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88화 (288/653)

제288화

계란으로 바위 치기.

사이한 기운이 상단전의 벽을 두드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그저 속담으로만 알고 있는 그 말을 실제로 보는 것 같았다.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너무 약하잖아.’

불혼수의 농도 조절을 실패한 건가?

몸속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림자에 스며든 듯 은밀하게 움직여서 상단전을 공격하는 사이한 기운은 불혼수밖에 없다.

다만 멀린이 무언가 실수를 했다고 느껴질 정도로 영약에 깃든 불혼수의 기운이 허약했다.

나뭇가지로 철제 방패를 수천 번 두들겨도 의미 없듯이 자신의 정신력은 이 정도로 절대 뚫리지 않는다.

‘라스랑 처음 만났을 때만도 못하네.’

라스가 보자마자 몸을 강탈하겠다고 달려들었을 때보다도 못한 수준의 정신 공격이라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니라.

라스가 얼음꽃 팔찌 위로 스멀스멀 올라왔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본왕의 분노와 냉기를 견딘 네놈이 저딴 기운에 진다면 본왕은 혀 깨물고 죽었을 것이니라.

녀석은 팔뚝에 앉은 채로 코웃음을 흘렸다.

‘맞는 말이야.’

라온이 라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혼수의 문제가 아니라….’

내 정신력이 너무 강해진 거였어.

전생의 삶 덕분에 강해진 정신력이 불의 고리를 통해 증폭했고, 라스를 만나며 한층 더 성장했다.

지금 자신의 정신력을 꺾을 약물 따윈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한숨 자도 되겠는데.’

불의 고리를 운용하지 않고, 잠이 들어도 불혼수의 기운은 자신의 정신을 뚫지 못한 채 힘이 다해서 사라질 것 같았다.

‘그렇게 아까운 짓을 할 필요는 없지.’

라온은 아직도 옆에서 어깨를 맞대고 있는 멀린에게 문을 가리켰다.

“연공해야 하니까. 혼자 있게 해줘.”

“얼마든지. 난 기다릴 줄 아는 여자니까.”

멀린은 눈동자에 묘한 열기를 담은 채 어깨를 쓸어내린 뒤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지.’

워낙에 기묘한 공간이라 제대로 기척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지금까지 본 멀린의 성격이라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물론 호법이 아니라, 감시를 위해서.

“후우.”

라온이 눈을 감고,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다. 고리가 일으키는 장대한 울림이 전신으로 퍼지자, 불혼수의 기운이 움찔거리며 멈춰 섰다.

화아아아아!

불혼수의 기운이 미꾸라지처럼 도망치려 할 때 만화공을 일으켜서 빠져나갈 마나회로를 차단했다.

‘어디 볼까.’

겁에 질린 듯 떠는 불혼수의 기운을 살펴보았다. 껍데기 자체는 사이하지만, 그 안에 있는 마나의 순도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났다.

‘정화만 시키면 충분히 흡수할 수 있겠어.’

7성에 이른 불의 고리를 공명시킨다면 불혼수의 사이한 기운 따위야 손쉽게 지워버릴 수 있다.

영약에 있는 기운 대부분은 냉기였기 때문에 불혼수의 순도 높은 기운을 만화공으로 전환하면 균형도 맞을 것 같았다.

라온은 미소를 지으며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운용했다. 일곱 개의 고리에서 일어난 청아한 기운이 불혼수의 사기를 정화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고리가 더 큰 울림을 터트릴 때마다 불혼수의 어둑한 껍질이 벗겨지고, 그 안에 깃든 순수한 마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더 뛰어나군.’

불혼수의 음습한 기운 안쪽에 깃든 마나는 예상한 것 이상으로 순도가 높았다. 이대로 받아들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고오오오오!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사기를 벗겨낸 마나를 만화공의 흐름대로 이끌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이함으로 가득 찬 마나는 상서로운 열기를 간직한 채 단전으로 스며들었다.

‘후.’

라온이 더운 숨을 내뱉었다. 불혼수의 기운을 만화공으로 만들었으니, 이젠 영약에 가득했던 냉기를 글래시아의 기운으로 바꿀 차례였다.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

영약의 장점들만 조화시켰다고 해도 냉기에는 꽤 많은 불순물이 끼어 있었다. 이걸 전부 다 받아들이면 오히려 손해다.

우우우우웅!

다시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주먹보다 더 큰 냉기를 깎고, 또 깎으며 더러운 기운을 모조리 녹여버렸다. 남은 건 날것처럼 순도 높은 냉기뿐.

주먹만 했던 냉기가 손톱만큼 작아졌지만, 이거면 충분하다. 이 작은 힘이 큼지막한 냉기보다 더 뛰어난 위력을 가졌으니까.

라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서 정제한 냉기를 글래시아의 구결대로 운용하여 단전에 안착시킨 후 눈을 떴다.

“후우….”

고개를 들어 창문을 보니, 태양이 사라지고,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짧게 느껴졌지만, 반나절 이상 지나간 것 같았다.

-느리구나. 느려.

라스가 얼굴을 들이밀며 혀를 쯧쯧 찼다.

-본왕이었다면 그딴 영약 1분 만에 소화시켰을 것이니라. 그 안에 깃든 더러운 것조차 모조리.

녀석은 한심하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네놈의 심계는 인정한다만 무력은 아직 멀었느니라.

‘알고 있어.’

라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의 말대로 무력 면에서는 한참 부족하다.

이번에도 강자들의 틈 사이에 껴서 아무것도 못 하지 않았던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멈출 새 없이 계속 실력을 갈고닦아야 했다.

‘고맙다.’

라스 덕분에 멀린의 정신 공격도 버텨낼 수 있었고, 냉정하게 조언해준 것도 고마워서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뭐, 뭐야!

라스는 어깨를 파르르 떨며 뒤로 황급하게 물러섰다.

-방금 그 말! 무슨 뜻이냐!

‘뭐가?’

-본왕에게 왜 저주를 내린 것이냐!

‘저주라니, 나는 정말 고마워서….’

저주 같은 게 있을 리가 있나. 정말 고마웠기에 고맙다고 했을 뿐이었다.

-취소해라! 네놈 같은 악귀가 고맙다는 소리를 할 리가 없지 않느냐!

라스는 취소하지 않으면 달려들 것처럼 이를 갈았다.

-빨리!

‘하, 취소할게.’

-후우!

라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본왕이라고 항상 노는 게 아니니라. 네놈에게 배운 게 많으니, 그런 저주 따위는 통하지 않느니라.

라온은 서글픈 눈으로 라스를 보았다. 대체 저 마왕의 머릿속에 자신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진짜….’

라스에게 오해라고 말하려 할 때였다.

[<불의 고리>의 성취가 상승했습니다.]

[<만화공>의 성취가 상승했습니다.]

[<글래시아>의 성취가 상승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5포인트 상승했습니다.]

멀린이 준 영약을 흡수하여 연공법의 성취가 오르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능력치가 상승했다는 메시지였다.

-저, 저주! 본왕에게 내린 저주를 거두지 않았구나!

‘…….’

-수강생에게도 능력치를 뺏어가다니, 이 지독한….

라스는 이제 모든 것이 자신의 의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다.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 방문이 열렸다.

“끝났어?”

멀린이 소매를 살짝 걷으며 들어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지켜보고 있었군.’

라온이 멀린의 들뜬 눈동자를 보며 볼 안쪽을 씹었다. 연공이 끝나자마자 들어온 걸 보면 예상대로 방문 앞에 있던 게 분명했다.

“이런 영약을 주다니, 무슨 속셈이지?”

라온이 속마음을 감추며 눈매를 좁혔다.

“말했잖아. 난 항상 널 생각하고 위할 뿐이야.”

멀린은 농염한 목소리를 흘리며 옆에 바싹 붙었다. 라온의 소매에 삐죽 나온 실을 만지작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연공을 오래 해서 그런지 머리가 좀 멍해. 쉬게 해줘.”

라온은 인상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만졌다. 불혼수에 당한 사람은 머리가 멍해지는 게 특징. 상단전의 벽이 깨져서 정신 공격에 완벽하게 노출된 상태를 연기했다.

“조금 멍하다고?”

“그래.”

“냉기의 영약을 듬뿍 담았으니까. 그럴 수도 있어.”

멀린이 조금 더 옆으로 다가와 눈을 마주쳤다. 가늘어진 그녀의 눈을 보며 루난처럼 눈동자에 힘을 풀었다.

“흐음.”

멀린이 손가락으로 가면의 입술을 살짝 문질렀다.

“내일 하나 더 먹는 게 좋겠는데?”

“뭐? 또?”

라온은 심장이 뛰는 것 억지로 누르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게 생각대로 될 수가 있나?’

혹시나 하나를 더 줄지도 몰라서 일부러 머리가 조금 멍하다고 하고, 눈동자에서도 약간만 힘을 풀었는데, 그게 그대로 먹혀들었다.

“그래. 딱 하나만 더. 이번엔 양을 조절해줄게.”

멀린이 뭔지 모를 꽃향기를 흘리며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걸 또 준다고?

라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대체 왜 또 주는 것이냐! 인질로 잡은 놈에게 왜 자꾸 영약을 주냐고!

녀석은 이유를 모르겠다며 강의를 해달라고 외쳤다.

“싫어?”

“하아, 알겠어.”

부탁이나, 명령을 잘 따르는 것도 불혼수의 특징이었기에 못 이기는 척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잘 듣네. 착해.”

“내 처지를 알고 있을 뿐이야.”

라온은 머리를 쓰다듬는 멀린의 손을 쳐내고 고개를 돌렸다.

‘얘도….’

호구 같은데?

*     *      *

창문 하나 없는 직사각형의 작업실. 천장에서 내려오는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책상 앞에 앉은 채 반지나, 팔찌, 목걸이 같은 악세서리를 세공하고 있었다.

모두 극도로 집중하고 있는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 가장 앞에 있던 백발의 노인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완성됐다.”

그는 직접 만든 붉은색 반지를 가지고, 작업실 중앙에 있는 데닝로즈에게 가져갔다.

“음!”

데닝로즈는 외눈 안경을 낀 채로 반지를 살피고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장 카롤의 실력은 여전하네요. 은퇴를 너무 빨리하신 거 아니에요?”

“흥. 당연히 실력이야 그대로지. 벌어둔 돈을 쓰지도 못하고 죽을 것 같아서 은퇴했을 뿐이다.”

“고마워요. 아저씨.”

“그런 소리 말거라. 네게 도움 받은 것들은 이런 걸로 메우지 못하니까.”

카롤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굉장히 급한 일인 모양이지? 이들을 전부 부를 정도면.”

그는 뒤편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전부 얼굴만 봐도 이름이 튀어나올 정도로 유명한 아티팩트 장인들이었다.

“예. 꼭 구해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데닝로즈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수단을 다 써서라도.’

라온은 데닝로즈라는 개인의 목숨만이 아니라, 그란세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구해준 영웅이다.

10사도와 멀린이라는 괴물들 앞에서도 밀리지 않은 채 마지막까지 홀로 희생하려 든 그 남자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암시장의 네 번째 후계자 자리를 버릴 수도 있었다.

‘무조건 구해야 해.’

암시장 지부장으로 일하며 수많은 영웅을 보고 만났지만, 라온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 강대한 무력 이상으로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칠 사람을 죽게 놔둘 수는 없다.

‘꼭 구할 수 있어.’

지그하르트에 라온의 위치를 잡을 수 있는 목걸이가 있다고 했으니, 그것과 이 추적용 아티팩트가 있다면 그 위치가 어디라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음, 그럼 아직 떠날 때가 아니로군.”

카롤는 데닝로즈의 떨리는 손을 보고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같은 물건을 만들어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감사해요. 보상은 충분히 드릴 게요.”

“그럼 내가 공짜로 일할 줄 알았냐.”

그는 옅은 미소를 짓고서 두 번째 작업을 시작했다.

데닝로즈는 카롤이 준 반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말씀을 드려야겠지.’

누구보다 라온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작업실을 나갔다. 그런데, 윗층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비서가 다급한 얼굴로 찾아왔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     *      *

광풍단은 데닝로즈가 그란세빌 근처 마을에 마련해준 숙소 로비에 모여 있었다.

“대체 언제 완성되는 거지?”

어깨에 두꺼운 붕대를 칭칭 감은 마르타가 소파 손잡이를 말아 쥐었다.

“너무 오래 걸리는 거 아니야?”

불안한지 그녀는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데닝로즈 님도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계실 거다. 침착하게 기다려.”

버렌은 양손을 모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다만 그도 긴장이 되는 건지 드물게 다리를 떨고 있었다.

“…….”

루난은 구석에 박힌 채 말없이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검사들과 달리 치료를 받지 않아서 여전히 손과 손톱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하아….”

“이틀이 지난 건가….”

“빌어먹을!”

“방법이 없다는 게 답답해 죽겠어.”

광풍단 검사들은 이곳저곳에 붕대를 동여맨 채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뭐든 하고 싶지만, 방법이 없고, 힘이 없다는 것에 절망하고 있었다.

쿵!

점차 광풍단원들의 말이 줄어들 때 숙소 문이 열리고 데닝로즈가 들어왔다.

“추적용 아티팩트가 완성됐어요!”

그녀는 광풍단원들 앞으로 달려와 손에 든 반지를 내밀었다.

“대륙추종향을 늘리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이제 빠르게 늘어날 거예요!”

그간 마음고생을 많이 한 듯 데닝로즈의 안색은 광풍단 만큼이나 창백했다.

“이제 바로 추적을 시작….”

“나도.”

루난이 손을 들어 올렸다. 피로 물든 손톱이 눈에 확 들어왔다.

“나도 갈게요.”

그녀는 추적에 동참하겠다는 듯 눈에 힘을 주었다. 보라색 눈동자 속에 강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나도 갈 거야.”

마르타가 구멍 난 어깨를 부여잡은 채로 데닝로즈 앞에 섰다.

“뒈지더라도 거기서 뒈지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깃든 열기는 꺾이지 않을 정도로 뜨거웠다.

“무리하실 필요 없어요. 이미 대륙에서 제일가는 전문가들을 섭외해놨어요. 바로 출발시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부탁드립니다!”

“저희도 가게 해주세요!”

“라온과 도리안을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싸우지는 못하더라도 둘을 찾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예. 제발 돕게 해주세요!”

루난과 마르타만이 아니라, 광풍단 검사들 모두가 일어나서 데닝로즈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음….”

데닝로즈가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섰다.

‘마음은 알지만….’

이들은 라온과 도리안이 납치당할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들을 저주하고 있었다. 무력한 본인들에게 실망한 사람들이기에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부장님을 곤란하게 하지 마.”

버렌이 한숨을 내쉬며 검사들의 앞을 막았다.

“추적술의 전문가들이 있다는데 우리가 껴봐야 방해일뿐이다.”

“라온과 도리안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데,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난 갈 거야.”

“우리는 지금 짐이야! 그것도 무거운 짐!”

“그 말이 맞아.”

갑작스럽게 들려온 경쾌한 목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간다.

“어…?”

“이 목소리….”

“다, 단주님!”

“오랜만.”

리메르. 붉은 머리를 질끈 동여맨 그가 문에 어깨를 기댄 채로 손을 흔들었다.

“많이도 다쳤네.”

그는 짧게 혀를 차며 광풍단 앞에 섰다.

“다, 단주님이 어떻게 여기에….”

“너희들이 있는데 당연히 와야지. 오랜만에 차원문을 타서 멀미를 좀 했지만 얼굴들을 보니 좋네.”

리메르는 세 조장부터 시작해 검사들의 얼굴을 차례로 살핀 후 고개를 끄덕였다.

“버렌의 말이 맞아. 추적은 추적술의 달인에게 맡겨야지. 너희는 도움이 안 돼. 시간 낭비야.”

그의 날카로운 음성에 광풍단이 고개를 푹 숙였다.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이 그들의 가슴에 깊게 박혔다.

“다만 이대로 있을 수 없는 것도 맞지.”

리메르가 입매를 말아 올렸다. 평소 연무장에서 보여주는 따스한 미소였다.

“너희가 할 일은 추적이 아니라, 검을 드는 거다. 전투태세를 갖춰라.”

“싸, 싸울 준비요?”

“저희는 10사도에게 아무것도 못 했어요.”

“머, 멀린과 10사도가 싸울 때도 끼어들지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라온에게 모든 짐을 떠맡겼다구요!”

“노력했는데, 정말 죽을 만큼 노력했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광풍단은 지금까지 가슴에 쌓아두기만 한 감정을 내뱉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너희는 너희의 싸움을 준비해. 괴물은 괴물이 잡을 테니까.”

리메르의 눈동자가 무저갱을 담은 듯 어둑한 빛으로 가라앉았다.

“지그하르트가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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