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78화 (278/653)
  • 제278화

    라온이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며 눈매를 좁혔다.

    ‘숫자만 많은 게 아니라….’

    강한 놈도 있나 본데.

    백혈교 놈들은 타인의 피와 살을 뜯어 먹고 혈기를 키운다.

    물 위로 떠오르는 기름처럼 마나의 흐름 사이에 스며든 혈기가 느껴지는 걸 보면 이곳에서 꽤 많은 고수들이 죽어 나간 것 같았다.

    ‘추적은 되지 않는군.’

    혈기의 발원지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거기까지는 갈 수가 없었다. 길어진 고무줄이 끊어지듯 진혼검의 기운이 중간에서 뚝 갈라졌다.

    ‘조심해야겠어.’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혈기의 악취와 자그마한 기척도 드러내지 않는 혈귀 놈들을 보면 처음 계획대로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뜨내기 용병인 척 조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건물들이 하나같이 재밌게 생겼네.”

    버렌은 그란세빌의 특이한 건물들을 올려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각이 지고 차갑기만 한 지그하르트 건물들과 다른 형태에 흥미가 동한 것 같았다.

    “음….”

    루난은 평소와 같았다. 건물에는 별 관심 없이 그란세빌 너머에 있는 몰브 호수 쪽만 바라보았다. 멍 때리기 좋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우와, 안은 더 화려한데요?”

    “지, 진짜 뭐가 이리 번쩍거리냐.”

    “낮에도 이런데, 밤은 더 난리 난다고?”

    “미친 동네구만.”

    다른 검사들 역시 혈기를 느끼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라온은 광풍단의 없어 보이는 반응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연기가 아니라서 오히려 좋네.’

    그란세빌에 처음 온 촌티 나는 용병이 할 법한 현실적인 반응이라, 나쁘지 않았다. 누구도 지그하르트에서 온 검사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후우….”

    마르타가 거친 숨을 뱉으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혈기를 파악한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란세빌 안에 있는 백혈교 놈들의 피 냄새를 맡은 듯했다.

    ‘원수라는 건가.’

    원수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쫓는다고 하던데 마르타도 영혼으로 백혈교도를 찾아낸 것 같았다. 어찌 보면 진혼검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쪽팔리니까. 촌티 좀 내지 마!”

    라온은 어벙하게 있는 광풍단원들에게 손짓했다. 용병단장인 척하기 위해서 일부러 말투를 상스럽게 했다.

    “에이….”

    “단장님도 들떴으면서.”

    “맞아. 제일 촌에서 온 사람은 단장님이잖아요.”

    “흐흐흐….”

    광풍단원들은 이곳에 오면서 교육한 대로 전형적인 소규모 용병단의 모습을 연기했다.

    “촌스러워.”

    “시골에서 왔으면 저게 당연한 거야.”

    “또 호구들이 왔구만.”

    “돈 다 털리고 돌아가겠네.”

    “몇몇은 여기서 지박령이 되겠지.”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과 바로 뒤에 있는 문지기들이 비웃음을 흘리는 걸 보니 연기가 제대로 먹힌 것 같았다.

    “닥치고 따라와! 숙소부터 정하고 너희 마음대로 놀게 해줄 테니까!”

    라온은 옅게 웃으며 전생에 머무른 적이 있었던 숙소로 향했다.

    *     *      *

    라온은 조장인 마르타, 루난, 버렌을 방으로 불렀다. 기막을 친 뒤 세 사람을 앉혔다.

    “비연회의 예측이 맞았어. 이곳에 있는 건 백혈교의 혈귀들이다.”

    불의 고리와 진혼검으로 파악한 연하디연한 혈기는 상당한 고수의 기운이 백혈교도 놈들에게 먹히고 남은 찌꺼기다.

    본래 기운의 크기를 생각해보면 최소 대주교급 이상의 강자가 이 도시 안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뿌득.

    마르타가 이를 바득 갈았다. 백혈교라는 게 확정되자, 참고 있던 기운이 분노를 타고 스멀스멀 타올랐다.

    “마르타.”

    라온이 차가운 눈으로 마르타를 내려보았다.

    “감정 통제가 안 된다면 빠져.”

    버렌이 놀라서 돌아볼 정도로 평소보다 차갑게 말했다.

    “이번 임무에는 우리 뒤를 봐주는 사람이 없어. 적 중에 마스터 상급 이상이나, 그랜드 마스터가 있으면 싸울 게 아니라, 빠져야 할 수도 있지. 흥분해서 이성을 잃는다면 너만이 아니라, 다른 단원들도 죽는다.”

    지금 이곳에는 리메르도, 셰릴도 없다. 광풍단 홀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하기에 후퇴는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선택지였다.

    “알고 있어….”

    마르타는 주먹을 꽉 말아쥐고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탁기와 함께 들끓던 기운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감정을 조절하여 분노를 가라앉힌 마르타의 눈은 다시 맑아져 있었다. 이곳에 오는 동안 수련을 시키며 감정 조절을 하게 만든 효과가 있었다.

    “그럼 다시 시작하지.”

    라온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세 조장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첫 목표는 수색이다. 진혼검으로도 놈들의 행적이 파악되지 않는 걸 보면, 이곳에 있는 백혈교 수장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거야.”

    진혼검의 탐지 능력으로도 백혈교도의 행적 자체가 파악되지 않는 걸 보면 놈들은 진법이나, 무학의 힘을 빌려 혈기를 꽁꽁 감추고 있는 게 분명했다.

    “즉, 바닥에부터 찾아 올라가야 한다는 뜻이지. 백혈교도를 발견해도 공격해서는 안 돼. 모른 척 놔주고, 그 뒤를 추적해서 본 거지를 찾아야 해.”

    백혈교도는 광신도이기에 고문이 통하지 않는다. 놈들의 정체를 드러내려면 백혈교도의 정체를 파악한 뒤 그 뒤를 쫓아야 했다.

    “그게 좋겠네. 알겠어.”

    “응.”

    버렌과 루난은 지시를 듣자마자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

    마르타는 대답 없이 눈을 내리 감았다.

    ‘이건 지워지지 않는 건가.’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 날이. 10사도와 혈귀들이 마을 사람들의 피와 살을 뜯고, 엄마를 끌고 가던 그 지옥이 떠오른다.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하겠지.

    지금도 매일 같이 꿈속에 나오는 장면이다. 만약 10사도를 죽이고, 엄마를 구해낸다고 해도 평생 그 악몽을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는 스스로 핑계만 댔지.’

    그런 일을 겪었으니까. 매일 같이 그 악몽을 꾸니까.

    백혈교 놈들을 보고 이성을 잃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나가고, 머리가 멍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라 되뇌었다.

    ‘계속 그럴 수는 없어.’

    이젠 그 자기 위안을 버려야 한다.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언제까지나 아무것도 못 하던 어린아이로 살 수는 없는 법. 라온과 1조 조원들에게 약속했듯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였다.

    ‘그건 그렇고, 저 녀석은 정말 괴물이네.’

    그란세빌에 도착한 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백혈교가 있다는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책까지 내놓았다. 매번 느끼지만, 무력만이 아니라, 시야와 경험도 대주급 고수를 보는 듯했다.

    ‘다 배워야겠지.’

    다른 것들도 배울 점이 넘치지만 지금 당장 자신에게 필요한 요소는 차가운 이성이다. 언제라도 냉정함을 유지하는 라온의 침착함을 닮고 싶었다.

    마르타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뒤 눈을 떴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괜찮네.”

    라온은 담담해진 마르타의 눈을 보며 피식 웃었다.

    “단원들에게도 같은 말을 전해. 그리고 전우조는 3명씩 이전에 정해준 대로 움직이도록.”

    3명이서 다녀야 한 명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보고와 대처가 동시에 가능해진다. 이런 상황에선 3명씩 다니는 게 가장 효율이 좋았다.

    “질문 없으면 해산.”

    라온이 단원들에게 돌아가라고 손짓했다.

    “넌 혼자 다니는 거야?”

    버렌이 나가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내 걱정해주는 거야?”

    “하긴 괴물 걱정은 하는 게 아니지.”

    그가 뻘쭘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그럼 넌 뭐하는데?”

    이번에는 마르타가 눈매를 좁혔다.

    “만나봐야지.”

    라온은 옅은 미소를 짓고서 몸을 일으켰다.

    “우릴 이곳에 부른 의뢰자를.”

    *     *      *

    라온은 홀로 숙소를 나섰다. 얼뜨기 용병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골목 구석에 있는 골동품점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슈.”

    외눈 안경을 낀 노인이 귀찮은 듯 고개를 까딱였다.

    라온은 진열된 잡동사니를 천천히 둘러보며 노인이 있는 카운터로 향했다.

    “뭘 그리 보는지. 살 거요? 팔 거요?”

    노인은 라온의 위아래를 살피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빌리러 왔습니다.”

    “무얼?”

    “큰 나무를 벨 도끼를.”

    “음.”

    노인이 느릿하게 일어났다. 조금 전 짜증이 담겼던 눈빛은 삽시간에 조그마한 감정도 없는 구슬처럼 투명해졌다.

    “이쪽으로 오시오.”

    라온은 노인을 따라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갔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여러 방을 지나서 가장 안쪽의 방에 가자, 벽에 아래에 걸쳐둔 회색 창문이 보였다.

    “이 안이오.”

    그가 창문을 열자, 어둠이 일렁거리는 공간과 하얀 계단이 나타났다. 마법적 처리를 한 비밀통로였다.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계단을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몇몇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계속 아래로 향했다.

    -인간들은 태양을 마주할 수 있으면서 항상 지하로 숨느니라. 한심한 것들이니라.

    라스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여긴 또 뭐하는 곳이냐?

    ‘이번 임무의 의뢰주가 있는 곳.’

    -무슨 놈의 의뢰주가 바닥에 처박혀 있느냐?

    ‘원래 숨어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암시장에 모이거든.’

    라온이 피식 웃었다. 지금 찾아가는 건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정보 집단이자, 그란세빌의 수많은 도박장과 주점을 운용하는 암시장이었다.

    -그놈들이 왜 이런 의뢰를 한 것이지?

    ‘이곳의 돈이 빠져나가고 있으니까.’

    아무리 유흥이 좋아도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즐길 정도는 아니다. 실종자가 늘어나고 있다 보니,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서 암시장의 매출도 바닥을 치고 있을 것이다.

    -흥, 호구들이 사라진다는 말이로군.

    ‘그렇지. 호구도 환경을 잘 챙겨줘야 돈을 물고 오는 법이니까.’

    라온은 그 말을 하며 라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기서 하나 배우는군.’

    아낌없이 주는 라스가 도망치지 않도록 음식만큼은 제대로 챙겨줘야겠다. 마카롱은 빼고.

    -음? 왜, 왜 본왕을 그런 눈으로 보는 것이냐?

    ‘아냐.’

    손을 저으며 피식 웃었다.

    탁.

    계단을 다 내려가자, 시꺼먼 복도에 은은한 조명이 켜진다. 따라오라는 신호였다. 그 빛을 따라 이동하니, 고풍스러운 문이 하나 나타났다.

    끼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보라색 로브를 입고, 후드를 눌러 쓴 여성이 원형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앉으시죠.”

    여성은 살짝 고개를 꾸벅이고서 앞자리를 가리켰다.

    “암시장 그란세빌 지부장 데닝로즈라고 합니다.”

    데닝로즈가 본인을 소개하며 로브를 벗었다. 붉은 머리가 눈에 띄는 단발 미녀였는데, 오른쪽 눈에는 검은색 장미가 그려진 안대를 끼고 있었다.

    “광풍부단주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합니다.”

    라온이 데닝로즈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숙였다.

    “용병으로 변장 중이신 건가요?”

    “예. 조사할 땐 용병 차림이 제일 편하니까요.”

    용병들은 워낙에 자유분방한 성격이기에 통제대로 따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전생에서도 가장 많이 변장했던 직업이 용병이었다.

    “아깝네요. 요난 가문의 최연소 장인을 반하게 한 얼굴을 좀 보고 싶었는데.”

    데닝로즈는 옅은 미소를 짓고서 테이블 위에 서류를 올려놓았다.

    “의뢰할 때와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어요.”

    그녀가 웃음기를 지운 얼굴로 서류를 내밀었다.

    “백혈교도. 그것도 상위 간부급 백혈교도가 있는 게 확인된 모양이군요.”

    “그, 그걸 어떻게….”

    데닝로즈가 왼눈을 부릅떴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미약한 혈기가 떠도는 게 느껴졌습니다. 이름 있는 고수들이 당한 듯 한데.”

    “맞아요….”

    그녀는 놀랍다는 듯 턱을 떨었다.

    “최근에 강자라고 할 법한 사람들이 매일 같이 죽어 나갔어요. 대주교 혹은 사도가 있을 가능성이 높죠.”

    데닝로즈가 서류의 아랫부분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최근에 실종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익스퍼트 중급, 상급, 최상급에 전성기가 한참 지났지만 마스터도 한 명 끼어있었다.

    “이자들이 모두….”

    “예. 최근 그것도 의뢰서를 보낸 이후에 사라진 사람들입니다.”

    “마스터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예상했던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사도인지, 대주교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은 겁니까?”

    “전혀요. 며칠 전에 백혈교도 한 명을 잡긴 했는데, 바로 자결을 해서 정보를 얻지 못했어요.”

    데닝로즈가 아쉽다는 듯 눈매를 찡그렸다.

    “은밀하게 포교 활동을 하는 중에 저희 요원에게 잡힌 거라서 지금은 더더욱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거예요.”

    “암시장도 백혈교는 찾지 못하는군요.”

    라온이 서류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뭐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자신이 이곳에 와서 얻은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백혈교는 저희의 천적 같은 거라서요.”

    데닝로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희는 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만든 집단이에요. 그란세빌로 따지자면 도박꾼, 도둑, 기녀, 점원, 하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물어오죠. 하지만 백혈교도는 그런 걸로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광신도….”

    “예. 그들은 혈신을 믿는 사람 외에는 절대 본인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아요. 하위 교도는 피의 색도 일반인과 비슷하기에 구별하기도 쉽지 않죠.”

    “덕분에 그라세빌의 매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고 있겠군요.”

    “그건 또 어떻게….”

    “죽으면서까지 유흥을 즐길 미친놈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라스에게 말해줬듯 대부분의 사람은 목숨까지 걸며 유흥을 즐기지는 않는다. 그란세빌과 비슷한 혹은 더 큰 유흥 도시는 많으니까.

    “으음….”

    데닝로즈가 라온의 담담한 눈빛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확실히 달라.’

    그란세빌에 오자마자 혈기를 느끼고, 백혈교가 숨어 있다는 걸 알아차리다니, 지금까지 그런 걸 파악한 사람은 없었다. 평범한 마스터들과는 궤가 다른 남자였다.

    ‘대륙십이성에게도 밀리지 않겠어.’

    지금까지 만났던 대륙십이성들에게도 이런 경악스러운 감정을 느낀 적 없었다. 라온이라면 한 연배가 높은 대륙십이성에게도 맞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20살도 안 된 사람이 이럴 수 있지?’

    더 놀라운 건 성격과 심계다.

    젊은 나이에 무력과 명성을 모두 얻어서 건방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느낌은 전혀 없다. 적당히 예의를 차린 채 임무에 대해서만 생각하며 정보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위험한 남자로군.’

    세간에는 라온의 무력만을 살폈지만, 정말 봐야 하는 건 그의 판단력과 통찰력이 아닐까 싶었다.

    “저희가 지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백혈교도 전체를 처리하지 않아도 되니, 이곳에 있는 상급 교도만 죽여주십시오.”

    데닝로즈가 생각을 정리한 뒤 고개를 숙였다. 그란세빌은 그 규모에 비해 많은 매출이 나오는 곳이다. 백혈교도만 몰아낼 수 있다면 정말 뭐든 해줄 수 있었다.

    “뭐든이라….”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 말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     *      *

    라온은 데닝로즈를 만나고 난 후 술을 마시며 그란세빌 전체를 돌아다닌 뒤에 몰브 호수로 향했다. 기녀와 함께 뱃놀이를 온 사람들이 꽤 많았기에 기척을 죽이고, 호수를 걸었다.

    호수 반대편에 있는 언덕에 오른 뒤에 그란세빌을 살폈다.

    -또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저녁은 안 먹는 것이냐! 여기 미식의 도시라며!

    ‘미식이고 뭐고 일부터 해야지.’

    -먹고 죽는 마족이 때깔도 좋다고 했느니라!

    ‘일을 해야 밥 사 먹을 돈도 생기지.’

    -밥!

    ‘일.’

    라온은 밥이라고 외쳐대는 라스를 호수 쪽으로 던져버리고, 그란세빌을 내려보았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위험해지는 건 광풍단원이고, 평범한 사람들이다. 최대한 빨리 이곳의 비밀을 파악해야 했다.

    ‘과하게 화려하군.’

    밤이 되자, 찬란한 조명들이 번쩍이며 낮과는 차원이 다른 화려함이 도시를 물들였다. 실종, 살인, 혈교 따위는 생각도 안 나는 듯 그저 즐거움만이 넘쳐 보였다.

    ‘뭔가가 있어.’

    밤의 그란세빌에서는 낮과는 다른 음습한 악취가 풍겼다. 특히 혈기의 흐름이 더 은밀해지고, 진혼검의 요기는 무언가에 짓눌린 듯 힘이 빠졌다. 아무래도 백혈교는 저 도시 전체에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했다.

    ‘여기라면 가능하겠지.’

    지금은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야할 때였기에 그란세빌에서 벗어나 도시 전체를 살필 수 있는 언덕에 올랐다.

    후우우.

    라온이 눈을 내리감은 채 폐에 깊숙하게 찬 숨을 뱉었다. 답답함이 가시는 걸 느끼며 눈을 떴다.

    우우우웅!

    이제 일곱 개로 늘어난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다. 심장이 빠르게 뛰며 세상의 흐름이 느리게 스치기 시작했다.

    강물의 파동도, 공기의 이동도, 흘러가는 구름도 굼벵이처럼 느릿하게 흘러갔다.

    치이이이잉!

    라온이 빠르게 휘도는 고리들에 한층 힘을 더했다. 고리들의 청명한 소리가 정신과 합일하는 순간 진혼검을 쥐었다.

    우우우우우웅!

    진혼검은 여덟 번째 고리가 된 듯 심장을 휘도는 불의 고리들과 공명하며 장대한 요기를 일으켰다.

    ‘여기에 하나 더.’

    라온은 입술을 꾹 깨문 채 분노의 마안을 일으켰다. 영혼에 달라붙은 분노가 붉어진 시야 속을 파고들었다.

    불의 고리가 보여주는 세상의 흐름과 혈기를 파악하는 진혼검의 요기 그리고 분노의 마안이 가진 투시력이 어우러지자, 상상하지 못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저 새끼들은 돌았어.”

    라온의 눈동자에서 섬뜩한 빛의 불꽃이 튀었다.

    “이 지랄을 해놨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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