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9화
-크으!
라스는 멀린이 가져온 아침 식사를 먹고서 탄성을 흘렸다.
-메뉴도 본왕이 딱 원하는대로고, 맛도 끝내주느니라.
녀석은 새우 피자와 파인애플 피자라는, 아침치고는 상당히 무거운 음식을 모닝빵처럼 가볍게 즐기고서 히죽 웃었다.
-거기 아이스크림도 좀 먹어보아라. 본왕은 지금 입이 텁텁하느니라.
라스가 아이스크림이 담긴 얼음 컵을 가리키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에휴….”
라온은 민트초코가 담긴 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다 준비하다니….’
무슨 스토커야?
멀린은 평소에 자신이 먹는 음식까지 조사했는지 말도 하지 않았는데, 새우 피자와 파인애플 피자 그리고 디저트로 민트초코 아이스크림까지 가져다주었다.
생각 이상으로 무서운 여자라고 느꼈지만, 문제는 하나 더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게 없어.’
가져다 주는 요리 중에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은 아무것도 없다.
새우 피자도, 파인애플 피자도, 민트초코 아이스크림까지 전부 자신이 좋아하는 게 아니라, 요 과식의 마왕이 선호하는 음식들이었다.
‘쯧.’
눈앞에 음식이 있는데 거절하면 라스가 발광할 게 뻔해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
-우후후후!
라스는 민트초코가 혀에 닿자마자, 눈이 초승달이 되어버렸다.
진짜 마왕 맞냐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저렇게 웃는 마왕이 있다면 무조건 반역이 일어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놈은 마왕이 아니다.
“후.”
라온은 민트초코를 다 먹은 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라스 때문에 꾸준히 먹고는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맛이 없다. 루난이나 라스나 이걸 왜 먹는 건지 모르겠다.
-그게 다 네놈이 힘든 일 없이 편히 커서 그렇느니라.
라스가 싹싹 비워진 아이스크림 컵을 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많은 고난을 겪은 본왕에게 민트초코는 달기만 하느니라.
‘지랄하네’라는 말이 바로 튀어나올 뻔했지만 꾹 참았다. 저 꼴을 안 보기 위해서라도 멀린에게 음식을 바꿔 달라고 해야겠다.
-후우, 좋구나. 이곳이 바로 천당이니라.
네가 거기 있으면 안 되지.
라온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라스를 보다가 일어섰다.
-쉐프를 보러 가는 것이냐?
‘그런 짓을 왜 해.’
-그럼 어딜 가는 것이냐.
‘이러고 있다간 살찔 거 같거든.’
배를 쓱쓱 문질렀다. 지그하르트에 있을 때보다 잘 먹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납치된 게 아니라, 휴가라도 즐기고 왔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식후 운동 좀 하려고.’
-여기서도 수련이냐? 정말이지 지겹느니라.
라스가 지독하다며 손을 휘휘 저었다.
‘수련은 아니야. 여기서만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라온이 방을 나섰다. 문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기괴한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지부의 끝으로 걸어간 뒤 벽을 향해 손을 올렸다.
찌이이잉!
미약한 스파크와 함께 지부를 감싸고 있는 반투명한 결계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해와 달 그리고 별이 새겨진 광대한 규모의 결계는 절대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듯 고고한 기운을 뿜어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복잡하군.’
결계에서 피어나는 다양한 기운을 생각해보면 그랜드 마스터 이상의 무인과 마법사, 흑마법사에 주술사까지 함께 만든 진법이 분명했다. 지금의 자신이 깨기에는 너무 어려운 결계였다.
-저걸 보러 온 것이냐? 지금 네놈에게는 무리이니라.
라스는 주제를 알라며 코웃음을 쳤다.
‘나도 알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라온이 피식 웃고서 결계를 살필 때였다.
“손 떼는 게 좋을 거야.”
등 뒤에서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한 번 더 만지면 그 손부터 잘라버릴 테니까.”
날카로운 살기를 느끼며 뒤를 돌았다. 뿔이 달린 뱀 투구를 쓴 남자가 건들거리며 서 있었다.
절혼검은 한참 뒤에서 팔짱을 낀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팔을 자른다? 그거 괜찮네.”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벽에 손을 얹었다. 강한 스파크가 일어나며 결계가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덤벼.”
“허….”
뱀 투구의 남자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너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는 건가?”
“바실리스크의 힘을 이어받은 검사겠지.”
뿔이 달린 뱀 형태의 몬스터는 그리 흔하지 않다. 사막에 살며 석화의 힘을 가진 거대한 뱀 바실리스크가 분명했다.
“바실리스크라….”
뱀 투구의 남자가 픽 웃었다. 틀렸는지 맞았는지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바실리스크가 아니라도 상관없어. 저자보다는 네가 상대하기 편할 것 같거든.”
라온이 뒤에 있는 절혼검을 가리켰다.
“일부러 시비를 거는 거였군.”
뱀 투구의 사내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모로 틀었다.
-네놈 설마….
‘맞아.’
라온이 주먹을 말아쥐며 미소를 흘렸다.
‘에덴의 혈귀들과 싸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잖아.’
뱀 투구의 남자도, 그 뒤에 있는 절혼검도 자신보다 강한 무인이다. 지금은 멀린 때문에 자신을 죽일 수 없는 저 괴물들의 무학을 빼낼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심심했는데, 잘 됐군. 대륙 제일의 천재라는 설화검협의 실력 좀 볼까?”
뱀 투구의 남자가 검을 뽑았다. 보편적인 검보다 검신이 두꺼워 중병 느낌이 드는 검이었다.
“투구 쓴 병신이 되기 전에.”
“투구 쓴 병신이라….”
라온이 옅게 웃으며 제천검의 검병을 쥐었다.
“당신의 이름은?”
“금면사라 불러라.”
뱀 투구의 사내가 본인의 이명을 금면사라 밝히며 자세를 낮췄다.
“전력으로 와라.”
“그래. 네 목을 벨 생각으로 가주지.”
금면사는 자그마한 기합도 없이 돌진해왔다. 빠르면서도 부드러운 움직임. 정말 뱀과 같은 보법이었다.
후우웅!
놈은 순식간에 좌측으로 짓쳐 들어 검을 내리찍는다. 칼날에 깃든 강대한 투기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변화는 없어.’
금면사는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직선적인 투로로 검을 내리쳐왔다. 어설프게 막았다간 그대로 목이 부러질 법한 강한 압력이 느껴졌다.
고오오오오!
라온이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제천검을 뽑았다. 발검이 그대로 공격으로 이어지며 금면사의 검과 정면에서 부딪쳤다.
쩌어어엉!
제대로 방비를 했음에도 무릎이 살짝 흔들리고, 어깨가 내려앉을 정도로 무거운 일격이었다.
‘역시나 강해.’
검의 무게가 7사도와는 차원이 다르다. 처음에 예상한 대로 금면사의 경지는 마스터 중급을 확실하게 뛰어넘었다.
마스터 상급에 오른 고수. 이 정도의 무인이 이름조차 알리지 않다니, 에덴은 정말 미친놈들의 집단이었다.
콰아앙!
라온이 좌측에서부터 질주해오는 금면사의 검격을 차단했다. 팔꿈치로 전해지는 충격에 입술을 깨물었다.
‘딱 좋은 상대야.’
중급을 꺾었으면 당연히 상급 차례니까.
금면사는 지금까지 상대했던 적들 중 가장 강하지만, 진짜 괴물과 비교하면 떨어지는 상대다.
이놈과 호각으로 싸우지 못하는 이상 여기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쩌어어어엉!
제천검에 만화공 회천을 일으켰다. 톱날처럼 회전하는 불꽃으로 금면사의 허리를 노리려고 할 때 놈의 검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우우우웅.
검날에서 타오르는 붉은 투기가 돌처럼 굳어지며 회천의 불꽃을 모조리 차단했다.
‘역시 바실리스크가 맞군.’
바실리스크는 적에게 석화를 거는게 다가 아니라, 본인의 몸을 강기로도 베기 힘든 강도로 만들 수 있다. 저리 단단한 오러를 운용하는 걸 보면 바실리스크가 확실했다.
‘재밌겠어.’
강철보다 더 단단한 투기를 깨부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들떴다.
“제법이군. 하지만.”
금면사의 눈동자가 뱀의 그것처럼 세로로 좁아지며 투기의 크기가 두 배 이상 증폭했다. 놈이 우측으로 돌진해 검을 그대로 휘두른다.
쿠구구구구!
산이 무너지는 듯한 압력이 온몸을 짓눌렀다. 투기에서 전해지는 무게에 다리가 마비된 듯 떨렸다. 절기를 사용하는 게 분명했다.
“벌써 끝은 아니겠지?”
“물론.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라온이 흥겨운 미소를 흘리며 태화오보를 밟았다. 대지를 울리는 발걸음과 함께 은백색 검신에 어린 강검의 묘리를 쏟아냈다.
콰아아아앙!
강검과 강검이 부딪치며 폭발한 충격파가 주변을 거칠게 휩쓸었다.
“더 재밌게 가보자고!”
금면사의 눈빛에 살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단숨에 전면으로 달려들어 검격을 내친다. 직선으로 떨어지는 투기의 벼락이 살짝 비틀리며 피할 공간을 차단했다.
‘아직 여유 있다는 건가.’
라온은 금면사가 일으킨 강대한 검격을 마주하며 피식 웃었다. 한층 더 강해진 투기를 보니, 녀석은 아직 전력이 아니었다.
‘더 끌어내 주지.’
제천검을 고쳐 쥐고서 그 검격 앞으로 달려나갔다. 무거움을 담아낸 만화공의 불꽃이 금면사의 검격과 다시 한번 정면에서 부딪쳤다.
쩌어어어어엉!
결계로 보호되는 대지가 움푹 파일 정도의 강대한 충격이 터지며 라온과 금면사가 다섯 걸음씩 물러났다.
“으음….”
금면사는 눈매를 좁히며 라온을 내려보았다.
“방금 뭘 한 거지? 갑자기 검이 무거워졌는데.”
“말했잖아.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라온이 울렁거리는 속을 불의 고리로 가라앉히며 미소를 지었다.
금면사가 두 단계 더 높은 경지에 있는 건 맞지만 이쪽에는 라스에게 받은 능력치와 특성이 있다. 밀리더라도 그냥 밀리지는 않는다.
“재밌군.”
금면사가 차게 웃으며 땅을 박찼다. 사막을 달리는 뱀처럼 매끄럽게 다가와 검격을 쏟아낸다. 한 번의 휘두름에 다섯 개의 파동이 일어나며 사위를 뒤덮었다.
‘이건 못 피해.’
라온이 짧게 혀를 차며 만화공 백화 염주벽을 일으켰다. 제천검에서 타오르는 불꽃의 방패와 금면사가 내리친 투기가 사선으로 격돌했다.
콰아아아앙!
금면사가 진심을 다했는지 하체가 무너질 정도로 압도적인 충격이 일었다. 막은 손부터 어깨까지 전신이 떨리고, 가슴 중앙으로 용암이 지나가는 듯한 열통이 느껴졌다.
‘확실히 달라.’
중급의 끝에 이른 것과 상급에 도달한 건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금면사는 본인의 검을 완벽하게 깨닫고 그에 합당한 강대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마음 놓았다간 목 날아간다. 아직 끝이 아니거든!”
금면사가 충격파를 뚫어내고 달려온다. 순식간에 안으로 파고들어 주먹을 내질렀다. 제대로 맞는다면 뼈가 부러질 정도의 투기가 실려 있었다.
터어엉!
라온은 팔꿈치를 틀어 금면사의 주먹을 쳐냈다.
“제법인데?”
감탄하는 놈에게 다가가 제천검을 뻗어냈다. 은빛 칼날에 깃든 광아검의 구결이 사나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흥!”
금면사는 천적에게서 도망치는 뱀처럼 몸을 틀어서 광아검을 흘려낸 뒤 검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려쳤다.
찌이이잉!
내려올 때보다 더 빠르게 솟구치는 검격. 붉은 벼락이 하늘로 치솟는 것 같았다.
치이이잉!
라온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번쩍였다. 찰나의 순간에 전환되는 오러. 글래시아의 냉기가 제천검의 칼날에 깃들었다.
서리연의 칼날이 투기의 빈틈을 쳐냈다. 그 뒤를 잇는 푸른 파도가 금면사의 목을 노렸다.
“두 번이라.”
금면사가 히죽이며 발을 구르자, 그의 전신에서 강대한 투기가 타오르며 서리연의 냉기를 그대로 견뎌냈다. 충격이 없는 건 아닌지 그의 입술로 피 한방울이 흘러내렸다.
“검을 따라오는 냉기의 칼날이라.”
그는 마음에 든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검을 세웠다. 투기가 통나무처럼 둥글게 번지며 전방을 휩쓸어왔다.
“후우.”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광아검을 그어내렸다.
‘이건 좀 아프겠는데.’
쏟아지는 투기의 크기를 보니 쉽사리 버틸 검격이 아니다. 최대한 강기를 응집시킨 채 그대로 부딪쳤다.
쩌어어어엉!
검과 검이 맞부딪치고 라온이 열 걸음 뒤로 물러서며 비틀거렸고, 금면사는 여섯 걸음 물러나는 것에서 그쳤다.
‘저놈 말대로야.’
재밌어.
라온이 입가로 흐르는 피를 훔치며 들뜬 미소를 지었다. 금면사의 검격의 요체는 굳건함과 부드러움이다. 쇠보다 더 단단한 주제에 흐물거리는 뱀의 속성을 가져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미리 상대해보길 잘했어.’
이곳을 빠져나갈 때 금면사와 처음 부딪쳤다면 큰 낭패를 당했을 것이다. 지금 미리 놈과 싸워둔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불의 고리가 있으니까.’
처음부터 불의 고리를 운용한 덕분에 놈의 검술이 어느 정도 눈에 익었다. 다음에 싸운다면 지금처럼 쉽게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젠….’
검술 이상을 봐야겠지.
절기 중의 절기. 금면사가 가진 진짜들을 봐야 할 차례였다.
“꽤나 튼튼한 놈이구나!”
금면사가 다가와 검을 내친다. 사선으로 뚝 떨어지는 검격. 한번 보았던 검술이었다.
쩌엉!
라온은 광아검으로 금면사의 검격을 거칠게 튕겨낸 뒤 제천검을 뒤로 젖혔다. 끌어 올린 만화공을 증폭시킨 채 앞으로 내질렀다.
만화공 백화.
염룡결.
불혼수를 흡수한 덕분에 한층 더 강해진 화룡의 표효가 금면사의 정면으로 뿜어졌다.
“이건….”
금면사가 검을 꽉 말아쥔다. 조금 전과 달리 진지한 눈빛으로 손목을 똑바로 세운 채 검을 그어 내렸다.
치이이이잉!
검에 깃든 투기가 부채꼴로 번지며 굳건한 빛을 뿜어낸다. 흡사 거대한 산이 세워진 듯한 모양새였다.
콰아아아아앙!
승천하려는 화룡과 하늘 아래에 선 태산이 부딪치며 대지가 움푹 파여 나갔다. 무지막지한 폭발이 터지며 주변에 시꺼먼 강기의 용오름이 치솟았다.
라온은 분노의 마안을 운용하여 폭발 그 안쪽에서 이루어지는 검과 검의 흐름을 포착했다.
‘투기에 투기를 쌓아서 계속 중첩시켰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금면사의 검격은 투기를 면과 면으로 만들어 중첩하는 방식에서 오는 위력이었다. 염룡결을 사용했음에도 어깨가 나갈 것 같은 충격이라니 경악스러운 무력이었다.
‘조금 더 빼내 볼까.’
라온이 만화공을 극성으로 일으키며 진각을 밟았다. 광아검 중 가장 묵직한 검격 대첨부를 내치며 중검의 묘리를 극성으로 휘감았다.
쿠구구구구!
무거움에 무거움이 중첩된 검격이 금면사의 머리를 부술 듯이 떨어져 내렸다.
“좋다. 와라.”
금면사가 어깨를 돌린다. 석상이 일어나듯 거친 움직임이었지만 그 안에 깃든 투기는 조금 전 검격을 한 번 더 초월했다. 이번 검격 역시 놈의 절기가 분명했다.
콰아아아아아!
시뻘건 섬광과 함께 아래에서부터 무시무시한 투기의 뭉치가 솟구쳐 올라왔다.
쿠우우우우우웅!
바닥에 가득 찬 결계가 뒤흔들릴 정도의 충격이 퍼지고, 주변에 있던 에덴의 귀신들이 모조리 날아갔다.
“아직 더 할 수 있겠지?”
금면사가 두 손으로 검을 잡았다. 그의 검신 위로 투기가 응집된 구체가 돋아난다. 점점 부풀어 오르는 구체가 허공을 가득 뒤덮었다.
“걱정 마라. 뒈지지만 않으면 멀린이 치료해 줄 테니까.”
“네 이야기인가?”
라온이 차게 웃으며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은빛 검신 위에 강대한 기류가 치솟으며 붉은 구체를 일으킨다.
만화공 백화
중천포.
금면사의 검에서 피어난 투기의 구체보다는 작았지만 더 압축된 힘이 허공에 짙은 뇌전을 일으켰다.
“끝까지 가보자!”
금면사와 라온이 동시에 검격을 쏟아부으려고 할 때였다.
후우우웅!
죽음의 기운이 어린 검은 섬광이 두 사람 사이로 쏟아져 내렸다.
콰아아아아앙!
맹렬하게 회전하는 검은 기운은 라온과 금면사의 절기를 홀로 감당하고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트드득.
검은 빛이 흩어지며 흑검을 내리고 있는 절혼검의 모습이 드러났다. 여기까지만 하라는 듯 턱을 살짝 틀었다.
“다된 요리에 후추를 뿌리네.”
금면사는 절혼검을 보며 혀를 찼다.
“하여튼 재미없는 놈이라니까.”
그는 인상을 찌푸리고서 검을 내렸다.
“음.”
라온도 짧게 입맛을 다시고서 제천검을 납검했다.
“다음을 기약하자고. 이 녀석을 떠나서 이 이상 했다가는 멀린이 난리를 칠 거 같거든.”
금면사는 손을 빙글 돌리고서 처음 나타날 때처럼 사라졌다. 멀린을 막 부르는 걸 보면 그녀와 비슷한 계급인 건지 아니면 막 나가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
절혼검은 어느새 흑검을 집어넣은 채 이쪽을 바라본다. 어제와 똑같이 어떠한 감정도 없는 눈빛이다.
“저자를 꺾으면 당신에게 도전해도 되나?”
“…….”
그는 대답도, 눈빛에 변화도 없이 계속 쳐다보기만 했다.
“허락한 것으로 알지.”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다음에 보도록 하지.”
여기가 점점 마음에 드네.
영약도 주고, 알아서 찾아오는 대련 상대까지 있는 걸 보면 라스의 말대로 천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라온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전으로 들어갔다.
“…….”
절혼검은 오른 어깨를 살짝 돌린 채 라온이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 * *
“하아.”
멀린이 어깨와 허리에 약을 발라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다니, 정말 말썽쟁이구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금면사에게 먼저 시비를 걸고 대련을 하자고 한 건 네가 처음이야. 다들 놀라고 있던데?”
“얼마나 강한지 좀 보고 알고 싶었거든.”
라온이 목을 가볍게 돌리며 눈을 내리감았다. 어차피 속이는 게 불가능하기에 솔직하게 말했다.
“무인들이란.”
멀린이 약을 다 바르고서 옆으로 살짝 물러섰다. 약이 효과가 좋은지 심한 충격이 있던 뼈와 근육이 시원해졌다.
“내상은 영약으로 해결할 수 있겠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에 어제 가져왔던 영약 상자와 똑같은 것을 내려놓았다.
“머리가 멍하다고 해서 좀 비율을 조절했어. 어제보다는 훨씬 덜 할 거야.”
라온이 상자를 열었다. 어제보다 조금 순해진 냉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조절하긴 했네.’
불혼수를 더 넣었어.
모양새를 보니, 냉기를 낮추고, 불혼수를 더 많이 넣은 것 같다. 어제 양과 오늘의 양을 합치면 정신이 몽롱해져서 멍하다는 기분 자체가 안 들 것이다.
“그리고.”
멀린이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얀 손 위로 푸른 빛이 돋아나며 투구 하나가 떠올랐다.
두 개의 뿔과 마름모꼴의 칼날 비늘, 뒤편에 뻗어 나온 하늘색 갈기까지. 모를 수가 없는 형태의 투구였다.
“용의 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