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59화 (259/653)

제259화

비연회주 채드는 가주전에서 나오자마자 비연회 건물 최상층으로 달려갔다.

지그하르트 본관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고풍스러운 집무실에선 긴 백발을 뒤로 깔끔하게 묶고, 둥근 안경을 쓴 중년의 여성이 손바닥만 한 책을 읽고 있었다.

“회주님!”

채드가 백발의 여성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네 얼굴 안 궁금하니까. 좀 떨어져.”

중년 여성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채드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리고 비연회주는 이제 내가 아니라, 너야. 언제까지 회주라고 부를래?”

“그, 그러네요.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채드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알리사 님.”

“왜?”

알리사라 불린 중년 여성의 시선이 처음으로 채드에게 돌아갔다.

“큰일 났습니다!”

“그래. 네가 당황할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니겠지. 다만….”

알리사가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이제 비연회의 수장은 내가 아니라 너고, 결정하고 판단해야 하는 것도 너야. 계속 내 의견을 듣고, 내 생각만 따르면 성장할 수 없단다.”

그녀는 할머니가 손주를 타이르듯 채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그건 아는데….”

“알면 됐네. 이곳은 전대 비연회주가 놀고먹는 곳이니, 나가렴.”

그녀는 은퇴한 사람 괴롭히지 말라고 중얼거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전쟁!”

채드가 악을 질렀다.

“가주님께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십니다!”

“으응?”

그건 예상외였는지 알리사가 책을 툭 떨어뜨렸다.

“전쟁을 연다고? 지금?”

“지, 지금은 아니고 3년 후입니다.”

“후우, 설명해봐.”

알리사가 안경을 벗고 몸을 돌렸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분위기가 변한다. 인자한 중년 여성에서, 비연회를 한 손에 쥐고 대륙을 내달리던 여걸의 눈빛이 살아났다.

“이번에 광풍단이….”

채드가 가젤 강에서 있었던 사건과 가주전에서의 일을 모두 말해주었다.

“아무래도 그 세 분은 라온 지그하르트를 특히 아끼시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재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각별한 존재처럼….”

“후후!”

알리사는 채드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 웃을 일이 아닙니다! 진짜라니까요!”

“아직 어리네.”

“예?”

“넌 그분들을 잘못 보고 있어.”

그녀는 손을 흔들며 등을 의자 뒤로 젖혔다.

“가주님은 보이는 것보다 더 냉정하셔. 목표를 위해서라면 자식도 신경 쓰지 않는 분이지. 얼마 전에도 그 냉혹한 눈빛과 기세는 그대로였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정말 라온 때문에 남북맹을 지워버릴 생각이라니까요!”

“그건 남북맹 때문이 아니야.”

알리사가 풉 하고 웃었다.

“아니, 진짜….”

“너 내가 누구인지 알지?”

“예에….”

“말해봐.”

“지그하르트를 항상 승리로 이끈 정보의 여왕 하얀매 알리사 님이십니다!”

채드는 많이 해본 듯 자세를 똑바로 한 채 알리사의 이명을 부르짖었다.

“그래. 나 알리사야. 나 못 믿어?”

알리사의 인자했던 어조마저 그녀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 버렸다.

“가주님이나, 천검대주님, 로엔 님이 화를 내시는 건 남북맹의 버러지들이 주제도 모른 채 우리 영역을 넘봤기 때문이야. 지그하르트의 이름값을 무시한 것에 자존심이 상하신 거지.”

“저, 저도 처음엔 그리 생각했는데, 라온에게만….”

“쓰읍. 내가 누구?”

알리사가 인상을 찡그리며 입맛을 다셨다.

“정보의 여왕! 하얀 매 알리사 님이십니다!”

“그래. 나 알리사라고. 네가 가주님을 많이 봤어? 내가 가주님을 많이 봤어.”

“하얀 매 알리사 님이 많이 보셨습니다!”

“그럼 누구 말이 맞아?”

“보통은 알리사 님이 맞지만 이건 진짜….”

“쯥!”

“하얀 매 알리사 님이 맞습니다!”

채드가 눈을 꽉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진짜 아닌데.’

글렌과 셰릴, 로엔은 단순히 영역을 침범당해서 화난 게 아니라, 소중한 자식이 남에게 맞고 들어왔을 때의 살벌한 분위기를 풍겼다.

남북맹을 모조리 박살 낼 기세였는데, 알리사는 그걸 이해 못 하고 있었다.

“저기….”

“또 뭐.”

“리메르 님에게는 정말 별 관심 없으셨거든요. 하지만 라온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다들 분노를….”

“하아, 채드야. 채드야.”

알리사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가주님만이 아니라, 천검대주님도 냉정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 아무리 임무를 함께해서 친분이 쌓였다고 해도 고작 그런 일로 선봉에 서겠다고 나서는 분이 아니야.”

“으….”

“로엔 님은 더하지. 그분은 몇십 년 동안 암살에서 손을 놨어. 그런데 라온 때문에 다시 암살에 손을 댄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전부터 라온의 정보는 바로 가주전으로 올라가서….”

“라온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하지. 최연소 마스터에 재능이 뛰어나잖아. 하지만 그 아이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그녀는 절대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끄윽!”

채드가 신음을 삼켰다.

‘상식.’

그래.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라온 좀 건드렸다고 전쟁이 일어나는 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그 요지경 같은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게 생겼다.

“이제 좀 알겠어?”

“근데 정말….”

“이 자식이….”

“아닙니다! 하얀 매 알리사 님의 말이 맞습니다!”

알리사의 날카로운 눈빛에 채드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전쟁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아. 특히 지그하르트는 움직이기 힘들지.”

“중재자들 때문입니까.”

“그것도 이유 중 하나긴 하고.”

알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전쟁은 없을 거야. 남북맹이 알아서 숙일 거거든.”

“숙인다면….”

“따지고 보면 틸러가 죽었으니, 그쪽에서 압박을 들어오는 게 맞지만 조용하잖아. 우리가 무서워서 입 닫고 있는 거야.”

“그건 알고 있습니다.”

채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그하르트가 정말 마음만 먹으면 남북맹을 지울 수 있다. 하지만 그들도 오마 중 하나이니, 이쪽도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피해? 당연히 꽤 손해가 크겠지. 다만 네 생각만큼은 아니야.”

“예? 하지만….”

“내가 너한테 윗분들의 무력에 대한 이야기는 제대로 안 했네.”

알리사가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어느 정도는 풀자며 옅게 웃었다.

“로엔 님이 부왕 로만을 하룻밤 만에 암살할 수 있다고 했지?”

“예.”

“그건 과장이야.”

“당연히 알고 있습….”

“하지만 나흘 정도면 100% 가능해. 셰릴 님도 좀 과장해서 말씀하셨겠지. 다만 가주님은 달라.”

그녀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천장을. 아니, 그 위에 있는 하늘을 가리켰다.

“가주님이 직접 나서면 남북맹은 멸망할 거야.”

*     *      *

라온은 근처 도시에서 리메르에게 필요한 물건을 산 뒤에 도란 마을로 돌아왔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는지 광풍 2조와 마을 사람들이 웃으며 반겨주었다.

“라온.”

첨탑 위에 있던 루난이 폴짝 뛰어내려 달려왔다. 평소보다 눈이 더 맹하게 풀려 있었다.

‘고생했나 보네.’

파도처럼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니, 무리해서 심력을 사용한 것 같았다.

“찾았어?”

“그래. 여길 지키느라 수고했어.”

“응.”

수고했다고 말해주자, 루난이 아주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가 갑자기 푹 쓰러졌다.

“어?”

라온이 루난을 받치고 바로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상처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무리해서 체력과 오러를 사용한 것에서 온 탈진 같았다.

“루난?”

“잠을 안 주무셨어요.”

2조 부조장 에비가 다가와 한숨을 내쉬었다.

“부단주님이 마을을 떠난 이후에 한숨도 안 자고 이곳을 지키셨어요.”

“그랬군.”

라온이 고로롱고로롱 숨을 내쉬는 루난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로 무리할 필요는 없었는데.’

루난에게 잘 지켜달라고 당부했지만, 아예 잠을 자지 않고 경계할 줄은 몰랐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차올라 그녀의 등을 살짝 두드려주었다.

“단주님은?”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상태도 그대로예요.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으십니다.”

“음, 루난은 내가 데려다 놓을 게.”

라온은 루난을 숙소 침대에 눕힌 후 리메르를 확인했다. 에비의 말대로 그의 상태는 쓰러졌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건 좋은 게 아니야.’

단전은 깨질 듯 출렁이고, 마나회로는 협착된 최악의 상태가 지금도 리메르의 수명을 깎아 먹고 있을 것이다.

다만 리메르가 깨어나야 치료를 시작할 수 있기에 지금 가능한 건 오러로 그의 몸에 활력을 일으켜주는 것뿐이었다.

라온은 만화공을 운용하여 마사지하듯 리메르의 전신을 풀어준 뒤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마르타와 1조가 돌아와 있었다.

“역시 와 있었네.”

마르타가 이마를 찡그리며 다가왔다.

“어땠어?”

“못 구했어. 도시 두 곳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도 그런 영약은 없더라고.”

그녀는 참 지랄 맞게 희귀한 물건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단전과 마나 회로의 자극을 줄여주는 아티팩트를 찾았어. 조금이지만 그 인간에게도 도움이 되겠지.”

마르타가 금색 팔찌를 꺼냈다. 느껴지는 기운이 상당한 걸 보니 보통 아티팩트가 아니었다. 못해도 유일급은 될 듯 했다.

라온이 팔찌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

이런 물건이 흔할 리가 없다. 가볍게 말하지만 찾는 데 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다.

“수고는 개뿔.”

마르타는 콧방귀를 끼고서 고개를 살짝 돌렸다.

“넌 어떻게 됐는데.”

“구했어.”

“저, 정말?”

“그래.”

“하아아….”

마르타가 깊은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행이양.”

그녀는 입을 살짝 내민 채 가슴을 쓸어내렸다. 혀가 풀린 건지, 긴장이 풀린 건지 발음이 이상했다.

“양?”

“어?”

“너 방금 다행이양이라고….”

“내, 내가 언제!”

“다들 들었지?”

“시, 시끄러워!”

마르타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마구 휘젓고서 마을 안쪽으로 달려갔다.

“숙소로 가는 거양?”

“닥치라고!”

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주먹을 들어 올리고서 숙소로 뛰었다.

“조장님이 저렇게 귀여운 건 처음인데?”

“다행이양이라니….”

“아주 가끔 저런 말투 쓰셔.”

1조 조원들이 마르타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리메르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자 다들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남을 놀리는 재주는 타고났구나.

라스가 입맛을 다셨다.

-농락의 마왕 한번 해볼 테냐? 마계 놈들이 아주 자지러질 텐데.

녀석은 다른 마족들에게 진짜 악귀를 보여주고 싶다며 나중에 꼭 마계로 가자고 떠들어댔다.

*     *      *

그날 저녁.

버렌은 가문에서 내어준 영약을 손에 꼭 쥔 채 마을에 도착했다.

“일단 받기는 했는데 이걸로 될지는 모르겠어.”

그는 영약과 금패를 내밀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나도 구했으니까.”

“구, 구했다고?”

버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정말 던전에 가서 구해온 거야?”

“진짜 장난 아니었어요!”

라온 대신 도리안이 앞으로 나오며 손을 쫙 펼쳤다.

“귀신이 된 로엔그린 님도 만나고, 사도와 싸우고!”

“사, 사도?”

“백혈교의 사도?”

라온이 가볍게 영약을 챙겼다고 이야기했기에 모두가 기겁하며 눈을 부릅떴다.

“다 모였으니까. 말해도 되겠지.”

“제가 할게요!”

도리안은 던전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고 싶은지 먹이를 앞에 둔 강아지처럼 헥헥거렸다.

“그래.”

고개를 끄덕여주자, 도리안이 활짝 웃으며 광풍단의 앞에 섰다.

“일단 던전을 찾은 것부터 시작하죠. 우리는….”

도리안은 직접 보고, 느꼈던 던전의 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에게 말해주었다.

“와아….”

“4사도면 마, 마스터 중급이잖아.”

“사, 사도를 고작 삼합으로 죽이는 게 가능해?”

“무슨 그랜드 마스터냐고!”

“진짜 미쳤다. 미쳤어.”

사도를 삼합에 잡았다는 말에 광풍단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렇게 저희는 로엔그린 님의 배려 덕분에 그분의 유산까지 챙겨 나올 수 있었죠. 사, 살짝 무섭지만 착하신 분이었어요.”

도리안이 그립다며 코를 훌쩍였다. 백목 책상을 끝까지 놓지 않은 녀석이 저런 말을 한다는 게 우스웠다.

“난 사도 잡은 것보다 저게 더 신기해.”

“그러니까. 어떻게 귀신까지 도와주냐?”

“되는 놈은 뭘 해도 된다는 거지.”

광풍단은 로엔그린의 유산을 모두 챙겨온 것에도 경악하며 헛바람을 흘렸다.

“그럼 그곳에서 구한 영약으로 단주님을 구할 수 있는 거 맞지?”

사도를 잡았다는 것에 숨을 못 쉬던 버렌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래. 최소한 예전으로는 돌아가실 수 있을 거야.”

“후우, 이제야 좀 마음이 놓이네.”

버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본인이 선택한다면….”

라온이 인공단전에 대해서도 말하려고 할 때였다.

“일어났어!”

리메르 옆을 지키고 있던 마르타가 소리를 질렀다.

“단주가 일어났다고!”

누가 뭐라 할 거 없이 광풍단 모두가 숙소로 달려갔다.

“으음….”

숙소에 들어가자, 리메르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안색이 창백했고, 숨이 거칠었다. 평소 그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표정들이 왜 그렇게 심각해. 내가 좀 늦게 일어났나?”

그는 이번 일도 웃어넘기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지만, 고통 때문에 눈썹이 떨리는 것까진 감출 수 없었다.

“다들 알고 있어요.”

라온이 리메르의 앞에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속이시지 않아도 됩니다.”

“뭘 속여.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야. 돌아가서 자면 나을….”

“다 알고 있다니까요.”

덜덜 떨리는 리메르의 어깨를 잡았다.

“하아….”

리메르가 한숨을 내쉬고 도로 누워버렸다.

“아이 씨! 지금까지 완벽하고 잘생긴 단주의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런 꼴이라니!”

그는 이런 추한 모습 보이기 싫었다며 떼쓰는 아이처럼 발버둥 쳤다.

“항상 꼴사나운 모습만 봤는데요….”

“그렇지.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만 배웠어.”

“응.”

버렌과 마르타, 루난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 날 한 번 더 죽이는 말이잖아. 몸보다 마음이 더 아퍼. 크윽!”

리메르가 가슴을 움켜쥐고 일어섰다.

“어쨌든 괜찮아! 돌아가서 실컷 자면 회복할 수 있어.”

그가 대충 넘기려고 할 때 라온이 마르타가 가져온 금팔찌, 버렌이 받아온 셰티의 눈물 그리고 던전에서 구한 영류환을 차례로 내려놓았다.

“이게 뭐냐?”

“저희가 구해온 물건들입니다.”

라온은 리메르에게 간단하게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쉬지 않고 지부까지 다녀오고, 도시를 두 개나 뒤지고, 잠 안 자고 날 지켰다? 그리고….”

리메르의 시선이 버렌과 마르타, 루난을 지나 마지막으로 라온을 향했다.

“사도를 쓰러뜨린 후 로엔그린의 유산까지 가져왔다라….”

그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 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

“진짜 부끄럽네. 이런 기분은 태어나서 처음이야. 좋은데, 민망하고, 가슴이 뜨겁게 차오르는데, 얼굴은 들 수가 없어.”

리메르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단주님께 도움만 받았으니,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죠.”

라온이 민망해하는 리메르를 보며 옅게 웃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도움을 주셨지.’

리메르는 기본 무학부터, 만화공, 여러 검술과 보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조언과 도움을 주었다.

목숨을 구해준 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인간적인 감정도 알려주셨기에 이 정도로는 은혜를 갚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단주님. 이제 선택하실 시간입니다.”

“선택?”

“셰티의 눈물과 영류환을 드신다면 협착된 마나회로가 회복되어 예전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로만과 싸울 때처럼 많은 힘을 사용하신다면 이번과 같은 일이 발생하겠죠.”

“그렇겠지.”

“다만….”

라온이 품에서 인공단전을 꺼내 리메르 앞에 내려놓았다.

“단주님이 스스로 단전을 깨고, 이 인공단전을 사용하신다면 오러를 처음부터 다시 모아야 하고, 많은 훈련이 필요하겠지만, 단전을 다치기 전으로. 지그하르트의 광검이라 불릴 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이, 인공단전….”

“어떻게 하실지 직접 선택하세요.”

라온은 리메르 앞으로 영약과 인공단전을 밀었다.

리메르는 떨리는 눈동자로 인공단전과 영약을 차례로 본 뒤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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