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1화
라온은 골목 앞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끄으응….
라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앓는 소리를 흘렸다.
-약속이 다르지 않느냐!
‘문 닫았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녀석이 가길 원했던 바비큐 식당은 새벽까지 영업을 했는지 문을 닫은 상태였다. 낮보다 밤이 활기찬 그란세빌답게 아침에 문을 연 식당이 많지 않아 선택권이 없었다.
-네놈의 주둥아리를 절대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거늘 또 속았느니라!
라스가 테이블에 올린 손을 파들파들 떨었다.
-이제 다시는 네놈의 말을 믿지 않….
‘일 끝나면 여기서 맛있다는 음식은 다 먹어볼게.’
-거짓말! 거짓말이 분명하느니라!
‘너도 알다시피 얼마 안 남았잖아.’
라온이 손가락을 위로 들었다. 식당 천장이 아니라, 그 위에 있는 주술진을 가리켰다.
‘어젯밤에 저 주술진이 개방됐어. 즉, 오늘 저 주술이 발동될 거야.’
어젯밤 식당에 들어가기 전에 느꼈던 요기와 혈기는 주술진이 개방되는 순간에 터져 나온 힘의 파편이다. 주술이 열렸으니, 그 안에 깃든 기운이 낭비되지 않게 빠른 시간 내에 분명 주술을 발동시킬 것이다.
-본왕이 보기에 저 기운은 아직 완벽하지 않느니라. 그릇이 다 채워지지 않았어.
‘맞아. 다만 제물이 여기에 있잖아.’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네놈이 제물이라고?
‘그래. 놈들은 분명 내가 온 걸 알고 있어.’
현 상황을 보면 암시장에도 백혈교도가 숨어 있는 건 확실하다. 7사도를 꺾고, 4사도를 죽여 자신을 원수처럼 생각하는 백혈교가 자신에 관한 정보를 놓칠 리 없었다.
‘나를 노리고 곧 공격해오겠지. 얼마 안 걸릴 테니까. 조금만 참아.’
-저, 정말이냐?
라스는 20초 전에 말했던 것도 잊어버리고 눈을 꿈뻑였다.
‘그럼.’
-끄으응….
“식사 나왔습니다.”
라스의 의심의 눈빛을 빛낼 때 점원이 계란과 햄이 들어간 샌드위치 2개를 가져왔다.
“감사합니다.”
라스와 대화를 하는 중이었기에 일단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뭐 하는 것이냐.
‘아니, 이번엔 정말 믿어도….’
-입 닫고 일단 먹기나 해라. 본왕의 뱃가죽이 등에 붙었으니까!
‘하.’
라온이 헛바람을 흘렸다. 나중에 먹을 음식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는데, 라스는 일단 눈앞의 샌드위치가 급한 모양이다. 이게 정말 마왕이 맞나 싶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샌드위치를 한 입 씹었다. 바삭하게 구워진 빵에 두꺼운 햄과 치즈 그리고 부드러운 계란이 잘 어우러져 고소하면서도 풍만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괜찮은데.’
-크으, 시장이 반찬이라더니, 이것도 나쁘지 않구나.
라스는 샌드위치 하나에 기뻐하며 헤벌쭉 웃었다.
-빵이 삐뚤어졌지 않느냐! 밸런스가 무너지니까. 빵 사이에 제대로 햄을 끼워넣거라!
“음….”
라온이 즐거워하는 라스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몹쓸 짓을 하는 기분이네.’
샌드위치 하나에 이리 열정적이라니, 이번만큼은 일을 끝낸 뒤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줘야겠다.
제일가는 식당 하나를 빌려서 광풍단 전체 회식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그거나 확인해볼까.’
라온은 라스가 폭주하는 통에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보상을 불러왔다.
<주술 해석사>
고난이도 주술을 스스로 해석하여 풀어낸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
능력 : 모든 능력치 +5.
‘능력치까지 붙었네.’
단순히 이름만 있는 칭호라고 생각했는데, 능력치를 올려주는 효과도 있었다. 뜻하지 않은 기쁨에 미소가 지어졌다.
<진법 해석(1성)>
검진, 무진, 주술진 등 모든 진법의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과 집중력이 상승한다.
진법해석은 추가 능력치는 없는 대신 여러 진법의 효과를 살필 수 있는 능력을 상승시켜주었다. 성장형이니, 제대로 키운다면 능력치보다는 훨씬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거기에 능력치까지 올랐지.’
마지막으로 모든 능력치 5포인트까지. 전투를 하기 직전에 이런 보상을 주다니, 무조건 이기라고 승리의 여신이 축복을 내리는 것 같았다.
-크으….
샌드위치에 기뻐하던 라스가 메시지를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고작 주술을 해석했다고 저런 보상을 주다니….
‘생각해보면 주는 게 당연해.’
라온이 손을 휘휘 저었다.
‘시스템은 이룬 업적에 따라 보상을 주잖아. 이번에 내가 어마어마한 규모의 주술진을 해석했으니, 그에 합당한 보상이 오는 건 당연한 거지.’
시스템은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무학이 아니라고 해도 업적이라 부를만한 일을 해냈기에 그에 따른 보상을 주었을 뿐이었다. 얻은 보상들도 주술이나 진법에 관한 것들이었다.
-끄으윽….
라스는 할 말이 없는지 이만 바득 갈았다.
-본왕이 돌아가면 시스템부터 깨부숴버릴 것이니라! 다시는 안 쓸 것이니라!
‘그러던가.’
라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라스가 다시 돌아갈 때는 자신의 일이 모두 끝났을 때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다 먹었으니, 가볼까나.’
빈 접시를 앞으로 밀어놓았다.
-뭐, 뭐야! 고작 샌드위치 하나 먹고 어딜 가는 것이냐!
‘애들한테.’
라온은 음식값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일어섰다.
‘백혈교를 깨부술 계획을 알려줘야 하거든.’
* * *
마르타는 라온에게 지시를 받은 이후부터 루나를 쫓았다. 전에 말했던 대로 루나는 동생 두 명과 함께 판잣집에서 살고 있었다.
충분한 돈을 주었으니, 오늘은 잘 먹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상납금으로 모두 빼앗겼는지 아이들은 딱딱하고 마른 빵으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언니. 언니도 먹어.”
루나의 여동생이 빵 반쪽을 내밀었다. 더 어린 남동생도 코를 훌쩍이며 먹고 있던 빵을 건넸다.
“난 밖에서 먹고 왔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희부터 먹어.”
루나는 옅게 웃으며 동생들에게 다시 빵을 밀어주었다.
마르타는 그런 루나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당했군.’
얼굴에 못 보던 멍 자국이 있는 걸 보니, 상납을 하러 갔다가 상납금 이상으로 돈을 뺏기고 얻어맞기까지 한 것 같았다.
‘망할 것들….’
동생들을 보며 배를 움켜쥔 루나를 보니, 이전의 자신이 떠올라 살짝 열불이 돌았다.
‘조지고 올까?’
결국 그거 내 돈이잖아.
꼬맹이들이 얻어맞고 마른 빵으로 배를 채우는 것을 보고 있으니, 열불이 터진다. 적당한 핑계를 대며 조지고 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아이들이야?”
“허업!”
고민하고 있을 때 뒤에서 라온의 담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겁을 할 뻔했지만 라온이 입을 막아준 덕분에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이 망할 자식아! 기척 좀 드러내고 와!”
“여기서 그럴 수는 없잖아.”
라온은 부드럽게 웃으며 기막을 펼쳐 소리가 빠져나가는 걸 막았다.
“저 여자아이가 루나 맞지? 상처만이 아니라, 전신에 혈기가 깃들어 있네.”
그는 루나를 보며 살짝 눈매를 좁혔다. 예상대로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전신에 혈기가 있다고? 그게 보여?”
“지금 좀 상태가 좋은 편이라.”
“음….”
난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루나의 상처를 보지 않았다면 혈기가 있다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이 거리에서 루나의 신체 내부의 혈기를 느끼는 라온이 괴물처럼 보였다.
“저 아이가 혈기가 깃든 돌을 묻은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잖아. 돌을 묻으며 혈기에 노출되어서 몸에 혈기가 쌓인 상태야. 통제가 안 되어서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지.”
“그,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건데?”
“지금은 괜찮지만, 주술이 발동되는 순간 죽을 거야.”
“죽는다고?”
“그래. 지금 주술진은 완벽한 상태에서 발동되지 않아. 가까이 있으면서 혈기에 많이 노출된 저 아이들부터 먹이로 삼겠지.”
라온은 섬뜩한 눈빛을 발하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바, 방법은? 이대로 놔둘 거 아니지?”
“그 사이에 정이라도 들었어? 평소와는 다르네.”
“시끄럽고!”
마르타가 손을 내리쳤다. 지그하르트에 들어가기 전 자신을 보는 듯하다는 말은 부끄러워서 할 수가 없었다.
“위험할 수도 있어.”
“상관없어.”
저런 아이들마저 희생양으로 삼는 백혈교의 계획을 깨기 위해서라면 어떤 상처를 입더라도 상관없었다.
“좋은 눈빛이네. 그 정도 각오라면 믿어줘야지.”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 튜스라는 놈이 저 아이들을 호출할 거야. 그럼 너와 1조는 아이들을 하나씩 미행해서….”
* * *
암시장 그란세빌 지부장 데닝로즈는 핏물이 말라붙은 지하를 걸었다.
‘이곳은 무너졌을 텐데.’
처음 그란세빌에 배치받았을 때 직접 이 길이 막힌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지하는 뻥 뚫려 있었고, 바닥에는 말라붙은 핏물 자국이 가득했다.
‘아니, 이 길이 무너지고 말고를 떠나서….’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제 발로 걷고 있지만, 왜 여기에 왔는지, 왜 이 복도를 걸어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기분. 걸음을 멈출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선택지는 그저 걸어가는 것뿐이었다.
피가 말라붙어 찐득한 지하를 한참 동안 걷자, 붉은빛이 새어 나오는 둥근 통로가 보였다. 여전히 이유를 모르는 채로 발은 그 통로를 넘었다.
월광이 쏟아지는 듯한 은은한 빛이 퍼지는 거대한 공동. 구역질이 나올 정도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는 공간의 중심에 젊은 미남자가 앉아 있었다.
‘저자는….’
데닝로즈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보라색 머리카락에 가는 실눈. 그리고 가슴에 새겨진 검흔까지. 암시장 지부장으로서 모를 수가 없는 인상착의. 백혈교의 7사도였다.
“같은 도시에 살면서 직접 보는 건 처음이로군. 데닝로즈.”
7사도가 몸을 일으키며 다정해 보이는 눈웃음을 지었다.
“아….”
데닝로즈는 본인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7사도가 무서워서도, 두려워서도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이곳에 온 것처럼 몸이 반응했다.
“처음부터 굽히는 여자는 별론데.”
7사도는 피식 웃으며 다가와 데닝로즈의 머리 앞에 섰다.
“끄윽….”
데닝로즈가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일어나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팔다리가 돌이 된 것처럼 무거웠다.
“왜?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이나 봐?”
“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억지로 혀를 돌려 말했다.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서 말하는 기분이었다.
“글쎄?”
7사도가 턱을 삐딱하게 튼 채 손가락을 까딱이자, 데닝로즈가 머리를 들어 올렸다.
“너희들이 왜 우리를 발견 못 했는지 알려줄까?”
“세작 때문이겠지….”
데닝로즈가 7사도의 가는 눈매를 보며 탁한 숨을 내쉬었다. 라온의 정보가 빠져나간 걸 보고 세작이 있다는 걸 확신했다.
‘그것도 간부.’
라온에 대한 정보는 극비리였기에 간부가 아니라면 조회할 수조차 없었다. 그자를 찾기 위한 계획을 다 짜놨는데 실행조차 못 하고 여기서 죽게 되다니, 속이 갑갑해졌다.
“아예 머저리는 아니로군.”
7사도가 만족스럽다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게 누굴까?”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공동의 뒤편에서 백색 로브를 두른 다섯 사람이 걸어 나왔다.
“아….”
데닝로즈가 눈을 부릅떴다. 지금 나온 다섯 명은 모두 암시장의 인원이었고, 그중 한 명은 간부였다. 그것도 가장 세작이 아니길 바랐던 암시장 지부와 직통으로 연결된 골동품점을 운영하는 필립이었다.
“필립 당신이 왜….”
질문을 해도 그들은 답을 하지 않았다. 7사도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내가 왜 너한테 이런 걸 말해주는지 알아?”
“죽일 생각이겠지.”
“아니야.”
7사도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네 몸은 이제 네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 그럼 지금 내 상태가….”
“그래. 내가 조종하는 중이지.”
그는 실로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하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너만이 아니야. 저 지상에 있는 벌레들 모두 내 손아귀에 있지. 죽으라고 명령하면 스스로 심장에 칼을 찔러 자살할 거다.”
“대, 대체 무슨….”
“오늘부터 이 그란세빌은 거대한 양식장이 될 거야. 유흥에 빠진 부나방들은 본인들이 죽는지도 모른 채 돈과 피를 가져다 바치겠지. 그걸 위한 주술이다.”
7사도가 천장을 가리켰다. 은은한 빛 속에서 거대한 혈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걱정 마. 너는 이 그란세빌의 지부장으로서 계속 살아줘야 하거든.”
“으….”
데닝로즈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세뇌 같은 게 아니라, 아예 반항을 할 수가 없기에 암시장 본부에 보고조차 할 수 없었다. 평생 이대로 7사도의 지배 아래에 살게 될지도 모른다.
“데닝로즈.”
7사도가 두려움에 짓눌린 데닝로즈의 눈을 굽어보며 미소를 지었다.
“첫 임무를 내리마. 라온 지그하르트를 데리고 와라. 놈이 이 양식장의 마지막 퍼즐이 될 테니까.”
* * *
라온은 숙소 뒤편에서 능력치가 오른 육체와 오러를 점검한 뒤 고개를 들었다. 어둑한 하늘. 어느새 해가 떨어져 있었다.
노을이 질 시간도 아니건만 온 세상이 껌껌했다. 달도, 별도, 구름도 없는 괴기스러운 하늘이었다.
저벅.
뒤편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암시장 지부장 데닝로즈가 걸어오고 있었다.
“라온 님.”
데닝로즈는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예의 있게 고개를 숙였다.
“백혈교도를 잡았습니다.”
“백혈교도?”
“예. 심문을 할 예정인데, 함께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죠.”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벽에 걸어두었던 코트를 걸쳤다.
“감사합니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데닝로즈의 뒤를 따라 그란세빌의 대로로 향했다.
화아아아!
특색 있는 건물들과 화려한 조명은 여전히 찬란한 빛을 뿜어냈지만, 어제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인간. 수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대로에 단 한 명의 사람도 없었다.
데닝로즈는 아무 관심 없는 듯 같은 보폭과 속도로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간 그녀가 멈춰선 곳은 대로의 중심이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많이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곳이지만, 지금은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라온 님.”
데닝로즈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장미가 그려진 검은 안대 밑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미안해요.”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건물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밖으로 튀어나왔다.
대충 세어봐도 백이 넘는 사람들이 눈동자에 회색빛을 돋아낸 채 라온을 에워쌌다.
그 뒤로 새하얀 로브를 입은 백혈교도들이 각종 무기를 든 채 위협하듯 혈기를 일으켰다.
쿠르르르.
라온이 사람들의 살의를 느끼고 눈살을 찌푸릴 때 데닝로즈의 옆에서 허연 웅덩이가 하나 돋아났다.
맥주 거품처럼 꿈틀거리던 액체는 느릿하게 솟구쳐 사람의 형태가 되었다. 보라색 머리카락에 실눈.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7사도가 자신감으로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라고 해야겠지.”
7사도가 코트를 툭 털며 새하얀 손을 들어 올렸다.
“라온 지그하르트.”
“7사도.”
라온은 눈썹을 살짝 내린 채 7사도를 바라보았다.
“네 짓이었나.”
“그래. 모두 내 작품이지. 네가 이리 시기적절하게 와줄 줄은 몰랐다만.”
그가 키득 웃고서 양팔을 쫙 펼쳤다.
“어때 내 환영 인사는 마음에 드나?”
“인사라….”
라온이 눈매를 좁히며 등에 매어둔 진혼검의 검병을 쥐었다.
“아아, 아직 내 말은 끝나지 않았어.”
7사도가 여유롭게 고개를 저었다.
“이들은 말이야. 교도가 아니야.”
그가 손가락을 들어 올려 하늘을 가리켰다.
쿠구구구구!
불의 고리를 운용하지 않았음에도 거대한 혈기의 먹구름이 눈에 보였다.
“이제 알았나?”
7사도는 당황한 듯한 라온의 표정을 보며 더 짙은 미소를 그렸다.
“저들은 저 주술의 영향으로 자신도 모르게 혈기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우리 교도가 아니라 이곳에 살던 평범한 벌레들이지.”
그가 옆에 있는 데닝로즈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 올렸다.
“…….”
데닝로즈는 머리카락이 뽑힐 정도로 고개가 높게 들렸음에도 신음 한 번 흘리지 않고,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네가 가진 단검의 효용은 알고 있다. 검명으로 혈기를 가진 교도에게 죽음을 안겨주는 노래를 부른다지? 여기서 그걸 사용했다간 저 벌레들도 모두 죽게 될 거다.”
7사도가 데닝로즈부터 그 도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가리켰다.
“라온 님….”
7사도가 풀어주었는지, 데닝로즈에게서 꽉 막힌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평온한 표정에서 나오는 절박한 목소리. 소름이 돋아오를 정도로 기괴했다.
“설화검협이라. 협사는 남을 위해 검을 든다고 들었다. 넌 어떨지 궁금하군. 너 자신을 위해 죄 없는 자들을 죽일지. 아니면 도망칠지.”
그는 선택권을 주겠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가 울리자, 사람들이 품에서 여러 무기를 꺼내 라온에게 다가갔다. 회색으로 차오른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들거렸다.
“협사? 난 그런 이름을 바란 적 없다.”
라온이 단호하게 진혼검을 뽑았다.
콰르르릉!
붉게 빛나는 칼날이 드러나며 천둥이 치는 듯한 요기의 울부짖음이 대로 전체를 울렸다.
“끄윽….”
“커헉!”
“어흑….”
혈기를 지닌 일반인도, 그 뒤를 지키던 백혈교도도 모조리 바닥으로 쓰러져 피를 뿌렸다.
“크하하하하하!”
7사도가 이마를 부여잡은 채 광소를 터트렸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그게 네놈이지! 이 세상은 진짜 너를 몰라. 잔인하고 지독한 네놈의 본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그는 로브를 풀어헤쳐 진혼검에 베였던 가슴의 검흔을 드러냈다.
“자, 시작하자. 네놈의 피를…어?”
7사도는 바로 옆에 있는 데닝로즈를 보며 턱을 떨었다. 그녀는 죽지 않고, 가는 숨을 쉬고 있었다.
데닝로즈만이 아니다. 혈기를 집어넣었던 인간들은 모두 살아서 숨을 쉬었고, 그 뒤를 지키던 교도들만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너 대체….”
7사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동자를 뒤르륵 굴렸다.
“너희는 선을 넘었어.”
“뭐?”
“앞으로 백혈교는 내 그림자만 봐도 도망치게 될 거다.”
라온이 진혼검을 들어 올려 7사도를 겨누었다. 붉은 눈동자와 같은 색으로 물든 칼날이 요요롭게 빛났다.
“이 땅에 있는 혈귀는 단 한 마리도 살려두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