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85화 (285/653)
  • 제285화

    라온은 10사도와 멀린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뭣들 해?”

    제천검과 진혼검을 맞붙여서 멀린과 10사도에게 빨리 싸우라는 신호를 보냈다.

    “시간이 남아도나? 빨리 붙고, 빨리 끝내자고.”

    “허!”

    “아아….”

    10사도의 맹수처럼 사나운 눈동자가 탁 풀렸고, 멀린은 황홀한 듯 들뜬 신음을 흘렸다.

    ‘이제 어떻게 되려나.’

    라온은 두 그랜드 마스터의 시선을 여유롭게 받아넘기며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안 먹히겠지! 네놈에겐 정신머리라는 게 없는 것이냐!

    라스는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가능성은 충분해.’

    -이런 멍청한! 저놈들은 본왕에게 티끌 같은 존재지만, 너희 세계에선 나름 강자가 아니더냐.

    ‘뭐, 그렇지.’

    -거기다 동맹이라며. 저 경지까지 올라간 놈들이 네놈 때문에 싸울 정도로 멍청하겠냐는 말이다! 다른 방식으로 네놈을 데려가려고 할게 분명 하느니라!

    ‘아닐걸.’

    각기 다른 감정이 씌인 10사도와 멀린의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오마에겐 이 방법이 통하지 않겠지만, 에덴과 백혈교에는 무조건 먹힌다.

    왜냐면….

    둘 다 미쳤으니까.

    미쳤다는 오마 중에서도 반의반쯤 더 돌아간 놈들이 에덴과 백혈교다. 동맹이고 뭐고, 정신 나간 놈들의 목적이 같으니 부딪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멀린. 저놈의 말을 따르는 건 아니겠지?”

    10사도는 흔들리는 눈빛을 가라앉힌 뒤 멀린을 보았다.

    “응? 아, 당연히… 들어줘야지.”

    “뭐?”

    “난 저 아이가 원하는 건 다 해주기로 마음먹어서.”

    멀린은 끈적한 웃음을 흘리며 양손을 뻗었다. 그녀의 뒤로 불과 물의 마법진이 돋아나며 주변의 마나가 들끓기 시작했다.

    “멀린!”

    10사도가 백색의 혈기를 운용했다. 눈동자만 보아도 질릴 정도로 지독한 살기를 일으키며 멀린을 노려보았다.

    “모르겠어? 이건 시험이야.”

    멀린이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시험?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날 가지고 싶으면 그 강함을 드러내라는 시험. 더 강한 쪽에 가겠다는 저 아이의 뜻을 정말 모르겠어?”

    그녀는 라온의 생각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받아들였다.

    “라온을 데려가기 위해서라면 너를 죽이는 것 따윈 간단하지.”

    멀린의 오른손에서 시뻘건 물이 치솟고, 왼손에서 푸른 불꽃이 타올라 10사도의 정면으로 쏘아졌다.

    콰아아아아!

    나아가면서 부피와 위력을 키우는 두 줄기 마법이 공동의 절반을 채웠다.

    “이 미친년이!”

    10사도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공간이 반으로 갈라지며 눈꽃처럼 새하얀 창이 나타나 그의 손에 잡혔다.

    창날에서 뿜어지는 맹렬한 혈기가 멀린의 마법과 정면에서 부딪쳤다.

    콰아아아아아앙!

    막대한 충격이 일어나며 공동의 바닥이 뒤틀리고, 천장이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렸다.

    “싸우기 싫으면 물러나. 넓은 아량으로 패배를 받아들여 줄 테니까.”

    멀린은 한 손으로 네 종류의 마법을 쏟아내며 비웃음을 흘렸다.

    “교주께서 내리신 명령이다. 혈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멈출 수 없다.”

    10사도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백창을 앞으로 겨누었다.

    “그럼 결정됐네.”

    멀린의 등 뒤로 떠오른 마법진의 크기가 2배로 부풀어 올랐다. 그녀가 운용하는 마나 역시 이전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증폭되었다.

    “마음껏 덤벼보렴.”

    “그 가면을 찢고, 울부짖는 얼굴을 즐겨주마.”

    10사도의 눈빛이 변했다. 사납지만 한편으로 침착함을 가진 맹수의 목줄이 풀린 듯 눈동자에 광기가 비쳤다.

    콰아아아아앙!

    창격과 마법. 두 괴물의 부딪침에서 일어난 충격에 글란세빌 전역이 뒤흔들렸다.

    -뭐, 뭐야.

    라스는 광대한 빛을 터트리며 싸우는 멀린과 10사도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 멍청한 놈들이 대체 왜 싸우는 것이냐!

    ‘조금 전에 10사도가 말했잖아. 미쳐서 그렇다고.’

    정말 그 이유 하나다. 멀린과 10사도는 그 강한 무력만큼이나 정신이 나갔기에 저 둘이 싸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멀린은 나한테 집착하고 있으니까.’

    볼 때마다 그 광적인 집착이 늘어나고 있으니, 그녀가 10사도에게 싸움을 거는 건 불 보듯 뻔했다.

    10사도 역시 냉정한 척하지만, 인간의 살을 뜯는 혈귀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일단 발작을 시작하면 미쳐 날뛰는 게 당연했다.

    ‘더 재밌는 걸 보여줄까?’

    라온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바람과 불꽃의 마법을 동시에 일으킨 멀린을 불렀다.

    “멀린. 에덴의 투구를 쓰면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는 건가?”

    “관심 있어? 있구나! 역시!”

    멀린은 뒤를 보며 활짝 웃었다. 노파의 가면이 미소를 짓는 모습은 기괴 그 자체였다.

    “아니야. 너는 그대로 너야. 다만 투구를 쓸 때는 조금 달라지지. 무슨 말인지는 한 번만 써봐도 알 수 있을 거야. 너는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게.”

    그녀는 다정한 어투로 투구에 깃든 신비로운 힘이 잠재력을 끌어 올려줄 거라고 말했다.

    “거짓이다.”

    10사도는 멀린의 마법을 쳐내고 이를 바득 갈았다.

    “에덴의 투구와 가면에는 수장급 몬스터들의 혼이 깃들어 있다. 그걸 사용하는 순간 네놈은 자아를 잃게 될 것이다!”

    그는 창에 휘몰아치는 혈기로 멀린을 밀어내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다르다. 교주께선 네가 너인 채로 강하게 만들어 주실 수 있으시다. 그저 혈기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나와 함께 가자. 너를 사도 중 최강으로….”

    “그건 안 되지.”

    멀린이 반투명한 공간을 일으켜 10사도의 창격을 흡수한 후 방긋 웃었다.

    “투구 속에 몬스터의 혼이 있기는 하지만, 무조건 먹히는 건 아니야. 네가 이길 수도 있어. 거기다 투구를 벗으면 평소와 같은 라온 너야. 달라질 건 없어. 그저 투기라는 강한 힘이 새롭게 생길 뿐이라고 생각하렴.”

    그녀는 손가락에서 돋아난 작은 바람에 입김을 불었다. 손톱보다 작았던 바람 조각이 거대한 용오름이 되어 10사도를 덮쳤다.

    “한 번 혈기를 받아들이게 되면 평생 인간의 살점을 뜯어먹는 괴물로 살아야 하는데, 그건 괜찮겠어? 거기다 백혈교주는 인간….”

    “닥쳐라!”

    “후후.”

    10사도가 폭풍을 가르고 나아가 창격을 내리쳤다. 멀린은 블링크를 사용하여 훌쩍 물러선 뒤 수많은 빛을 뿌리는 마법 폭격을 난사했다.

    콰아아아아앙!

    멀린과 10사도는 다시 말을 멈추고 서로의 숨통을 노리는 살벌한 공세를 이어갔다.

    “흠.”

    라온은 멀린과 10사도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눈매를 좁혔다.

    ‘투구에 몬스터의 혼이 깃들어 있다라….’

    이건 이용할 수도 있겠는데.

    지금의 자신이라면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정보를 얻었다. 둘 다 미쳐주어서 참으로 고마웠다.

    ‘봤지?’

    라온은 라스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정보도 빼낼 수 있어.’

    -어어….

    라스는 라온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이놈은 진짜 인간이 맞나…?’

    적이 훨씬 강한데도 주눅 들지 않고, 상대의 심리를 이용하여 싸움을 붙이고 심지어 거기서 정보까지 얻다니, 이런 방식은 상상도 해 보지 못했다.

    ‘어이가 없도다.’

    라온은 이곳에서 가장 약하지만, 상황을 지배하고 있었다. 최약자가 강자를 상대로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선 모습에 처음으로 놈이 크게 보였다.

    무력 면에서는 아직 애송이가 분명하지만, 정신력과 심계는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크흠!

    이건 쓸모가 있겠느니라.

    라스는 헛기침을 하고서 왼 손바닥을 크게 만든 뒤에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적기 시작했다.

    -본왕은 오늘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느니라. 약자가 강자를….

    ‘너 뭐 하냐?’

    라온은 갑자기 손바닥에 뭔가를 적으며 중얼거리는 라스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필기하고 있느니라.

    ‘필기?’

    -그렇느니라.

    ‘무슨 필기?’

    -네놈이 저 두 바보를 부린 방법을 확실히 기억하기 위한 필기이니라. 꼭 습득해서 건방진 프라이드 놈과 추잡한 그리드 놈을 싸우게 만들 것이니라.

    ‘허….

    라스는 처음엔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지 않더니, 눈으로 직접 본 뒤에 이 방법에 빠져든 것 같았다.

    -본왕은 이미 멋진 대사까지 생각해놨느니라.

    ‘대사?’

    -그래.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멋들어지지 않느냐?

    라스는 본인이 생각해도 대단하다며 콧대를 세웠다.

    -앞으로도 강의를 부탁하느니라. 이걸 마계의 어린 마족들에게 들려주어야 하는데….

    녀석은 아쉽다고 입맛을 다시며 다시 그 대사를 반복했다.

    ‘그게 그리 쉽게 되는 게 아닐 텐데….’

    이번 계략이 성공한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멀린이 진짜 미쳐있기 때문이다. 어지간히 정신이 나가 있지 않은 이상 이뤄질 수가 없는 일이다.

    ‘그건 그렇고….’

    라온은 좋은 강의를 들었다고, 즐거워하는 라스를 보며 눈썹을 축 내렸다.

    ‘이젠 정말 포기한 건가?’

    라스는 10년 넘게 얻어터지다 보니, 이젠 몸을 차지하는 걸 반쯤 포기한 것 같았다. 지금에 와선 몸의 한쪽을 빌려 사는 불법 세입자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 많고, 어리숙하며, 괴식을 좋아하는 분노의 군주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녀석이었다.

    콰아아아앙!

    라스의 뒤통수를 보며 신기하다고 중얼거릴 때 그란세빌 상공에서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멀린과 10사도는 좁은 공동에서 벗어나 하늘 위에서 싸우고 있었는데, 한참 떨어져 있음에도 두 괴물이 일으키는 마나의 충격에 속이 울렁거렸다.

    -다음 계획은 무엇이냐. 도망치는 것이냐?

    ‘아니.’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도망쳐봐야 금방 잡히고, 역으로 인질만 생긴다. 지금 할 일은 그런 게 아니었다.

    화르르르!

    바닥에 손을 얹고 만화공을 일으켰다. 말라붙은 핏물을 따라 흘러간 불꽃이 사위로 퍼지며 숨이 끊어진 사람들을 휘감았다.

    -이런 상황에서 화장을 하겠다고?

    ‘이런 상황이니까. 하는 거야.’

    이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전부 7사도에게 피와 살이 뜯겨 죽었다. 이대로 놔둔다면 망령이나, 좋지 않은 음의 존재가 될 수 있기에 위로해주며 떠나보내기로 했다.

    우우우우웅!

    진혼검은 요기를 일으켜서 만화공의 불꽃을 키워주었다.

    ‘그런가.’

    진혼검이 울리는 청명한 검명이 이들은 자신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기원하는 것 같았다.

    화아아아!

    순도 높은 열기와 요기가 어우러지며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던 사람들이 재가 되어 하늘 위로 흩어졌다.

    ‘그곳에서 평안하시길.’

    라온이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내리감았다.

    재 속에서 피어난 상서로운 빛이 진혼검의 칼날 위로 깃드는 것도 모른 채 한참 동안 죽어간 사람의 넋을 위로했다.

    *     *      *

    콰르르르릉!

    천공에 가득 찬 먹구름에서 장대한 스파크가 번쩍인다. 노란 사슬이 하늘을 휘감은 듯한 장관 속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벼락 줄기가 쏟아졌다.

    찌이이이잉!

    10사도의 백창에서 일어난 혈기의 파도가 땅 위에서 하늘 끝까지 치솟아 그란세빌 전역을 뒤덮었다.

    콰아아아아앙!

    극에 이른 마법과 무학의 격돌에 도시가 진흙처럼 뭉개진다. 격돌의 여파에서 터져나간 마나의 조각만으로도 호수가 뒤집히고, 산이 내려앉았다.

    우우우웅!

    10사도는 양손에 붉고, 푸른 마나를 응집시키는 멀린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네년도 알 텐데? 이대로 계속 부딪친다면 너와 나 둘 다 죽는다. 정말 끝까지 해보겠다는 건가?”

    “너희 교주가 라온을 노린 게 언제부터지?”

    멀린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뭐?”

    “이번에 4사도가 라온의 손에 죽었을 때겠지?”

    “….”

    10사도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난 처음부터야. 그 아이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반했지. 그리고 두 번째 봤을 때 확신했어. 우린 운명이라는 걸.”

    멀린의 미소가 진해질수록 그녀의 주변에서 흐르는 마나의 밀도와 향기가 기하급수적으로 짙어졌다.

    “으음….”

    10사도는 멀린의 눈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광기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난 네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걸 알자마자, 이 싸움을 준비했지. 승리는 네가 가져. 다만 라온은 나와 함께 갈 거야.”

    멀린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번쩍이자, 그녀의 등 뒤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마법진이 돋아났다.

    콰아아아아아아!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마법은 하나하나가 강환의 위력이었고, 사위에서 쏟아져 10사도의 공간을 완벽하게 포위했다.

    “멀린!”

    10사도의 창에서 하늘을 깨부술 듯한 강대한 혈기가 타오르며 마법을 갈랐지만, 폭포를 벤 듯 금방 새로운 마법이 그 자리를 채웠다.

    “널 위해 준비해둔 만 개의 마법들이야. 잘 놀고 있으렴.”

    “머어어어얼린!”

    멀린은 10사도의 괴성을 뒤로 하고 다시 공동으로 내려갔다.

    *     *      *

    라온은 내려온 멀린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건 예상외인데.’

    저런 준비까지 하는 걸 보니, 역시 저 여자는 그냥 미친 게 아니라, 아주 단단히 미쳤다.

    ‘다만….’

    이쪽이 편하긴 하지.

    10사도와 무력으로 붙는 것보다는 멀린의 마법을 상대하는 게 훨씬 편하다.

    ‘진혼검이 있으니까.’

    로엔그린의 던전에서 흑도를 부수고 얻은 진혼검의 능력. 마법 요혈이 있기에 10사도가 멀린의 마법을 뚫고 오는 동안은 충분히 버틸 자신이 있었다.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라스의 감탄을 들으며 진혼검을 앞으로 겨눴다.

    “장해.”

    멀린이 방긋 웃으며 박수를 보내왔다.

    “뭐?”

    “또 성장해서 무언가를 준비한 모양이지?”

    그녀는 더 짙은 웃음을 흘리며 턱을 살짝 내렸다.

    “그걸 꼭 보고 싶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네.”

    “미안하지만 난 시간이 많거든. 너희 둘의 결착을 꼭 보고 싶은데.”

    “그건 안 될 거야.”

    멀린의 손위로 육각형의 상자가 돋아났다. 기이한 문양으로 가득한 상자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잿불처럼 타올랐다.

    “그건….”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보는 것만으로 불길함을 뿜어내는 상자였다.

    “전설급 아티팩트 중에서도 일회용 소모품이 있다는 거 알아?”

    “전설급 소모품?”

    “이게 그중 하나. 영암옥이라는 물건이야.”

    등골 위로 올라서는 오싹한 소름에 뒤로 물러섰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비할 수 있도록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공명시켰다.

    “개방.”

    멀린은 쫓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상자 속으로 마나를 밀어 넣었다.

    찌이이이잉!

    육각의 상자에 18개의 구멍이 뚫리며 시꺼먼 김이 뿜어져 나왔다.

    ‘저게 뭐…어?’

    검을 들어 올리려고 했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눈동자를 내리니,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시꺼먼 쇠사슬이 돋아나 전신을 묶고 있었다.

    “이, 이건….”

    “영암옥은 사용자보다 마나의 양이 적은 존재를 가둘 수 있는 감옥이지. 그림자 사슬이 네 영혼을 묶어두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을 거야.”

    그 말대로였다. 육체가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이 육체를 움직일 영혼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상태라면 라스가 들어올 수 있도록 혼을 비켜줄 수도 없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멀린이 방긋 웃으며 영암옥을 흔들자, 시야가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네놈의 옹달샘 같은 마나 때문에 본왕도 움직일 수가 없다. 하지만 이것도 네놈의 계획이겠지? 좋다. 어디든 가보자 꾸나!

    라스는 사람 속도 모르고 히죽거렸다.

    ‘젠장….’

    “부단주님!”

    이를 갈 때 천장의 구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간신히 눈동자만 들어 올리자, 바람에 휘날리는 녹색 머리칼이 보인다.

    도리안. 녀석이 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이쪽으로 던졌다.

    “이 멍청아. 도망가….”

    라온이 바득 이를 갈며 멀린을 보았다.

    “우…리 애들 건드리면 죽일 거…야.”

    “안 건드려. 잠깐만 눈을 감았다가 뜨면 다 끝나 있을 거야.”

    멀린이 부드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손을 저었다.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손가락이 제 자리에 돌아오는 걸 본 순간 시야가 껌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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