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86화 (286/653)

제286화

콰아아아아앙!

10사도가 무시무시한 혈기의 섬광을 일으키며 수백 개의 마법을 단번에 찢어발겼다.

몸 이곳저곳에 상처가 가득했지만, 그의 눈빛은 처음보다 더 짙은 광기로 타오르고 있었다.

“멀린!”

“너무 늦었네. 데이트는 이미 끝났거든.”

멀린은 라온이 봉인된 영암옥을 든 채로 싱긋 웃었다.

“이 미친년이 끝까지!”

10사도는 이를 갈며 백창을 아래로 내뻗었다. 막대한 혈기가 응집된 창격이 멀린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멀린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전신이 별자리처럼 반짝이며 희미해졌다.

“못 도망친다!”

“끈질긴 남자는 인기 없어.”

“닥쳐!”

10사도는 허공을 박차고 직접 공동으로 돌진했다. 지하에서 무시무시한 폭발이 연쇄적으로 터져나왔다.

“으윽!”

도리안은 손을 덜덜 떨며 몸을 일으켰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무너지는 대지를 달렸다.

‘제기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는데….

훈련생 시절부터 라온과 가장 가까이에서 지냈기에 그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라온은 현명하게 위기를 헤쳐 나가는 듯싶지만, 항상 무리를 하고 있다.

본인의 목숨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바보이기에 살 떨리는 걸 참고 숨어있었는데,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부단주님….’

라온은 멀린의 상자에 봉인될 때까지도 자신을 걱정하며 도망치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런 남자였기에 목숨을 버려서라도 도와주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 이게 최선이야.’

배 주머니를 모조리 까뒤집어 보면 저 상자를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의미 없다. 라온이 다시 나온다고 해도 저 둘에게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지금은 라온을 다시 찾을 방법만 생각하고 움직이는 게 최선이었다.

“멀린!”

“허억!”

도리안은 공동 쪽에서 들려오는 10사도의 괴성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 이 다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주저앉아 울고 싶을 정도로 섬뜩한 울림이었다.

‘도, 도망쳐야 해.’

지금 저 괴물에게 걸린다면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라온을 다시 찾을 가능성 자체가 사라진다. ‘그걸’ 전해 줄 수 없으니까.

‘최대한 빨리…아!’

도리안은 10사도에게서 최대한 멀리 도망치려다가 멈춰섰다.

‘이럴 때 움직이지 말라고 하셨었지….’

얼마 전 북망산에서 훈련을 할 때 라온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고수에게 벗어나고 싶을 때는 도망치는 것보다 숨는 게 나아. 마스터만 되어도 너희들의 기척을 잡고 따라잡는 건 일도 아니니까. 반면 숨어서 호흡만 잘 조절하면 살 가능성이 꽤 높지.]

[호흡조절이요?]

[그래. 산이면 야생동물처럼, 사람이 많은 곳이면 그곳에 맞춰서 평범한 사람처럼 움직이면 돼. 가장 중요한 건 긴장을 푸는 거야. 마음을 편하게 먹고 기척을 죽인다면 너희를 찾기란 쉽지 않아.]

라온과 함께 했던 집중력 강화 훈련을 떠올리며 숨을 꾹 조였다. 죽은 사람처럼. 아니, 죽어가는 사람처럼 아주 느리고, 가늘게 호흡하며 벽 아래에 몸을 숨겼다.

‘그 말이 맞아.’

10사도는 그랜드 마스터라고 했다. 자신이 이 도시를 벗어나도 따라올 가능성이 있으니, 죽은 척 숨는 게 훨씬 나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걸 알고 있었을까. 쓸모없다고 생각한 수련이 목숨을 구해주고 있었다. 그에게 또 한 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라온 님은 항상 뒷일을 생각하셨지.’

혹시 모르니까….

배 주머니에서 붉은 액체가 든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 소매 안쪽에 끼워둔 후 입을 틀어막고 조금 더 몸을 숙였다.

콰앙! 콰아아아앙!

분노한 10사도가 이곳저곳을 때려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동안 이어진 굉음이 잦아들고, 광기를 뿌리던 10사도의 기운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후우….”

도리안은 그 이후로 30분이 지난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살이 떨린다. 겁쟁이 주제에 너무 무리했는지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이 도통 가라앉지를 않았다.

“죽겠네.”

제대로 숨을 못 쉬어서 띵한 머리를 부여잡고 광풍단이 있을 곳을 향해 움직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기척을 죽이고, 길을 돌아서 도시 밖으로 향했다.

도시를 막 나가려고 할 때 서른 명이 좀 넘는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못 보던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광풍단이었다.

“조장님들!”

도리안이 튀어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며 버렌에게 달려갔다.

“너 이 자식!”

“이 뚱땡이! 너 어디에 있었어!”

버렌과 마르타가 인상을 찌푸리며 달려왔다. 화를 내고 있지만 두 사람의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크윽!”

도리안이 광풍단의 눈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라, 라온 님이….”

가슴을 두들겨서 꽉 막힌 듯한 숨을 내뱉었다.

“라온 님이 납치되셨어요.”

“…….”

“시발….”

버렌과 마르타는 바닥으로 시선을 던지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빌어먹을!”

“역시 그랬나….”

“10사도와 싸우던 놈. 노파의 가면을 썼잖아. 부단주를 노린다는 멀린이었겠지.”

광풍단도 10사도와 멀린이 싸우는 걸 보고 어느 정도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멍청한 새끼! 그랜드 마스터 둘 사이에서 뭘 어쩌겠다고!”

마르타가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오러 대신 감정을 실은 주먹이 모두의 마음을 울렸다.

“녀석은 또 우리를 살리려고 희생한 거다.”

버렌이 이를 바득 갈았다. 그는 피나도록 주먹을 말아쥐며 고개를 숙였다.

“아…아….”

루난은 그대로 주저앉아서 모은 손을 떨었다. 아예 패닉에 빠진 것 같았다.

“어느 쪽에 납치당했지?”

“에덴의 멀린입니다. 이상한 상자에 끌려 들어갔는데….”

도리안은 직접 보았던 상황을 모두에게 말해주었다.

“하, 하필이면 공간이동을….”

“그럼 찾는 게 불가능한 거 아니야.”

“아니야! 빨리만 움직이면….”

“10사도가 놓쳤잖아. 멀린 정도의 마법사는 공간이동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라온….”

“제기랄!”

광풍단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모두 넋이 나간 듯 눈이 풀린 채로 말을 더듬었다.

“크으….”

“젠장!”

“라온. 그 망할 자식이….”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도 들려왔다.

“차, 찾을 방법은 있어요.”

도리안의 갈라진 목소리에 광풍단의 시선이 환하게 반짝였다.

“방법? 방법이 뭔데!”

주저앉아 있던 루난이 오뚝이처럼 일어나 도리안의 머리를 잡았다.

“도리안!”

“빨리 말해! 빨리!”

“입부터 열라고!”

광풍단이 모조리 달려들어 도리안의 멱살과 어깨, 팔을 붙잡았다.

“아, 좀 놓고!”

도리안이 뒤로 물러선 후에 주머니에서 붉은 액체가 든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유리병?”

“그게 뭔데?”

“뱀꼬리홍작화를 으깬 액체에요.”

그는 유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아주 은은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대륙추종향!”

광풍단 사이에 끼어있던 장미 안대를 낀 젊은 여성이 비명을 질렀다.

“대륙추종향을 뿌리신 거군요!”

“어? 이분은….”

도리안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암시장 지부장인 데닝로즈님이다. 일단 설명부터 해.”

“아, 저분 말대로 이건 대륙추종향이라고 하는 건데, 한 번 뿌리면 북쪽에 있는 지그하르트에서 남쪽에 있는 로베르트 가문까지도 맡을 수 있다고 하는 추적용 액체에요.”

“그, 그럼 너….”

“설마!”

“네. 라온 님이 상자에 들어가기 전에 이 액체를 뿌렸어요.”

도리안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리안.”

“너 이 자식!”

“이 겁쟁이 녀석이 웬일로!”

루난과 버렌, 마르타가 도리안을 얼싸안았고, 광풍단도 희망을 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거 냄새가 거의 안 나는데? 쫓을 수 있어?”

“강한 냄새는 빨리 사라지는 법이니까요. 특별한 아티팩트가 있어야 이 향을 맡을 수 있어요.”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배 주머니에서 반지를 하나 꺼냈다. 가운데 붉은 보석이 박힌 아티팩트였다.

“이 반지를 끼면 이 뱀꼬리홍작화의 냄새를 맡을 수 있어요. 즉, 라온 도련님이 어디에 있든 찾아갈 수가….”

“그랬군.”

등 뒤에서 들려온 서늘한 음성에 등골에 오싹한 소름이 지나갔다.

경악이 담긴 광풍단의 동공 속에 10사도의 모습이 비쳐있었다.

“허억!”

도리안은 재빠르게 추종향과 반지를 배 주머니에 넣었다. 바로 도망치려 했지만, 목부터 몸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손이 움직이지 않기 전에 재빨리 소매를 털었다.

“너는 나와 같이 가야겠다.”

10사도가 석상처럼 멈춘 도리안의 목덜미를 잡아 올렸다.

“안 돼!”

“죽어!”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루난과 마르타다. 둘은 단숨에 검을 뽑아 들고, 10사도를 향해 돌진했다.

터어엉!

10사도가 손을 저었다. 가볍게 내리친 손날에서 피어난 혈기가 두 사람의 심장을 노렸다.

“이 자식!”

“흡!”

루난이 눈이 돌아간 마르타의 앞에 서리의 벽을 일으켰다.

쩌어어엉!

강맹한 혈기가 서리의 벽을 사정없이 깨지고, 루난이 피를 토하며 뒤로 튕겨 나왔다.

“크윽!”

마르타는 계속 가라는 듯한 루난의 눈을 보고 광폭화를 일으켰다. 가진 오러를 모조리 폭발시키며 검을 내리찍었다.

터엉!

10사도가 손가락을 튕겼다. 검지에서 뻗어 나온 혈기의 선이 마르타의 검을 깨부수고 그녀의 어깨를 뚫어버렸다.

“개진! 죽어도 막아!”

버렌과 광풍단이 혀를 씹으며 달려들었다.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익힌 절기를 극성으로 펼쳐냈다.

“귀찮게 구는군.”

10사도가 손을 뻗었다. 손아귀에서 일어난 혈기의 파동이 광풍진을 단숨에 깨부쉈다. 검사들은 모조리 피를 토하며 바닥에 처박혔다.

“흐으윽….”

마르타는 상처를 생각도 안 하는 듯 입술을 깨물며 검을 세웠다. 찢어진 제복 사이로 낡아 빠진 물방울 목걸이가 흔들렸다.

“너, 너는 내가 죽여! 라온도, 도리안도 못 줘!”

그녀가 악을 지르며 검을 내뻗었다.

터억.

10사도는 힘없이 내려오는 마르타의 검을 잡은 채 그녀의 목걸이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그랬군. 그때의.”

“크흑….”

그는 짧게 혀를 차고서 손가락을 튕겼다. 마르타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바닥을 굴렀다.

“라온도, 이놈도 잊어라.”

10사도가 손을 털자, 그의 발밑에 붉은 웅덩이가 돋아났다.

“그게 너희가 살길이니까.”

그 말이 다 끝나기 전에 그와 도리안이 웅덩이 속으로 가라앉았다.

“아아아악!”

루난이 악을 지르며 기어와 10사도가 사라진 곳의 땅을 맨손으로 두드렸다. 손에서 피가 나고, 살이 뜯겨나가도 멈추지 않았다.

“크흐윽….”

버렌이 입에서 흐르는 피를 훔치며 루난의 옆에 붙었다. 그 역시 정신을 놓은 것처럼 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도리안….”

“도리안!”

“개새끼들이!”

기절한 마르타를 제외한 다른 광풍단 검사들도 옆에 붙어서 땅을 내리치고, 두드렸다.

데닝로즈는 땅을 내리치는 그들을 보다가 우측에서 굴러오는 유리병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잠시만요!”

그녀는 유리병을 주운 채 모두를 불렀다.

“이게 있으면 그분을 찾을 수 있어요!”

“하, 하지만 반지는….”

“저희도 대륙추종향을 이용해요. 이 향기만 있으면 추적용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어요!”

10사도의 손에 들어갔던 대륙추종향이 왜 이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있으면 충분히 추적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낼게요.”

데닝로즈의 외안이 선명한 빛으로 번쩍였다.

“암시장주의 네 번째 후계자의 이름을 걸고.”

*     *      *

도리안이 눈동자를 굴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는….’

먼지 하나 없는 새하얀 방과 피를 칠한 듯한 붉은 기둥 그리고 그 위에 세워진 고귀해 보이는 단상까지. 눈치 없는 자신도 이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10사도는 방의 중심에 선 뒤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을 뵙습니다.”

‘끄흡!’

불길한 생각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사도가 사부라 부르는 인물은 딱 하나. 이 기괴한 방의 주인은 살면서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던 백혈교주였다.

화아아.

단상을 가리고 있는 붉은 발 뒤로 여성의 굴곡이 도드라진 그림자가 피어났다.

분명 아무런 힘의 작용도 없었거늘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그녀의 존재감이 갑작스럽게 드리웠다.

‘이건….’

마비된 턱이 떨리는 것 같다. 글렌의 패기와는 결이 다른 신비함이 방 전체로 퍼져 나왔다.

붉은 발로 모습을 가리고 있음에도 이런 분위기를 낼 수 있다는 게 경악스러웠다.

“일곱째는 혈신의 품으로 돌아갔구나.”

발 안에서 따스하다는 느낌이 드는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기쁨과 슬픔, 다정함과 경멸이 한곳에 어우러진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10사도는 눈을 내리감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할 일이 있나. 그 아이가 못났을 뿐이지. 혈신께서는 그런 아이도 품어주실 테니 신경 쓰지 말라.”

백혈교주의 음성에는 웃음기가 깃들어 있었다. 제자가 죽었음에도 웃음을 짓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 공포스러웠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후우, 제가 그를 찾았을 때….”

10사도는 눈을 뜨고, 그란세빌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멀린. 멀린이라. 또 방해를 하는구나.”

백혈교주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얕은 짜증과 분노가 스며들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누구지?”

“라온에게 대륙추종향을 뿌렸고, 추적할 수 있는 아티팩트가 있다고 하기에 데려왔습니다.”

“아티팩트?”

“예. 저 배 주머니에 있는데 꺼낼 수가 없습니다.”

10사도가 도리안의 배 주머니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특별한 아티팩트로 보입니다.”

“재밌구나.”

백혈교주가 발 안에서 부드럽게 손짓을 하자, 도리안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그는 끈이 달린 것처럼 단상으로 끌려갔다.

‘히이이익!’

도리안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심장이 꾹 조여져서 당장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부, 분명 죽겠지. 그래도….’

반지를 넘겨줘선 안 돼.

지금까지 라온에게 받은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절대 반지를 넘겨줘선 안 된다. 소매에 있던 추종향을 남겨두고 왔으니, 다른 추적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을 거다.

모두가 라온을 구해줄 테니, 자신은 이곳에서 버텨야 했다.

터억!

도리안은 떠오를 때처럼 부드럽게 단상 앞에 내려앉았다. 10사도에게 막혀 있던 마나회로도 뚫렸는지 팔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나를 죽이면 주머니는 열리지 않아! 절대로 반지는….”

“고생 많았겠구나.”

“어…?”

바로 고문을 시작할 거라 예상했지만, 백혈교주에게서는 보드라운 음성만 흘러나왔다.

“그런 전쟁터에서 주인을 돕기 위해 몸을 숨기고 있었다니, 장해.”

붉은 발 속에서 손이 뻗어 나왔다. 소름이 돋아 오를 정도로 새하얗고 아름다운 손이 먼지로 가득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따스함과 부드러움에 턱이 덜덜 떨렸다.

“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고 있단다.”

“으으, 그래봐야… 아!”

소용없다고 말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리다가 작게 열린 발 속의 흑안을 마주했다. 어둠을 그대로 담아낸 듯한 눈동자를 본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이대로 있다간 네 주인의 혼은 짐승보다 못한 몬스터의 먹이가 될 거야.”

“그건….

“반지를 내게 주렴.”

백혈교주가 도리안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네 주인을 찾아서 더 높은 곳에 오르게 해주마.”

“어….”

도리안은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고서 배 주머니에서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를 꺼내 백혈교주에게 내밀었다.

“고맙구나.”

백혈교주의 손짓에 도리안이 옆으로 픽 쓰러졌다.

“새로운 제자를 구하는 길은 꽤 재밌을 것 같구나.”

그녀는 빨갛게 빛나는 반지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그리운 얼굴들을 볼 수 있겠어.”

*     *      *

비연회주 채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다급한 걸음으로 알현실을 향했다. 본래라면 노크를 하고 기다려야 하지만, 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비연회주?

“채드 님?”

리메르의 멱살을 쥐고 있던 셰릴과 그 뒤에서 미소를 짓던 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 나 구하러 왔어?”

리메르는 멍든 눈으로 손을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한시가 급한 일이라!”

채드는 세 사람에게 대답하지 않고, 글렌이 보이는 중앙에 무릎을 꿇었다.

“그란세빌 암시장으로부터 급보입니다. 과, 광풍부단주가 에덴의 멀린에게 납치당했다고 합니다!”

채드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을 했다.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몰라서 긴장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고오오오오!

장난기로 범벅이 된 리메르의 눈동자가 삽시간에 귀신처럼 번뜩이고, 셰릴의 눈빛에 짙은 살의가 드러났으며, 로엔 주변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세히.”

글렌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와 같은 냉정함을 두른 얼굴이었지만, 그래서 더 두려웠다.

“자세히 말해 보라.”

“아, 예. 광풍부단주는 그란세빌 전역에 진법이 설치되었다는 걸 알고서….”

채드는 데닝로즈가 보낸 서신을 최대한 간략하게 요약해서 보고했다.

“에덴. 이 쓰레기 새끼들이….”

“가만히 놔두니까. 천지가 제집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너무 오래 살려둔 모양이군요.”

리메르와 셰릴, 로엔이 일으키는 기파가 강해진다. 세 사람의 분노가 알현실을 뒤흔들고 있었다.

“채드.”

“예, 예….”

글렌의 덤덤한 목소리에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세 사람보다 더한 분노가 느껴졌다.

“라온에게 준 휘석의 반응은?”

“찾아보았는데, 허공과 바다에서 반응합니다. 아무래도 시공간이 뒤틀린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글렌이 라온에게 준 휘석 목걸이는 대륙 어디라도 위치 추적이 가능한 탐지기였지만 제대로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굉장히 수준 높은 결계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찾을 수 없는 건가?”

“아닙니다.”

채드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지금 필요한 건 물리적인 위치인데, 그걸 도리안이라는 아이가 뿌린 대륙추종향으로 해결했다고 합니다. 목걸이와 추종향을 모두 이용하면 찾을 수 있습니다. 암시장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설 것 같으니,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암시장의 후계자 중 하나가 추종향 아티팩트를 만드는 대로 바로 수색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사람과 물건을 찾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쪽이니, 분명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셰릴. 가문 내에 있는 간부들을 모두 소집해라. 로엔. 봉신가의 가주들을 소환해라.”

“예!”

“예.”

둘은 섬뜩한 눈빛을 발하며 그대로 알현실을 떠났다.

“채드. 대와 단의 힘을 총동원해서라도 에덴과 백혈교의 움직임을 파악해. 최대한 빨리.”

“백혈교도 말씀이십니까?”

“백혈교에는 세상의 법칙을 비트는 주술이 있다. 추종향을 쫓는 반지가 있다면 라온의 위치를 발견할 가능성이 높다.”

“아….”

“그리고 그쪽에 납치된 아이 또한 지그하르트다.”

“아, 알겠습니다!”

채드가 주먹을 꽉 말아쥐고 일어섰다. 지그하르트라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솟구치는 말에 가슴이 거칠게 뛰었다.

“리메르 넌 채드를 돕도록.”

“…….”

리메르는 대답 없이 채드의 뒤에 섰다. 능글맞음을 항상 두르던 그의 분위기가 북풍처럼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별관에는 전하지 않겠습니다.”

리메르가 글렌에게 고개를 숙인 후 채드를 데리고 알현실을 떠났다.

“후우….”

글렌이 입술을 깨문 채로 옥좌의 손잡이를 쥐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적철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에덴, 백혈교.”

그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번들거렸다.

“모조리 지워주마.”

세상 그 어디에 있다고 해도.

*     *      *

“으음….”

라온은 통나무로 만든 듯한 천장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여기는….’

약간의 두통이 일며 멀린이 사용했던 영암옥이라는 물건에 잡혔던 게 떠올랐다.

‘전설급 소모품까지 사용할 줄이야.’

귀하디 귀한 전설급 아티팩트. 그 중에서도 한 번 쓰고 사라지는 소모품을 자신에게 사용하다니, 아무래도 미친년을 너무 얕봤던 것 같다.

“음….”

몸을 일으켰다. 솜털처럼 부드러운 이불을 걷자, 먼지 하나 없는 새하얀 의복이 보였다. 멀린이 갈아입힌 것 같았다.

‘목걸이가 있네. 어? 검도…?’

휘석 목걸이만이 아니라, 잘 개어진 제복과 진혼검, 제천검도 머리맡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뭐지?’

납치한 거 맞아?

제복이나 목걸이는 그렇다 치고 왜 진혼검과 제천검까지 놔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 일어났느냐?

라스가 필기할 자세를 취한 채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 다음에는 어떻게 움직일 것이냐. 본왕에게 가르침을 주거라.

녀석은 이제 자신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듯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계획이라….’

라온이 제천검을 잡으며 입맛을 다셨다.

‘따지고 보면 나쁘지 않아.’

멀린과 10사도의 대화를 들으며 만약에 납치될 거라면 백혈교보다 에덴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었다.

‘투구에 강한 몬스터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 했었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자칭 마왕 놈과 싸워왔기에 투구 속 상대가 누구든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탈출 가능성은 충분해.’

이곳을 벗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더 강해져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역시 아낌없이 주는 라스…어?’

라온이 진혼검을 쥐며 미소를 지을 때였다. 등 뒤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우우웅!

진혼검의 경고와 동시에 뒤를 돌며 검을 뽑았다.

쩌어엉!

진혼검을 막은 새까만 장검 위로 새하얀 백골의 투구가 떠 있었다. 텅 빈 안구 속에서 번쩍이는 황금빛 불꽃이 죽음의 냄새를 피워냈다.

“데스 나이트의 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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