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66화 (266/653)

제266화

라온은 광풍단 검사들에게 식사 시간을 준 뒤 별관으로 복귀했다.

흑환을 만들어 준 엔시아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 했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영감이 떠오르셨다고 아침부터 방에서 나오지 않으십니다.”

엔시아 대신 찾아온 주디엘이 담백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성능은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건가.”

“자신이 있으신 듯합니다.”

“그래. 완벽하다는 뜻이겠지.”

흑환의 사용 후기도 듣지 않은 채 방에 들어갔다는 건 본인이 만든 아티팩트의 성능과 품질에 자신 있다는 의미다.

나이는 어리지만, 그녀의 실력이나 마인드는 이미 장인의 위에 오른 것 같았다.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주디엘에게 중무전의 상황을 물어보려고 할 때 그녀가 먼저 말문을 텄다.

“중무전에서 도련님의 최신 정보를 갱신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최신 정보?”

“예. 부상, 새로운 장비, 숨겨둔 무학 그리고 행적까지. 조심스럽게 접근하라는 지시였습니다.”

그녀는 오랜만에 이런 상세한 명령이 내려왔다고 덧붙였다.

“그래?”

라온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버렌의 집사 티아스의 반응에서 느꼈던 위화감이 그저 느낌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요즘 중무전은 어때?”

“조용합니다.”

“조용하다?”

“카룬 지그하르트가 임무에 나가 있기에 전마단주 겔미어 지그하르트가 중무전을 임시로 운영하고 있는데 평소보다 훨씬 잔잔한 분위깁니다. 그리고 그건….”

그녀의 눈동자가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처럼 깊게 가라앉았다.

“폭풍전야.”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디엘의 말을 받았다.

“뒤에서. 혹은 밑에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예. 내부 정보가 통제되어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정보 통제라….”

주디엘이 정보 통제라는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겔미어 지그하르트에 대해 제대로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겔미어는 어떤 사람이지?”

“전마단을 맡고 있는 젊은 강자로 무력 수위는 마스터 중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확하고 빠른 찌르기 위주의 검술을 익혔고, 천무성의 단주를 베어 대륙에 호풍검이라는 이명을 알렸죠.”

주디엘이 옅은 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그 이명만큼이나 대외적 이미지도 굉장히 좋습니다. 아군에게는 자비롭지만, 적군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다고 합니다. 다만 실제 성격은 아군이어도 방해가 된다면 베어버릴 정도로 냉혹한 인물입니다. 중무전 내부에서도 두려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군.”

라온이 짧게 혀를 찼다.

‘정보 통제, 티아스의 반응, 겔미어의 실제 성격 그리고 버렌의 훈련 열외….’

그 모든 정보를 조합하니, 불길한 느낌이 등골을 스쳤다.

다른 것들도 이상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버렌의 훈련 열외가 가장 특이한 일이다.

‘그 녀석이 훈련을 쉽게 빠질 리가 없으니까.’

광풍단에서 책임감이 가장 좋은 버렌이 훈련에 빠진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열외를 해도 본인이 직접 와서 설명해야 했다.

‘내 생각이 짧았어.’

버렌의 최측근이자, 그를 가장 아끼는 집사 티아스가 왔기에 방심해버렸다.

“중무전의 내부 정보가 통제되어 있다고 했지?”

“예. 상당히 막혀 있습니다. 조심성이 높아요.”

“부탁 하나만 하지.”

훈련복에 끼워둔 금색 핀을 가리켰다. 이번에 로엔그린의 던전에서 챙겨온 아티팩트 중 하나였다.

“이 아티팩트의 정보를 줄 테니, 중무전 내부에서 버렌의 위치를 파악해줘.”

“아티팩트의 정보라면 분명 먹히겠지만, 버렌 님은 왜….”

“내 예상이지만 지금 꽤 고생하고 있을 거 같아서.”

라온이 차가운 미소를 흘리며 뒤를 돌았다.

“이젠 내 쫄다구인데, 챙겨줘야지.”

*     *      *

그날 밤.

라온은 북망산 앞에 선 광풍단원들을 내려보았다.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짜증이 어려 있는 눈동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생존 방식은 간단해. 너희는 숨고 나는 찾는다. 그리고 마주치면 전투. 어때? 참 쉽지?”

“이 멧돼지 같은 놈아! 우리가 널 어떻게 이겨!”

마르타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이를 갈았다. 달려와 멱살을 쥘 기세였다.

“존잘 라온. 이길 수 없어.”

루난은 힘들다며 고개를 저었다. 어제 엔시아를 만났다고 하더니 다시 존잘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맞아요! 우리가 단주대리를 어떻게 이깁니까!”

“마스터 아닐 때도 못 이겼는데, 이젠 벽 그 자체라구요!”

“불합리합니다!”

광풍단원들도 주먹을 흔들며 절대 이길 수 없다고 불평했다.

“걱정 마. 그냥 하자는 게 아니니까.”

라온이 피식 웃고서 손목과 발목에 흑환을 찼다.

“난 흑환을 착용하고, 너희는 벗는다. 즉 난 오러 없이 너희를 찾을 거야. 이러면 되겠지?”

“오, 오러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정말요?”

“그, 그렇다면 할 만하지!”

광풍단은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아냐! 아직 남았어!”

마르타가 인상을 찌푸리며 앞으로 다가왔다.

“전투에서는 어쩔 건데? 갑자기 팔찌를 벗고, 덤비는 건 아니겠지?”

“물론 이대로 싸우지.”

“좋아! 그럼 할 만하지. 네 면상을 후려주마!”

마르타가 입술을 꾹 깨물고, 주먹을 들어 올렸다.

“나도! 요즘 너무 열 받는다고!”

“오늘도 하루종일 바닥을 뒹굴었잖아!”

“끄으, 절대 못 참아!”

광풍단원들 모두가 분노를 일으키며 이를 갈았다.

“나한테서 발견되지 않거나, 날 쓰러뜨리는 사람은 내일 휴가를 주도록 하지.”

“허억!”

“휴가!”

“나, 난 무조건 숨을 거야! 땅굴을 파서라도 숨겠어!”

휴가까지 준다고 하자 광풍단원들의 얼굴이 뻘게졌다. 숨던, 공격하던 의욕이 최대치로 오른 상태였다.

루난은 그러거나 말거나 멍하니 북망산을 올려다보았다.

“난 한 시간 뒤에 움직인다. 그럼 출발!”

라온이 씩 웃으며 손뼉을 쳤다. 리메르를 하도 봐서 그런지 이럴 때면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게 되었다.

“가즈아아아!”

“오늘 끝까지 숨 안 쉰다!”

“난 라온님을 때려눕힐 거야! 저 얄미운 얼굴을 언제 때려보겠냐고!”

광풍단원들을 기합을 내지르고 산으로 올라갔다. 오늘 훈련 동안 오러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라온은 검사들이 산을 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뒤를 돌았다.

광풍단원들도 바보는 아니기에 처음에만 함성을 지르고 쥐 죽은 듯 조용히 산을 올랐다.

“재밌겠지?”

-흥! 애들 놀이가 뭐가 재밌다고.

“내일 휴가 준다고 했으니까. 전력을 다해서 발악할 거 아니야. 그 희망을 깨뜨리는 맛이 있을 거 같지 않아?”

-크으으!

라스가 맥주를 원샷으로 들이킨 듯한 탄성을 흘렸다.

-본왕조차 생각하지 못한 사악함이라니! 역시 네놈은….

‘또 시작이네.’

라온은 엉겨 붙으러는 라스를 밀어내고 눈을 감았다. 한 시간은 길다. 오러를 운용하지 않는 대신 명상으로 검술을 갈고 닦으며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됐군.”

라온은 한 시간하고 5분이 더 지났을 때 눈을 뜨고 산으로 다가갔다.

“나쁘지 않은데?”

빨리 움직이기 위해서 보법을 사용한 녀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발걸음을 죽이고 흔적을 지운 채 산을 올랐다. 가르친 보람이 있어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다고 못 찾는 건 아니지만.’

산을 수색할 때 보아야 할 건 바닥만이 아니다. 나뭇가지나 나뭇잎이 휘어진 흔적, 바람을 타고 오는 체취, 산길에서 움직이는 사람의 심리 등 족적을 보지 않아도 힌트는 많았다.

‘우측으로 꽤 많이 움직였네.’

바닥과 나뭇가지의 흔적을 보니 여덟 명 이상이 우측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이쪽부터 처리하는 게 좋겠어.’

라온은 흔적의 방향을 확실하게 파악한 뒤 그 방향으로 달렸다.

‘흔적이 점점 짙어지는군.’

산 초입 부근과 달리 중턱을 넘어서자 흔적들이 노골적으로 언덕 부근을 가리키고 있었다.

‘생각이 훤히 보이네.’

라온이 피식 웃고서 언덕을 오르자마자, 양옆 그리고 나무 위에서 시퍼런 수련검이 떨어져 내렸다.

“우리에게!”

“휴가를!”

“내놔라!”

“죽엇!”

숨어 있던 광풍 3조 검사들이 악을 지르며 수련검을 내리쳐온 것이다.

위치선정, 타이밍, 반응 속도 모두 좋았다. 물론 이상한 단어 하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좋은 기습이야.”

라온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후우우웅!

그 한 걸음으로 검사들의 검은 허공을 그어 내렸고, 라온은 그 틈을 이용하여 우측에 있는 검사 두 명의 복부를 후려쳤다.

“꺼어억!”

“으윽!”

고작 주먹에 배를 맞았을 뿐이지만, 검사들은 입에 거품을 문 채 일어서지 못했다.

“야! 뭣들 하는 거야!”

“칼도 아니고 주먹이잖아!”

“못 일어나.”

라온은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나왔다. 오러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근력과 민첩성의 통제를 풀었기에 절대 일어날 수 없다.

“흐으윽!”

“마, 말도 안 돼!”

“오러를 못 쓰잖아! 다 함께 덤비면 이길 수 있어!”

버렌이 없기에 3조 부조장인 크레인이 모두를 격려하며 달려들었다.

타아앙!

라온은 허리를 노리고 내질러 온 다섯 개의 수련검을 손등과 어깨로 가볍게 쳐냈다.

“그저 눈을 따라서 움직이지 마. 기감. 오러를 전력으로 운용해서 상대와의 거리와 위치를 파악해!”

장미 가시처럼 뻗어 나오는 칼날들을 모조리 흘려낸 뒤 하나씩 주먹을 후려쳤다.

퍼버버버벅!

폭풍처럼 쏟아낸 주먹에 광풍 3조가 바닥을 뒹굴었다. 남은 사람은 부조장 크레인뿐이었다.

“히이익! 이, 이게 어떻게….”

크레인이 이빨을 턱을 떨며 뒷걸음질 쳤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가 진자처럼 흔들거렸다.

“너 아까 ‘죽어’라고 했지?”

“제, 제가요? 그럴 리가 있나!”

“아냐. 확실히 들었어. 그래서 너만 남겨뒀거든.”

라온이 빙긋 웃으며 손목을 돌렸다.

“자, 잠깐!”

“넌 좀 많이 맞자.”

“아아아악!”

*     *      *

라온은 다시 산 초입에 내려와 있었고, 그 앞에는 광풍단 검사들이 무릎을 꿇은 채로 멍이 든 부위를 문지르고 있었다.

마르타는 대놓고 일대일로 붙자고 했다가 신명나게 두들겨 맞았고, 루난은 가장 마지막까지 숨어 있었지만 결국 위치를 들켜서 항복했다.

“수색과 은엄폐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너희들이 나한테 위치를 들키지 않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어.”

라온이 광풍단과 눈을 마주치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부터 싸울 준비를 해야겠지.”

마르타가 얻어맞은 턱을 문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정답. 거기서 갈리는 게 어떻게 싸우느냐지.”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마스터가 되면 육체와 감각이 한층 올라가. 너희만 오러를 사용하더라도 내가 더 유리하지. 그런 무인을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할까?”

“그냥 돌진해서 패버린다!”

“기습한다!”

“숫자로 둘러싼다!”

첫 대답은 당연히 마르타다. 광풍단은 각자 생각한 답을 내놓았지만, 그중에 정답은 없었다.

“정답은 없어.”

“없다고?”

“엑?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정말이다.”

라온이 당황하는 광풍단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리, 시기, 상황 모두 때에 따라 달라지니 정답은 없지. 다만 해답은 있다. 집중력. 그 상황에서 어떤 방법을 써야 더 버틸지, 어떻게 싸워야 상대를 쓰러뜨릴지 머리가 깨질 정도로 생각하고 집중해라.”

눈동자에 열기를 담아 광풍단을 굽어보았다.

“내가 언제 너희를 발견해서, 어떻게 싸울지를 모르니, 출발할 때부터 집중력을 최고조로 유지해. 항상 너희가 유리한 싸움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긴장의 끈을 붙잡은 채 머리를 굴려. 계속 말하지만 집중력이다. 이 훈련이 끝날 때까지 집중력을 최고조로 유지해.”

그 말에 광풍단 모두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들의 눈동자에 힘이 담기는 게 느껴졌다.

“알아들었으면 올라가. 2라운드 시작이다.”

“예!”

검사들은 이전처럼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오러도 없는 라온에게 깨진 창피함과 가슴이 뛰는 조언을 받은 감격에 마음을 다잡고 조용히 산을 올랐다.

라온은 광풍단이 조심스럽게 산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본 후에 뒤를 돌았다. 산이 아니라, 연무장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음? 네놈 어디 가는 것이냐?

어깨에서 하품하던 라스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연무장.’

-저 산에 가는 게 아니라?

‘거길 왜 가?’

-아니, 방금 애송이들에게 올라가라고.’

‘쟤들보고 올라가라고 한 거지. 내가 간다는 말은 안 했잖아.’

-어어….

녀석은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지금 저 녀석들에게 필요한 건 집중력을 유지하는 시간이야.’

라온이 뒤를 돌아보고 씩 웃었다.

‘내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 계속 긴장과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겠지. 조금 힘이 들겠지만, 짧은 시간에 많은 성장을 할걸?’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힘든 게 아니라, 죽을 정도로 힘들겠지만, 그만큼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도 수련 좀 해야지.’

라온이 어깨를 으쓱하고서 제천검의 검병을 쥐었다.

-네, 네놈은 아무리 보아도 인간이 아니다!

라스가 턱을 파르르 떨었다.

-그건 인간이 할 사고방식이 아니라고!

‘그럼 인간이 아닌가 보지.’

-인정했구나! 드디어 인정했어! 좋다! 본왕이 깔아놓을 로열로드에서….

‘안 산다구요.’

*     *      *

라온은 5연무장으로 돌아와 눈을 감았다. 불의 고리와 만화공을 천천히 끌어 올렸다. 전신의 마나회로를 불의 기운으로 달군 뒤에 제천검을 뽑았다.

고오오오오!

대기조차 일그러뜨릴 강대한 열기가 강물이 스치는 자갈처럼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치이이익!

바닥에 깔린 고운 모래들이 시꺼멓게 그을리며 회색 연기를 스멀스멀 일으켰다.

‘이게 만화공 염주벽.’

염주벽은 몸으로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일 때 전신의 열기를 높여 상대의 오러를 태워버리는 방어 무학이었다.

‘역시 만화공에는 쓸만한 게 많아.’

마스터에 오르며 만화공 백화의 무학들이 새롭게 머리에 그려졌다. 지금까지는 나 자신의 무학을 만들고, 발전시키느라 거리를 두었지만, 이제 여유가 생겼으니, 제대로 익혀볼 시간이었다.

후우우웅!

라온은 육체를 두른 만화공의 기운을 제천검으로 이동시켰다. 검날 위에서 타오르는 열화의 강기를 검기처럼 얇게 저민 뒤에 한 줄의 선을 일으켰다.

화아아아!

검신에서 흐르는 열기의 선에 바닥의 모래들이 사그러들고, 아지랑이가 피듯 공간이 찌그러져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적섬.

염주벽과 반대로 강기에 압도적인 화력을 더해 상대의 방어를 깨부수는 패도의 무학이었다.

라온이 천천히 검을 내리그었다. 모래 바닥이 검게 갈라져 날카로운 구멍이 생겼음에도 양옆에 쌓인 모래들이 차오르지 않았다. 적섬의 열기에 주변의 공기마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괜찮군.’

비슷하거나 떨어지는 상대라면 절대 막지 못하고, 자신보다 윗급 상대의 방어라도 뚫어버릴 경악스러운 위력이었다.

‘오러 소모가 크긴 하지만.’

염주벽이나 적섬 모두 백화의 무학이기에 기본적인 검술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양의 오러가 소모됐다. 좋은 무학이지만 쓸 때를 확실히 고르는 게 좋을 듯싶었다.

라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서 지금까지 익혔던 그리고 익힐 수 있는 무학들을 차례로 펼쳐내고 점검했다.

집중하여 정신을 잃고 검술을 펼치다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제 찾으러 가야겠네.’

-무슨 물건이냐고!

라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름을 흘렸다.

‘물건이라니, 아끼는 부하들이지.’

방치해 둔. 아니, 훈련시켜 둔 광풍대원을 부르기 위해서 제천검을 집어넣었다. 북망산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뒤를 돌았는데, 연무장 앞에 주디엘이 도시락 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도련님을 뵙습니다.”

주디엘이 무릎을 살짝 구부려 인사를 한 뒤에 앞으로 다가왔다.

“새벽부터 웬일이야?”

“수련하고 계실 거 같아서 간식을 준비해왔습니다.”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앞에 섰다. 평소에는 짓지 않는 미소.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 고마워. 이쪽으로 가자.”

라온이 빙긋 웃으며 주디엘과 함께 휴게실로 들어갔다. 기막을 펼쳐서 소리가 빠져나가는 걸 막았다.

“무슨 일이지?”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벌써?”

“급한 일이신 것 같아서 좀 빠르게 알아봤습니다.”

그녀가 담백한 눈빛을 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건 제 예측입니다. 그걸 생각하고 들어주십시오.”

“그래.”

“중무전의 그 어떤 연무장에서도 버렌 님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중무전 건물 안에 있다고는 하는데,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반면에 겔미어는 이곳저곳에서 목격되었죠. 그리고 보이지 않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습니다.”

“그게 누구지?”

“올란. 전마단의 조장 중 하나로 검의 달인입니다. 다만 그에게는 검 말고, 특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특기?”

“예. 세뇌.”

주디엘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말을 이었다.

“육체적인 고통을 주는 단순한 방식이 아니라, 말과 약간의 약물로 정신에 충격을 주는 세뇌 방식이라 외부에 티가 나지 않습니다. 제게 걸려 있던 약한 세뇌도 그런 방식이었죠.”

라온의 살기에 그 세뇌가 지워지긴 했지만, 예전의 자신도 올란이 사용하는 것 같은 세뇌에 걸려 있었다.

“그럼 네 말은….”

“네. 아닐 수도 있지만, 올란이 버렌 님께 세뇌를 걸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거의 확실하다는 소리네.”

라온이 이마를 찌푸렸다. 아닐 수 있다고도 말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겔미어라는 놈은 동생을 감금해둘 수 있는 개새낀가?”

“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아, 이유는 아마 나 때문이겠지?”

“…….”

주디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알 수 없다는 의미였지만, 그래서 앞의 예측들이 더 신뢰가 갔다.

“올란이 사용하는 로펜스식 세뇌는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진행됩니다. 그 이후에도 꾸준히 불러서 추가적으로 완벽하게 세뇌를 걸죠.”

“열흘….”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티아스가 열흘 동안 훈련에 참여하지 못할 거라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확실하군.

‘그래, 확실해.’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 티아스는 사정을 알고 있음에도 협박을 당해 어쩔 수 없이 연무장으로 찾아온 것이다. 평소와 다른 그의 반응은 제발 버렌을 찾아달라는 구원의 손짓이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지금 중무전에는 기본 병력과 전마단만 있는 거지?”

“예. 카룬이 야만족을 상대하러 갔기에 남은 병력은 그들이 전부입니다.”

“딱 좋네.”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마단 정도면 광풍단의 훈련 교보재로 제격이겠어.”

“주, 중무전을 칠 생각이십니까?”

“그래. 지금 우리애들이 미친개가 되기 직전이거든?”

라온이 북망산을 올려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잘 물어뜯을 수 있을 거야.”

-그건 네놈 때문이지 않느냐! 분명 그 녀석들도 널 더 물고 싶을 거다!

‘미친개도 주인은 안 무는 법이지.’

라스를 밀어내려고 할 때였다. 안쪽 연공실에서 굉음이 터졌다.

“어?”

라온이 바로 휴게실을 나섰다. 연공실 앞이 흙먼지로 뒤덮였고, 그 연기 사이에서 적발을 난잡하게 늘어뜨린 리메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저 인간은 또 왜 저 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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