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2화
“그 전에.”
라온이 손짓을 해서 산에 오르려던 광풍단을 불렀다.
“젠장….”
“없앨 기회였는데.”
“없애는 건 아니지. 죽을 정도의 고생을 시키는 거잖아.”
“아, 그러네. 착각했다.”
“운 좋은 줄 알아.”
광풍단원들은 인상을 찡그리며 중무전으로 돌아왔다.
“얘, 얘들 대체 왜 이래?”
버렌은 고작 일주일 만에 기질 자체가 달라진. 아니, 짐승처럼 변한 광풍단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일단 부상자들부터 치료하죠.”
라온은 돌아온 광풍단과 장원 이곳저곳에 자빠져 있는 중무전 무인들을 가리켰다.
전마단이라면 모를까. 저들 대부분은 버렌이 납치된 것도 모르고 있었을 거다.
“가주님께 갈 사람은 이렇게 넷이면 충분하니까요.”
이번 일의 중심에 있는 자신과 버렌 그리고 겔미어와 올란이면 사정을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그럼 도괴 님과 고먼 님은….”
테론드가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도괴의 눈치를 살폈다.
“저희 총관님은 그런 귀찮은 일 안 하세요. 저분 짬밥에 무릎 꿇고 보고하기는 좀 그렇잖아요.”
“크흠! 그렇지.”
도괴는 라온의 말이 마음에 든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에 도괴 님께서 부상자 처리를 담당해주실 겁니다.”
“내, 내가?”
“해주실 거죠?”
“끄으윽!”
라온의 미소에 도괴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글렌 앞에 설지, 귀찮지만 애들을 관리할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늙은이를 어디까지 부려먹는 거냐! 이 망할 놈아!”
그는 욕을 내뱉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역시 단원을 생각하는 건 총관님이 제일입니다.”
“시끄럽다!”
그는 빨리 사라지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허어….”
테론드가 도괴의 옆에서 미소를 짓는 라온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도괴 님이 저리 다루기 쉬운 사람이었나?’
도괴는 괴팍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원로원에 있을 때도 다루기 힘들었지만, 자유의 몸이 된 이후에는 통제 자체가 안 되는 재난으로 여겨졌다.
그런 괴물이 저 어린 검사에게 꼼짝도 못 하는 모습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역시 무력만 봐서는 안 되는 친구야.’
라온의 진면목은 최연소 마스터에 오른 재능과 무력이 아니라, 겔미어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재빠르게 움직이는 결단력과 상황을 본인의 의도대로 조종하는 심계에 있었다.
‘존경스러울 정도로군.’
동료를 구하기 위해 중무전을 친다는 결정을 하고 단호하게 움직이다니, 대단하다는 말로도 한참 부족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검사에게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럼 가시죠.”
라온은 기절한 겔미어와 올란을 질질 끌고 왔다.
“그, 그렇게 들고 가실 겁니까?”
테론드가 거의 걸레짝이 된 겔미어와 올란을 가리키며 마른침을 삼켰다.
“범죄자를 대우해줄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 그렇지만 아직….”
“아, 한 명 더 필요한 사람이 있네요.”
“예?”
라온이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정말 중요한 사람이니, 꼭 좀 불러와 주세요.”
* * *
리메르는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 옆을 바라보았다.
라온과 버렌 그리고 팔이 날아간 겔미어와 눈이 풀린 올란이 보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붉은 계단 위. 금빛 단상에서 세계를 굽어보는 글렌의 서늘한 눈동자가 있었다.
“어….”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연무장에서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왜 이곳에 끌려왔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기억이 없다. 정신을 차리니 가주전이었고, 눈을 뜨니 알현실이었다.
라온은 멍하니 선 리메르를 보며 피식 웃었다. 테론드가 직접 데리고 왔는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가주님을 뵙습….”
“인사는 됐다.”
인사부터 하려고 할 때 글렌이 손을 저었다. 5살 때부터 그를 봐왔지만, 저 정도로 차가운 눈빛은 처음이었다.
“무슨 일인지 설명하라.”
“제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라온이 입을 열기 전에 버렌이 앞으로 나왔다. 이번 일의 당사자였으니, 직접 말하겠다는 뜻이었다.
“버, 버렌.”
겔미어가 버렌에게 손짓했다.
“제발….”
그는 이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살려달라고 중얼거렸다.
“…….”
버렌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깊은 숨을 내쉬고서 눈동자에 글렌만을 담았다.
“임무에서 복귀한 날 전마단주가 찾아왔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중무전으로 향했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하는 중에 전마단주가 갑자기 라온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라온?”
“예. 라온을 죽이고 싶으니, 약점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죽인다라….”
글렌의 붉은 눈동자가 우측으로 돌아갔다. 지독하리만큼 서늘한 기파가 겔미어를 찍어눌렀다.
“끄헉!”
겔미어가 왼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주저앉았다. 지혈해 둔 오른쪽 어깨에서 다시 피가 번졌다.
“가, 가주님. 사, 살려….”
겔미어가 엎드려 빌어도 글렌의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고오오오오!
글렌의 양옆에 선 로엔과 셰릴 역시 평소에 보기 힘든 건조한 눈빛으로 겔미어에게 날카로운 기파를 쏘아냈다.
“흐으윽….”
세 사람이 일으키는 기운에 겔미어는 전신을 파르르 떨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야, 약점을 말하라고 하고, 죽이기 위해 유인 해오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거절하고 중무전을 나가려고 할 때 습격을 당했고, 눈을 뜨니, 처음 보는 밀실이었….”
쿠구구구구!
글렌의 강대한 기파에 버렌의 말이 뚝 끊어졌다.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했던 기운이 송곳처럼 날카롭게 갈려 겔미어와 올란의 숨통을 짓눌렀다.
“끄허허헉!”
“어윽….”
두 죄인은 심장이 멈추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개처럼 바닥에 엎드렸다.
“계속하라.”
“절 포박한 채 라온을 죽이는 걸 도우라고 했지만 거절했습니다. 그때 전마단 2조장 올란이 와서 세뇌를 시작했고….”
버렌은 밀실에서 있었던 일주일을 말하고서 라온을 바라보았다.
“다 포기하려고 할 때 라온이 와주었습니다. 저 녀석이 아니었다면 전 올란의 세뇌에 먹혔을 겁니다.”
그는 겔미어와 올란을 돌아보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으으으….”
“허억! 허억!”
글렌이 일으킨 기운은 여전히 겔미어와 올란을 짓누르고 있었다. 둘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글렌의 시선이 중앙의 라온에게 돌아갔다.
“버렌이 납치당한 건 어떻게 알았느냐.”
“확신은 없었습니다.”
“확신이 없다?”
“예. 시작은 의심이었으니까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는 버렌은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합니다. 훈련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직접 와서 모두에게 사과할 녀석이 집사만 보낸 게 이상해서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에 버렌의 어깨가 살짝 떨렸고, 글렌의 기세가 잦아들었다.
“음!”
“역시.”
셰릴과 로엔은 잘했다는 듯 입매를 살짝 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버렌의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집사일 거라 생각하여 그를 몰래 찾아가 진실을 물었습니다. 그 후에는….”
라온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글렌에게 모두 설명해주었다.
“아, 아닙니다. 가주님! 저는….”
“입 다물어.”
글렌은 눈빛만으로 겔미어의 머리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대리석 바닥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난 네게 입을 열라 허락하지 않았다.”
“죄, 죄송….”
겔미어는 딱딱 소리가 들릴 정도로 이빨을 부딪쳤다.
“겔미어.”
“예, 예에….”
“무엇이 아닌지 말해보아라.”
글렌은 겔미어에게도 기회를 줄 생각인지 턱을 살짝 틀었다. 다만 그를 압박하는 기세는 풀지 않았다.
“지,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동생의 성취를 보고 싶어서 작은 장난을 쳤을 뿐입니다. 가, 가둔 건 맞지만 버렌에게 손을 댄 적은 없었습니다!”
겔미어는 간신히 잡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듯 피를 토하면서도 입을 놀렸다. 간절한 눈빛으로 말도 안 되는 핑계를 주절댔다.
“자, 장난을 끝내고 버렌에게 선물을 주려고 할 때 라온이 나타나서 전부 꼬인 겁니다. 저,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참 이상하네요.”
라온이 겔미어의 말을 끊으며 피식 웃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지만, 끝은 확실하게 내는 게 좋았다.
“무슨 놈의 장난을 일주일 동안 치죠? 거기다 당신은 나를 보자마자, 죽일 생각만 했잖습니까. 실제로 검을 휘두를 때도 목과 심장을 노렸… 큽!”
말을 하다 보니, 미처 수습하지 못한 내상으로 인해 역류한 피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쿠웅!
라온의 붉은 핏물이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옥좌에 앉아 있던 글렌의 몸이 크게 출렁였다.
셰릴과 로엔 역시 주먹을 꽉 말아쥔 채 다시 기세를 끌어 올렸다.
쿠구구구구!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일어난 세 사람의 무시무시한 기파에 알현실이. 아니, 가주전 전체가 뒤흔들렸다.
“…억!”
“끄으으….”
겔미어와 올란은 찌부가 된 토마토처럼 바닥에 넙죽 엎드린 채 온몸을 떨었다. 호흡을 할 수 없는지 꺽꺽 소리만 냈다.
“테론드.”
글렌이 우측으로 빠져 있는 테론드에게 손짓했다.
“예.”
테론드가 앞으로 나오며 부복했다.
“둘 중 누구의 말이 맞는가.”
“시간이 적어서 조사 자체가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괜찮다. 말해보도록.”
“지하 밀실의 상황, 전마단과 중무전 검사들의 증언, 올란의 세뇌 능력을 확인해본 결과 광풍부단주의 말이 95% 이상 확실하다고 생각됩니다.”
“수고했다.”
글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테론드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겔미어.”
글렌의 기세가 촛불처럼 훅 꺼졌다. 다만 그의 눈빛은 무저갱처럼 깊게 가라앉았다.
“넌 네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다.”
“아….”
“전마단은 오늘부로 해체한다. 전마단 소속 검사들은 중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중무전 역시 그 책임을 나눠 2년간 활동을 중지한다.”
그는 아무 감정도 없는 눈으로 겔미어를 굽어보며 말을 이었다.
“네 오른팔은 영원히 붙일 수 없고, 지금 이 순간부터 20년 동안 면벽행을 명한다.”
“이, 이십 년?”
겔미어가 턱을 덜덜 떨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파, 팔도 못 붙인 채 20년이라니요! 저보고 죽으라는 말씀이십니까!”
“먼저 동생을 납치하고, 광풍부단주를 죽이려고 한 건 네놈이다.”
“전 다른 이들과 똑같이 했을 뿐입니다!”
이십 년 동안 동굴에 박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일까. 겔미어는 글렌에게 악을 질렀다.
“가문의 꼭대기에 오른 이들처럼 그저 방해꾼을 지우려고 했을 뿐입니다! 아버지도! 가주님도 같은 길을 걸으셨지 않습니까!”
“맞다. 나도 그런 길을 걸었지. 부정할 생각은 없다.”
글렌이 살짝 튼 턱을 끄덕였다.
“다만 나는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다. 누구도 모르게,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게 몇 번이나 확인했지. 그 이후에는 강해졌다. 나의 치부를 알더라도 따질 수 없도록, 그 누구도 덤빌 수 없도록 힘을 키웠다.”
그에게서 피어나는 오싹할 정도로 건조한 기운이 겔미어의 심혼을 꿰뚫었다.
“동생의 성격조차 파악하지 못하여 틈을 만들어준 너와는 다르다.”
“아아….”
겔미어의 눈동자가 썩은 달걀처럼 탁 풀렸다. 넋이 나간듯 입을 떡 벌린 채 허공을 올려보았다.
“전마단 2조장 올란은 어긋난 상사를 말리긴커녕 악행에 동참하여 지그하르트 직계에게 세뇌를 걸려 했으니, 사형이다.”
“흐흐흐흐!”
올란은 글렌의 기세에 미쳐버린 듯 침을 질질 흘렸다.
“그리고 라온 지그하르트.”
“예.”
“네게도 잘못이 있다.”
라온은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가문 내부의 일은 네가 먼저 처리할 게 아니라, 집법부를 통해서 움직여야 했다. 결과는 좋았지만, 그 시작은 좋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예상했던 말이었기에 눈을 내리깔았다.
“집법부를 거친다면 겔미어에게 시간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을 준다?”
“예. 버렌의 집사도 이용할 자이니, 집법부에도 선이 닿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겔미어는 집법부도 중무전엔 들어올 수 없을 거라고 떠들어댔습니다.”
“으음!”
그 말에 테론드가 살벌한 눈빛으로 겔미어를 노려보았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것 같았다.
“저와 단주님께는 징계를 내리셔도 괜찮습니다. 저희는 단원을 구한 것으로 만족합니다.”
라온이 리메르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 나? 왜?”
리메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켰다.
“단주님께서는 제 억지 계획도 허락해주시고, 집법부에 편지도 보내주셨죠. 단주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저도 중무전에 쳐들어가는 결정을 하긴 힘들었을 겁니다.”
“아….”
저 미친놈이 또 뭐라는 거야!
어이가 없다. 계획은 지가 다 짜놓고 책임만 떠넘기다니, 이게 책임 없는 쾌락인가 뭔가 같았다.
[야이 자식아! 이게 무슨 짓이야!]
리메르는 바로 라온에게 오러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광풍단 애들 수련에 물오른 거 알고 계시죠?]
라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답을 보내왔다.
[그건 아는데….]
[지금 걔네들 징계받으면 성장할 기회를 놓쳐요. 그러니까 저랑 단주님이 책임지자구요.]
지금 광풍단은 자신감과 집중력이 최고조에 오른 상태다.
하루의 수련으로 평상시 한 달의 훈련 효과를 볼 수도 있기에 이 기회를 버리기는 너무 아까웠다.
[끄응….]
리메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단원을 걸고넘어지니 할 말이 없었다.
[단주님. 가주님이랑 친하시잖아요. 조금 죄를 낮게 좀 부탁해봐요.]
[치, 친하긴 하지….]
마지막 자존심 때문에 맞고 산다는 말은 나오질 않았다.
“이번 일은 저와 단주님의 잘못이 가장 큽니다. 징계를 내려주십시오.”
“끄으으….”
라온이 담담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고, 리메르는 울상이 되어 허리를 굽혔다.
“그런가.”
글렌이 서늘한 눈빛으로 라온과 리메르를 내려보았다.
“분명 과정에 문제는 있었지만 사망자가 한 명도 없는 점, 실제로 버렌 지그하르트가 납치되었고, 세뇌에 걸릴 뻔했다는 점을 고려해.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일주일간의 근신을 명한다.”
“가, 가주님! 라온은 저 때문에….”
“그만해.”
버렌이 나서려 했지만 라온이 그의 소매를 잡고 뒤로 끌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너희 둘은 이만 나가보도록.”
“음….”
라온은 일어서서 리메르를 바라보았다. 그는 괜찮으니 나가라는 듯 턱짓을 했다. 버렌과 함께 글렌에게 고개를 숙이고서 알현실을 나갔다.
“테론드. 규정대로 처리하도록.”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테론드도 정신이 반쯤 나간 겔미어와 올란을 끌고 알현실을 떠났다.
“하아, 요즘 애들은 참 활기차서 좋네요.”
리메르는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오러 메시지 다 들으셨죠. 실제로 전 아무것도….”
“단원이 싸우러 갔는데, 술을 처마셔?”
글렌의 눈빛이 겔미어를 볼 때처럼 건조하게 가라앉았다.
“에?”
리메르가 마른침을 삼켰다.
‘술 기운은 다 지웠는데?’
알현실에서 호출이 왔다는 걸 듣고 술기운을 모조리 지웠는데 어떻게 들켰는지 모르겠다.
“냄새잖아.”
셰릴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술기운을 날릴 때 뿜어지는 주정이 네 옷에 다 배겼다고!”
“아, 안 나는데….”
“네가 처마신 술이니까. 넌 안 나겠지! 이 멍청아!”
“어억!”
리메르가 턱을 떨었다. 그 말이 맞았다. 옷에 깃든 술기운을 날릴 시간도 없이 바로 알현실에 들어오게 되어서 처음부터 술 마신 걸 들켰던 것 같았다.
“가, 가주님은 아실 겁니다. 아이들이 커가는 데 중요한 건 보호자의 믿음이죠. 저는 우리 애들을 미, 믿고….”
위를 올려보다가 입을 꾹 닫았다. 단상 위에 있던 글렌과 셰릴, 로엔의 시선은 조금 전 라온의 입에서 떨어진 핏물을 향해 있었다.
“저, 저기 제 말좀….”
“시작하지.”
“예.”
“알겠습니다.”
글렌의 끄덕거림을 시작으로 세 사람이 분노의 눈빛으로 단상에서 내려왔다.
“님들? 저 화, 환자에요! 아직 다 안 나았고….”
“걱정 안 해도 된다.”
“그래. 내가 설마 후유증이 남게 때리겠어?”
글렌과 셰릴이 각자의 기운을 일으키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리메르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뒤를 돌았다. 어느새 다가온 로엔이 길을 막고 있었다.
“로, 로엔 님?”
“걱정마십시오. 라온 도련님이 아프셨던 만큼만 하겠습니다.”
로엔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탁탁 털었다.
“이제 셋이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장 위에서 붉은 벼락과 푸른 기운이 떨어져 내렸다.
아아아악!
* * *
라온은 흔들리는 가주전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누군가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착각인지 금세 그쳤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밖으로 나오니, 치료를 끝낸 광풍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라온….”
“어떻게 됐어?”
루난과 마르타가 앞으로 달려왔다.
“앞으로 겔미어와 올란을 볼 일은 없을 거야.”
오러를 통제당한 채로 20년 면벽이니, 어떻게 보면 죽음 이상으로 심한 징벌이었다. 겔미어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재수 없는 면상을 안 봐도 된다니 다행… 음.”
마르타가 이죽거리다가 버렌을 보고 말을 멈췄다.
“괜찮아.”
버렌이 옅게 웃었다.
“있던 정까지 다 떨어졌거든. 내가 중무전으로 가는 일은 없을 거야.”
티를 내진 않았지만, 버렌은 광풍단에 들어오고 난 이후에도 중무전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작은 그리움이 이번 일로 완전하게 사라진 것 같았다.
“난 광풍단에 뼈를 묻을 테니, 걱정하지 마.”
“버렌….”
“버렌 님!”
“역시 우리 조장이야.”
“함께 갑시다!”
그의 확실한 선언에 광풍단 검사들의 눈동자가 빨갛게 번쩍였다.
“그 말은….”
“이제 시작해도 된다는 거겠죠.”
마르타의 고갯짓에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서 아까 그 가마를 다시 꺼냈다.
“자, 잠깐!”
“버렌! 버렌! 버렌!”
광풍단 검사들은 가마에 다시 버렌을 태운 뒤에 가주전 바로 뒤에 있는 북망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버렌! 버렌! 버렌!”
“너도 고생 좀 해봐야 해!”
“크르르르!”
“힘든 건 함께 할수록 힘들어지지!”
“캬아아!”
검사들은 짐승 같은 눈빛을 빛내며 으르렁거렸다.
“라온! 나 좀 살려달라고! 이 자식들 왜 짐승이 된 건데!”
버렌은 상황파악을 못하고 비 맞은 강아지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정지.”
“윽!”
라온이 손을 들어 올리자, 멧돼지처럼 산을 오르려던 광풍단이 멈춰섰다.
-어?
라스가 놀랍다는 듯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네, 네놈에게 다시 인간의 마음이라도 생긴 것이냐?
‘사정은 설명해줘야지.’
라온이 옅게 웃고서 버렌의 옆으로 다가갔다.
“버렌. 광풍단이 강해진 거 보이지?”
“보, 보이긴 하는데….”
그는 이렇게 되긴 싫다고 중얼거렸다.
“모두 집중력 훈련을 완수하면서 저런 성취를 이룬 거야. 너도 광풍단이니 당연히 해야지.”
“하지만 난 일주일 동안 잡혀 있었잖아! 서 있을 힘도 없다고!”
버렌이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버렌. 위기를 거꾸로 하면 뭐지?”
“기, 기위? 아무 뜻도 없는 거 아냐?”
“그래. 아무 뜻도 없어. 그냥 하라고.”
“어어….”
-야이 미친 놈아!
버렌과 라스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역시 우리 단주 대리야.”
“고럼! 저게 진짜 광풍단이지.”
“가자! 가자!”
광풍단 검사들은 빨간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다시 출발.”
라온은 가마를 툭툭 치며 미소를 지었다.
“버렌! 버렌! 버렌!”
광풍단은 주술을 외우듯 버렌의 이름을 외치며 북망산으로 올랐다.
“아, 버렌 내려주고, 너희도 숨어. 집중력 훈련 2부를 시작해야 하니까.”
“버레….”
그 말에 광풍단의 외침이 뚝 멈췄다. 빛을 잃은 동공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뭐라고….”
“너희도 함께하라고.”
라온이 씩 웃었다.
“내가 모레부터 일주일 근신이거든. 그 전에 너희가 해야 할 수련을 몸에 때려 박아줄게.”
광풍단의 수련을 조금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기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저들을 단련시켜둘 생각이다. 이후는 도괴에게 맡기면 된다.
“이, 이제 안 되겠다….”
“저걸 죽이자.”
“그래. 그래야 우리가 살아.”
광풍단이 가마를 내려놓고 이를 악물었다. 검을 뽑은 채 가진 기세를 모조리 끌어 올렸다.
“죽여어어어!”
“으아아아아!”
마르타의 외침을 시작으로 광풍단이 대광풍진을 만들며 달려왔다. 진심인지 검에 살벌한 기세가 흘러넘쳤다.
-허어….
라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놈들은 가짜였어. 진짜 광기는 이놈뿐이니라….
녀석은 달려오는 광풍단이 불쌍하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러면 나야 편하지.”
라온이 씩 웃으며 제천검을 검집 채 들어 올렸다.
“오늘은 밤이 좀 길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