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2화
다음날 새벽.
라온은 출발 준비를 하는 광풍단원들을 살폈다. 누구 하나 죽지 않고 임무를 완수했기 때문에 모두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다만 리메르와 루난은 졸음을 참지 못하고, 벽에 기댄 채 머리를 까딱였다.
“단주님.”
라온이 리메르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도, 돈 달라고? 너 이제 정말 깡패….”
졸다가 깨서 멍한 눈을 한 리메르가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손목 달라구요.”
“손목은 왜?”
“상태 좀 보려고 합니다.”
“괜찮은데?”
“단주님의 괜찮다는 말은 못 믿으니까요.”
“에휴, 정말….”
그는 귀찮게 한다고 중얼거리면서도 손목을 내밀었다.
“금방 끝내겠습니다.”
만화공을 운용하여 리메르의 마나회로를 살폈다.
‘확실히 나아지긴 했네.’
마나회로가 붙었어.
단전은 여전히 망가진 상태지만, 협착되고 갈라졌던 마나회로의 상태는 훨씬 좋아졌다. 물론 예전으로 돌아가려면 한참 더 회복해야 하지만, 일단 일상생활에 문제는 없어 보였다.
“정말 나아지긴 했네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리메르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거봐. 괜찮다고 했잖냐.”
“우리 단주 도박은 발리면서 구라는 숨 쉬듯이 치잖아. 제대로 살펴봐.”
마르타가 히죽거리는 리메르를 보며 콧등을 찡그렸다.
“그, 그래도 내가 단주인데 말이 너무 심한….”
“하긴 단주님이 거짓말을 하신 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버렌이 마르타 옆에 붙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생 시절에는 하루 종일 거짓말만 하신 적도 있었지.”
“거짓말 아닌 걸 찾는 게 빠를 정도였어.”
다른 광풍단원들도 리메르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너무 슬퍼….”
리메르는 광풍단원들을 보며 눈썹을 축 내렸다.
“…….”
옆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루난은 아이 같은 숨소리를 내며 잘도 잤다.
“출발하기 전에 묻고 싶은데.”
라온은 출발 준비를 모두 마친 뒤에 뒤를 돌아 광풍단과 눈을 마주쳤다.
“일주일 전에 강해지고 싶다고 말했던 거 진심 맞지?”
“당연하지!”
“물론!”
“앞으로는 목숨 걸고 수련하겠습니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어요!”
임무도 완수했고, 리메르도 회복했기에 광풍단 모두는 진심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다행이네.”
라온이 빙긋 웃으며 버렌에게 시선을 주었다.
“버렌.”
“음?”
“지부까지 쉬지 않고 보법을 밟을 때 힘들었어?”
“힘들었지. 긴 시간 동안 전력으로 오러를 운용한다는 건 정말 힘들더라고. 아니, 힘든 정도가 아니라 고통스러웠지.”
“그 이후에 성장한 느낌도 들었겠지?”
“오, 오러의 총량이 약간 늘어나긴 했지….”
버렌은 뭔지 모를 불안함을 느끼고 눈동자를 떨었다.
“들었지? 버렌이 증명을 했듯이 오러를 전력으로 운용하며 달리기만 해도 오러의 총량과 내구성, 육체 능력이 향상된다. 이런 실전 훈련은 흔하지 않아.”
“어….”
“그, 그러면….”
광풍단원들이 라온을 보며 턱을 떨었다.
“그래. 여기서부터 지그하르트까지 전력으로 달려간다.”
라온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억!”
“야이 미친놈아!”
“악!”
버렌이 기겁하고, 마르타가 오랜만에 욕을 내뱉었으며, 루난이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부, 불가능해요! 지부까지만 가는데도 숨 막혀 죽을 뻔했다구요!”
“나…무서워….”
“그러다가 다 죽어! 다 죽는다고요!”
버렌과 함께 달렸던 3조 조원들이 팽이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후, 훈련은 할 건데요.”
“네에. 돌아가서 조금만 쉬고….”
“무슨 소리야.”
라온이 검사들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조금 전에. 너희가 너희 입으로 목숨 걸고 수련한다며.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뭐든 한다며.”
“아….”
“그, 그건….”
광풍단원들은 라온의 평온한 눈동자를 보며 턱을 떨었다.
‘으으, 망했다….’
‘저 악마 같은 놈!’
‘이렇게 될 줄 알고 물어본 거야. 분명해!’
이미 라온의 덫에 걸린 검사들은 도망칠 구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입술만 깨물었다.
“몸부터 풀어. 전력으로 달리려면….”
“자, 잠깐! 루난 님!”
라온이 달리기 전 준비운동을 지시하려 할 때 크레인이 조금 전에 깨어난 루난을 가리켰다.
“루난 님은 어떤 훈련이라도 받겠다고 동의 안 하셨잖아요!”
어떻게든 살고 싶었던 크레인이 침을 흘리며 손을 휘저었다.
“흐음.”
눈치 빠른 녀석.
이건 크레인의 말이 맞았다. 루난은 조금 전까지 조느라 대답하지 못했으니까.
“루난 님!”
“살려주세요!”
“루난! 너 잠도 못 잔다고!”
광풍단 모두가 루난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나중에 지옥 훈련을 하더라도 복귀만큼은 평범하게 하자고 부르짖었다.
“잠….”
루난은 잠을 못 잔다는 소리에 마음을 결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 나는….”
“루난.”
라온은 루난이 거절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같이 가줄 거지? 다 끝나고 또 아이스크림 가게 가자.”
“응!”
부드럽게 웃으며 손짓하자, 루난이 맹한 눈으로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아….”
“끄, 끝났어.”
“망했다….”
광풍단의 눈동자에서 힘이 풀려갔다.
“이제 다 동의했네. 직접 한 말은 지켜야지? 준비들 해.”
라온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빨리 준비를 끝내라고 턱짓했다.
“단주님!”
“쟤 좀 막아줘요!”
“임무 완벽하게 끝나고 귀환인데, 이게 무슨!”
광풍단원들은 마지막 희망인 리메르에게 달라붙었다.
“라, 라온. 난 환자고, 쟤네도 이제 임무를 끝냈으니까 이번에는 좀 편하게….”
“단주님 말은 준비해 두었습니다.”
라온이 손짓을 하자, 이젠 부하가 다 된 벨가와 모린이 검은색 말 한 필을 가져왔다. 역삼각형 얼굴에 눈빛이 초롱초롱하며, 털이 은은하게 반짝이는 명마였다.
“혈통 좋은 말이니, 다음 마을까지 버틸 수 있을 겁….”
“으랏차!”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리메르가 말에 올라탔다.
“너희들은 약하다! 아무리 훈련을 해도 부족해! 내가 이끌 테니, 당장 쫓아오도록!”
리메르는 본인이 뛰지 않는다는 것에 안심하고서 말을 타고 앞으로 내달렸다.
“으윽!”
“하여튼 저 인간은!”
“후….”
버렌과 마르타, 루난이 어쩔 수 없이 달려갔고, 그 뒤를 광풍단 검사들이 따라갔다.
“으랴!”
“으아아아!”
“젠장!”
리메르가 가뜩이나 빠른 명마를 전력으로 몰았기에 다른 검사들도 온 힘을 다해서 달릴 수밖에 없었다.
-으으!
라스가 리메르의 뒷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나 꼴 보기 싫은 귀때기이니라! 얄밉기 그지없도다!
‘걱정 마.’
라온이 옅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돌아가서 제일 피똥 싸는 건 저 사람일 테니까.’
* * *
첫눈이 깔린 듯한 새하얀 대리석 위로 핏빛 기둥이 솟아 있는 기묘한 공간.
10사도는 석상이라도 된 듯 미동도 없이 투명할 계단 위에 세워진 단상을 바라보았다.
샤아아아!
10사도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자, 단상을 가리고 있던 붉은 발 뒤로 여성의 굴곡을 담아낸 그림자가 비쳤다.
“사부님을 뵙습니다.”
10사도가 무릎을 꿇었다. 사도가 머리를 조아리는 유일한 존재. 백혈교주의 등장이었다.
백혈교주는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은은한 기세만 가졌지만, 그 존재감만큼은 발군이었다. 강대한 기세를 퍼뜨리는 10사도의 존재조차 그녀의 신비로움에 묻히고 있었다.
“넷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알아봤겠지?”
단상 위에서 영혼이 녹아내리는 듯한 달큰한 음성이 흘러내렸다.
“예.”
10사도는 머리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
“4사도는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당했다고 합니다.”
“라온? 모렐이 아니라, 라온 지그하르트?”
제자이자, 사도의 죽음을 들었을 때도 평온하던 백혈교주의 음성에 놀라움이 담겼다.
“그렇습니다.”
“라온이라면 루드킨을 꺾었던 그 아이였지?”
루트킨은 7사도의 이름이다. 백혈교 내에서 사도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건 백혈교주 밖에 없었다.
“마스터에 올랐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벌써 태른을 죽일 정도라고?”
“저도 믿기지 않았지만, 사실이었습니다.”
10사도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낮은 숨을 뱉었다.
‘사부님이 놀라시는 건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백혈교주는 4사도의 숨이 끊어지자마자. 그의 죽음을 알았음에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로엔그린의 던전에 갔으니, 발카르나 다른 육황오마의 강자에게 당했다고 생각하며 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런 냉정한 백혈교주조차 라온에게 4사도가 당했다는 사실에는 경악하고 있었다.
‘아니, 당연한 건가.’
4사도를 죽인 건 이미 완숙에 이른 강자가 아니라, 이제 막 날개를 펴는 라온 지그하르트였다. 마스터에 오른 지 1년도 안 된 애송이에게 4사도를 꺾였다는 건 아직도 믿기질 않았다.
“세상에는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니, 이제 마스터에 오른 라온 지그하르트가 4사도를 꺾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백혈교주는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았다.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턱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 됐는지는 알고 있겠지?”
“예. 정면대결은 아니고, 암습을 했다고 합니다.”
“암습?”
“4사도가 모렐을 상대하고 있을 때 뒤에서 찔렀다고 합니다. 4사도가 죽은 척을 하며 기회를 노렸지만, 그것조차 파악하여 역으로….”
10사도는 로엔그린의 던전의 생존자들이 말했던 증언을 그대로 읊었다.
“그 나이에 상대의 심리까지 이용하다니, 영리한 아이로군.”
백혈교주는 재미있다는 듯 더운 열기가 담긴 웃음을 흘렸다.
“사용했다는 단검은 루드킨의 가슴을 찢어놓았던 요기의 단검이겠지?”
“그렇습니다.”
“대륙 최고의 재능을 지닌 천재가 우리에게 천적이 되는 무기까지 가지고 있다? 재밌네.”
백혈교주가 양손으로 무릎을 잡으며 들뜬 미소를 지었다.
“루드킨은 어때?”
“하사하신 성혈 덕분에 상처를 모두 회복하고, 벽을 넘었습니다.”
“그게 다가 아니겠지?”
“예. 고수들의 피와 살의 취하며 더욱 성장했습니다.”
10사도는 지켜보고 있던 것처럼 7사도의 행적을 읊었다.
“시험해보기 딱 좋겠어.”
백혈교주가 긴 손가락을 까딱였다.
“루드킨을 보내서 라온 지그하르트의 진짜 무력과 성격을 파악해. 그 이후에는 알고 있겠지?”
“그는 글렌 지그하르트의 손자입니다.”
“나도 알아.”
“그래도 데리고 오라는 겁니까?”
“나보고 그 늙은이를 두려워하라는 건가?”
“음….”
10사도는 대답하지 못하고 살짝 눈매를 찡그렸다.
“좋은 재능은 좋은 곳에서 써야 하는 법.”
백혈교주가 등을 뒤로 젖히며 입꼬리를 길게 말아 올렸다.
“그 아이를 사도로 삼을 생각이야.”
* * *
라온과 광풍단은 가젤 강으로 떠날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지그하르트 정문 앞에 도착했다.
“주, 죽겠다….”
“저 또라이 새끼. 지, 진짜로 달려서만 오게 했어….”
“히이이….”
버렌과 마르타, 루난 모두 허리를 굽힌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제복과 머리카락은 전부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허억! 허억!”
“토, 토할 거 같아.”
“죽고 싶어….”
조장이 지칠 정도였으니, 다른 광풍단 검사들은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바닥을 뒹굴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눈과 코, 입에서 물을 흘려냈다.
“나, 나 집에 갈래! 이렇겐 못 살아!”
도리안은 오랜만에 고급 썰매를 꺼내서 집에 간다고 울부짖었다.
“에휴, 허약한 것들. 이 정도로 쓰러져서 강해질 수 있겠냐고.”
계속 말을 갈아타며 편하게 온 리메르는 광풍단원들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끄으윽!”
“제기랄….”
광풍단원들이 우아하게 말을 몰아 정문으로 향하는 리메르를 보며 이를 바닥 갈았다.
‘저, 저 인간은 정말!’
‘밉다밉다. 저렇게 미울 수가….’
‘아프다고 위로해주는 게 아니었는데….’
라온은 훈련을 시키면서 같이 뛰기라도 했지, 계속 말을 타고 온 리메르가 저런 말을 하니 이가 바드득 갈렸다.
“가문의 정문 앞이다. 모두 정렬해.”
라온은 광풍단의 상태를 확인한 뒤에 성문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광풍단 임무를 완수하고 복귀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거대한 성문이 웅장한 소리와 함께 갈라졌다.
“광풍단.”
열린 성문 안에서 외총관 일리운이 나오며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복귀를 환영한다.”
“신수가 훤하네. 집만 지키니까 좋나.”
리메르가 말에서 내리며 피식 웃었다.
“부하들 잘 만난 네놈만 하겠느냐.”
일리운이 라온과 광풍단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떻게 네놈 밑에서 저런 아이들이 나왔는지.”
“인생은 운빨이잖아. 부럽지?”
“부럽긴 하군.”
일리운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는 다른 대주들도 함께 있으니, 바로 가주전으로 향하라고 말했다.
“역시 그런가.”
리메르가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돌았다.
“복장을 정리해. 가주전으로 간다.”
“예!”
라온과 광단은 빠르게 머리와 옷을 정리한 뒤에 리메르를 따라 가주전으로 향했다.
“라온 지그하르트.”
라온이 가장 뒤에서 따라갈 때 외총관 일리운이 손짓을 했다.
“한 번의 임무에서 남북맹주의 제자와 백혈교주의 제자를 모두 벤 건 네가 처음이다.”
그는 어깨를 두드리며 기꺼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지그하르트의 이름이 아직 살아 있음을 증명시켜주어 고맙다.”
“아닙니다.”
라온은 일리운에게 목례를 하고서 광풍단의 뒤를 따랐다.
‘다 같군.’
겉보기엔 냉정하고 무관심하지만, 일리운 역시 지그하르트의 무인이었다. 그는 남북맹과 백혈교를 모두 망신시킨 것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야. 저기….”
“허억!”
대로 주변에서 가벼운 대화를 하던 검사들이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다. 광풍단을 차례로 스친 그들의 시선은 라온에게 고정되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기세가 전혀 달라졌군.”
“남북맹의 틸러를 베었다던데.”
“단순히 잡고 끝낸 게 아니라, 틸러의 악행까지 밝혔잖아. 그놈은 하루아침에 영웅에서 악마가 됐지.”
“부왕 로만과 내기를 해서 모두를 살렸다고 하더군. 3년 후에 붙겠다니, 20살도 안 된 아이의 간땡이가 무슨….”
“정체기도 안 오는 건가? 어떻게 실력이 늘기만 하지?”
검사들은 물처럼 자연스레 흘러내리는 라온의 기파를 느끼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게 전부가 아니야. 로엔그린의 던전에 들어가서 4사도를 죽인 건 업적 그 자체다.”
“이제 19살이 되어가는 어린 검사가 사도를 잡다니, 이런 적이 있던가?”
“그런 말은 실례다. 이미 완성을 향해 가는 검사이니, 나이는 중요치 않아.”
“그냥 잡은 건 아니고, 암습이라고 하던데? 실제로 싸웠다면 복귀하지 못했겠지.”
“하긴 모렐과 싸우는 4사도를 기습했다고 했었으니까.”
“흐음, 지그하르트 검사가 기습이라니, 좀 그렇군.”
“그래서 너희는 기습으로 사도를 잡을 수 있나? 대련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적인데 기습이 무슨 상관이지?”
“맞는 말이다. 백혈교의 혈귀 놈들은 인간 취급을 해줄 필요가 없어.”
어떻게든 라온의 업적을 깎으려는 검사들이 있었지만, 다른 검사들이 나서서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라온은 검사들의 시선을 통해 그들의 감정을 느꼈다. 호감과 비호감 그리고 추잡함을 동시에 받아들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힘이 있다면 질시를 뿌리는 자들을 짓누를 수 있다고 하셨었지.’
예전에 셰릴이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절대적인 힘이 있다면 타인의 악의조차 짓누를 수 있다는 조언이.
‘아직 모두를 눌러버릴 수는 없지만….’
라온이 뒤를 돌았다. 암습을 했다며 추하다고 했던 검사들을 보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헉!”
“끄흑!”
“아….”
얼음장처럼 서늘하고도 날카로운 기파에 입을 주절거리던 검사들이 엉덩방아를 찧고 팔과 다리를 파르르 떨었다.
“몸이 좋지 않으면 들어가서 쉬시죠.”
라온은 공포에 질린 듯 흔들리는 눈동자들을 굽어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흐음!
라스가 얼음꽃 팔찌 위로 올라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짓을 하는군. 주절거리는 놈들, 비꼬는 놈들은 사지를 얼려버려야 하느니라.
‘그러냐.’
-분노를 운용하는 게 가장 좋지. 조금 전 네놈이 분노를 사용했다면 저것들 전부 바지에 오줌을 지렸을 것이니라.
‘분노?’
-그렇느니라. 본왕의 분노는 저런 놈들에게 쥐약과도 같다.
‘어떻게 쓰는 건데?’
-좋다! 본왕이 약간의 강의를….
라온은 오늘도 아낌없이 주는 라스의 조언을 꿀떡 삼키며 가주전으로 향했다.
* * *
가주전 알현실에는 지그하르트 주요간부들이 양 옆으로 진열을 갖춘 채 서 있었다.
라온과 광풍단은 리메르의 뒤를 따라 알현실 중앙의 카펫을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광풍단은 이뤄낸 업적답게 우렁찬 목소리로 알현실을 뒤흔들었다.
“광풍단.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리메르가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일어나라.”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듯한 글렌의 음성을 들으며 몸을 일으켰다.
“라온 지그하르트.”
“예.”
라온이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리메르와 같은 위치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가젤 강에서도, 로엔그린 던전에서도 네가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고 들었다. 직접 설명하도록.”
“알겠습니다.”
이곳에 오면서 생각을 정리해두었다. 천천히 숨을 고르고서 입을 열었다.
“처음 가젤 강에 도착했을 때 백창을 타고 온 틸러와 만났습니다. 그와… 음?”
라온은 자연스레 글렌을 올려보고 말을 하려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가, 가주님 표정이….’
왜 저러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