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8화
라온이 뭉개진 정문을 짓밟으며 중무전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조각난 문짝이 밟히는 소리가 밤공기를 울렸다.
“모두 위치로!”
“전마검진을 펼쳐라!”
“장원을 사수해!”
“절대 들여보내지 마! 우린 중무전의 무인이다!”
“우와아아아!”
침입 대비 훈련이 되어 있었는지 전마단 검사들은 조장들의 지시에 따라 각자의 위치로 이동하여 검을 뽑았다. 잘 단련된 기세가 날카로운 검기와 함께 일제히 치솟았다.
“괜찮네.”
라온은 피부를 따갑게 찔러오는 전마단 검사들의 기파를 느끼며 미소지었다. 이 수준이라면 광풍단 검사들의 훈련에 좋은 교보재가 되어 줄 것이다.
“라온 지그하르트!”
“멈춰라!”
“광풍단 따위가 어딜 감히!”
검진을 펼친 전마단 검사들이 죽일 듯 살기를 일으켰지만, 라온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기파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쳐라!”
전마단 검사들이 동시에 달려들려고 할 때였다.
쿠구구구!
라온의 등 뒤에서 눈동자에 시뻘건 투지를 담은 광풍단이 쏟아져 내렸다.
“크르릉!”
“크르르르!”
“캬아아아!”
광풍단은 ‘물어’라는 지시에 어울리는 으르렁거림을 뱉으며 전마단을 향해 돌진했다.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듯 했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광풍진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갔다.
치이잉!
검사들은 각기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여 순식간에 대광풍진을 완성한 뒤 전마단과 정면에서 부딪쳤다.
콰아아앙!
강대한 힘의 파동이 터지며 허공으로 가지각색의 빛무리가 치솟았다.
“흐음….”
라온은 전마단과 맞붙어 싸우는 광풍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 수 위의 상대와 호각으로 싸우는 모습을 보니, 실전 전투 훈련을 시킨 보람이 있었다.
“단주 대리! 빨리 가세요!”
“버렌! 그 인간을 잡아 오라구요!”
“시킬 훈련이 산더미야!”
“일단 산에서 밤부터 새우게 합시다! 그게 제일 지옥이었어!”
광풍단원들은 전마단 검사들을 밀어붙이며 버렌을 구해오라는 게 아니라, 훈련을 시키게 끌고 나오라 외쳤다. 누가 듣는다면 사정을 설명 안 한 줄 알 정도였다.
‘그렇게 즐거웠나?’
좋은 경험을 동료에게도 전해주려는 광풍단의 우애에 미소가 지어졌다. 다음에는 훈련량과 강도를 반 배정도 올려야 할 것 같았다.
라온은 광풍단원이 들으면 까무러칠 소리를 중얼거리며 전선 그 너머를 보았다.
청발의 검사 한 명이 전투에 뛰어들지 않고,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했다.
‘저놈이 전령인가.’
저건 도망치는 게 아니다. 중무전을 지휘하는 겔미어에게 이 상황을 알리러 가는 전령이 분명했다.
‘그 뜻은 겔미어가 이 사태를 알기 힘든 곳에 있다는 거겠지.’
주디엘의 정보와 티아스의 증언을 조합해보면 버렌은 오러나 소리로 찾을 수 없는 현진각 깊은 곳에 갇혀 있을 것이다.
외부에서 기척을 느낄 수 없는 곳에 있다면 반대로 안에서도 외부의 기척을 느낄 수 없다. 즉, 겔미어는 지금 상황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냥 보내줄 수는 없지.’
증거는 확실히 잡는 게 좋으니까.
라온이 글래시아의 기운을 일으켰다. 리메르가 바람을 운용하듯 손가락을 튕겨 안쪽으로 달려가는 청발의 검사에게 서리의 기운을 쏘아냈다.
챠아아아!
섬광이 되어 나아간 푸른 기운이 청발 검사의 신발에 달라붙은 뒤 그의 발목을 통째로 얼려버렸다.
“흐어어억!”
검사는 오러를 운용하여 발목을 뒤덮은 글래시아의 냉기를 지우려고 했지만, 당연히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가려 할 때였다.
“멈춰라!”
전마단 진형 쪽에서 눈 밑에 상처가 난 중년 검사가 돌진해왔다.
‘이 자는….’
주디엘이 만들어준 책자에서 눈 밑에 상처가 난 검사에 대해 본 기억이 났다. 전마단 1조 조장 해론이었다.
“더 이상 못 간다!”
해론이 이를 악물고 검을 내리쳐왔다. 라온은 예리한 검기가 쏟아지고 있음에도 거침없이 앞으로 걸었다.
쩌어어엉!
시퍼런 검날이 라온의 이마에 닿으려는 찰나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와 해론이 내리친 검기를 찍어 내렸다.
“크르르!”
마르타다. 회색 입김을 뿜어낼 정도로 흥분한 마르타가 이를 갈며 해론의 허리를 향해 검을 내려쳤다.
“이 어린 계집이!”
“크아아앙!”
어린 계집이라는 말에 마르타의 분노가 거세졌다. 위로 세운 검신에서 해론이 기겁할 정도의 검격이 쏟아져 나왔다.
“크으윽!”
단단하면서도 흉폭한 검세에 해론이 신음을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흐아압!”
마르타는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끝까지 따라붙어 해론의 어깨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으윽….”
해론은 간신히 검을 막았지만, 고통으로 인해 손목을 떨었다. 내부에도 충격이 있었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좋네.’
마르타는 본능적인 감각이 뛰어나다. 그 감각에 기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도 전해줬으니, 더 강한 상대인 해론을 역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마르타. 부탁행.”
라온이 손을 흔들고서 마르타를 스쳐 지나갔다.
“그거 하지 말라고! 이 자식아!”
계속 짐승 소리만 내던 마르타가 이를 갈며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이 아예 짐승이 되진 않은 듯싶었다.
“쯧!”
이번에는 좌측에서 진을 지휘하던 날카로운 눈매의 여성 검사가 혀를 차며 달려왔다.
치이이잉!
단숨에 짓쳐 들어 손에 든 세검을 내지른다. 하나의 칼날이 다섯 개로 늘어나며 전신의 급소를 노려왔다.
‘이번엔 3조장인가.’
날카로운 검기와 마른 체형을 보니, 이 여자는 전마단의 3조장 쿠란인 것 같았다.
‘나쁘지 않은 검기야.’
라온은 이번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검조차 뽑지 않은 채 그 검기 사이로 들어갔다.
후우우우!
쿠란의 검기가 몸을 꿰뚫으려 할 때 눈앞으로 서리의 벽이 치솟았다.
쩌저저정!
은빛 장벽으로 쿠란의 검기를 모조리 지워버린 루난이 앞으로 나오며 설화를 고쳐 잡았다.
“내가 할게. 버렌 데려와.”
루난은 맹한 눈으로 분노한 표정을 드러내는 신기를 보여주고서 땅을 박찼다.
“이익! 비켜!”
쿠란이 창칼처럼 예리하면서도 쾌속한 찌르기를 연달아 쏘아냈지만, 루난은 그 투로를 읽은 것처럼 부드럽게 검을 휘돌려 모든 검격을 차단했다.
쩌저저정!
루난과 쿠란 사이에서 검기와 서리가 부딪치는 불협화음이 끝없이 이어졌다.
‘교육시킨 보람이 있네.’
마르타와 루난의 장점을 키우고, 단점을 지웠기에 짧은 시간임에도 확실한 변화가 보였다. 무력 자체는 저쪽이 더 강했지만, 기세는 이쪽이 압도하고 있었다.
라온은 광풍단 모두에게 가볍게 손을 저어주고, 다리를 얼린 청발의 검사에게 향했다.
“다리를 붙잡아서라도 막아!”
“어차피 저놈은 우릴 죽일 수 없어!”
마르타와 루난에게 묶인 해론과 쿠란은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 중무전의 호위 검사들을 불렀다.
“조장님들 말이 맞아!”
“놈은 우리를 죽일 수 없다!”
“가, 가자!”
“절대로 보내지마!”
“다 달라붙어!”
조장들의 말에 용기를 얻은 검사들이 이를 악문 채로 달려왔다.
“그 말은 맞지.”
라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 집행의 목적은 중무전을 부수는 게 아니라, 버렌의 수색이기에 저들을 죽일 수 없었다.
“물론 그건….”
나한테 붙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대지를 짓누르는 걸음에서 지독한 열기가 스멀스멀 피어난다. 만화공과 그 뒤를 받치는 불의 고리가 공명하며 터져 나온 무시무시한 기세가 전장을 뒤덮었다.
“허어….”
“끄으으!”
“이, 이 괴물을 어떻게 막으라고….”
용암처럼 뿜어지는 열화의 기파에 검사들은 다가올 생각 따위는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식은땀만 흘렸다.
라온은 멈춰선 검사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준 뒤 현진각으로 다가갔다.
‘여기서도 안 느껴지는군.’
건물 근처까지 왔음에도 버렌이나 겔미어의 기운이 잡히지 않았다.
‘역시 밀실인가?’
기척을 아예 지워버리는 밀실은 지하 깊은 곳에 여러 장치를 이용해서 만들기에 들어가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버렌의 증언도 필요 없이 바로 현장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됐….”
라온이 현진각으로 들어가려 할 때 하늘 위에 검은 그림자가 졌다. 땅을 걷어차 옆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쿠우웅!
장원 바닥이 폭삭 무너지며 서릿발 같은 인상을 한 적발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온 것이냐!”
이가 바득 갈리는 소리에서 살기가 묻어나왔다.
“고먼 님이시군요.”
카룬의 호법 중 한 명인 고먼 트록이다. 전장에 나가지 않고 이곳에 남았던 것 같다.
“마지막 기회를 주지! 당장 나가라!”
그는 절대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듯 살벌한 기세를 뿜어냈다.
캬아앙!
고먼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뒤에 있던 청발 검사의 발목을 묶고 있던 냉기가 사정없이 깨져나갔다.
“가라!”
“가, 감사합니다!”
청발 검사는 고개를 꾸벅일 시간도 없이 바로 현진각으로 들어갔다.
‘경지 자체는 나보다 조금 높군.’
고먼의 무력은 마스터 중급은 되어 보였다. 이길 수는 있겠지만 시간이 끌리게 되어 겔미어가 버렌을 숨길 기회를 주게 될 수도 있었다.
“아쉽게도 당신은 제 상대가 아니네요.”
“뭐? 이 건방진….”
“부탁드립니다.”
라온은 고먼이 아니라 뒤쪽을 돌아보며 고개를 숙였다.
쿠구구구구!
중무전의 담벼락이 거칠게 뜯어지며 고먼이 작아 보일 정도의 체구를 가진 도괴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 도괴!”
“도괴? 건방진 놈. 네놈이 날 그리 부를 자격이 있더냐?”
“아니. 그….”
고먼은 도괴의 기세에 질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시건방을 떠는 걸 보니, 실력이 좀 늘어난 모양이구나.”
도괴가 히죽 웃으며 검을 내리쳤다.
“크으윽!”
고먼이 빠르게 검을 뽑아서 맞섰지만, 도괴에 힘에 밀려 차츰 뒤로 밀려났다.
“이야. 역시 총관님은 유명하시네요. 부럽습니다.”
“이 얄미운 자식아! 닥치고 빨리 들어가기나 해!”
도괴가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안 그래도 갑니다.”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현진각으로 들어갔다.
“길잡이가 출발할 시간은 줘야죠.”
* * *
“크으….”
버렌은 지친 숨을 몰아쉬며 턱을 숙였다.
“이야!”
올란은 그런 버렌을 내려보며 탄성을 흘렸다.
“제 생각보다 정신력이 강하시군요. 역시나 지그하르트의 피는 속일 수 없는 모양입니다.”
그는 대단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닥쳐!”
버렌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이를 갈았다.
“네놈들 따위에겐 절대 굴복하지 않아!”
“굴복이라….”
올란이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혹시 제가 처음에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뭐?”
“제 세뇌는 다른 세뇌와 조금 다르다고. 한 번에 강하게 거는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죠?”
“그걸 왜 지금….”
“이미 버렌 님에겐 제 세뇌가 박혀 있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 당신의 뇌리에 부드럽게 스며들어 있죠.”
“무, 무슨!”
버렌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올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버텼는데 언제 세뇌에 걸렸다는 건지 모르겠다.
“질문은 아무 의미도 없죠. 제 목소리와 단어 그리고 몸짓까지. 그 모든 행동이 버렌 님의 뇌에 피로와 고통을 심어주는 사전 작업이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올란은 절대 눈과 귀를 닫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계속 질문하고 홀로 떠들어댔다.
“이제 딱 한 시간 정도의 마무리만 하면 기본 세뇌가 끝납니다. 외부에서는 변화가 없지만, 버렌 님의 뇌에는 폭풍이 일어나죠.”
올란의 목소리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는 빙긋 미소를 짓고서 뒤로 슬쩍 물러섰다.
“여기서 확실하게 끝내고 싶지만, 그 전에 버렌 님을 만나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말과 함께 밀실의 문이 열리고, 겔미어 지그하르트가 들어왔다.
“겔미어!”
“이젠 형이라고 안 부르는 건가? 슬프군.”
겔미어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올란은 고개를 숙이고 겔미어의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수고했어.”
겔미어는 올란에게 손을 저어주고, 버렌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도 친동생에게 이러고 싶지는 않거든. 어때? 생각은 좀 변했어?”
“무슨 생각!”
“내 손을 잡고 라온 지그하르트를 처리할 준비가 됐냐고.”
“지랄한다.”
버렌이 고개를 삐딱하게 세운 채 코웃음을 쳤다.
“내 대답은 똑같아. 동료를 배신하느니, 차라리 죽고 말지!”
“역시나.”
겔미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등을 뒤로 젖혔다.
“그거 알아? 이 가문의 모두가 네가 생각하는 더러운 일들을 해왔다는 거?”
“그, 그게 무슨….”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동료의 뒤를 찌르고, 형제의 목을 베고, 부하를 팔아버린 게 이 가문의 대가리들이라고.”
그는 팔을 양쪽으로 길게 펼치며 서늘한 미소를 흘렸다.
“여기만 그럴까? 아니야. 육황오마. 그에 못지않은 대륙의 거대 세력들은 모두 그렇게 성장했어. 앞서가는 혹은 방해가 되는 세력을 짓밟고 위로 올라갔지.”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린 가문이잖아! 이런 식으로는….”
“모두 이런 식으로 해왔어. 나도, 네가 존경해 마지않는 아버지도 그리고 가주님까지. 모두 그렇게 가족과 친척의 등에 칼을 꽂으며 위로 올라갔다.”
겔미어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번들거렸다.
“지그하르트는. 이 거대한 땅은 그렇게 쌓아 올린 피의 성이다.”
“으….”
버렌은 대꾸하지 못한 채 입술을 떨었다.
“너 아직 이명 없지?”
겔미어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전환하듯 깍지를 낀 손을 무릎에 댄 채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그걸 왜….”
“라온 지그하르트는 15살부터 이명이 붙었다더군. 하분성의 수호신이니, 소검귀이니 하다가 이젠 설화검협이라는 멋들어진 이명을 얻었어. 그에 반해 넌 뭐지?”
그가 비웃음을 흘리며 버렌을 굽어보았다.
“이명도 없는 광풍단의 조장. 라온 지그하르트의 뒤만 봐주는 검사 1. 이게 널 보는 세간의 시선이다.”
“…….”
“네 앞에는 평생 라온 지그하르트가 있을 거다. 여길 가도 라온. 저길 가도 라온. 모든 사람이 버렌이 아니라, 네 앞을 달리는 라온만을 찾겠지.”
“난….”
버렌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 지경이 되어도 정말 질투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질투하지 않고 동료의 성공을 기뻐할 수 있겠냐고.”
겔미어의 목소리가 점차 느릿해지며 가슴을 울렸다. 주먹으로 심장을 두드리는 듯했다.
“후우….”
버렌이 깊은숨을 내쉰 채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잠깐의 순간에 그의 눈동자는 다시 안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무슨….”
겔미어는 정지한 듯한 버렌의 눈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그 녀석을 질투한 건 12살 때야. 재능을 타고난 재수 없는 자식이라 생각했지.”
타고난 재능으로 세상을 쉽게 사는 망할 놈이라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재능만큼이나 노력하는 놈이었지.’
라온의 사물함 안에 있던 낡은 신발들을 보고 느꼈다. 그놈은 재능 이상으로 노력하는 놈이다.
해야 할 게 있다면 잠을 자지 않고, 밥을 먹지 않고서 검을 휘두르는 독종 중의 독종이다.
‘그런 놈을 어찌 질투하겠어.’
누구보다 노력하고 바쁜 주제에 다른 동료들의 성장에도 진심이다. 목숨을 구해준 것으로 모자라, 강해질 방법을 알려주는 녀석을 질투한다는 건 자신의 추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었다.
“형도 어리네. 내 12살 때만도 못해.”
버렌은 흔들리는 겔미어의 눈을 보며 히죽였다.
“솔직히 얘기해봐. 내 걱정을 해주는 게 아니라, 형이 겁나서잖아. 라온이 조금만 더 성장하면 따라잡히니까. 아니다. 이미 따라잡혔을 수도 있겠네.”
“너….”
“질투는 본인이 하면서 내 핑계를 대면 추한 게 덜해지나? 한심하네.”
“닥쳐!”
겔미어가 처음으로 인상을 찡그린 채 소리를 질렀다.
“올란!”
그는 의자를 걷어찬 채 일어서 올란을 불렀다.
“당장 시작해!”
“알겠습니다.”
올란은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후우….”
겔미어는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 깊게 숨을 내쉬고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버렌 님도 출중한 재능을 지니셨는데 아쉽군요. 몇 년만 더 수련하시면 저도 따라잡을 수 있을 텐….”
“무슨 헛소리야. 너쯤은 지금도 잡아.”
버렌은 코웃음을 치며 눈썹을 내렸다.
“자신감은 좋네요.”
“자신감? 사실이다. 라온의 뒤에서 강자를 어떻게 잡는지는 수없이 봐왔거든.”
“그런가요.”
올란은 부드럽게 넘겼지만, 이전보다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처음으로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이거 잘만 하면….’
이 둘을 자극해서 도망칠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믿겠으면 한 판 붙어보던가.”
올란을 도발하려고 할 때 바깥쪽에서 쿵쿵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이 방 한 겹이 아니었어?’
소리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이 밀실은 두 겹 이상으로 만든 것 같았다. 정말이지 미친놈들이었다.
몇 개의 문소리가 들린 뒤 밀실의 철문이 거칠게 열렸다.
“다, 단주님!”
문을 연 청발의 검사가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야.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과, 광풍단이 쳐들어왔습니다!”
“뭐?”
“어?”
겔미어와 올란이 검사를 돌아보며 입을 떡 벌렸다.
“광풍단?”
“광풍단이 왜?”
그 대답은 청발 검사가 아니라, 천장에서 들려왔다.
콰아아아앙!
산이 주저앉는 듯한 굉음과 함께 천장이 와르르 무너졌다.
후우우웅!
시꺼먼 흙먼지 속에서 섬뜩한 붉은 눈동자가 번쩍였다.
“누구냐!”
겔미어가 검을 잡고 기세를 뿜어냈지만, 붉은 눈의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버렌을 보았다.
“네가 무슨 공주냐? 허구한 날 지하에 처박혀 있게?”
“너….”
버렌은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턱을 덜덜 떨었다.
“라온!”
그 이름을 부른 순간 먼지가 하늘로 솟구치며 라온의 모습이 드러났다. 휘날리는 금발과 빛이 아롱져 떨어지는 붉은 눈. 턱을 살짝 치켜든 모습은 거만했지만, 그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돌아가자.”
라온이 제천검의 검병을 쥔 채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널 목 빠지게 기다리는 광견. 아니 광풍단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