈은 그 얼굴과 달리 보는 눈이 더럽게 없으니까.”
라스가 인상을 찌푸리자,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온몸을 휩쓸었다.
공격을 한 것도 아니다. 그저 분노의 기세를 끌어 올린 것만으로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상상을 초월한 기세라 순간 호흡을 해야 한다는 것도 잊었다. 거친 숨을 뱉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네놈이라면 느끼고 있겠지? 본왕의 기운이 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이곳은 자신과 록타의 영혼이 맞부딪치면서 만들어진 정신세계. 라스가 현재 가지고 있는 분노 이상의 힘을 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수를 써서 저 정도의 정신력을 발휘하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버러지들은 혼과 육체를 따로 생각하지만, 결국 혼은 육체라는 그릇과 함께일 수 밖에 없느니라.”
라스가 턱을 치켜들며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을 쏘아냈다.
“영혼을 본래 육체에 맞는 형태로 구현하여 본왕이 가진 권능의 일부분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느니라.”
녀석이 한 발 더 앞으로 다가온다. 발밑에서부터 피어나는 강대한 냉기와 분노에 턱이 파르르 떨렸다.
“큰 희생을 치렀지만, 차라리 잘 되었느니라. 이대로 네놈의 몸을 차지한다면 모든 손해를 메울 수 있겠지.”
라스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발을 굴렀다. 그 순간 가늠할 수 없는 분노와 냉기의 파동이 일어났다.
쩌저저저정!
무언가를 느낄 겨를도 없이 자신의 양옆과 뒤편으로 거대한 얼음의 산이 치솟았다.
“허….”
라온이 입술을 떨며 눈동자를 굴렸다. 거대한 서리의 산이 어깨에 닿아 있었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만 옆으로 다가왔어도 팔이 날아갔을 것이다.
‘치솟았다? 그게 맞나?’
솔직히 말해서 얼음의 산이 치솟는 과정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즉, 라스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은 이미 죽어서 사라졌을 것이다.
“걱정할 필요 없느니라.”
라스가 손가락을 빙글 돌리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평소와 같은 비웃음이건만 저 모습으로 하니 우아해 보였다.
“본왕은 자비롭다. 그간의 설움을 갚기 전에는 끝내지 않을 것이니라.”
“그건 자비로운 게 아니라, 잔인한 건데?”
“그럴지도.”
웃음기가 담긴 음성이 끝나기 전에 녀석의 발밑에서 거대한 서리의 파도가 밀려왔다.
“크으….”
라온이 만화공을 일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전과 똑같다고 생각하면 안 돼.’
라스가 솜사탕일 때와 같은 크기의 파도였지만, 그 안에 깃든 기운은 차원이 달랐다. 이전까지 사용했던 힘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었다.
쿠구구구구!
불의 고리 일곱 개를 동시에 회전시키며 만화공을 일으켰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죽을 가능성도 있다. 무조건 전력을 다해야 한다.
뿌득!
라온이 어금니를 지그시 씹었다. 제천검의 칼날에 가지고 있는 모든 기운을 쏟아부어 염룡결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아!
은빛 칼날에서 뻗어 나온 화염의 숨결이 전방으로 나아가 라스가 일으킨 서리의 해일과 맞부딪쳤다.
쿠구구구구!
서리의 해일은 이전처럼 쉽게 녹아내리지 않았다. 불의 고리를 최대한 일으킨 만화공의 불꽃을 오히려 밀고 들어왔다.
“크으….”
이대로는 못 버텨.
이제 와서 다른 검술을 사용하거나, 보법을 밟을 수도 없었다. 염룡결을 사용하는 상태에서 어떻게든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집중해라. 어떻게 해서든…음?’
맞아. 집중.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염룡결을 평소처럼 운용한다면 절대 버틸 수 없다. 힘을 한 곳에 집중해야 했다.
쿠구구구구!
염룡결의 화력을 자신의 어깨너비만큼으로 압축시켰다. 화력이 한곳으로 집중되며 라스의 냉기를 천천히 밀어내기 시작했다.
화아아아아아!
염룡결로 막지 못한 방향은 냉기의 파도가 몰아쳐 푸른 언덕을 만들어냈다.
“후욱!”
라온이 숨을 몰아쉬며 인상을 찡그렸다. 냉기의 파도를 막지 못했다면 자신 역시 저 언덕의 일부분이 되었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이해할 수가 없어. 이곳은 정신 세계인데, 본체를 만든 것으로 그런 힘이 생긴다고?”
라온이 미소를 짓는 라스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말했듯이 육체란 혼의 그릇이자, 안착지다. 제대로 된 육체가 없다면 아무리 분노의 군주인 본왕이라고 해도 진정한 힘을 끌어내기 힘들지. 마왕의 혼이라고 해도 육체에 맞는 모양새를 갖춰야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느니라.”
라스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평소와 같은 행동이지만, 무력과 외모가 달라지니 웃음은커녕 긴장감만 격해졌다.
“걱정 마라. 본왕은 네놈을 죽일 생각이 없느니라.”
“뭐?”
“지금까지 쌓은 정이 있으니, 네놈을 한구석에 처박아 둔 뒤에 그간의 굴욕을 갚아줄 것이니라.”
녀석이 다시 손을 펼쳤다. 바닥에 진동이 일어나며 냉기의 가시가 치솟았다.
화아아아아아!
라온이 만화공 회천을 내리쳤다. 빠르게 회전하는 불꽃의 칼날과 격돌했음에도 라스가 일으킨 가시는 몇 개밖에 잘리지 않았다.
‘모두 베는 건 무리야.’
피하는 게 낫겠어.
라온이 태화보를 밟아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냉기의 가시는 보법을 밟는 곳마다 튀어나와 영혼을 노려왔다.
“쯧.”
짧게 혀를 차고, 태화이보를 밟아 최대한 빠르게 가시가 튀어나오는 공간을 벗어났다.
“느리구나.”
라스가 손을 빙글 돌리자, 이번에는 허공에서 냉기의 가시가 떨어져 내렸다.
“망할!”
라온이 진각을 밟으며 제천검을 허공으로 내질렀다. 만화공의 기운을 전력으로 끌어모으며 중천포를 일으켰다.
쩌저저적!
중천포에서 운용되는 강대한 인력이 라온의 숨통을 노리던 서리의 조각들을 모조리 끌어모았다.
콰아아아아앙!
가시들이 한곳에 모조리 모인 순간 중천포를 터트려서 수백 개의 가시를 모조리 부숴버렸다.
“후욱….”
라온이 울렁이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정신력을 써서 그런지 머리가 아찔했다.
“좋은 생각이 났느니라.”
“또 무슨….”
“본왕이 네놈의 몸을 차지하는 대로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으로 삼시세끼를 먹을 것이니라. 상상만 해도 즐겁구나!”
녀석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마왕치고 소박하네.”
“네놈에게 고통만 줄 수 있다면 소박해도 상관없느니라!”
라스가 히죽이며 손가락을 튕겼다. 천공에 푸른 구름이 피어나며 그 안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빗물이 쏟아진다.
‘저건….’
라온이 손을 떨었다. 빗물 하나하나가 심혼을 꿰뚫을 수 있는 강대한 위력을 지닌 서리의 기운이었다.
‘막는 건 불가능해.’
그렇다고 모두 피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저 구름은 이 공간 전체를 뒤덮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얼음꼬치가 될 수는 없다. 이를 악물고 태화보를 밟았다.
터엉!
라스가 쏟아낸 서리의 소나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보법을 밟는 방향으로 떨어져 내렸다.
“비 맞은 생쥐 꼴로 도망치는 모습이 가관이로구나!”
라스는 배를 잡고 낄낄 웃었다. 잘난 외모에 안 맞는 경박한 웃음이었지만 또 굉장히 잘 어울리기도 했다.
“재밌는 거 하나 알려줄까?”
“재밌는 거?”
“이 세계는 네놈이 그리 원하던 검계현신의 힌트가 될 수 있는 장소이니라.”
“그게 무슨….”
갑자기 검계현신이라는 말에 고조되던 집중력이 깨졌다.
“너희들이 검계현신이라 칭한 기예는 검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현하는 무학. 즉, 상상으로는 뭐든 할 수 있는 이 정신세계가 그 검계현신의 밑바탕이 된다는 의미이니라. 물론….”
라스가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본왕 밑에 깔린 네놈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녀석은 그래서 말을 했다며 더 많은 양의 냉기를 일으켰다. 하늘에서 파도가 치는 듯 이전보다 더 많은 양의 빗물이 쏟아져 내렸다.
‘놀리려고 말했군.’
라온이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저 망할 마왕 놈은 자신의 집중을 깨고 조롱하기 위해 검계현신을 꺼내든 거다.
캬아아앙!
떨어지는 빗물이 왼쪽 팔을 스치자, 어깨만이 아니라 온몸을 칼로 찌르는 듯한 아릿한 통증이 일어났다. 영혼으로 이룬 육체이기에 한 곳만 다쳐도 전신이 아픈 것 같았다.
‘이대로면 벗어날 수가…음?’
라온이 보법을 밟기 위해 뒤를 돌다가 눈을 부릅떴다. 라스가 처음에 만든 서리의 산과 언덕 밑으로 불꽃이 뻗어나가고 있었다.
‘저 불꽃은….’
처음에 록타와 싸울 때 이 공간을 집어삼키기 위해서 일으킨 영혼의 불꽃이다. 그 잔불은 라스의 서리에도 사그라지지 않고 점차 범위를 늘려갔다.
‘왜 없어지지 않는 거지?’
라스가 일으킨 분노와 냉기에 비하면 자신의 정신력은 한참 모자라다. 저 불꽃이 서리 밑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라온은 낄낄 웃는 라스와 무너진 성 앞에 무릎을 꿇은 록타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저놈이 이곳의 주인이 아니라서?’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다.
이 세계는 자신과 록타의 정신이 부딪치며 만들어진 세계였고 록타는 이미 패배를 인정했다. 즉, 침입자인 라스와 상관없이 이 세계는 자신만의 것으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맞아. 녀석도 그런 말을 했었어.’
라스는 맨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 공간은 본인과 큰 관계가 없다고 했었다.
‘그럼 저 불꽃이 성에 깔릴 때까지만 버틴다면….’
라스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정신을 놓다간 얼마 못 버틸 텐데?”
라스의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냉기의 해일이 치솟았다. 위에서는 서리의 소나기가, 아래에서는 냉기의 파도가 밀려오는 첩첩산중이었다.
‘이건 못 피해.’
라온이 멈춰 섰다.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 올린 무학으로는 절대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그래도….’
방법은 있어.
라스의 말대로 이곳이 정말 정신력과 상상으로 뭐든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지금까지 쌓은 무학이 아니라 다른 것을 운용하면 된다.
라온이 숨을 몰아쉬고 왼발을 뻗었다. 머리에 그리는 건 최강의 무인 글렌 지그하르트. 그가 태화보를 전수해준 날을 떠올렸다.
어디에도 갈 수 있는 한 걸음.
본래의 세계에선 발휘할 수 없는 그 걸음을 떠올리며 땅을 박찼다.
후우우웅!
공간을 접어서 달리는 수준을 넘어 법처럼 공간을 뛰어넘는 보법이 운용되며 라온의 몸이 한순간에 라스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한 걸음이다. 라스가 일으킨 모든 냉기를 단 한 걸음으로 모조리 피해냈다.
“이 무슨….”
라스도 놀랐는지 뒤를 돌아보고서 눈을 부릅떴다.
“너 라스 맞네.”
라온이 힘 빠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련과 힌트를 동시에 주는 걸 보니, 아낌없이 주는 라스가 맞아.”
냉기로 공간 전체를 휘감아 놓고, 상상력이라는 말을 해서 벗어날 방법을 알려주는 걸 보면 외모는 변했어도 속성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 라스가 맞았다.
“시끄럽다. 이건 본왕의 유희일 뿐이니라!”
라스가 양손을 내뻗었다. 손아귀에서 푸른 빛이 일렁이자, 바닥과 천장에서 무수한 냉기의 폭풍이 돋아나왔다.
쿠구구구구!
폭풍끼리 부딪치며 더 거대해지고 위력을 강화했다.
“절대 막지 못할 것이니라!”
“맞아. 대신 피하면 그만이지.”
“못 하느니라!”
라스가 손가락을 이용하여 직접 폭풍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글쎄.”
라온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훔치며 오른발을 내뻗었다. 태화이보가 빛살처럼 뻗어나가 공간을 뒤덮은 폭풍을 빗겨냈다.
“으음!”
라스가 서리의 형태를 변화시켜서 영혼을 노렸지만, 그때마다 글렌의 태화보를 그대로 발휘하여 파동이 일어나는 영역을 벗어났다.
‘역시 통해.’
글렌이 직접 보여준 태화보는 라스가 감탄하여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의 상승무학답게 온 세상을 뒤덮은 냉기를 회피하는 신기를 보여주었다.
“후욱.”
라스가 찬 숨을 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실수였군. 네놈에겐 시간을 줘선 안 됐는데.”
“이미 늦었어.”
정신세계 한정이지만 글렌의 태화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라스가 무얼 해도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아니, 늦지 않았느니라.”
라스가 오른손으로 하늘을, 왼손으로 땅을 가리켰다.
쿠구구구구구!
두 손이 천천히 가운데로 향하자, 천공과 대지에서 동시에 냉기의 물결이 일어났다. 하늘과 땅 그 어디에도 피할 공간이 없는 대규모의 공격이었다.
“이 정도라면 네놈도 피할 수 없겠지.”
라스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입꼬리를 길쭉하게 말아 올렸다.
“걱정 마라. 말했듯이 죽이지는 않는다. 네놈은 본왕의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니라!”
“하아….”
라온이 이제 머리에 닿기 시작한 차디찬 냉기의 천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푸하하하하! 그 표정이 볼 만하구나! 이제야 드디어 복수하는… 어?”
라스는 폭소를 터트리다가 우뚝 멈췄다. 고개를 내린 라온은 절망한 표정이 아니라, 웃고 있었다.
“너….”
“아니, 늦은 게 맞아.”
라온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검을 검집에 넣었다.
“허세를 부려봐야 소용없느니라! 이대로 짓눌러버린다면 아무리 네놈이라도… 에?”
라스가 라온에게 삿대질을 하려다가 입을 떡 벌렸다.
‘왜 짧지?’
자신의 길고 아름다운 팔과 손가락이 짜리몽땅해졌고, 다리는 아예 사라져 있었다. 푸르고 짧은 손. 라온에게 구박받으며 살던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끄윽… 뭐야! 이게 뭐냐고!”
이제 한 끗만 지나면 라온을 조질 수 있는데, 왜 갑자기 몸이 원래대로 돌아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끝난 거다.”
라온이 피식 웃으며 땅을 가리켰다. 록타의 영혼이 끌고 온 얼어붙은 땅과 왕성이 사라지고, 별관을 비롯한 지그하르트 가문만이 남아 있었다.
“이 영역의 주인이 결정되었다는 거지.”
록타가 이전에 인정한 패배 이후 자신의 불꽃이 이 세계를 먹어 치우면서 라스가 본체의 모습을 드러내며 끌어 올린 힘도 사라진 것이다.
“넌 이곳에선 이방인일 뿐이었으니까.”
“아….”
라스도 이제 상황을 이해했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어, 어땠느냐? 본왕의 농담은 재미있었느냐? 에헤헤!”
“딱 때리기 좋은 크기네.”
라온이 두 주먹을 말아쥐고, 라스에게 다가갔다.
“저, 저기 본왕은 그저 민트초코를 먹고 싶었을….”
“일단 맞고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