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84화 (284/653)

제284화

라온은 7사도의 목에 진혼검을 박아넣은 채 왼팔로 놈의 목을 감고 뒤로 물러섰다.

7사도를 인질을 잡은 채 방해를 해 온 남자를 돌아보았다.

왼쪽 가슴에 열 개의 구슬이 새겨진 백색 코트를 두르고, 흑발 중앙에 회색 선이 그러진, 눈빛이 맹수처럼 사나운 중년인이었다.

‘역시 10사도였군.’

등 뒤에서 다가온 혈기는 포르반 시에서 7사도를 죽이기 직전에 느꼈던 10사도의 것과 같았다.

놈은 두 번째로 방해를 해왔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더 빨랐다.

고오오오오.

10사도의 눈빛이 서서히 올라선다. 가뭄을 맞이하기라도 한 듯 건조한 눈빛. 당장 7사도가 죽을 수 있음에도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라온이 볼 안쪽 살을 꾹 씹었다.

‘더럽게 강해.’

마스터에 올랐기 때문인지 10사도의 무력이 그대로 전해져온다. 기세만으로 압도되어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직은 무리인가.’

오러와 체력을 소모하지 않았어도 달라질 건 없다. 그랜드 마스터는 지금의 자신이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길 수 없는 상대. 싸움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살아나가야 했다.

‘하나 있기는 한데.’

라온이 우측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건방지게 뭘 쳐다보는 것이냐.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하품하던 라스가 눈매를 찡그렸다.

‘아니야.’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쓸 수 없어.

라스를 몸에 받아들인다면 7사도가 아니라, 백혈교주가 와도 살아나갈 수 있다.

불의 고리가 7성에 올랐으니, 후에 몸을 되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스가 몸을 차지한 순간 100% 폭주한다고 했으니, 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휘말릴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 상황을 좀 살펴야겠어.’

라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난 백혈교가 이렇게 정 많은 곳인 줄 몰랐네.”

백혈교를 조롱하며 10사도가 어떻게 움직이더라도 반응할 수 있도록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고, 오러를 끌어 올렸다.

“아무리 사제라고 해도 마스터를 쫓아다니며 챙겨주다니, 이거 과보호 아니야? 설마 밥도 먹여주나?”

“풀어라.”

10사도는 본인이 우위에 있는 듯 눈빛을 가라앉혔다.

“명령하지 마.”

라온이 차게 웃으며 7사도의 목에 박힌 진혼검을 살짝 비틀었다. 살점이 찢어지며 회색 핏물이 덩어리째 떨어졌다.

“크허억!”

진혼검에서 뿜어지는 요기에 7사도가 고통이 담긴 신음을 흘렸다.

“사, 사형….”

7사도는 10사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발 살려달라며 구걸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아무리 백혈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도급을 쉽게 채우지는 못하지?”

“끄흐윽….”

라온이 진혼검의 검병을 꽉 말아쥐었다. 그 진동만으로도 7사도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한테 죽은 4사도의 자리도 아직 공석이잖아. 이놈까지 죽는다면 사도 중 2자리가 비게 될 텐데, 약해졌다고 오마에서 떨어져 나가는 거 아니야?”

백혈교가 육황오마 중 가장 많은 머릿수를 가졌다고 해도 사도급 인재를 바로 채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7사도를 인질로 잡은 지금 어떻게든 살아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네 말대로 4사도의 자리는 아직 공석이다. 다만….”

10사도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메마른 눈빛으로 라온과 7사도를 내려보았다.

“본교의 강자는 사도만 있는 게 아니다. 사도가 중요한 이유는 그 강함 때문이 아니라, 혈신의 빛과 진리를 민중에게 전하기 때문이다.”

10사도는 메마른 음성으로 천천히 입을 뗐다. 삭막한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신앙심이 비쳐 나왔다.

‘사도보다 강한 자들이 있다고?’

전생의 기억으로도, 비연회의 정보에서도 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그 말이 정말이든 말든. 이 녀석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는 뜻이야.’

백혈교는 무력단체이기 이전에 종교단체다. 사도보다 강한 자보다 사도의 지위가 높다는 건 7사도가 인질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었다.

“사도가 밥을 빌어먹든 말든 관심 없다. 내가 원하는 건….”

10사도에게 물러나라고 말을 하려 할 때 구멍 난 천장에서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라온!”

“부단주님!”

“살아 있어요?”

루난과 버렌을 비롯한 광풍단 검사들이 아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어…?”

“자, 잠깐! 저 사람….”

“10사도!”

“저 괴물이 왜 여기에!”

그들은 단숨에 10사도를 알아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움직이지 마.”

10사도가 고개를 들어 올리려고 할 때 만화공을 일으켰다. 최대한 강한 기운을 끌어올리며 진혼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끄으윽….”

진혼검에 깃든 요기가 만화공에 의해 증폭되며 7사도의 신음이 짙어졌다.

“거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이놈은 죽는다.”

10사도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이쪽만 바라보았다. 협박이 먹혔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지금이 말할 기회였다.

“버렌! 루난! 도시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

라온은 모두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천장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라온!”

“너는 어떻게 하려고!”

“부단주님! 안 돼요!”

“함께 싸우려고 그 수련을 한 거잖아요!”

광풍단은 물러서지 않고 당장이라도 내려올 듯 투지를 일으켰다.

‘저 녀석들….’

10사도의 무시무시한 기세를 느끼고도 저런 말을 하다니, 가르친 보람이 있었다.

뿌듯했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멍청한 짓을 시킬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예외다. 난 살 수 있으니,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전부 데리고 나가.”

“라온.”

“너 이 자식….”

라온은 걱정을 비치는 루난, 버렌과 눈을 마주하고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거짓말 한 적 없는 거 알지?”

진심이다. 광풍단이 도시에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간다면 라스를 불러들여 10사도를 역으로 잡을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나중에 보자.”

그 말에 허리를 숙이고 있던 광풍단이 동시에 일어섰다.

“광풍단은 부단주의 지시를 따른다!”

“모두 움직여!”

광풍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방으로 퍼졌다. 루난이 가장 길게 보고 있었지만, 그녀도 입술을 깨물고서 떠나갔다.

“사, 사형. 왜 가만히 계시는 겁니까. 저놈들을 인질로 잡으면…커헉!”

라온은 주절거리는 7사도의 입을 막고 10사도를 보았다.

‘이상한데?’

7사도의 말대로 지금 상황은 10사도에게도 기회다. 광풍단을 인질로 잡는다면 이쪽을 흔들 기회인데도, 놈은 정말 가만히 있었다. 모든 목적이 이곳에만 있는 것처럼.

‘잠깐.’

그러고 보니….

마스터라면 모를까. 그랜드 마스터인 10사도가 정말 마음먹고 뒤를 노렸다면 자신이 그 습격을 막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솔직히 말해 놈이 진심이었다면 이미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벌어진 일들을 되새기자, 등골이 오싹한 가정 하나가 떠올랐다.

‘저놈 설마….’

날 노리는 건가?

광풍단원을 잡을 생각도 않고, 7사도에게도 큰 관심이 없으며, 습격도 살해가 아니라, 생포를 위한 행동이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가정이었다.

‘거기다 쓸데없이 사도에 관한 설명을 했어.’

조금 전 10사도는 설명할 필요 없던 사도의 역할에 대해 말했다. 주절거리지 않는 놈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 설명에도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날 사도로 만들 생각인가?”

라온의 나지막한 말에 10사도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나타났다. 크게 벌어진 두 눈이 그의 놀라움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분께서 왜 널 데리고 오라 하셨는지 이제야 알겠군. 역시 앉은 자리에서 세상을 굽어보시는 분답다.”

10사도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흔들리던 눈동자가 겨울의 늪지처럼 굳게 여물었다.

“맞다. 난 너를 데려가기 위해서 왔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 이놈은 제 원수입니다! 사도가 된다니요!”

7사도는 목에 칼이 박힌 주제에 끝까지 본인의 불만을 뱉었다.

“사부님의 지시다.”

“끄윽….”

놈은 교주의 지시라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네게 선택권은 없다. 거절한다면 네놈의 부하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네 사제는 안 보이는 건가?”

라온이 7사도의 목에 박힌 진혼검을 다시 비틀었다. 살이 으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죽여도 상관없다.”

“사, 사형?”

“같은 상대에게. 그것도 하수에게 2번이나 패한 사도는 없는 게 더 도움 되겠지.”

10사도의 눈빛과 목소리는 서늘했다. 본인이 직접 7사도를 죽이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차가운 기세였다.

‘인질이 안 먹힌다는 건가?’

사도에 대한 설명을 떠올려보면 허세라고 느껴지지만, 불리해진 건 이쪽이었다.

‘시간이 필요한데….’

아직 광풍단과 사람들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잡설을 말해서라도 시간을 끌어야 한다.

“사도가 된다면….”

라온이 입술을 살짝 깨물며 10사도를 보았다.

“백혈교주에게 직접 무학을 전수받을 수 있는 건가?”

“물론이다.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사도의 첫걸음이다.”

“대륙 최강자 중 한 명에게 사사 받다니, 그건 나쁘지 않군.”

시간을 끌기 위해서 생각도 없는 말을 중얼거릴 때였다. 불의 고리가 허공에서 돋아난 은은한 마나의 흐름을 포착했다.

‘저건….’

라온이 그 마나의 흐름을 눈에 담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거 잘하면….’

라스를 강림시키지 않고도 살 수 있겠는데?

*     *      *

버렌은 혈현괴진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10사도가 나타나서 그란세빌을 무너뜨린다고 거짓말을 하여 모두 도시 밖으로 내보냈다.

도시 전역에 백혈교와 혈기의 잔재가 남아있었고, 건물이 모래성처럼 무너져있었기에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1조는 어떻게 하죠?”

“마르타가 있는 곳으로 모이기로 했으니, 모두 밖에 있을 거다! 신경 쓰지 말고 달려!”

“조장은….”

“난 확인을 끝내고 가겠다.”

버렌은 루난과 함께 도시에 남은 마지막 사람까지 확인한 뒤 라온과 10사도가 있는 구덩이를 바라보았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가봐야 방해가 된다는 걸 알았기에 입술을 깨물고 도시를 벗어났다.

마르타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 광풍단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왜 다들 나오는 건데?”

“10사도가 나타났다.”

“10사도….”

어린아이를 안고 있던 마르타가 턱을 떨며 몸을 일으켰다. 텅텅 비어있던 그녀의 단전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치솟았다. 오러가 아니라, 생명을 불태우는 듯한 기운이었다.

“그 새끼가 왔는데 너희는 왜 여기에 있냐고!.”

“라온이….”

“그걸 그냥 놔둬? 같이 죽여야 할 거 아니야!”

상황을 설명하자, 마르타는 당장이라도 달려갈 것처럼 검병을 말아쥐었다.

“안 돼.”

루난이 마르타의 손목을 꽉 잡았다.

“이거 놔! 10사도는 내가 죽여야 해! 라온 혼자서는 절대 무리라고!”

“라온이 돌아온다고. 믿어달라고 했어.”

마르타가 거칠게 손을 휘둘러도 루난은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놓으라고!”

“마르타. 10사도가 네 원수라는 건 알고 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우리가 가봐야 방해가 될 뿐이다.”

버렌의 입술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마르타는 피로 물든 버렌의 입술을 보고 발을 굴렀다.

“무슨 상황이 매번…억!”

욕을 내뱉으며 앉으려고 할 때 루난이 맞잡은 주먹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퍼억!

마르타는 루난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었다.

“어…?”

“루, 루난?”

“2조장님….”

광풍단 모두가 루난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이 미친년이 지금 뭐 하는 거야!”

마르타가 얼굴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악을 질렀다.

“달려갈까 봐 막으려고.”

“누가 이딴 식으로 막아!”

“너가.”

루난이 마르타를 가리켰다.

“내가 언제 이딴…설마 너….”

마르타가 인상을 찌푸렸다. 예전 광혈귀를 만났을 때 루난이 발작을 해서 뒷목을 내리쳐서 기절시킨 적이 있었는데, 그때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복수야?”

“복수가 아니라 말리려고.”

“그게 복수잖아!”

“아니야.”

“크으으으!”

마르타가 루난에게 주먹을 날리려다가 멈춰 섰다.

‘이 녀석….’

평소에 누구보다 멍한 루난의 눈동자는 그녀답지 않게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홀로 남은 라온을 걱정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후우….”

루난의 눈을 보니,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어쩔 수 없지.”

마르타가 입술을 깨물고서 등을 돌렸다. 1조가 구해온 아이들은 전부 겁에 질려서 어깨를 떨고 있었다.

“야. 얘들 먹일…어?”

마르타는 광풍단을 쭉 살피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놈은 왜 없어?”

*     *      *

라온은 새롭게 드러난 마나의 흐름을 모른척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도가 된다면 영약도 받을 수 있나?”

“단순한 영약이 아니라, 그분의 피를 받을 수도 있다. 널 마음에 들어 하시니, 단숨에 지금의 경지를 뛰어넘게 될 것이다.”

“이놈이 강해진 것도 그 피 때문이겠군.”

진혼검을 움직여 7사도를 앞으로 살짝 밀었다.

“맞다. 혈신을 따르고 믿는다면 네게도 그런 축복이 있을 것이다.”

10사도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서 순수해 보일 정도로 허연 기운이 타올랐다.

백혈기. 혈기의 극치라 불리는 경지였다.

“백혈교로 와라. 너라면 나보다 높은 곳에서 신을 모실 영광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신? 신이라….”

라온이 10사도의 손아귀에서 타오른 하얀 불꽃을 보며 찬웃음을 흘렸다.

“난 신을 믿지 않아.”

지금만이 아니다. 전생에서도 신 따위는 믿지 않았다.

“주신이니 성신이니 하는 것들도 관심 없는데, 혈신이라니 웃기는 소리지.”

본인들의 신을 비웃어도 10사도는 반응하지 않았다.

“내가 믿는 건 오직 나 ‘자신’뿐이다.”

라온이 오른손으로 본인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런 내가 조금 전에 약속 하나를 했지.”

“약속?”

“이들과 한 약속이다.”

가라앉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공동에 산처럼 쌓인 시체들이 눈에 들어온다.

고통과 공포에 질려 본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수많은 시체들이 원망하듯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놈을 죽여주겠다고 맹세를 했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신은 인기가 없는 법. 난 이 사람들의 원한을 남겨둘 생각이 없어.”

“끄윽….”

일변하는 기세를 느낀 7사도에게서 두려움 섞인 떨림이 전해졌다.

“너….”

10사도도 라온이 비치는 불길함에 눈동자를 떨었다.

“역시 너희들에게도 사형제는 소중한 모양이네.”

부드럽게 흐르던 라온의 미소가 뚝 멎었다.

“역겨워.”

그 말과 함께 7사도의 목에 박힌 진혼검을 앞으로 뜯어냈다. 회색 핏물과 대비되는 시뻘건 불꽃이 7사도의 목을 갈라냈다.

뿌드득!

뼈와 살이 찢어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7사도의 목에서 살벌한 양의 핏물이 쏟아졌다.

“사, 사….”

7사도는 목이 갈라져 말을 잇지 못하고, 손을 파르르 떨다가 바닥에 가라앉았다. 고통에 찢어질 듯 부푼 눈동자에 죽음이 비쳤다.

“라온 지그하르트!”

10사도가 매서운 눈동자에 분노를 담아 다가왔다. 내지르는 손아귀에서 상상을 초월한 힘이 폭발했다.

쿠구구구!

라온이 숨을 낮게 내쉬며 두 검을 쥐었다. 남은 오러를 모조리 끌어 올려 방어를 하려 할 때 공간이 사선으로 비틀어지며 오색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쩌어어어엉!

10사도의 공세를 막아낸 공간의 틈이 쩍 벌어지며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여성이 걸어 나왔다.

“멀린?”

10사도가 쭈글쭈글한 노파의 가면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하아….”

멀린은 10사도가 아니라, 라온을 돌아보며 들뜬 신음을 흘렸다.

“역시 너뿐이야. 그 투구를 쓸 사람은 너뿐이라고.”

가면 속에서 비치는 그녀의 동공에 열망이 깃들었다. 처음 하분 성에서 봤을 때보다, 셰릴과 싸울 때보다 더한 욕망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나와 함께 가자. 라온. 평생 나만을 바라보게….”

“에덴의 멀린.”

10사도가 조금 전과 차원이 다른 혈기를 일으키며 멀린을 노려보았다. 그에게서 타오르는 허연 혈기에 멀린이 일으킨 공간이 녹아내렸다.

“네년이 끼어들 때가 아니다. 꺼져라.”

“나와 라온 사이에 네가 끼어든 거야.”

“오마의 협약을 어기겠다는 건가?”

“협약? 그런 걸 했었나?”

멀린은 여유롭게 허공으로 떠오르며 양손을 펼쳤다. 10사도의 혈기에 조금도 밀리지 않는 강대한 마나를 일으키며 미소를 흘렸다.

라온은 멀린의 등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역시 저놈이었군.’

시간을 끌기 위해 백혈교에 관심있는 척했을 때 불의 고리가 잡아낸 마나의 파동은 예상대로 멀린의 것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날 노리고 있었지.’

멀린은 하분 성에서 만났을 때부터 욕망을 드러냈고, 두 번째로 마주친 전장에서 광적인 집착을 했기에 10사도가 데려가지 못하게 막아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정말 여의치 않을 때는 살려야 할 수도 있었던 7사도를 죽이고, 그 뒤를 맡긴 건데 완벽하게 예상대로 움직여주었다.

고오오오오!

10사도와 멀린. 그랜드 마스터를 넘어선 두 괴물이 일으키는 기파만으로 지하에서부터 하늘 끝까지 닿는 마나의 용오름이 일어났다.

‘서로 죽일 정도로 싸우지는 않겠지.’

오마 협약. 그저 이름만 있다고 해도 상위 간부끼리 직접 목숨을 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걸 어그러뜨려야 해.’

둘 다 날 원하고 있으니까.

오직 지금이기에 가능한 일을 하기로 했다.

뒤로 훌쩍 이동하여 벽에 등을 기댔다.

“응?”

“너?”

“너희 둘이 싸워라.”

라온은 당황한 듯 눈을 부릅뜬 두 괴물을 보며 턱을 치켜들었다.

“난 이긴 쪽을 따라가도록 하지.”

-이거 진짜….

라스는 자신감에 가득 찬 라온의 미소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미친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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