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82화 (282/653)

제282화

7사도는 바닥에 너부러진 사람들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혈현괴진의 혈기를 내려받은 인간들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죽기는커녕 다친 사람도 없어 보였다.

그에 반해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교도들은 모조리 숨이 끊어져 있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교도들이 죽는 건 예상했다. 라온이 요기의 검으로 검명을 울릴 거라는 걸 알고 방비를 했음에도 약간의 충격이 있었으니까.

다만 죽은 교도들보다 훨씬 가까이 있던 버러지들이 그저 기절만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오러 통제력이 인간을 벗어나지 않고서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은 얕게, 먼 곳에 있는 교도들에게는 검명을 깊게 박았다는 뜻인데, 자신조차 그런 오러 운용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역시나.”

7사도가 고개를 들어 올려 요검을 겨누고 있는 라온을 보았다.

“대단하군.”

예상을 벗어난 상황에 놀라움을 인정하며 여유롭게 박수를 보냈다.

‘이 정도 어그러짐은 받아들일 수 있어.’

이게 전부가 아니니까.

혈기가 깃든 인간들을 데리고 와서 죽일지 살릴지 선택을 하게 한 연출은 그저 라온을 조롱하고, 정신을 무너뜨리기 위한 장치였을 뿐이다.

진짜는 지금도 부풀고 있는 저 하늘 위의 주술. 혈현괴진이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7사도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저 주술의 이름은 혈현괴진이다.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

“…….”

라온은 검을 겨눈 채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히 모르겠지. 저 주술이 있는 줄도 몰랐을 테니까. 혈현괴진은 피의 괴이를 세상에 현현시킨다는 의미다. 그건 이들처럼 우리의 먹이가 되어줄 벌레들을 표현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의미로는….”

7사도가 섬찟한 미소를 지으며 혈기를 끌어 올렸다. 무식할 정도로 강대한 혈기가 치솟으며 그의 주변이 바싹 말라붙기 시작했다.

“저 주술 아래에서 강해지는 교도를 말하기도 하지. 다만 지금은 준비운동조차 되지 않아, 혈현괴진이 제대로 발동된다면 혈기의 증폭효과는 지금의 2배가 넘으니까.”

“…….”

7사도에게서 어마어마한 혈기가 타오르고 있음에도 라온의 표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가라앉은 눈빛으로 7사도를 살필 뿐이었다.

“지금부터 네게 진정한 절망을 선사해주지. 혈기의 별 아래에서 죽어라.”

7사도가 손가락을 튕겼다. 튜스에게 진을 발동시키라고 보내는 신호였다.

“음?”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혈현괴진의 혈기는 여전히 주변의 기운을 빨아들이며 부풀어 오르고만 있었다.

딱!

조금 더 크게 손가락을 튕겼다. 하지만 여전히 진은 발동되지 않았다.

“튜스!”

이름을 불러도 변화는 전혀 없었다.

“이게….”

“내가 저 진을 모른다고 했던가?”

라온의 서늘한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이름은 몰랐어. 다만….”

그는 비웃음을 흘리며 혈현괴진을 가리켰다.

“저 주술에 대해서는 너보다 많이 알걸.”

“튜스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조금 전까지 여유로웠던 7사도의 눈빛은 파도를 맞은 듯 요동쳤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들을 이용해서는 안 됐어. 그 어린 것들을 제물로 바치려 하다니, 네놈들은 거죽만 인간이지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다.”

라온이 섬뜩한 눈빛으로 7사도를 굽어보았다.

“그런 추잡한 짓거리를 가장 싫어하는 녀석에게 맡겼으니, 네가 부르짖는 튜스는 지금쯤 머리가 날아가 있지 않을까?”

7사도가 라온의 눈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 정말 안다고? 혈현괴진을? 어떻게?’

대체 어떻게!

혈현괴진이 발동될 때 가장 가까이 있는 아이들이 제물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니, 놈은 정말 주술진에 대해 파악한 것 같았다.

‘제기랄….’

라온의 말대로 튜스가 죽는다면 많은 일이 꼬이게 된다. 갑자기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따아악!

7사도가 손가락을 튕기자, 주변에 몸을 감추고 있던 백혈교도들이 우르르 뛰쳐나왔다.

못해도 30명이 넘는 인원들이 지금의 상황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은 채 혈기를 끌어 올렸다.

“튜스를 도와! 사방으로 퍼져서 움직여!”

라온이 또 검명을 울리기 전에 보내야 했기에 바로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라온은 검명을 울리는 대신 뒤로 고개를 돌렸다.

“광풍단!”

시원한 외침과 함께 광풍단 검사들이 나타나 원을 그리며 백혈교도를 포위했다.

“살 가치가 없는 쓰레기들이다.”

라온은 차가운 살기를 일으킨 채 백혈교도를 노려보았다.

“모조리 죽여.”

그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무감정한 듯 보였던 광풍단 검사들이 장대한 기운을 일으키며 백혈교도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 흔한 기합성조차 없었다. 들리는 건 오직 검을 긋는 파공음과 백혈교도의 머리가 떨어지는 소리뿐이었다.

“이쪽도 시작하지.”

라온이 왼손에 진혼검, 오른손에 제천검을 들었다.

“네놈이 마시는 공기조차 아까우니까.”

*     *      *

두 시간 전.

마르타는 튜스와 대화를 하는 루나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정말이었어.’

라온이 말했던 대로 루나와 뒷골목의 아이들은 튜스의 호출을 받고 그의 상점에 모여들었다.

‘저놈이 튜스로군.’

튜스는 청발의 중년인이었는데, 인상 좋다는 말이 자연스레 나올 정도로 다정해 보이는 외모를 지녔다.

‘저런 얼굴로 그 지랄을 하다니….’

얼굴이 저리 인자해 보이니, 아이들을 이용하기 더 쉬웠을 것이다. 버려진 아이들은 정을 그리워하니까.

‘개새끼.’

당장 쫓아가서 튜스의 주둥아리를 후려버리고 싶었다.

“이번에도 부탁하마.”

튜스는 방긋 웃으며 아이들에게 성인 남성의 주먹만 한 돌과 은화를 건네주었다.

“네!”

“걱정 마세요!”

아이들은 돈을 받았다는 기쁨에 방긋 웃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 은화가 5개인데요?”

“어? 나도 5개네?”

“평소에는 하나나 두 개였잖아요. 잘못 주셨어요.”

은화 5개를 받은 아이들은 기뻐하기보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망할 새끼….’

저걸 저승길 노잣돈이라고 주는 건가.

평소보다 많은 은화를 주는 이유는 뻔했다. 라온의 말대로 아이들을 제물로 바치기에 주는 제물값이었다.

“아, 오늘은 부탁이 하나 더 있거든.”

“하나 더?”

“그게 뭔데요?”

“바로 돌을 묻지 말고, 자리에서 기다리다가 내가 신호를 줄 때 돌을 묻어주렴.”

튜스는 부탁한다며 미소를 지었다.

“신호는 어떻게 주시는데요?”

“아저씨가 소리 칠 테니까. 다 들릴 거야.”

“아!”

“알겠어요!”

“넵!”

아이들은 은화를 5개나 받았기에 별 불평 없이 각자 정해진 자리로 떠났다.

“음….”

다만 뒤에 있던 루나는 다른 이들처럼 떠나지 않았다.

“루나야?”

“아저씨 저….”

그녀는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술을 살짝 뗐다.

“응?”

“아, 아니에요!”

튜스를 살피듯이 위아래로 보던 루나는 고개를 젓고서 뒤로 물러섰다.

“오늘 일이 끝나고 말해드릴게요.”

“그러렴.”

튜스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마르타가 낮은 숨을 뱉었다. 혹시라도 말하면 어떻게 하나 고민했는데, 저자가 위험한 사람이라고, 계속 설득한 보람이 있었다.

아이들이 모두 떠나자마자, 튜스의 곁으로 표정이 삭막한 남녀 10명이 나타났다. 복장은 평범했지만, 백혈교도가 분명했다.

“가라.”

그들은 튜스의 지시를 듣자마자, 조금 전 아이들이 떠난 방향으로 흩어졌다.

“이제 우리 차례야. 조금 전에 지정한 대로 흩어져.”

“예.”

마르타가 손짓하자, 1조 검사들은 조금 전 백혈교도가 움직인 방향으로 떠났다. 추적의 추적. 아이들을 따라가는 백혈교도의 뒤를 쫓는 이중추적이었다.

마르타는 옥상의 간판 뒤에서 움직이지 않고 계속 튜스를 살폈다.

한 시간이 지났을 때 태양이 사라져 밤이 찾아왔고, 도시를 노닐던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가까운 건물로 들어갔다. 시끄럽기로 유명한 도시에는 개 한 마리 남지 않았다.

‘이것도….’

라온의 예측과 똑같았다. 녀석은 아이들을 보낸 뒤에 태양이 지고, 사람들이 사라질 거라고 말했는데, 그게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놈이야말로 진짜 괴물이네.’

대륙 제일의 검술 재능으로도 모자라, 이런 분석력과 판단력까지 가지고 있다니 이젠 질투조차 나지 않았다.

툭.

해가 지고, 사람이 사라지고 나서야 튜스가 밖으로 나왔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림. 대주교의 로브를 걸친 그는 아무도 없는 길을 걸었다.

‘이제 내 차례로군.’

마르타는 끌어 오르는 살기를 억지로 누른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루나는 돌을 박아놓기로 한 장소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튜스에게 받은 은화를 내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말했어야 했는데.

자신처럼 버려진 아이들을 유일하게 챙겨주는 튜스 아저씨가 이상한 사람일 리가 없었다.

어제 만난 마르타 언니가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튜스 아저씨를 배신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쓰렸다.

‘그래. 이따가 말하자. 그게 좋겠어.’

루나는 이 일이 끝난 뒤에 튜스에게 어젯밤의 일을 고백하기로 마음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뭐지…?”

정신을 차리자, 세상이 어두워져 있었다. 너무 깜깜해서 한밤중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렇게 시간이 지났을 리 없는데?’

고민한 시간이라고 해봐야 잠깐이다. 오후에서 갑자기 밤이 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허억!”

이상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태양이 사라진 하늘에 시뻘건 구름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저 구름은 뭐지….”

“루나.”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루나가 고개를 돌렸다. 튜스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 평소와 같은 미소지만 느껴지는 게 다르다. 산에서 맹수를 만났을 때처럼 등골이 오싹했다.

“아, 아저씨?”

루나는 어둑해진 하늘과 새빨간 구름을 가리키며 입술을 떨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별일 아니란다.”

튜스는 정말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 아까 나한테 하려 했던 말이 뭐였지?”

“네?”

“나중에 말해준다고 했던 말이 뭐냐고.”

“그, 그건….”

루나는 입을 떼지 못했다. 어제 마르타가 말한 대로 튜스의 모습이 너무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아, 말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

튜스가 부드럽게 손을 내저었다.

“죽은 자가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으니까.”

“그, 그게 무슨….”

“이제 돌을 박으렴.”

“아저씨?”

루나는 튜스의 지시를 거절하려 했지만, 몸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등을 돌렸다.

‘어…?’

멈추고 싶었지만,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루나. 네게는 고마운 일이 참 많아. 네가 먼저 찾아와준 덕분에 다른 아이들도 날 믿기 시작했지.”

튜스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지만, 그 안에는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한기가 끼어 있었다.

“그래서 교도로 이끌까 했다만, 아쉽게도 몸이 상했더구나. 길어봐야 일 년이었지. 다만 네 동생들은 나름 괜찮아.”

그는 혓바닥을 날름하며 사이한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들은 내가 잘 키워주도록 하지.”

“아….”

안 돼. 안 된다고!

안 된다고 절규를 해보았지만, 입에서 나오는 건 낮은 신음뿐이었다.

루나의 몸은 그녀의 의지를 배신하고 돌을 묻어야 할 장소로 걸어갔다. 딱딱하게 느껴지는 손이 땅을 파고 다시 돌을 들었다.

“으….”

손바닥이 아프다. 가시가 박힌 돌을 잡은 듯 심각한 통증이 일어났다.

“아, 혈석이 네 몸 안에 있는 혈기를 빨아들이는 중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렴.”

튜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흐으….”

“곧 아픔도 없어질 테니까.”

그 말과 달리 고통은 점점 심해졌다.

“아, 그래도 마지막이니 목소리는 듣는 게 좋으려나.”

튜스가 손짓을 하자, 굳어 있던 입이 풀렸다. 다만 나오는 건 당연히 비명이었다.

“아아아악!”

손바닥을 불 속에 집어넣은 듯 지독한 고통에 목이 찢어질 정도로 비명을 질렀다. 정신조차 혼미해져 눈이 내려 감기기 시작했다.

‘제발… 누가 제발 좀….’

그 누구라도 좋았다. 자신이 죽어도 상관없었다. 동생들이라도 저 악마에게 끌려가지 않기를 빌고 빌었다.

하지만 당연히 변화는 없었다. 비 내리는 뒷골목에서 동생들에게 판자를 씌워줄 때처럼 신은 없었다.

망할 놈의 신. 좆 같은 신!

재수 없는 신을 부르짖을 때였다.

캬아아앙!

뒤에서 날아온 무언가에 의해 손에 든 붉은 돌이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누구… 커헉!”

튜스의 비명이 들리는 순간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뒤를 돌았다.

뚝뚝.

튜스의 왼팔이 땅에 떨어져 있었고, 그 앞에 어제 본 마르타가 회색 핏물이 흘러내리는 칼을 들고 있었다.

“개시발 새끼가!”

마르타는 그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욕을 뱉으며 튜스에게 돌진했다.

“크으으윽….”

튜스는 다급하게 뒤로 물러서며 하나 남은 팔을 휘둘렀다. 그의 손아귀에서 회색 기류가 퍼지며 마르타를 막는 벽이 세워졌다.

“으아아아아!”

마르타는 괴성을 터트리며 단숨에 벽을 깨부수고 튜스에게 쇄도했다.

“이 망할 년이!”

튜스는 그 부드러운 인상이 찌그러져 보일 정도로 얼굴을 구기며 기이한 언어를 읊었다.

캬갸갸갸걍!

허공과 바닥에서 붉은 가시가 튀어나와 마르타를 휩쓸었다.

“송충이 같은 새끼! 생긴 대로 추잡한 짓만 저지르는구나!”

마르타는 오러를 두른 몸으로 혈기의 가시를 부수며 검을 내리쳤다.

“흥!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튜스는 끝없이 움직이던 다리를 멈추고, 검지와 중지 손가락을 모아 주술을 읊었다.

쾅! 콰아아앙!

그 말이 정말인지 마르타의 검격이 혈기의 주술에 막히기 시작했다. 혈기의 벽은 점점 두꺼워지고, 가시가 날카롭게 돋아나 그녀의 피부를 찢어발겼다.

“후우욱….”

마르타의 입에서 탁한 입김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흑안이 시뻘겋게 물들며 전신을 휘돌고 있던 갈색 오러가 2배로 부풀었다.

“크아아아!”

그녀는 붉은 눈동자를 번득이며 이전보다 2배는 빠른 속도로 돌진했다.

콰아아아앙!

단숨에 혈기의 벽과 가시를 부수고, 튜스에게 달려들었다.

“크흡!”

튜스는 혈영보를 밟아 뒤로 물러나며 눈매를 좁혔다.

‘광폭화인가….’

육체 능력과 오러가 1.5배 가량 증가하고 눈이 붉어진 걸 보면 확실하다.

사이안 협곡의 전사들이 몬스터와 대전쟁을 벌일 때 사용한다는 광폭화가 분명했다.

‘멍청한 년.’

광폭화에는 아주 큰 단점이 있다. 적아를 가리지 못하고, 바로 앞에 있는 자만 죽일 듯 공격한다는 큰 단점이. 지금도 마르타는 끊임없이 솟구치는 벽만 두드리고 있었다.

“후후.”

튜스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혈기로 만든 혈인을 소환했다.

“크으으으!”

예상대로 마르타는 자신이 아니라, 바로 옆에 소환된 혈인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한 번에 끝내주지.’

혹시 모를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혈기의 벽을 두 겹으로 쌓고, 마르타를 단숨에 찢어 죽일 수 있는 상급 주술을 외웠다.

‘마혈멸창이면 충분하겠지.”

빠르게 마혈멸창의 주술을 외운 뒤 마르타에게 날리려고 할 때였다.

콰아아아앙!

혈인에게 시선을 빼앗겨야 할 마르타가 혈기의 벽을 단숨에 깨부수고 돌진해왔다.

“이미 늦었다!”

튜스가 재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마혈멸창을 쏘아냈다. 광폭화한 검사라면 저 창을 절대 피하지 않는다.

검으로 부수려 할 텐데 그게 저년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후우우웅!

마르타의 붉은 눈동자가 영민하게 번쩍이더니, 쏘아진 창을 흘려낸 뒤 머리 위로 든 검을 내리그었다.

“크흡!”

튜스가 다급하게 혈기의 방패를 일으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뿌드드드득!

마르타의 검이 혈기를 가르고, 튜스의 가슴을 사선으로 터트려버렸으니까.

“끄허억….”

튜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턱을 떨며 뒤로 넘어갔다. 벌어진 상처에서 회색 핏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부, 분명 광폭화였는데….”

“이성을 잃는 것 따위 극복했다.”

마르타는 검을 휘돌리며 튜스에게 다가갔다.

“언제고 같은 벽에 막혀 있을 수는 없지.”

그녀는 뺨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을 손등으로 훔친 뒤에 검을 역수로 잡았다.

“네가 이용한 사람들에게 사죄하며 뒈져라! 이 좆 같은 새끼야!”

마르타는 악을 지르며 튜스의 심장을 내리찍었다.

“크흐, 내, 내가 왜 사죄를 해야 하지. 혈신의 가호를…입게 해줬으니, 오히려 감사를 받아야….”

튜스는 광신도답게 끝까지 반성하지 않았다. 극도의 고통을 느끼며 죽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허어억….”

마르타가 검을 내려놓고 바닥에 자빠졌다. 혈기로 인한 상처가 가득한 상태에서 광폭화와 이성 유지를 한 번에 운용했더니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어, 언니….”

루나가 입술을 꼭 깨물며 다가왔다. 흔들리는 눈빛에는 두려움과 미안함, 당황이 깃들어 있었다.

“이리와!”

마르타는 신경질적으로 손짓했고, 루나가 찔끔거리며 다가왔다.

“손 보여줘.”

“네?”

“귀 막혔어? 손 보여달라고!”

“아, 네.”

루나가 마르타에게 손을 펼쳐 보였다. 파인애플껍데기를 손으로 꽉 쥔 것처럼 손바닥이 시뻘겋게 갈라져 있었다.

“쯧, 내가 먼저 나섰어야 했는데.”

“아, 아니에요! 제가 언니를 믿지 못하고….”

“입 닫어.”

마르타는 인상을 찌푸리며 얼마 남지 않은 오러를 일으켜 루나의 손에 깃든 혈기를 밀어냈다.

“아….”

“처음 만난 사람을 믿는 것도 바보짓이지. 이 멍청아!”

루나는 손을 간지럽히는 부드러운 기운에 어깨를 떨었다.

다정함과 어울리지 않는 거친 목소리. 이젠 제대로 생각도 나지 않는 옛날을 떠오르게 만드는 따스함이었다.

* * *

콰아아아앙!

제천검과 톱칼이 정면에서 맞부딪치며 강렬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주변에 쌓인 화려한 건물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그 사이로 라온과 7사도가 한 번 더 격돌했다.

쩌저저정!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 다섯 번의 격돌. 힘과 힘. 속도와 속도의 경합은 호각 그 자체였다.

“크으으으….”

7사도가 눈을 부라리며 아래에서부터 톱칼을 올려 그었다. 대해에서 파도가 일어나듯 거대한 혈기가 치솟았다.

고오오오!

라온이 차디찬 미소를 흘리며 진혼검을 내리그었다. 단검에서 뻗어 나온 예리한 요기와 묵직한 강기가 어우러지며 강렬한 빛을 뿌렸다.

쿠와아아아앙!

오러와 혈기의 충돌에 지축이 뒤틀리고, 허공에 비틀어짐이 일어났다.

터엉!

라온은 검을 맞대고 있던 7사도의 복부를 걷어찼다. 7사도가 고무공처럼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네놈이….”

7사도는 자존심이 상한 듯 이를 바득 갈았다.

“너도 느꼈겠지.”

라온이 제천검을 어깨에 걸친 채 7사도에게 다가갔다.

“네가 불렀던 튜스라는 놈의 숨이 끊어진 거.”

피식 웃으며 뒤를 가리켰다. 광풍단 2조와 3조에게 쓰러진 백혈교도의 시체도 거리에 가득했다.

“이제 남은 건 네놈뿐이다.”

라온이 턱을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회식을 해야 하니, 빨리 끝내도록 하지.”

“큭, 크하하하하!”

7사도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광소를 터트렸다. 실눈을 치켜뜨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래. 인정해주지. 네놈의 계략, 전략 그리고 그 무력까지. 모두 감탄이 나오는 수준이다.”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과는 격이 다른 기운을 두른 채 서늘한 안광을 쏘아냈다.

“다만 네놈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다.”

“잘못 아는 거?”

“그래. 저 주술은 말이야. 술자가 죽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야.”

7사도가 톱칼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쥐고, 고속으로 무언지 알 수 없는 진언을 읊었다.

멈출 새도 없이 흘러간 진언이 퍼진 순간 상공에 가득 찬 혈기의 먹구름이 크게 약동했다.

“이제, 혈현괴진은 폭발한다.”

그의 미소와 함께 혈기의 먹구름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며 무시무시한 기운을 일으켰다.

거대하고 또 거대하다. 하늘을 가득 채운 혈기의 구체가 끝없이 확장되며 천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저게 폭발하면 이곳은 통째로 날아갈 거다. 아마도 멀쩡한 나와 걸레짝이 된 너만 남겠지.”

7사도는 양손을 펼친 채 키득거렸다.

“걱정하지 마. 네놈의 피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아 마셔줄 테니까.”

“아까 내가 했던 말을 잊었나?”

“뭐?”

“너보다 저 주술을 더 잘 안다고 했을 텐데.”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만화공을 극성으로 일으켰다.

쿠웅!

진각을 밟아 땅에서부터 올라서는 진중한 울림과 강대한 열기를 진혼검에 담아 상공으로 쏘아냈다.

콰르르릉!

시뻘건 불꽃과 샛노란 요기를 두른 진혼검이 거꾸로 솟구치는 벼락이 되어 혈기가 끝없이 모여드는 구체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다만 진혼검이 꿰뚫었음에도 혈기의 구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더 기운을 증폭시켰다.

“크하하하하!”

7사도가 가라앉는 혈기를 가리키며 비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요기가 깃들었다고 해도 고작 단검 한 자루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저 구체에는 천 명 이상의 피가 깃들어 있다! 네놈 따위가 지울 수 있는 게 아니야!”

라온은 담담한 눈빛을 빛내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똥폼 잡는 거 좋아하던데, 한 번 빌리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시원하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혈현괴진이 폭풍을 맞이한 듯 파르르 떨렸다.

찌지지지직!

수천 마리의 새가 우는 듯한 굉음이 터지며 혈기의 구체가 완전히 멈춰섰다,

우우우웅!

칼날이 거칠게 회전하는 파공음과 함께 혈현괴진에 실금이 그어졌다. 얇디얇은 금이 거미줄처럼 붉은 구체 전체로 번졌다.

콰아아아아앙!

갈라진 금 사이로 노란빛이 뿜어지며 혈현괴진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대륙 전체를 울리는 듯한 폭발은 그란세빌 상공을 벗어나 도시의 바깥으로 쏟아져 내렸다.

“7사도.”

라온은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혈기의 빛무리를 뒤로하고 7사도 앞에 섰다. 경악을 담은 채 쩍 벌어진 놈의 눈을 보며 미소를 흘렸다.

“난 말이다. 한 번 이긴 상대에겐 절대 지지 않아.”

제천검을 고쳐 쥐고 그대로 땅을 박찼다.

쩌어어어엉!

회전하는 불꽃을 칼날에 담아 톱칼을 내리치며 7사도를 밀어붙였다.

“크으으윽!”

7사도는 당황한 와중에도 정확한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감정의 흔들림은 그대로 전해져왔다.

라온은 태화보를 밟고 앞으로 짓쳐 들어 제천검으로 서리연을 그었다. 푸른 빛무리가 은빛 궤적을 따라 질주하며 허공을 스쳤다.

“그건 알고 있는 검술이다!”

7사도가 톱칼을 사선으로 그어 내리며 서리연의 두 검격을 모조리 차단했다.

“그럼 이건?”

라온이 허공에 왼손을 뻗었다.

처어억!

혈현괴진을 부수고 돌아온 진혼검이 그의 손에 역수로 잡히며 오싹한 검명을 터트렸다.

초근접 거리에서 번진 혈우에 7사도의 몸이 일순간 마비되었다.

“크윽!”

7사도는 재빨리 몸을 빼냈지만, 라온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진혼검을 내질렀다.

푸카아아악!

서리연을 맞고 갈라졌던 7사도의 상처가 또 한 번 뜯겨나가며 탁한 핏물을 뿌렸다.

“끄으으….”

“약속하지.”

허리를 숙인 7사도를 굽어보는 라온의 두 눈동자에 붉은 뇌광이 어렸다.

“이곳이 네놈의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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