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7화
수련생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도리안이 대륙에 떠도는 소문과 사건에 대해 주절거린 적이 있었다.
워낙에 말이 많은 녀석이라 이런저런 잡설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때 나름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를 꺼내놓았다.
새롭게 등장한 에덴의 괴물. 안구가 황금빛 불꽃으로 타오르는 데스나이트의 투구를 쓴 괴인이 오웬 왕국의 기사단 하나를 단신으로 전멸시켰다는 이야기였다.
에덴의 귀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 고개를 끄덕일 때 녀석은 놀라운 소식 하나를 추가로 말해주었다. 그 기사단의 이름이 청마 기사단이라는 걸.
청마 기사단은 오웬 왕국의 전통 있는 기사단 중 하나이며 그 기사단의 단장은 그랜드 마스터의 위에 오른 패론 후작이었다.
오웬 왕국의 국왕은 직접 검을 뽑아 들고, 데스나이트의 투구를 쓴 귀신을 찾았지만, 놈은 그대로 사라져다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들은 홀로 패론 후작을 베고, 청마 기사단을 전멸시킨 데스나이트의 투구를 쓴 괴인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담아 절혼검이라는 이명을 붙였다.
라온은 데스나이트의 투구를 쓴 채로 진혼검을 막은 검사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놈이 그 절혼검인가.’
투구 속 안구는 선명한 황금빛 불꽃을 태워냈고, 갑주는 새하얀 백골이었으며, 호리호리한 체형에 키가 컸다. 도리안에게 들었던 소문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외형이었다.
‘거기다….’
처음에는 있다는 것조차 몰랐지만, 모습을 드러내자 오싹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투기와 사기를 풍겨낸다. 이 남자 역시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초고수였다.
끼기기긱!
라온이 장검에 막힌 진혼검에 조금 더 힘을 주며 절혼검의 눈을 살폈다.
검을 겨누고 있음에도 그의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없다. 분노, 의문, 당황, 기쁨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다 타고 재가 된 땔감처럼 텅 비어 있었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지?”
“…….”
질문을 해도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무감정한 눈빛으로 그저 이쪽을 바라만 보기만 했다.
“당신이 절혼검인가?”
“…….”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절혼검을 꺾는 건 무리였기에 일단 진혼검을 물렸다.
스르릉.
절혼검도 기다렸다는 듯 장검을 검집에 납검했다.
‘이놈 언제부터 있었어?’
-네놈이 깨어나기 전부터 와 있었느니라.
‘감시자인 모양이군.’
라온이 옅은 숨을 뱉었다. 왜 무기와 아티팩트를 가져가지 않았나 했더니, 멀린은 절혼검을 감시로 붙인 것 같았다.
‘뭐, 좋아.’
라온이 피식 웃으며 제복을 입었다. 어차피 에덴의 목적은 투구를 씌우는 거다. 그때까지는 죽이지 않을 테니,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옷을 다 입고, 검을 착용하고 있는데도 절혼검은 움직이지 않고, 그저 지그시 자신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저놈도 그 여자 같은 건가?
‘그 여자?’
-얼굴 바보 있잖느냐.
‘아….’
라스가 말하는 사람은 엔시아다. 존잘이라고 외치는 엔시아와 멍하니 얼굴만 보는 절혼검을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저건 그냥 감시야.’
-흐음, 뭔가 좀 다른데….
라스는 뭔가 좀 아닌 것 같다며 입맛을 다셨다.
‘그럴 리가 있나.’
라온이 진혼검까지 허리에 찼을 때 문이 열리고, 멀린이 들어왔다.
“이제 일어났…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멀린의 다정했던 목소리는 절혼검을 본 순간 차갑게 가라앉았다.
“…….”
절혼검은 멀린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고, 라온만을 바라보았다.
“그런가.”
멀린은 코웃음을 치고서 절혼검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가.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
절혼검은 아주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밖으로 나갔다.
“옷을 새로 가져왔는데, 그 더러운 걸 또 입었어?”
멀린은 손에 들고 있던 옷을 내밀었다. 절혼검을 대할 때와는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따스한 목소리였다.
“저 남자가 절혼검인가?”
“맞아. 잘 알고 있네.”
“네가 감시로 붙여놓고, 왜 화를 낸 거지?”
라온은 소름이 돋아 오를 정도로 분위기가 변한 멀린을 보며 눈썹을 살짝 내렸다.
“감시로 붙인 적 없어.”
멀린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 녀석은 원래 이곳저곳 맘대로 돌아다니거든. 신경 쓰지 마.”
그녀는 전혀 의미 없는 존재라며 가면 속에서 웃음을 흘렸다.
“감시도 안 붙였다? 내가 저곳으로 도망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지?”
라온이 벽에 붙은 네모난 창문을 가리켰다. 햇살이 들어오는 창문은 꽤 큼지막해서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었다.
“도망이라….”
멀린은 매끄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해도 돼.”
그녀는 정말 원하는 대로 하라는 듯 창문을 가리켰다.
‘뭔가가 있군.’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여유로울 리가 없었다.
“광풍단은 어떻게 됐지?”
“약속대로 안 건드렸어.”
멀린은 관심도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가지고 온 검은색 옷을 침대맡에 내려놓았다.
‘음….’
저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았지만, 10사도를 생각하면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분노한 놈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으니까.
라온은 그들이 무사하기를 바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 그 옷엔 피가 묻었잖아.”
“필요 없어.”
“그래? 그럼.”
멀린이 손가락을 튕기자, 제복에 가득했던 핏물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찢어진 곳도 바느질한 듯 깔끔하게 메워졌다.
“따라오렴. 왜 널 감시할 필요가 없는지 알려줄 테니까.”
멀린은 오래된 친구 혹은 아이를 대하듯이 말하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
‘따라가야겠지.’
잡혀 온 건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라온은 깊게 숨을 내쉬고서 멀린의 뒤를 따라갔다. 문을 넘어서자마자 풍경이 변한다.
따스한 느낌을 주던 통나무집이 사라지고 차디찬 검은색 복도가 나타났다.
“여긴….”
“얼마 전에 새로 연 에덴의 지부야. 지부지만 본단 수준으로 규모가 크지.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 손 잡을까?”
멀린은 방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
라온은 그녀의 손을 무시하고 조금 뒤에 섰다.
“하긴 고분고분하면 매력이 없지.”
멀린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우우웅!
단단하고 차가워 보이는 벽에서 여러 종류의 문이 나타나고 사라지며, 가지각색의 투구와 가면을 쓴 에덴의 귀신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들은 멀린만이 아니라, 라온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저들이 왜 나한테 인사를 하는 거지?”
“이곳에도 계급이라는 게 있으니까. 넌 내 직속이야. 시작부터 7성이지.”
멀린은 들뜬 웃음소리를 흘리며 복도의 끝으로 향했다.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어둠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
통나무집에서 보았을 때와 달리 하늘은 껌껌했고, 샛노란 달이 떠 있었다.
‘결계인가.’
시간이 뒤틀린 공간인 것 같았다. 고개를 내려 다른 건물들을 보았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 설계된 북방의 건물과 비슷하지만 좀 더 고풍스러운 양식이다. 벽면과 천장이 얇은 걸 보니, 지그하르트보다는 남쪽인 것 같았다.
건물들 뒤로는 황량한 대지가 보인다. 저 멀리 도시 같은 게 보이지만, 너무 멀어서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었다.
“여기는 어디지?”
“뒤를 돌아봐.”
라온은 멀린의 손짓을 따라 뒤를 돌았다. 조금 전 나온 신전 같은 건물 뒤로 거대한 도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곳도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지만, 모를 수가 없는 도시다. 하분 성에 가기 전에 들렸던 교역도시 카멜룬이었다.
“설마 여기는….”
“그래. 카멜룬 바로 아래야.”
멀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던 답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미친….”
카멜룬은 지그하르트와 오웬 그리고 발카르 셋의 영역에 속한 중립도시다. 육황 중 셋을 무시하고 이렇게 가까운 곳에 지부를 설치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 셋이 모두 있기 때문이지. 서로 견제들을 해주니 오히려 움직이기 편하거든.”
멀린은 육황끼리 경쟁을 해줘서 편하게 설치할 수 있었다고 중얼거렸다.
“여기라면 내가 도망치기 더 편할 텐데?”
지그하르트는 몰라도 이곳에서 오웬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충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 쉽지는 않을 거야.”
멀린이 손가락을 튕겼다. 하얀 손가락에서 피어난 마나가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장대한 빛을 뿌렸다.
고오오오!
밤하늘 위로 은빛 선이 번지며 이 공간을 둘러싼 거대한 마법진이 드러난다. 태양과 달, 별이 어우러진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지부 전체에 퍼져 있었다.
“이건….”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처음부터 불의 고리를 전력으로 운용하고 있음에도 결계의 묘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마법, 흑마법, 무학, 주술, 투기에 정확히 알 수 없는 기운까지. 해석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흐름이 결계 전체에서 꿈틀거렸다.
‘가진 기운만 다양한 게 아니야.’
결계에 깃든 기운들은 그 흐름이 규칙 없이 마구잡이로 변했다.
5분이 채 지나기 전에 통나무집에서 본, 태양이 달로 변하는 광경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난잡한 흐름이다. 멀린이 감시가 필요 없다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때. 저 결계를 풀고 도망칠 수 있겠어?”
멀린이 눈을 마주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절대 나갈 수 없다는 자신감이 깃든 웃음이었다.
“…….”
라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당장 저 진법을 해석하는 건 무리였으니까.
“거기다….”
멀린이 우측으로 손짓했다. 조금 전에 방에서 검을 맞댔던 절혼검이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옆에 뿔이 달린 뱀의 투구를 쓴 무인도 있었는데, 그랜드 마스터는 아니지만 최소 마스터 중급 수준의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네가 도망치려고 들면 저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저들만이 아니겠지.
저 두 괴물 말고도 마스터급 강자의 기운만 셋이 더 느껴졌다. 힘으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은 벗어날 수 없겠어.”
“생각보다 포기가 빠르네. 뭐, 그것도 나름대로….”
“넌 뭘 착각하고 있군.”
라온이 환희로 차오른 멀린의 눈동자를 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도망칠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어.”
이곳에서 너희들의 힘을 모조리 먹어 치울 생각이니까.
이것 또한 기연. 이곳에서 에덴의 모든 것을 흡수한 뒤 벗어날 것이다.
“아아….”
멀린은 또 한 번 착각한 듯 들뜬 숨을 내뱉었다. 하얀 손을 뻗어서 턱을 쓸어내렸다.
“나와 함께 있고 싶다는 거지? 그래. 난 항상 너와 함께 있을 거야. 언제까지나.”
“헛소리 말고.”
라온이 인상을 찡그리며 멀린의 손을 쳐냈다.
“본론이나 얘기해. 나한테 씌운다는 가면은 뭐지?”
“조금만 기다려.”
멀린이 가면 아래를 살짝 들었다. 그녀는 절혼검과 뱀 투구의 사내를 가리키며 붉은 입술을 말아 올렸다.
“저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보물을 준비했으니까.”
* * *
원형 테이블 위로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냉기의 영약들이 일렬로 놓여 있다.
중앙에는 네모난 상자가 하나 있었는데, 천사 날개와 악마의 뿔이 새겨진 고풍스러운 형태였다.
멀린은 콧노래를 부르며 찬란한 생기를 뿜어내는 영약들을 상자 안에 차례로 담았다. 마지막 영약까지 넣은 뒤 테이블 끝에 놓인 유리병을 들었다.
치이이익.
유리병의 뚜껑을 열어 그 안에서 찰랑거리는 시꺼먼 액체를 영약 위에 뿌렸다.
액체가 영약들에 닿자마자, 악취가 느껴질 정도의 사이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 나왔다.
멀린은 영약의 생기조차 죽이는 탁한 향을 즐기다가 상자를 닫았다.
우우우우웅!
영약과 액체가 뒤섞이며 네모난 상자 안에서 작은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멀린은 영약이 섞여 가는 상자를 보며 진한 눈웃음을 흘렸다.
‘라온 지그하르트.’
역시 사랑스러운 아이야.
라온은 빠져나갈 수 없는 수렁에 갇혔음에도 당황하지 않았고, 조급하게 도망치려 들지도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무엇을 얻어야 할지를 생각하며 훗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본래 무력 이상으로 정신력이 뛰어난 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납치당했음에도 저런 여유를 보여줄 줄은 몰랐다.
‘영암옥을 쓸 가치가 있었어.’
고작 마스터 따위에게 왜 영암옥을 사용하냐는 반발이 있었지만, 납치당한 직후에도 침착한 라온의 그릇을 본 순간 그 선택에 후회 따위는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최고의 결정이었다.
멀린은 천천히 회전을 멈추는 상자를 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물론 그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지만.’
라온은 마스터 하급이면서 마스터 상급. 아니, 최상급 이상으로 정신력이 단단하다.
완성된 투구 속 영혼이라면 그런 정신력이라도 충분히 깰 수 있을 테지만,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이 영약까지 준비했다.
‘한옥단.’
기본적으로는 뛰어난 냉기의 영약들이 어우러져 복용자의 육체와 오러 수준을 크게 올려주겠지만, 진짜는 마지막에 스며든 불혼수였다.
불혼수는 영혼의 통제력을 무너뜨리는 사술의 결정체. 그 사이한 기운이 한옥단의 기운을 빨아먹고, 더 지독한 힘을 발휘할 테니, 라온의 정신력이 아무리 단단하다고 해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티이익!
상자 속에서 울리던 폭풍 소리가 그치고, 뚜껑이 저절로 열렸다. 회색 김 아래에 매끄럽게 다듬어진 둥근 단약 하나가 놓여 있었다.
“라온.”
멀린은 그 단약 깊은 곳에 스며든 불혼수의 기운을 느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더 사랑스러운 아이가 될 때란다.”
* * *
라온은 지부 전체를 돌아보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여긴 또 밤인가?’
신기하게도 이 방은 외부의 시간과 반대로 흐른다. 밖이 밤이면 이곳은 낮이고, 밖이 낮이면 이곳은 밤이었다.
‘웃음도 안 나오는 곳이로군.’
멀린이 단단히 말을 해놓았기 때문인지 에덴의 인원들 중 자신의 발걸음을 막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절혼검이나, 뱀 대가리의 무인도 그저 지켜만 볼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탈출만 하지 않으면 뭘 해도 되는 것 같았다.
-본왕은 이곳이 나름 마음에 드느니라.
라스는 테이블 중앙에 놓인 쿠키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밥과 간식이 맛있느니라. 별관과 거의 동급이다.
‘…….’
이 마왕 놈은 밥만 많이 주면 어딜 가서도 꼬리를 흔들 녀석이다. 나름 좋아졌던 이미지가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너 대체 누가 분노라는….’
그동안 궁금했던 걸 물어보려고 할 때 방문이 열리고, 멀린이 들어왔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으며 어깨를 들이밀었다.
“어때? 지낼 만해?”
“지루한 것만 빼면.”
라온은 담담한 눈으로 멀린을 보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솔직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걱정하지 마. 조금만 있으면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네가 말한 투구를 쓴 이후겠지?”
“물론.”
멀린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더 붙었다. 달큰한 살 내음을 풍기며 작은 목갑을 내밀었다.
“이건….”
“영약이야.”
그녀가 목갑을 열어주었다. 정갈한 기운을 흘리는 푸른빛 영약이 들어 있었다.
“음….”
라온은 영약의 겉이 아니라, 그 내부를 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뭔가를 섞었군.’
겉보기엔 냉기가 깃든 영약 같지만, 저 안에는 정확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사이한 무언가가 스며들어 있었다.
‘정신에 영향을 주는 거겠지.’
10사도는 투구 속에 깃든 영혼이 인간의 혼을 짓눌러서 육체의 통제를 뺏는다고 했다. 그 말대로 생각해 보면 이 영약은 자신의 정신에 좋지 않을 영향을 줄 게 분명했다.
“거절한다면?”
“난 먹여주는 것도 좋아해. 입으로 해줄까?”
멀린이 가면을 살짝 들어 올리며 손가락으로 입술을 훑었다.
“필요 없어.”
직접 먹지 않으면 억지로 먹이겠다는 뜻이다. 그랜드 마스터 둘과 마스터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거부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후.”
라온이 짧게 숨을 내뱉고서, 영약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불의 고리를 믿을 수밖에.’
성자조차 치료하지 못한 혹한의 저주를 깔끔하게 지워버린 일곱 개의 고리를 믿고, 영약을 씹었다.
멀린의 영약은 이에 박히는 순간 액체가 되어 스스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우우우우웅!
불의 고리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영약의 흐름을 통제한다.
영한초, 데룸의 내단, 혈백화, 오지협목 등 고급 영약들이 응집된 순도 높은 냉기 사이로 사이한 기운 하나가 일어났다.
치이이잉!
불의 고리를 운용하지 않았으면 느끼기 힘들 정도로 은밀한 기운은 냉기와 달리 머리 쪽으로 향했다. 뇌가 아니다. 상단전. 영혼이 깃든 그 공간을 파고들었다.
‘역시 정신을 노리는 건가.’
예상한 대로다. 투구를 쓰기 전에 정신력을 먼저 무너뜨리려고 하는 게 뻔했다. 사이한 기운은 스스로를 날카롭게 갈아 영혼의 보호하는 상단전의 방벽을 두드렸다.
쩌엉!
라온은 그 두드림을 느끼고,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뭐야….’
왜 이렇게 약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