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77화 (277/653)
  • 제277화

    라온은 리메르가 쌓아둔 업무를 모두 끝낸 뒤 연무장을 나섰다.

    장비를 챙기기 위해 별관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루난이 눈에 들어왔다.

    “음?”

    옆으로 다가가서 그녀를 따라 시선을 올렸다. 먹구름이 가득 껴서 달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하늘을 왜 보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루난. 안 가?”

    “저거 구슬 아이스크림 같아.”

    루난은 구름 사이에 낀 푸른 달을 가리키며 입맛을 다셨다. 최근 훈련이 바빠서 아이스크림도 못 먹은 건지 그녀는 달을 아이스크림으로 보는 기적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건 아니… 아!”

    라온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상자를 꺼냈다. 아까 채드가 주고 간 디저트였다.

    “그럼 이거라도 먹을래? 마카롱이라는 디저트라던데.”

    “마카롱?”

    루난의 맹한 눈동자 속에서 보라색 불꽃이 일어났다. 안 주고 가면 별관까지 쫓아올 기세였다.

    “잠깐만.”

    라온이 피식 웃고서 포장지를 벗기고 뚜껑을 열었다. 동그란 머랭 쿠키 사이에 여러 가지 크림이 샌드처럼 발라진 과자가 20개 정도 들어 있었다.

    “먹고 싶은 걸로 골라.”

    지금까지 루난에게 얻어먹은 게 많아서 이런 과자는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오오!

    다만 먼저 반응한 건 루난이 아니라, 라스였다.

    -달콤하고, 산뜻한 향기가 솔솔 풍기는구나. 라온 지그하르트! 본왕은 저 끝에 있는 녹색을 고르겠다! 민트초코가 분명 하느니라!

    라스는 민트초코 크림이 들어간 초록색 마카롱을 골랐다. 이름까지 부르는 걸 보면 간절하다는 뜻이었다.

    ‘민트초코는 별론데.’

    -이럴 때라도 본왕을 좀 챙기란 말이다!

    ‘흐음.’

    라온이 애절한 눈빛을 보내는 라스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도 가끔은 거름을 줘야 하는 법. 어려운 일은 아니니, 녀석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응?”

    짧게 혀를 차고서 라스가 말한 마카롱을 고르자, 루난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손에 쥔 초록색 마카롱을 맹하게 쳐다보고 있는 걸 보니, 그녀도 이걸 고르려고 했던 것 같다.

    ‘이걸 어쩌냐? 아이스크림 소녀가 민트초코 마카롱이 먹고 싶은 모양인데?’

    -끄으윽….

    ‘네 부하잖아. 챙겨줘야지. 줘? 줄까?’

    -비, 빌어먹을!

    라스가 이를 바득 갈았다. 부하와 음식 사이에서 극한의 고민을 하는 듯 눈동자가 진자처럼 흔들렸다.

    ‘내가 네 고민을 줄여줄게.’

    -자, 잠깐….

    라온이 손목에 달라붙은 라스를 털어내고서, 루난에게 민트초코 마카롱을 내밀었다.

    “네가 먹어.”

    “아냐.”

    루난이 고개를 저었다. 예상과 달리 그녀의 눈동자에 아쉬움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하는 듯 보였다.

    “동지.”

    “어?”

    “라온도 민트초코 동지잖아. 괜찮아.”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민트초코 옆에 있던 쿠앤크 마카롱을 챙겼다.

    “난 이걸로 할게. 고마워.”

    루난은 고개를 꾸벅이고서 연무장 앞에 멈춘 마차로 향했다. 본가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음….”

    라온은 떠나가는 마차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유일하게 먹고 싶었던 건데.’

    딱 봐도 쿠앤크 색이라 그나마 당겼던 마카롱인데 루난이 가져가 버렸다. 다만 그런 것보다 민트초코를 좋아한다는 오해가 생긴 게 더 짜증 났다.

    -푸하하하하! 네놈도 그런 꼴을 당할 때가 있구나! 꼬시다! 꼬셔!

    ‘이거 잘 부서지게 생겼는데….’

    라온이 마카롱을 부술 듯이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얇은 가루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자, 자, 잠깐! 하지 마라!

    ‘하지 마라?’

    -끄윽….

    ‘하지 마라?’

    -보, 본왕이 자, 잘못했느니라….

    라스가 울상을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녀석에겐 마왕이라는 자존심보다 음식이 더 중요한 것 같았다.

    이게 분노의 마왕?

    아무리 생각해도 속성이 잘못 정해졌다. 라스에게 어울리는 건 폭식 혹은 괴식이었다.

    ‘앞으로 조심해.’

    라온이 라스를 툭툭 치고서 민트초코 마카롱을 입에 넣었다.

    쿠키를 베어 문 순간 처음으로 느껴지는 건 단맛이었다. 그것도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었던 단맛. 혀가 살짝 아려올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그 뒤로 다가오는 건 민트초코 크림이다. 살짝 차가운 크림이 입안을 휘감으며 쿠키보다 산뜻한 단맛과 알싸함을 동시에 전해주었다.

    “하아아….”

    라온이 깊은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게 대체 뭔 맛이냐….’

    지독할 정도로 단 쿠키와 민트초코 크림이라니, 다시는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이었다. 마카롱을 주고 간 채드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라스. 너도 맛없… 음?”

    라스의 반응을 보기 위해 고개를 내렸는데, 녀석은 입을 떡 벌린 채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이, 이런 디저트가 세상에 존재했다니….

    라스는 본인의 뺨을 부여잡은 채 들뜬 신음을 흘렸다.

    -미쳤느니라. 단 쿠키와 민트초코 크림의 조화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느니라! 이게 미식이고, 이게 디저트니라!

    녀석은 역시 세상은 넓고, 맛 좋은 건 많다며 히죽였다.

    -다음! 다음도 먹어보아라!

    ‘으음….’

    라스가 저리 떠느니, 자신도 모르게 입에 침이 고였다. 이번에는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초콜릿 마카롱을 골랐다.

    “크헉….”

    민트초보보다 맛 자체는 나았지만, 단맛은 더욱 강해졌다. 너무 달아서 혀에 쓴맛이 돌 정도였다.

    -흐어어어!

    라스는 황홀한 표정으로 어깨 위에서 버둥거렸다. 고양이가 개박하 위에서 뒹구는 듯한 모습이었다.

    -더! 더! 더 먹어보자꾸나! 오늘 새로운 미식의 장에….

    라온은 라스의 외침을 들으며 마카롱의 뚜껑을 꽉 닫았다.

    -얌마!

    못 먹겠다.

    돌아가서 실비아와 시녀들에게 줘야지.

    *     *      *

    라온은 마카롱을 시녀들에게 넘기고 방으로 들어왔다.

    실비아와 시녀들은 신기할 정도로 마카롱을 좋아했다. 너무 달지 않냐고 물었지만 그게 좋다고 했다. 이쯤 되니 라스가 아니라, 자신의 혀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흑, 그 아까운 것을 모조리….

    라스는 2개 밖에 못 먹었다며 푸른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중에 구슬 아이스크림 사줄게. 그걸로 좀 참아.’

    -정말이냐?

    “임무 다녀와서 먹을 테니까. 제발 좀 조용히 있어.’

    -물론이니라! 본왕이 또 과묵하지 않느냐. 걱정하지 마라! 참고로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부하들이 너무 말이 적다며 의사표명을….

    “어휴….”

    조용히 시키려고 아이스크림을 말한 건데 더 시끄러워졌다.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임무에 가져갈 물건들을 챙겼다.

    장비와 소모품을 배낭에 넣고 있을 때 창가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너무도 익숙한 기질인지라 바로 창문을 열었다.

    “오랜만!”

    검은 안경으로 눈을 가린 리메르가 씩 웃으며 다가왔다.

    “한밤중에 검은 안경은 왜 쓰신 겁니까?”

    “아, 이거? 패션이지. 패션.”

    리메르는 패션도 모르냐면서 어색하게 손을 저었다.

    “내일모레 임무 간다며?”

    “예. 단주님은 남으시겠죠?”

    채드가 주었던 임무서에 책임자는 자신으로 되어 있었다. 리메르는 이곳에 남는다는 뜻이었다.

    “함께 가고 싶긴 한데, 이 꼴로 움직여봐야 큰 도움 안 되니까.”

    “맞는 말이네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메르는 순수한 바람의 오러를 쌓는 선택을 했기에 아직 충분한 오러를 쌓지 못했다. 이동하면서 시간을 뺏기느니, 가문 내에서 수련하는 게 나았다.

    “그, 그렇게 말하니까. 좀 슬픈데?”

    “단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만.”

    “그래도 인마! 스승이자, 상사가 우울해하면 위로를 해줘야지! 넌 눈치 없어서 크게 되긴 글렀다.”

    “후우….”

    라스에 이어 두 번째로 귀찮은 사람이라 한숨이 나왔다.

    “지금 나보고 귀찮다고 생각했지!”

    귀신이었다.

    “뭐,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창가에 팔을 괴었다.

    “이번 임무부터는 네가 책임자야. 전처럼 네 뒤를 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네 판단으로 광풍단이 전멸할 수도 있고, 전부 살아남을 수도 있지.”

    그의 눈동자가 달빛처럼 청명한 이채를 발했다.

    “책임이라는 건 네 생각보다 가벼울 수도 있고, 무거울 수도 있어.”

    “제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겁니까?”

    “그래.”

    리메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도록 그리고 그 가벼움에 농락당하지 않도록 주의해. 너라면 알아서 잘하겠지만.”

    “단주님은 항상 날아갈 듯 가벼우셨던 겁니까?”

    “크으, 아프네. 요즘 혀가 날카로운 인간들이 왜 이리 많은지.”

    그는 가슴을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하는 척하다가 턱을 들었다.

    “휘석 목걸이는 차고 있지?”

    “이거 말씀이십니까?”

    라온이 목 안쪽에 차고 있던 휘석 목걸이를 꺼냈다. 로엔이 효능을 말해준 이후로 계속 착용하고 있었다.

    “그래. 그거.”

    “죄송하지만 드릴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팔아서 도박하실 테니….”

    “얌마! 아무리 그래도 부하 물건 강탈은 안 해!”

    그는 절대 아니라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너희는 날 뭘로 보는 거야!”

    “도박중독자, 사기꾼, 게으름뱅이, 도둑?”

    “끄윽….”

    리메르는 다시 한번 가슴을 움켜쥐고 휘청였다.

    “반박할 수가 없네.”

    그는 피식 웃고서 창틀에 등을 기댔다.

    “라온. 광풍단을 부탁하마.”

    걱정이 묻어나오는 진중한 목소리. 함께 가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이었던 것 같다.

    “전부 무사히 데리고 오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으마.”

    리메르는 가볍게 손을 흔들고서 떠났다.

    라온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낮은 숨을 내쉬었다.

    ‘책임이라….’

    평소에도 리메르 대신 많은 책임을 졌다고 생각했는데, 홀로 광풍단을 책임질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리메르는 노는 척, 자는 척하면서도 항상 뒤에서 모두를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라온은 리메르가 떠난 방향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함께 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채드는 광풍단이 출발하는 시간에 맞춰서 5연무장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단주님이 계시지 않는다. 모든 일을 우리가 알아서 헤쳐나가야 하니, 항상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게 마음을 굳게 다지도록.”

    연무장 안에서 라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주 없이 떠나는 임무였기에 모두를 격려하는 것 같았다.

    ‘사람을 다룰 줄도 아는군.’

    처음으로 책임지는 임무에 흥분하여 공을 세울 생각만 하지 않고, 먼저 단원들을 자제시키려는 걸 보니, 역시나 난 사람이었다.

    “출발.”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연무장 문이 열리고, 광풍단원들이 줄지어 나왔다.

    채드는 연무장 문 옆쪽에 빠진 채 기다리다가 라온이 나온 순간 그에게 다가갔다.

    “부단주님.”

    “회주님?”

    그는 자신이 왔다고는 생각도 못 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긴 어쩐 일로….”

    “그렌세빌과 백혈교에 관해 조사한 정보가 있는데, 버리기 아까워서 가져왔습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군요.”

    채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정보를 수집했던 책자를 내밀었다.

    “어제 밤샘 작업을 좀 해서 퇴근하는 길이었습니다. 부담가지지 마세요.”

    “아, 감사합니다.”

    라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책자를 받았다.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채드는 미련 없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짓고서 등을 돌렸다.

    ‘완벽해!’

    실제로 저 책자는 어제 만든 자료였고, 퇴근하는 게 아니라 일찍 일어나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만, 라온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전부 그럴듯한 핑계를 댔다.

    부담 없이 좋은 인상만 남기는 완벽한 방법이었다.

    ‘이제 다음을 준비해볼까.’

    채드는 본인의 일 처리가 끝내줬다고 자화자찬을 하며 비연회로 돌아갔다.

    *     *      *

    라온은 채드가 준 책자를 모두 외운 뒤에 태워버렸다. 허공으로 흩날리는 재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정보가 너무 자세해.’

    그란세빌에 대한 정보만이 아니라, 최근 백혈교의 행적과 놈들의 술법까지 적혀진 상당한 고급 정보였다.

    ‘비연회주 채드라….’

    점점 더 의심스럽군.

    가문의 실세인 비연회주가 새벽에 연무장까지 찾아와서 이런 정보를 넘겨준다는 게 너무 이상했다. 본래 정보단체의 수장은 엉덩이가 무겁고 권위적인 경우가 많으니까.

    채드가 젊은 편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챙겨주는 건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적은 백혈교가 아닐 수도 있겠어.’

    의뢰에서 말한 것과 달리 적은 백혈교가 아니라, 중무전이나, 진무전에서 준비한 무인 혹은 암살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살짝 위험한데.’

    백혈교와 달리 그들은 이쪽의 전력을 알고 있기에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럼 방법이 있지.’

    아주 간단한 방법이.

    이곳에서부터 그란세빌까지 가는 동안 광풍단의 무력을 키워서 그들의 정보를 뛰어넘으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다.

    ‘거기다.’

    라온이 홀로 떨어져서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는 마르타를 보았다.

    적이 백혈교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계속 저 상태다. 강해진 무력이상의 살의와 분노를 뿜어내서 1조도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저 녀석도 정신을 차리게 해주려면 더더욱.’

    라온이 반나절 만에 휴식을 취하는 광풍단을 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모두 기상.”

    “벌써?”

    “아직 10분도 안 쉬었는데요.”

    광풍단은 조금만 더 쉬자며 칭얼거렸다.

    “그럼 앉은 채로 들어.”

    고개를 끄덕이고 광풍단과 시선을 마주했다.

    “출발할 때도 말했지만, 이번 임무는 적의 유인일 가능성도 있다. 즉, 우리를 아는 적과 싸우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음….”

    “그게….”

    다들 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희도 알겠지만, 우리가 그란세빌에 가는 동안 꽤 많은 시간이 걸려. 그럼 그 시간을 그냥 버려야 할까?”

    “어…?”

    “서, 설마….”

    광풍단은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맞아. 지금부터 이동 중 수련을 시작한다.”

    “아, 안 돼!”

    “이 미친놈아!”

    “적당히 하자고!”

    광풍단원들을 절규하며 바닥을 내리쳤다.

    “자, 잠깐만! 수련하다가 우리 체력이 다 빠지면 어쩔 건데,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싸울 가능성도 있잖아. 아니면 이동 중에 기습을 당할 수도 있고!”

    버렌이 손을 들며 소리쳤다.

    “걱정 마. 암습을 할 수 없도록 지름길로 가고, 일정을 조절해서 그란세빌에 도착할 때쯤은 몸 상태를 끌어 올려줄 테니까.”

    전생에 그란세빌을 많이 가봤기에 여러 지름길과 은신처를 알고 있다. 중간에 암살자와 만날 일 따위는 없었다.

    “끄윽….”

    “제, 젠장….”

    “저 인간은 왜 모르는 게 없는 건데!”

    버렌과 광풍단은 반박하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괘, 괜찮아요!

    크레인이 미소를 지으며 손목과 발목을 쳤다.

    “흑환이 없잖아요. 그것만 없어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

    “그것도 걱정 마. 도리안.”

    라온이 손짓을 하자, 도리안이 죽상을 한 채 앞으로 나왔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고 배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흑환을 우수수 꺼냈다.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몰라서 도리안에게 부탁해놨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모두 착용하고 달릴 준비 하도록.”

    “안 돼애애애애애!”

    광풍단의 절규가 조용한 산을 울렸다.

    *     *      *

    각양각색 다양하다 못해 독특하게 느껴질 정도로 화려한 건물들이 육각의 영지 위에 꽉꽉 채워져 있었고, 그 뒤에 깔린 호수는 오후의 햇살을 받아 황금을 녹인듯한 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지금까지 갔던 왕국이나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이 작은 규모였지만, 그 화려함만큼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이 작은 도시가 바로 그란세빌이었다.

    라온은 낮은 성벽 뒤로 보이는 그란세빌을 쭉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여전하네.’

    유흥이라 함은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는 구석이 있다. 암살에는 최적의 장소였고, 실제로 이 도시에 무수히 많은 임무를 수행했었다.

    ‘내 기분은 다르지만.’

    전생에는 사람을 죽이러 왔고, 이번에는 사람을 구하러 왔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와아….”

    “여기가 그란세빌이야?”

    “드, 듣던 대로 화려하긴 하네.”

    광풍단원들은 그란세빌과 몰브 호수의 화려한 외관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

    마르타는 여전히 백혈교만 생각하는 건지 이전보다 더 날카로운 기세를 일으키며 그란세빌을 노려보았다.

    “가자.”

    라온이 턱짓을 하고서 앞장섰고, 광풍단은 숨을 고르고서 그 뒤를 따랐다.

    성문 앞에 있는 문지기에게 지급 받은 용병패를 보여주자,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들어가라 손짓했다.

    ‘이것도 여전하네.’

    카멜룬이 양지와 음지가 균형을 이룬다면 그란세빌은 음지에 훨씬 가깝기에 검문 역시 형식적이었다.

    라온은 용병패를 돌려받은 뒤 얇고, 낮은 성문을 넘어 안으로 그란세빌에 들어갔다.

    우우우웅.

    두 발이 그란세빌 땅을 밟음과 동시에 진혼검이 거친 진동을 일으켰다.

    ‘이거 봐라?’

    라온이 울부짖는 진혼검의 검병을 꽉 잡았다. 화려한 도시를 굽어보며 서늘한 미소를 그렸다.

    바퀴벌레처럼 아주 득실득실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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