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0화
전생에 데루스 로베르트와 마티오의 대화를 지나가듯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백혈교주가 진정으로 까다로운 이유는 강대한 무력이 아니라, 더러운 주술 때문이지. 어디서, 어떻게 발동될지 모르는 주술의 위협에 제대로 접근하기도 힘들어.]
데루스는 그리 말하며 짧게 혀를 찼었다.
[특히 미리 주술진을 설치해둔 곳에서 백혈교주와 싸우는 건 날 죽여달라고 외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얼마 전에 리텐 마을에 보냈던 그림자들이 전멸한 거 기억하나?]
[예.]
마티오는 목각인형처럼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것도 백혈교주의 주술이다. 주술진 안에 있는 인간들에게 혈기를 박아넣어서 술자의 명령을 따르는 제물로 만든 뒤에 양과 순도가 높아진 혈기를 산채로 뽑아내서 먹어 치우지. 혈기의 기생이라니 굉장하지 않나?]
데루스는 아름답고 효율적인 방식이라며 마티오에게 그 진법을 분석하고 연구하라 지시했다.
물론 실패했지만, 그때 어깨너머로 배운 덕분에 주술과 진법에 대한 지식을 채울 수 있었다.
라온은 그날의 대화를 되새기며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해. 그 주술이야.’
형태와 방식은 당시에 들었던 것과 많이 달라졌지만, 그 목적은 변하지 않았다.
그란세빌 전체에 설치된 진법은 이 안에 있는 인간들에게 혈기를 집어넣은 뒤 훗날 더 커지고, 순도 높아진 기운을 뽑아먹기 위한 주술이었다.
말 그대로 양식장. 이 그란세빌은 백혈교도가 혈기를 키우기 위한 인간 양식장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전생에 사냥개로 살며 수많은 더러운 짓을 보고, 직접 저지르기도 했지만, 이건 격이 다르다.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전부 제물이 된다니….’
눈앞에 있는 수많은 사람은 주술진이 완성된 순간 백혈교도의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본인은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혈기의 의지를 따른 채 손님의 상에 올라가길 기다리는 수조 속 물고기가 될 것이다.
‘이대로 놔둘 수는 없어.’
실비아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지그하르트 검사답게 약자를 위해 검을 들었으면 좋겠다던 그녀의 유일한 부탁이.
‘아니지.’
실비아의 부탁을 떠나서 이걸 가만히 지켜보는 건 검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실격이었다.
“아하하하!”
“오늘 끗발이 좋네. 딱 한 판만 더 하자!”
“술 더 없어? 전부 가져와!”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또 보자고.”
라온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운 그란세빌의 중앙대로에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뭉게구름처럼 퍼지는 혈기의 안개를 노려보며 마음을 굳게 다졌다.
‘깨부숴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 * *
마르타는 무릎을 꿇어서 입을 다문 여자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름이 뭐야?”
상처에 관해서 말을 하지 않으니, 일단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루나.”
“루나? 내가 아는 멍청한 애랑 이름이 비슷하네.”
“멍청한 애?”
“그래. 1년 365일 눈이 풀려 있는 바보가 있거든.”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진짜 있어.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볼 수 있을 거야.”
마르타는 항상 멍만 때리는 루난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내 이름은 마르타야.”
“마르타….”
“루나. 정말 중요한 일이라서 그래. 그 상처가 어떻게 생긴 건지 말해줄 수 없어?”
“…….”
루나는 아이다운 모습을 보이다가도 상처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거 얼마 안 된 상처잖아. 누구한테 베인 건지 좀 알려줘.”
마르타가 루나의 팔에 새겨진 상처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벌어진 흔적을 보면 검 같은 날붙이에 당한 것 같았다.
“누, 누구한테 당한 건 아니에요. 그리고….”
루나는 말을 할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후우.”
마르타가 한숨을 푹 내쉬고서 루나에게 돌려받은 지갑을 가볍게 던졌다가 받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가자.”
“어, 어디를요?”
“어디긴 어디야 당연히 경비대지. 소매치기를 현장에서 잡았는데 그냥 둘 수는 없잖아? 아! 아니다. 그 전에 그 녀석한테 먼저 가야겠네.”
“그 녀석?”
“그래. 인간을 개로. 그것도 미친개로 만드는 또라이가 하나 있거든.”
루나를 내려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아, 안 돼요! 전 오늘 꼭 돌아가야 한다구요!”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제발요! 동생이 있어요!”
루나는 애절한 눈빛으로 소매를 잡았다.
“음….”
마르타가 입술을 살짝 씹었다.
‘그래서였나.’
고수에게 잡혔다간 바로 손목이 날아가기에 일반적으로 소매치기를 할 때 용병이나, 무인은 건드리지 않는 게 상식이다. 아직 어려서 모르나 싶었는데, 알면서도 급했던 모양이다.
“상납금 때문에?”
“네. 바로 내일이라….”
루나는 턱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지닌 부끄러움과 간절함이 피부에 와닿았다.
“좋아. 말해주면 이거 전부 줄게.”
마르타가 손에 쥐고 있던 지갑을 가리켰다.
“그, 그걸 전부요?”
“그래. 전부.”
“으음….”
루나의 눈동자가 좌우로 사정없이 굴러갔다. 두려움, 민망함, 불안감으로 번들거리던 눈동자가 천천히 멈췄다.
“…알겠어요.”
“좋아.”
마르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지갑을 루나에게 던졌다.
“후….”
루나는 받은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이건 누구에게 맞은 게 아니에요.”
“뭐?”
“돌을 땅에 묻는 일을 하다가 돌멩이 끝에 베인 상처에요.”
그녀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매만지며 눈매를 찡그렸다.
“돌멩이를 묻어?”
“네. 지정해준 장소에 돌멩이를 묻으면 돈을 주거든요. 그 일을 하다가 베인 상처에요. 그리고 이거 꽤 오래됐는데 잘 안 낫는 거예요.”
마르타가 루나의 팔을 자세히 살폈다. 듣고 보니 검보다는 두꺼운 날붙이에 베인 듯한 상처였다. 날카로운 돌멩이라면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그 돌은 누가 설치하라고 했지?”
“그건….”
“말해주기로 했잖아.”
“튜스라는 상인 아저씨예요.”
“상인?”
“네. 집 없는 아이들에게 밥이랑 간식을 사주시고, 머물 곳도 만들어주는 분인데, 가끔 용돈을 주면서 일을 시키시거든요.”
루나는 튜스에 대해 말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호감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 돌은 왜 묻으라고 했는데?”
“마을을 악령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돌이라고 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몰라?”
“아뇨. 알고 있는데, 이젠 그러려니 해요. 워낙에 미신을 잘 믿는 분이라. 다만 요즘은 아저씨가 말하고 다니지 말라고 하셔서….”
“그랬군.”
마르타는 루나의 말을 들으며 주먹을 쥐었다.
‘잡았어.’
튜스라는 놈은 백혈교가 확실했다. 아이를 이용하여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은 채 이 땅에 더러운 짓을 벌인 게 분명했다.
‘처음에는 가짜 돌을 주고, 관심이 사라진 지금은 혈기가 깃든 돌을 묻어뒀겠지.’
다른 사람들이 의심할 법한 초기에는 평범한 돌멩이를 묻게 하고, 관심이 떨어진 지금에는 진짜 혈기가 깃든 돌을 줬을 것이다. 대가리를 잘 굴리는 놈이었다.
“루나. 고마워.”
“하아….”
루나는 죄책감에 물든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네가 이 마을을 구했을지도 몰라.”
“네? 구하다뇨?”
“나중에 알게 될 거야.”
마르타가 옅게 웃고서 루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 덕분에 진짜 악령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거든.”
* * *
라온은 마르타의 이야기를 듣고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너무 늦길래 묶어둬야 하나 싶었는데, 이런 정보를 물어올 줄이야.”
마르타는 누구보다 큰 실마리를 가져왔다.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기에 놀라움이 더욱 컸다.
“저기 입만 떠드는 녀석이랑, 졸던 녀석이랑은 다르지.”
마르타가 버렌과 루난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크윽!”
“…….”
버렌이 분한 듯 인상을 찡그렸고, 루난은 그러려니 눈을 꿈뻑였다.
“이게 루나가 말한 돌이야.”
“나?”
“너 말고!”
마르타는 고개를 돌린 루난에게 손을 휘젓고서, 라온에게 손바닥만 한 돌멩이를 내밀었다.
“나한테는 개뿔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흠….”
라온이 마르타가 준 돌을 살피며 눈매를 좁혔다.
‘확실히 있군.’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운용하자, 돌멩이 깊숙한 곳에 깃들었던 혈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 미세해서 감각이 높아진 지금이 아니라면 발견하지 못할뻔했다.
‘어린아이를 이용하다니.’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야.
버려진 아이들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은 없다. 암시장도 아이들의 미래는 수많은 길로 뻗어있다는 핑계로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적당한 나이가 되거나, 직업을 가지게 된다면 모를까. 거지와 다를 바 없는 아이에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거기다 사람의 심리도 이용했지.’
처음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돌을 묻게 시켜서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는 착한 상인을 연기한 뒤 모든 의심을 벗어난 뒤에 혈기가 깃든 돌을 설치시킨 걸 보면 조심성도 많은 놈이었다.
‘그 진법에 사용했겠지.’
튜스라는 놈은 그란세빌 상공에 있는 진법을 보완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시켜 이 돌멩이를 묻은 게 분명했다.
“나도 알아낸 게 있어.”
라온은 버렌과 마르타, 루난을 앉힌 뒤에 지금까지 알아 온 내용을 말해주었다.
“그, 그런 미친 짓을….”
“으….”
버렌이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었고, 항상 담백하게 반응하는 루난도 검을 당장 뽑을 정도로 분노했다.
“루나에게 가야겠어. 만약 튜스에게 날 만난 사실을 밝힌다면 위험해!”
마르타가 당장 뛰어나갈 듯 몸을 돌렸다. 루나에게 말을 하지 말라고 했고, 그 답을 들었지만 불안해졌다.
“마르타. 나가는 건 좋은데, 네가 진짜 살펴야 할 건 루나가 아니야.”
라온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튜스라는 놈이 곧 루나를 부를 거야. 그놈을 감시해.”
“튜스가 루나를 부른다고?”
“그래. 진법의 완성까지 얼마 남지 않았거든.”
하늘에 떠 있는 혈기의 뭉치를 볼 때 진법이 발동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튜스라는 놈의 조심성을 생각해보면 이번에도 아이들을 움직일 것이다.
“마르타와 1조는 튜스의 위치를 파악한 후 감시, 버렌과 3조는 1조를 지원해. 루난과 2조는 하던 대로 따로 백혈교를 추적해.”
“알겠어.”
“응.”
버렌과 마르타, 루난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나도 가야겠군.’
라온은 자그마한 기척도 없이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새벽이건만 그란세빌의 밤은 여전히 화려하고 시끄러웠다. 누구에게도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낡은 주점의 옥상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깨끗하네.”
이렇게 보면 자그마한 먹구름도 끼어 있지 않을 정도로 맑은 밤하늘이었다. 피식 웃고서 불의 고리를 운용하자, 깨끗한 하늘을 가득 메운 혈기의 구름이 시야에 가득 찼다.
라온이 붉은 운무를 비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 * *
은은한 빛이 번져 나오는 지하 공동.
7사도가 손을 뻗어 핏물로 가득한 공동 바닥을 짚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지자, 핏물이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열기를 담은 핏물은 살아 있는 뱀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며 바닥에 육망의 선을 그렸다. 우측의 각이 살짝 찌그러진 그란세빌과 같은 형태였다.
7사도는 핏물로 그려진 육망성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튜스.”
“예.”
뒤에 서 있던 튜스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쪽은 완성됐다. 네 쪽은?”
“준비는 다 끝냈습니다. 술법을 조율한 뒤에 내일 밤 혈석을 설치하면 됩니다.”
튜스의 어조는 마치 신을 영접하듯 극도로 정중했다.
“이번에도 그 애새끼들을 이용하는 건가?”
“예. 사전 작업을 해둔 덕분에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방법입니다.”
“머리는 더럽게 잘 쓴다니까.”
7사도가 턱을 삐딱하게 틀며 피식 웃었다.
“그 아이들에겐 상당한 양의 혈기가 깃들었을 테니, 먹는 맛이 있겠군.”
“죄송하지만, 그 아이들은 먹이가 될 수 없습니다.”
“뭐?”
“주술이 완성되는 순간 혈석에 생명력이 빨려 미라가 될 테니까요.”
튜스는 아이들의 목숨을 무슨 길가의 돌멩이처럼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크하하하하!”
7사도가 벽에 등을 기대며 광소를 터트렸다.
“아이를 아끼는 것 같아서 놀려본 건데, 그럴 필요가 없었군.”
그는 튜스를 굽어보며 히죽였다.
“넌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운 교도다. 항상 혈신의 축복이 함께 하겠어.”
“과찬이십니다.”
튜스는 감격한 듯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라온은 뭘 하고 있지?”
“어제와 같습니다. 교도를 수색하는지 그란세빌을 돌아다니고만 있습니다.”
“딱 좋군.”
7사도가 가슴의 상처를 긁으며 씩 웃었다.
“예정대로 오늘 밤에 주술을 개방하고, 내일 밤에 발동시킨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튜스가 고개를 꾸벅이고서 바닥의 속으로 가라앉았다.
“내일. 드디어 내일이로군.”
7사도의 눈동자가 바닥에 차오른 혈기처럼 시뻘겋게 번쩍였다.
“라온 지그하르트.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넌 모를 거야.”
네 피와 살을 산 채로 뜯어주마.
* * *
라온은 다음날에도 그란세빌 전역을 돌아다녔다. 이곳저곳에서 주술진을 살피다가 달이 떠오를 때쯤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 멈춰 섰다.
‘쉽지 않네.’
혈기에 스며든 알 수 없는 기운이 끝없이 휘돌며 주술의 해석을 방해했다. 혈기 사이에 끼어드는 통에 제대로 된 흐름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대체 뭐지?’
익숙한 기운은 확실한데, 그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혈기에 껌처럼 달라붙어서 절대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진법 해체가 어렵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오늘 저녁까지 정체를 밝히지 못할 줄은 몰랐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고서 다시 주술진을 보았다. 시뻘건 안개 속에서 붉은 입술의 여성이 넌 할 수 없다고 비웃는 것 같았다.
-이 망할 놈아….
라스가 턱을 파르르 떨며 손톱을 드러냈다.
-이제 술 좀 그만 처마시고! 밥 좀 먹자고!
녀석은 입에서 알코올 냄새가 나 죽겠다며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어쩔 수가 없잖아.’
미안한 말이지만, 주술의 해석이 지지부진해서 가만히 밥을 먹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크으, 코앞에서 향긋한 음식 냄새가 진동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는 것이냐! 대체 본왕은 언제까지 불행해야 하냐고!
“음….”
라온이 배를 문질렀다. 어제부터 제대로 밥을 먹지 않았더니, 허기가 지긴 했다.
-마계에 에테르 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다. 일단 먹자. 밥을 먹으면 분명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것이니라.
라스는 이상한 속담을 주절거리며 연달아 밥을 외쳤다.
‘알겠어.”
불의 고리를 너무 오랫동안 운용했기에 잠깐 휴식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가 좋은데?’
-지, 진짜냐? 정말 가는 것이냐?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말해.’
-본왕은 우측에 있는 식당이 끌리느니라. 거기에서 나오는 바비큐 냄새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느니라!
‘바비큐라….’
라온이 피식 웃으며 라스가 말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시끄러운 식당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술진을 보았다.
‘여전히 변화는… 어?’
불의 고리를 가라앉히려고 할 때 갑자기 상공의 혈기들이 크게 출렁이더니, 지금까지 보지 못한 변화를 일으켰다.
쿠구구구구!
그란세빌 전역에서 시뻘건 혈기와 샛노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 혈기의 구름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바, 밥은….
‘조용.’
라스를 밀어내고, 혈기 사이에 스며든 노란 기운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요기.”
요기였어….
혈기의 운무 속에 끼어 있던 친숙한 기운은 다름 아닌 요기였다.
라온이 이를 바득 갈았다.
‘이 정신 나간 놈들.’
두려움이나 원망, 분노 같은 음의 감정을 가진 사람은 죽으면서 요사스러운 기운. 즉, 요기를 남긴다.
혈귀 놈들은 본인들이 죽인 사람들의 요기마저 이용하여 저 주술진을 개량한 게 분명했다. 혈기에 끼인 요기 때문에 지금까지 진법을 해제할 길이 보이지 않았던 거다.
우우우우웅!
진혼검도 그걸 느끼고 강대한 검명을 일으켰다. 분노와 원망 그리고 절규가 깃든 울음이었다.
-바, 밥은 나중에 먹어야겠지? 으응….
라스는 알아서 떨어져 나갔다.
라온은 부들부들 떠는 진혼검의 검병을 꽉 잡고 사람이 거의 오지 않는 골목으로 돌아갔다.
찌이이이잉!
숨을 고르고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진혼검의 절규와 하나가 된 일곱 개의 고리가 육체를 관악기 삼아 장대한 공명을 일으켰다.
온몸이 용광로가 된 듯 뜨겁게 달아오르며 정신이 고조된다.
극대화된 감각이 주술의 해석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극한의 몰입 속에서 두뇌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우우우웅!
어지러웠던 적색 안개의 흐름이 눈에 보이는 듯 선명해졌다. 마나회로를 휘도는 오러처럼, 혈기는 운무 속에서 정해진 궤도를 질주하고 있었다.
심장은 거칠게 두방망이질 치지만, 머리는 호수처럼 맑다.
그림을 그리듯 단 한 순간에 혈기의 흐름을 읽어낸 뒤 머리에 집어넣었다.
조금 전까지 지쳤던 몸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활력으로 가득했다.
혈기는 점점 더 부풀어 올랐지만, 그 내부가. 그 흐름의 모든 것이 뇌리에 흘러들어왔다.
손가락을 들어 올려 선을 그었다. 뇌리에 가득 찬 주술의 흐름을 역행한 궤도가 붉은 빛무리를 따라 퍼져 나왔다.
완벽한 해주. 언제라도 저 거대한 주술을 지워버릴 해답이 그 손가락을 통해 번졌다.
“하아….”
라온의 입술을 타고 더운 숨결이 퍼져 나왔다. 어느새 달이 지고 떠오른 태양이 기뻐하듯 선홍빛 햇살을 쏟아냈다.
깨달았다.
저 진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지워야 하는지 그 모든 해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끝났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라도 저 주술진을 깨부술 수 있게 되었다. 자연스레 입가에 둥근 미소가 그려졌다.
“라스.”
라온은 졸린 강아지처럼 축 처진 라스의 목덜미를 들었다.
“밥 먹으러 가자.”
-저, 정말이냐?
라스는 바로 밥을 먹자고 할 줄은 몰랐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그래. 나도 배가 고프네.”
머리는 맑았지만, 체력과 정신력을 많이 소모했는지 뱃속에서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쳐댔다.
-크으, 이제야 마음이 통하는구나! 그럼 어제 가려다가 만 곳으로 가자!
“그래.”
라온이 빙긋 웃었다. 배도 고프긴 했지만, 아무 말 없이 기다려준 라스가 고마워서 아침은 녀석이 원하는 대로 먹어줄 생각이었다.
-이제야 네놈이 좀 마음에 드는구나. 그래. 이게 바로 공존이자, 공생이니라. 네놈도 이제 좀….
라스가 히죽 미소를 지을 때 라온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절대급 주술진을 해독하셨습니다.]
[칭호 <주술 해석사>가 생성됩니다.]
[특성 <진법 해석>이 생성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5포인트 상승합니다.]
초고난도 주술을 해석한 대가로 나오는 시스템의 보상이었다.
“?”
-?
미소를 짓고 있던 라온과 라스의 눈동자가 탁 풀렸다. 표정은 비슷했지만 느끼는 감정은 정반대였다.
‘이걸 줘?’
-이걸 왜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