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1화
라온은 앞서가는 멀린을 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즐거운가 보네.’
깃털처럼 가벼운 걸음을 보니, 자신이 용의 투구를 쓴 이후가 기대되어 어쩔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안에 있는 놈을 기다리고 있겠지.’
멀린이 원하는 건 그 투구 속 영혼이 자신의 몸을 차지하는 걸 테지만,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상대가 누구라고 해도 정신력으로는 지지 않는다.
“어때? 긴장돼?”
시선을 느꼈는지 멀린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가면 속 눈동자가 욕망의 빛으로 번들거렸다.
“조금.”
아예 긴장이 안 되는 건 아니기에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할 필요 없어. 네가 할 일은 투구에 몸을 맡기는 것뿐이니까.”
멀린은 투구를 쓰고 편안하게 잠에 빠지면 그만이라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저자는 뭐지?”
라온이 뒤에서 따라오는 절혼검을 가리켰다. 대전으로 들어오지 않던 그가 여기까지 오는 건 드문 일이었다.
“투구를 쓰면 넌 무방비가 되거든. 널 보호하기 위해서 좀 와달라고 했어.”
멀린은 절혼검이 아니라, 라온을 보며 가면의 입술을 훑어내렸다.
“네 투혼식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안 되니까.”
그녀는 투구를 쓰는 행사를 투혼식이라고 말해주었다.
“음….”
라온은 금빛으로 타오르는 절혼검의 안구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뭔가 다르단 말이지.’
지금까지 만났던 에덴의 무인과 달리 절혼검에게선 투기만 느껴지는 게 아니라,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죽음의 냄새가 풍겼다.
정말 사자를 데려와 투구라도 씌운 것 같았다.
‘하나 같이 이상한 놈들뿐이야.’
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멀린의 통나무 방 앞에서 멈춰섰다. 하지만 멀린은 그곳이 아니라는 듯 더 앞으로 나아갔다.
“네 투혼식은 다른 방에서 열 거야. 넌 특별하잖니.”
멀린이 따라오라는 듯 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녀는 한참 더 나아가 대전의 끝에 있는 벽에 이르렀다.
우우우웅!
멀린이 회색 벽면을 톡 두드리자, 벽 중앙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는 통로가 열렸다. 통로 속에서 시꺼먼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나왔다.
“들어가자.”
멀린이 눈웃음을 치고서 먼저 통로로 들어갔다.
-흐음….
라스는 벽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왜?’
-아무것도 아니니라.
녀석은 아니라는 말과 달리 짜증이 깃든 눈빛으로 벽에 뚫린 통로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 녀석이 제일 이상하지.’
라온이 옅게 웃으며 벽에 돋아난 통로로 들어갔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는 아릿한 빛이 번진 후 거대한 정사각형의 공간이 나타났다.
웅장한 규모의 방에는 바닥만이 아니라, 네 개의 벽과 천장에도 각기 다른 형태의 오망성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후우우.
마법진에서는 조금 전 보았던 검은 기운이 모락모락 타오르고 있었다. 다만 검은 연기에선 사악한 기운이 아니라, 순수한 마나가 느껴졌다.
-역시 그놈인가?
라스는 마법진에서 흐르는 기운을 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놈?’
-있느니라. 멍청하기 그지없는 놈이.
녀석은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입을 다물었다.
“저곳에 앉아.”
더 물어보려고 할 때 멀린이 바닥의 마법진 중앙에 놓인 회색 의자를 가리켰다.
“…….”
라온은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절혼검의 눈을 보다가 멀린이 지정해준 자리로 가서 앉았다.
“똑똑한 아이라 참 편해.”
멀린이 앞으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 위로 어제 보았던 용의 투구가 둥실 떠올랐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비늘과 생기 넘치는 하늘색 갈기는 이 투구의 용이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후우.”
라온이 짧게 숨을 내뱉고서 투구를 두 손으로 잡았다. 투구는 외형과 다르게 종이로 만든 것처럼 가벼웠고 고무 같은 탄력이 있었다. 얼굴이 크든 작든 누구에게나 맞을 것 같았다.
“잠시만 기다려줘.”
멀린이 초승달 같은 눈웃음을 치고서 두 손을 모았다. 그녀의 손 위로 여섯 개의 마법진이 돋아난다. 이 방에 새겨진 마법진과 같은 형태였다.
고오오오오!
그녀의 마나에 공명하듯 벽과 천장의 마법진이 진동을 일으키며 시꺼먼 빛을 뿜어냈다.
“라온.”
멀린이 투구를 쓰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이 눈을 내리감았다가 뜬 후 용의 투구를 착용했다. 조금 컸던 투구가 머리에 딱 맞게 축소되며 기이한 기운이 전신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잘 다녀와.”
멀린이 가면을 살짝 들어 올렸다. 붉은 입술을 투구의 입매에 맞추며 입꼬리를 가늘게 말아 올렸다.
“눈을 뜨면 다 끝나 있을 거야.”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시야가 훅 꺼졌다.
* * *
지그하르트 가주전 알현실.
가문의 간부들과 봉신가 가주들이 모여 있음에도 알현실은 얼음장을 깔아놓은 듯 서늘했다.
간부들의 표정 역시 삭막하기 그지없었는데, 그 이유는 모두 한 명의 존재 때문이었다.
글렌 지그하르트. 북멸의 옥좌에 앉은 그에게서 피어나는 지독할 정도의 패기에 모두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가주님. 모두 모였습니다.”
로엔이 글렌의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툭툭.
글렌은 간부와 가주들을 굽어보며 손가락으로 옥좌를 가볍게 두드렸다.
“지그하르트의 걸음이 멈춘 지 꽤나 긴 시간이 흘렀다.”
“으음….”
그의 음성에 깃든 서늘함에 명전단 단주가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지그하르트가 대륙의 절반을 삼킬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그 이상의 피는 흘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글렌의 차디찬 시선이 우측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스스로 걸음을 멈췄다. 지그하르트엔 진혼과 휴식이 필요했고, 그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우측 기둥 뒤에 서 있던 셰릴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다른 이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글렌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번들거렸다.
“라온 지그하르트와 도리안 세피아가 납치되었다는 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간부와 가주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혈교와 에덴이 광풍단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면 나는 너희를 소집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메르에게 하나의 단을 맡겨서 복수를 지시했겠지.”
그 말이 맞았다. 지그하르트는 단이나, 대가 전멸했다고 해도 모두를 소집하는 경우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놈들은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단 검사들을 납치했다. 이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지?”
글렌의 눈동자가 돌아간다. 조금 전까지 그에게 겁에 질려 있던 검사들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번쩍였다.
“지그하르트를 무시했다는 뜻입니다.”
셰릴이 대표로 대답하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그 말대로다.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단 검사를 납치했다는 건 우리를 어중이떠중이로 여긴다는 뜻. 우리의 검이 무섭지 않고, 두렵지 않다는 의미다.”
글렌의 말이 길어질수록 그의 패기가 가라앉았다. 그가 정말로 분노했다는 의미였다.
고오오오오!
지그하르트 간부와 봉신 가문의 가주들은 글렌과 반대로 점차 강대한 기파를 일으켰다. 모두가 일으키는 기운에 가주전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라온이나 광풍단을 싫어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존중한다. 허나 이번 일은 내부의 일이 아니라, 외부의 일. 라온이 아니라,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생각할 때다.”
글렌이 몸을 일으켰다. 자그마한 기세도 없는 그의 존재감이 태산을 드리운 듯 거대해졌다.
“수색은 이미 시작되었다. 암시장과 함께 라온 지그하르트와 도리안 세피아를 찾아라. 그 끝에 오마가 아니라, 육황이 있어도 상관없다. 그 아이들의 납치와 관련이 있는 곳은 모조리 지워버려라.”
“예!”
가주전이 하나의 심장이 된 것처럼 거대한 약동을 일으켰다.
“적이 누구든 두려워하지 말라.”
글렌이 단상에 끝에 섰다. 태양처럼 달아오르는 붉은 시선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내가 너희들의 앞에 서겠다.”
* * *
눈을 뜨자, 어두운 하늘이 보인다. 그 끝이 어딘지 보이지 않는 천장이었다.
“음….”
라온이 몸을 일으키며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 되지 않는 검은 공간 뒤로 얼어붙은 땅이 보인다. 지그하르트의 영역보다 더 넓은 왕궁이 은빛 서리에 통째로 얼어붙어 있었다.
‘저 냉기는….’
모를 수가 없는 친근한 기운. 글래시아의 냉기였다.
‘로엔그린의 솜씨로군.’
글래시아의 냉기로 얼어붙은 성을 보니, 이야기 속에 나오는 멀린의 성이 분명하다. 긴 세월 동안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왕성은 쓸쓸함을 넘어 을씨년스러웠다.
“음?”
라온이 성을 눈에 담은 채 일어서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평소와 무언가가 다르다. 완벽하게 익숙해진 육체와 눈높이가 조금 차이가 났다.
자신의 손과 옷을 살폈다. 절대 사라지지 않던 얼음꽃 팔찌가 보이지 않았고, 광풍단의 제복 대신 검은 야행복을 입고 있었다.
‘설마….’
라온이 하얀 땅에 얼굴을 비쳤다. 20년 가까이 와온 금발적안의 얼굴이 사라지고, 어둠을 두른 듯한 흑발흑안의 청년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나다….”
지금의 내가 아니라, 전생의 나. 평생 데루스 로베르트에게 목줄이 잡힌 채 살았던 암살자 라온의 모습이었다.
툭.
뒷걸음질을 치는데 발에 무언가가 걸렸다. 아래를 보니, 작은 단검과 장검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건….’
모를 수가 없다. 전생에 사용했던 단검과 장검. 데루스 로베르트에게 죽을 때까지 함께 했던 무기였다.
“혼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라온 지그하르트가 아니라, 전생의 라온의 모습이 나온 걸 보면 혼을 마주한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라스도 없었군.’
왜 그 수다쟁이가 아무 말도 안 하나 했더니, 녀석과도 격리된 공간인 것 같았다.
라온은 오랜만에 전생의 무기를 잡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내 보양식은 언제 일어나려나.
그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이 공간이 진동한다.
쿠구구구구!
왕궁이 무너지고 날카로운 푸른 비늘에 덮인 거대한 용의 목이 치솟았다. 그 끝에서 세상에 분노하는 듯한 청색 안광이 번쩍였다.
쿠오오오오오!
왕성 전체를 뒤덮은 얼음이 유리장처럼 깨져나가고, 웅장한 용울음이 이 세계를 울렸다.
쿠와아아아아앙!
지평선을 그릴 듯한 거대한 날개가 펼쳐지며 왕궁이 모조리 붕괴한다.
쏟아지는 돌과 얼음 무더기 속에서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작은 통나무집이 보였지만 금세 먼지에 묻혀 사라졌다.
후우우웅!
푸른 용이 얼어붙은 대지를 박차고 천공으로 솟구친다. 끝이 없는 하늘을 거칠게 부유하던 용은 라온을 발견하고서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앙!
푸른 용이 낙하하여 새하얀 대지를 짓뭉갰다. 뱀의 혓바닥처럼 갈라진 눈동자가 무시무시한 압박을 보내왔다.
라온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문 채 푸른 용의 패악적인 시선을 마주했다.
우우우우웅!
푸른 용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돋아나며 그 거대한 육체가 인간의 크기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장대한 빛무리 속에서 젊은 남성이 걸어 나온다. 바다색 눈동자를 가진 미남이 기사의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 엔시아가 보자마자 존잘이라고 외칠 법한 외모였다.
“이해할 수 없군.”
청발의 남성이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공주님의 말씀대로라면 네 정신의 벽이 무너져서 이 세계 자체가 열리지 않았어야 하거늘. 왜 네가 내 앞에 있는 거지?”
그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괜히 불혼수를 준 게 아니었어.’
앞의 남자가 말하는 것을 보니, 불혼수로 정신의 벽을 깨부수면 아예 이런 공간이 생길 일 없이 바로 저놈의 혼이 자신의 혼을 깨부수는 모양이다.
‘그런데 공주라고?’
이 용이 다른 사람을 찾을 리 없다. 멀린을 공주라고 부른 게 분명했다.
“멀린이 공주라는 건가?”
“모르는 건가?”
용은 그것도 모르냐는 듯 눈썹을 아래로 내렸다.
“하긴 네놈도 공주님께 잡혀 왔을 뿐일 테니.”
그는 한심하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너 드래곤이 아니로군.”
라온이 청발의 사내를 올려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절대 드래곤일 수가 없어.’
드래곤은 최강의 종족답게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하다. 유희 중이라면 모를까. 본체의 모습을 보인 드래곤이 인간에게 공주님이라는 말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럼 이놈은….’
라온의 눈동자에 이채가 비쳤다.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는 용이면서 드래곤이 아닌 존재는 딱 하나뿐이다.
드래고니안.
드래고니안은 드래곤과 타종족의 혼혈을 통칭하는 말이다.
대부분은 본래 종족보다 강한 힘이나, 뛰어난 마나 친화력을 타고나는 정도에 그치지만 가끔 돌연변이처럼 용으로 변하는 능력을 가진 채 태어나는 드래고니안이 있는데, 바로 앞에 있는 놈이 그 경우인 것 같았다.
“드래고니안인가?”
“그렇다.”
청발의 남자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은 록타 데포르트. 블루 드래곤 크로노스 데포르트의 아들이며 시르켄의 근위 기사 대장이다.”
그는 갑옷을 입고, 검을 든 모습답게 스스로를 기사라 말했다.
“네게 악감정은 없다. 나는 기사로서 공주님을 지키지 못한 죄인. 죗값은 죽어서 치르겠다. 편히 몸을 넘긴다면 고통은 주지 않….”
“지랄하네.”
라온이 차게 웃었다. 전생의 몸이기 때문일까. 라온 지그하르트일 때는 잘 쓰지 않은 욕설이 바로 튀어나왔다.
“너희들 마음대로 납치해놓고 죽어서 죗값을 갚겠다? 개소리도 적당히 지껄여.”
“반항은 의미가 없다.”
록타가 눈매를 가라앉혔다.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네 발밑을 보아라.”
그 말에 아래를 보았다. 록타가 밟고 있는 하얀 땅과 극명하게 반대되는 어둑한 대지가 보였다.
“그 어두운 땅이 네 인생의 전부다.”
“뭐?”
“네 영혼에 깃든 세계는 그 땅과 두 자루의 칼이 전부라는 뜻이다. 반면에….”
록타가 본인의 뒤편을 가리켰다.
“내 세계는 이 얼어붙은 성에서 멈췄지만, 네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굳건하다.”
그의 눈빛에서 서늘한 냉기와 죽음을 겪은 절망이 피어나왔다.
“마음만 먹는다면 네 좁고 가는 세계 따위는 지금 당장 밀어버릴 수 있다. 마지막 기회를 주지. 물러나라. 약자에게 힘을 쓰고 싶지 않으니까.”
록타는 아직도 스스로가 기사라고 생각하는지 헛소리를 내뱉었다.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원래 약한 개일수록 짖기만 하는 법이지.”
라온이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주절거리지 말고 덤벼. 반쪽짜리 도마뱀아.”
“결국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는군.”
록타의 눈이 시퍼렇게 번쩍이자, 그가 밟고 있던 얼어붙은 대지에서 서리의 파도가 일어났다.
콰아아아아!
새하얀 해일이 시꺼먼 대지를 집어삼키며 영역을 늘려간다. 마나회로가 얼어붙는 듯한 감각. 매일 같이 느꼈던 라스의 공격과 비슷한 고통이었다.
‘이거였군.’
이래서 투혼식이라 부르는 거였어.
이제 이해가 간다. 이 장소는 라스와 매일 같이 싸우던 자신의 육체를 시각화한 곳이다. 더 거대한 힘을 가진 록타의 혼이 이 공간의 대부분을 먹어치운 것이다.
쿠구구구구!
록타가 일으킨 냉기와 놈의 절망이 점차 거대해지며 검은 공간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어느새 모든 공간이 얼어붙으며 남은 것은 발을 딛고 있는 한 뼘 땅뿐이었다.
“말했지 않나.”
록타가 노골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기사 어쩌구 하더니, 결국 멀린과 다를 바가 없는 놈이었다.
“의미 없는 짓이라고. 네가 이 세계에서 날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어째서지?”
“경험이 다르니까. 네놈은 이곳이 처음이겠지만 난 살아 있을 때부터 이 세계에서 싸워왔다. 백 번은 넘게 싸웠을 것이다.”
“백번이라.”
라온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고작 그거?”
불의 고리를 일으키며 진각을 밟았다. 발밑에서 뻗어 나오는 만화공의 불꽃이 얼어붙은 대지를 휩쓸기 시작했다.
화아아아아아!
시뻘건 불길은 끝없어 보였던 냉기와 절망을 찰나의 순간에 녹여버리고, 역으로 얼어붙은 땅까지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록타가 쏟아낸 냉기와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이, 이 불꽃은 뭐야!”
라온은 찢어질 정도로 부릅뜬 록타의 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쪽은 말이다. 귀찮게 구는 솜사탕에게 반평생을 시달렸거든. 이딴 싸움은 백 번이 아니라, 천 번도 더 했어.”
만화공의 열기와 반대되는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적염에 타오르는 대지를 걸었다.
저벅.
불길에 젖은 낡은 신발 소리가 뚜렷한 구두 소리로 변한다. 어두운 바지와 상의가 매끄러운 빛을 흘리는 광풍단의 제복으로 바뀌고, 흑발이 타오르며 금괴를 녹인 듯한 찬란한 금발이 찰랑였다.
투우웅!
허무함만 가득했던 검은 눈동자가 태양을 삼킨듯한 적안이 되어 록타의 심혼을 꿰뚫었다.
화아아아아!
끝없는 불길이 번지며 라온의 뒤편에 별관과 5연무장이 그리고 지그하르트의 전경이 드러난다.
쓸쓸함만 가득했던 시꺼먼 대지가 스스로 쌓아온 인연으로 채워졌다.
내 세계는 더이상 비어 있지 않았다.
“네, 네놈은 뭐야! 어찌 인간의 정신에 이런 극명한 변화가….”
록타는 사람 자체가 변한 라온을 보며 턱을 파르르 떨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당황을 넘어 겁에 질린 것 같았다.
화르르르!
그가 놀라건 말건 만화공의 열기는 얼어붙은 땅을 녹이고, 록타가 무너뜨린 왕성까지 닿기 시작했다.
“평범한 인간이다.”
라온이 제천검의 검병을 꽉 말아쥐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목줄을 풀고, 이제야 사람다운 삶을 사는 인간.”
“그게 무슨 헛소리냐!”
“미안하게 됐어. 네놈과 네 잘난 공주님은 원하는 건 절대 얻지 못할… 음?”
“어?”
라온이 말을 멈추고 우측을 바라보았다. 록타도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샤아아아아!
만화공의 불꽃이 타오르는 바닥 위로 시퍼런 실이 꼬이고 꼬이며 기이한 영역을 만들고 있었다.
“저, 저건 또 무엇이냐! 어떻게 이 공간에 침입자가!”
록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네놈! 무엇을 부를 것이냐!”
“내가 부른 게 아니라, 지가 찾아온 거다.”
라온은 손목에 생겨난 얼음꽃 팔찌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불법 세입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