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7화
라온은 용광로에 담근 듯한 진혼검의 붉은 칼날을 내려보았다. 끝없이 울리는 검명이 더 강해지고 싶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네가 이 장도의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거지?’
진혼검은 맞다는 듯 검날을 격하게 떨었다.
-개소리니라.
라스가 어깨 위에서 진혼검을 굽어보며 코웃음을 쳤다.
-비루한 미물 따위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턱이 있나.
‘그게 그렇게 힘든 건가?’
-네 미물 단검은 저 잡것들을 죽이기 위해서 태어났으니, 놈들의 기운을 지우는 건 당연한 일이니라. 하지만….
라스가 뚱한 눈빛으로 바닥에 깔린 장도를 살폈다.
-저 장도에 담긴 능력을 흡수하는 건 다르다. 본왕이라면 모를까. 저런 미물 따위가 어찌 그런 일을 하겠느냐.
녀석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손을 휘저었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안경잽이의 미련이나 풀어주러 가거라.
“흐음….”
라온이 뒤를 돌아보았다. 도리안이 무인과 마법사들의 이름을 적고 있어서 아직 시간은 많았다.
‘해도 손해 볼 건 없지.’
저 장도가 어떤 물건인지, 어떤 이름을 가졌는지는 몰라도 그 능력만큼은 알고 있다.
마법 역장.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심장에 만들어 놓은 마나 써클을 이용해 마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 장도는 칼날에서 기묘한 진동을 일으켜 써클이 이뤄내는 마법의 흐름에 미약한 장애를 일으킨다.
정말 그 능력을 진혼검이 가질 수 있다면 마법사와의 대전에서 굉장히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도 있었다.
화아아아아!
라온이 검은 장도를 들어 올렸다. 잡기만 했음에도 장도 안에 깃든 혈기가 몸을 파고들어 왔다. 물론 불에 고리에 짓눌려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쫓겨났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데?’
진혼검이 흥분한 듯 더 강한 울림을 일으켰다.
“깨라고? 그것도 요기만으로?”
깜짝 놀라서 말이 튀어나왔다. 진혼검은 본인의 칼날로 저 검은 장도의 날을 깨부수라고 말하고 있었다.
우우우웅!
진혼검은 확실하다는 듯 다시 한번 검명을 울렸다.
-검을 깨는 것으로 그 능력을 가져?
라스는 어리석다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의미 없는 짓이니라.
‘조용히 좀 해봐.’
라온은 라스의 말을 무시하고 진혼검을 들어 올렸다.
‘어려운 일은 아니야.’
4사도가 쥐고 있는 장도를 깨는 거면 모를까. 가만히 있는 장도를 부수는 건 식은 수프 먹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고오오오!
요기 적응을 통해 진혼검의 요기를 최대한 끌어 올린 뒤 그대로 내리쳤다.
파캬아앙!
진혼검이 일으킨 강대한 요기에 장도의 길고 시꺼먼 칼날이 유리장처럼 깨져나갔다.
화아아아아!
조각난 장도에서 혈기가 스멀스멀 일어났다. 그 검은 기운은 어떤 반항을 할 새도 없이 진혼검의 붉은 칼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우우웅!
진혼검은 자그마한 혈기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진한 울림을 흘리며 장도에서 흘러나오는 기체들을 모조리 흡수했다.
장도의 기운을 모두 받아들인 진혼검은 이전보다 색이 진해져 있었다.
[진혼검이 혈도의 기운을 받아들였습니다.]
[흡수가 끝난 뒤 진혼검에 새로운 능력이 생성됩니다.]
자신의 소유물이기 때문인지 시스템은 진혼검에도 작동하고 있었다.
-어억!
라스가 진혼검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된다고? 저런 미물 따위가!
‘처음에는 네 말대로 미약했겠지만, 점점 성장했잖아.’
라스의 말대로 처음 만났을 때의 진혼검에겐 이런 능력이 없었을 것이다. 많은 백혈교도의 혈기를 흡수하여 성장하고, 이번에 사도와 대주교의 피를 마신 덕분에 이런 능력이 생겼을 것이다.
-끄윽, 성장….
라스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미물이라 부른 진혼검의 능력에 아주 약간 짜증을 느낀 것 같았다.
‘엄청 대단하다는 뜻이겠네.’
라스의 반응이 저 정도인 걸 보니, 진혼검이 가지게 될 능력을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았다.
“헥, 헥! 다 끝났어요.”
도리안이 서명을 다 받은 뒤에 다가왔다. 여전히 머리 위에 책상을 들고 있었다.
“그거 언제까지 들고 다닐 거냐?”
“귀신님이 떠날 때까지요.”
그는 바로 위에 있는 로엔그린을 보지 못하고 좌우로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그래?”
“네. 엄청 신나 보이시는데, 꼭 수련 잘 되실 때처럼.”
“그럴 수밖에.”
라온이 잘게 떨리는 진혼검의 칼날을 보며 씩 웃었다.
대박이 터졌으니까.
* * *
라온은 로엔그린의 안내를 받아 그의 연구실이 있는 던전 마지막 층에 이르렀다. 하지만 방은 존재하지 않았고 큼지막한 벽이 끝이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도리안이 벽을 두드리고, 발로 차기도 했지만, 미동도 없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래시아로 기감을 퍼뜨리고, 분노의 마안까지 이용해 봐도 벽 뒤는 바위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빨리 귀신님을 불러봐요.”
도리안은 그렇게 말하고서 백목 책상을 머리 위로 얹었다.
[후후.]
로엔그린이 그 모습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못 찾으신다니 이제야 제 면이 사는군요.]
“역시 이곳에 있군요.”
로엔그린은 영웅이라 불렸던 강력한 마법사다. 자신이 그의 비밀을 찾지 못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떻게 들어가야 하죠?”
[간단합니다. 벽 중앙에 손을 올리고 글래시아를 운용해주십시오.]
“글래시아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데….”
[숨겨두었으니까요. 한 번 해보십시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벽에 손을 올린 뒤 글래시아를 운용했다.
쿠구구구!
푸른 냉기가 바위의 금 사이로 스며들더니, 벽이 갈라지며 하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 이게….”
벽에서 글래시아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이렇게 열릴 줄은 몰랐다.
[냉기를 대지 속성처럼 운용한 겁니다.]
로엔그린이 벽을 가리키며 빙긋 웃었다.
“대지 속성처럼?”
[예. 분노의 신께서는 냉기를 불꽃처럼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냉기를 바위처럼 만든 것이지요.]
단순히 냉기의 형태만 변화시킨 게 아니라 흐름 자체를 바꿔버린 것 같았다. 마법사였던 그였기에 가능한 방법인 것 같았다.
[들어오시죠.]
라온은 로엔그린의 연구실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생각과는 조금 다르네.’
예상과 달리 연구실은 그리 크지 않았고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정화마법을 걸어놓은 것 같았다.
이런 상태라면 영약이든 아티팩트든 썩지 않고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다행이었다.
좌측 벽면에는 책이 가득했고, 우측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아티팩트와 재료들이 진열장에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히이이익!”
도리안이 책상에 쓰러져 있는 백골을 보고 비명을 터트렸다. 백골은 얼음꽃 자수가 새겨진 청색 로브를 입고 있었고, 동그란 안경이 흘러 내려와 있었다.
[허허, 이거 참 쑥스럽게….]
백골의 주인인 로엔그린이 민망한 듯 웃으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창피한 모습을 보여드리게 됐군요.]
“아닙니다.”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귀, 귀신님 처음 뵙. 아니, 이곳에 계시겠구나. 자, 잘 부탁드립니다. 길을 알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에, 그리고 저희 부단주님이 너무 건방져서 죄송합니다!”
도리안은 책상을 걸친 채로 로엔그린의 백골에 고개를 연속해서 숙였다.
[좋은 분이시군요.]
“그렇지만 바보입니다.”
라온이 옅게 웃고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말씀해주시죠. 어떤 미련이 남으신 겁니까?”
연구실을 둘러보아도 그의 미련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입을 통해서 들어야 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먼저 신관님의 목적부터 끝을 내죠.]
그가 진열장의 가운데에 있는 동그랗란 황금 구슬 하나와 목갑을 꺼내달라고 말했다.
[그 구슬은 인공단전입니다.]
“인공단전?”
[예. 단전이 부서지거나, 없으신 분들을 위한 아티팩트죠. 마나회로와 연결만 되면 진짜 단전처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
라온이 입맛을 다셨다.
‘이거라면 쓸 수 있겠어.’
리메르의 단전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 이 인공단전을 이용한다면 그에게 새로운 단전을 만들어 줄 수 있다.
[단점은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 단전 자체가 교체되는 것이기 때문에 단전에 오러를 처음부터 다시 모아야 합니다. 하수라면 모를까. 고수에겐 짧더라도 힘든 시간이 되겠죠.]
‘확실히….’
단전에 오러를 채우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다. 리메르 정도 경지라면 남들보다 훨씬 빨리 오러를 모으겠지만 그 시간 동안은 굉장히 힘들 것이다.
“그럼 이건 뭐죠?”
라온이 목갑을 가리켰다.
[그건 마나회로의 손상을 회복시켜주는 영류환입니다.]
“마나회로의….”
[예. 마나회로가 찢어지고, 어그러진 상태를 회복시켜주죠]
“그렇군요.”
이제야 안도감이 든다. 이 두 개가 있으면 리메르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원하는 게 있었다.
“혹시 이 두 가지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리메르 말고 실비아도 회복시키고 싶었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물었다.
[음, 영류환은 제조법이 있습니다만 인공단전은 제가 만든 게 아니고 우연히 얻은 거라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저런 아티팩트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언젠가는 실비아도 회복시킬 수 있으리라.
“이제 말씀해 주시죠. 로엔그린 님의 미련은 무엇입니까?”
[음….]
로엔그린은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잠시 뜸을 들였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조금 과거로 돌아가야 할 것 같군요.]
그가 자신의 백골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는….]
* * *
마녀 멀린과 그녀가 부리는 몬스터들에 의해 레미아라 불렸던 도시가 하룻밤 사이에 멸망했다.
항상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어머니도, 무섭지만 속으로는 다정하신 아버지도, 매일 산과 들을 뛰어다녔던 친구들도 모두 내 눈앞에서 몬스터의 먹이가 되었다.
도시를 지키던 기사들은 멀린의 불꽃에 재가 되었고, 급히 달려온 왕국의 마법사들 역시 유성처럼 쏟아지는 마녀의 마법에 전멸했다.
그때 내가 살아남은 이유?
그저 멀린의 자랑 욕구 때문이었다.
“아아, 너무 기분 냈네. 다 죽이면 내가 한 일을 알려줄 사람이 없잖아.”
그 미친년은 본인이 내게 레미아 시를 무너뜨렸다는 걸 대륙에 알리라고 말하고 떠났다.
분노했다.
홀로 남은 것에, 같이 죽지 못한 것에 분노하며 마녀를 저주했다.
그 미친년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 수도 있다고 외치며 절규했다.
그때 그분이 나타났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니, 악마인지 신인지조차 알 수 없는 거대한 존재. 이 도시를 멸망시킨 마녀와도 격이 다른 진짜 하늘이 강림했다.
그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입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열렸다.
그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서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떠날 것처럼 몸을 돌린 그는 내 마지막 말이 마음에 든다며 힘을 내려주었다. 마녀에게 복수할 수 있는 서리의 힘을.
-이것만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네 분노가 진심이라면 노력해보아라. 그 멀대인지 뭔지를 네 손으로 죽이도록.
마녀 멀린입니다.
-어쨌든 네놈이 지닌 분노를 폭발시킨다면 네 능력도 함께 강해질 것이니라.
나는 그분에게 내게 무엇을 원하시냐고 물었다. 영혼도 바치겠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영혼? 지랄하는구나. 필요 없느니라.
그를 붙잡고 다른 원하는 걸 말해달라고 했다.
-본왕이 네놈에게 준 힘이나 연구해보아라! 그만 귀찮게 해!
그분은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고, 나도 재가 된 도시를 떠났다.
그분의 능력은 신비로웠다. 그저 얻었을 뿐인데,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 사용법을 알게 되었다.
대륙을 떠돌며 낮에는 전투를 벌이고, 밤에는 마법과 냉기를 연구했다. 수많은 낮과 밤이 지나고 나름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을 때 난 다시 절망했다.
마녀 멀린과의 극심한 차이. 대륙 최강 중 하나이자, 최악의 마녀라 불리는 그녀와의 경지 차이에 울부짖었다.
그때 그분이 다시 나타나셨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것이냐. 약하면 강해져라. 네 시간을 모두 바치더라도 강해져서 죽이면 그만이다.
너무도 단순한 이야기였지만, 당신의 나에겐 신의 계시와 다를 바가 없는 소리였다.
-밀대인지 뭔지 하는 허접한 놈 따위 가지고 뭘 그리 귀찮게 구는 건지.
마녀 멀린입니다.
-어쨌든 본왕의 콧바람으로도 죽일 허접한 놈을 가지고 그만 고민해라. 네가 더 강해지면 그만이니라.
그는 한심하다며 혀를 차고 사라졌다.
강해졌다. 수련하고 연구했으며, 싸우고 또 싸웠다.
멀린과 싸워도 크게 밀리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많은 강자와 몬스터들이 그녀를 따르고 있었다. 혼자서는 절대 이길 수 없었다.
마녀의 성을 칠 사람들을 모았다. 자신처럼 복수를 불태우는 사람들이 조금 모여들었지만, 대부분은 절대 이길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할 수 없다고, 복수를 포기하라 말했다.
친한 이들까지 그리 말하자, 나까지 힘이 빠졌다. 정말 복수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고, 술로 밤을 보냈다. 복수를 위한 모임까지 점차 흐지부지되고 있을 때 다시 그분이 오셨다.
-정말 못 봐주겠노라. 그 멀미라는 놈을 겁내는 놈이 많다면 네가 강해져서 모조리 꿇리면 그만 아니더냐.
마녀 멀린입니다.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들은 패배자다. 이미 세상에 무릎을 꿇은 버러지들이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과 함께 나아가라. 네겐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는 그만 귀찮게 하라며 손을 휘젓고 사라졌다.
대륙 전체에 공포를 퍼뜨린 배신의 마녀 멀린. 그녀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별거 아니라고 하는 그분 덕분에 무서움과 두려움이 사라졌다.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았다. 그분의 말씀대로 별거 아니라 생각하며 힘을 키우고, 할 수 있다고 믿는 동료를 모았다.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자, 안 된다고 말하던 사람들도 모여들었고, 떠난 사람들이 돌아왔다.
그리고 멀린에게 레미아 시가 불탄 지 딱 40년이 지난 그 날.
나와 동료들은 마녀의 성을 깨부수고 멀린의 숨통을 끊었다.
전 세계가 환호했고, 우린 영웅이 되었다.
다만 내게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외쳤던 복수에 성공하고, 죽은 자들을 위로했다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1년 후 상황 정리까지 끝났을 때 그분이 다시 찾아왔다.
-이제야 끝나다니, 참으로 느리구나.
수고했다는 말조차 없지만, 그분다워서 미소가 지어졌다.
난 그분에게 영혼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악마에게 이승과 저승의 삶을 바치더라도 복수하고 싶다고 외쳤으니까.
-또 헛소리를 하는군.
그분은 코웃음을 치며 손을 저었다.
-네놈처럼 허접한 혼 따위는 필요 없느니라. 네 분노가 본왕의 간식 정도는 되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어이가 없었다. 강해지면서 눈앞의 존재가 인간이나, 신이 아니라는 건 알았으니까. 당연히 내 혼을 받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저 재밌었다고만 말했다.
-그 멀티도 잡았으니, 이제 네 삶을 살아라. 안경잽이.
그는 끝까지 멀린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채 사라졌다. 고맙다는 이야기도 못 했건만, 영혼은커녕 준 힘도 가져가지 않고 떠나셨다. 그제야 알았다. 이분이 진정한 나의 신이라는 것을.
나는 1년간 세상을 즐기고 던전을 만들었다.
이유?
간단하다. 그분의 옷을 붙잡고 들었던 부탁인 글래시아의 연구.
그것도 억지로 그분께 들은 거지만 그거라도 들어드리고 싶었다.
복수를 준비할 때보다 더 열심히 연구하며 글래시아의 냉기를 운용했다.
하지만 신이 만든 힘답게 너무도 완벽했다. 어설프게 수정했다간 오리지날보다 훨씬 나쁜 운용법이 될 게 뻔했기 포기하는 게 나을 정도였다.
물론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힘을 주고, 정신을 이끌어준 그분을 위해 남은 시간을 모두 바쳐서 글래시아의 냉기를 더 단단하게 굳히는 방법을 만들어냈다.
냉기의 운용법 중 하나일 뿐이지만 여기까지가 자신의 한계였다.
이제 그분에게 냉기를 돌려드리며 고맙다고 말씀드리면 다 끝났다.
하지만 그분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일부러 끊는 게 아니라, 연결 자체가 되지 않았다.
기다렸다.
1년, 10년, 그리고 20년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았고, 내 수명은 끝나가고 있었다.
이대로 죽는 건 아깝지 않았다. 연구가 사라져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분께 감사하다는 말도 못 하고 지워지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그 미련이 불씨가 되었을까.
난 죽음과 삶의 틈 사이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또 기다렸다.
그분이 돌아오시기를.
* * *
라온이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럼 당신의 미련은….”
[예. 그분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제 나름대로 수정한 글래시아의 운용법을 알려드리는 겁니다.]
로엔그린은 그게 전부라며 미소를 지었다.
-저, 저 멍청한 놈이!
라스가 눈이 찌그러져 보일 정도로 인상을 쓴 채 로엔그린에게 뛰어올랐다.
-인생을 복수에 바쳤으면 네 삶을 살라고 그리 말했건만!
분한 건지, 슬픈 건지 라스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다른 분이 아니라, 라온 님이 와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로엔그린은 바로 앞에 있는 라스를 보지 못한 채 라온의 손을 잡았다.
[글래시아의 운용법은 저곳에 있습니다. 제가 지닌 냉기는 제가 사라지는 순간 그분께 돌아가겠지요.]
-이 멍청한 안경잽이 놈아! 그딴 거 생각하지 말고, 네놈 걱정이나 하란 말이다!
라스는 병신 짓이라며 이를 갈았다. 녀석의 둥그런 눈매에 투명한 구슬이 맺혔다.
[당신을 만나서 다행입니다. 오래만에 정말 즐거웠습니다.]
정말 그게 미련의 전부인지 흐릿하던 로엔그린의 몸이 천천히 지워지기 시작했다.
-야! 로엔옐로!
‘라스.’
라온이 라스를 붙잡고 인상을 찡그렸다.
-놔!
‘이대로 보낼 거냐?’
-뭐?
‘이게 마지막인데, 그렇게 화만 내면서 보낼 거냐고.’
-보, 본왕은….
‘몸을 빌려줄게.’
큰마음을 먹고 말했다.
-뭐?
‘네가 바로 몸을 돌려준다는 약속을 한다면 대화할 수 있도록 몸을 빌려준다고.’
지금까지 봐온 라스와 저런 영웅까지 감복시킨 라스를 믿고 말했다.
-크으, 안 된다.
‘왜?’
-네놈의 몸에 들어간 순간 본왕의 의지와 상관없이 폭주할 것이니라.
‘아….’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라스는 예전에도 혼과 육체가 너무 오랜 기간 떨어졌기에 폭주할 거라고 말했었다.
-대신….
* * *
로엔그린은 몸이 따스해짐을 느꼈다. 육체가 있을 때처럼 심장이 뛰고, 혈액에 피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이제 정말 갈 때가 되었군.’
미련을 확실하게 정리했기 때문일까. 마음이 편하다. 라스 님을 보지 못한다는 점은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그분의 신관께 감사함을 전한 것으로 만족했다.
피곤하다. 이 몸이 된 이후로 처음으로 노곤해졌다. 눈을 감으면 다시는 뜨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어쩐지 그분을 닮은 듯한 신관을 보고 눈을 감으려 할 때였다.
콰아아아아아!
라온의 어깨 위로. 아니, 그의 전신이 푸른 분노의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다. 처음 그분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정도의 분노에 눈이 번쩍 뜨였다.
-멍청한 놈이로다.
[다, 당신은….]
확실하다. 이 기운, 저 고귀하면서도 상스러운 말투는 그분 뿐이었다.
[라, 라스 님?]
“본왕이 말했을 터다. 네 인생을 살라고. 누가 이런 멍청하고 답답한 짓을 하라고 했더냐.”
[허허허!]
웃음이 나왔다. 그분이라면 저리 말씀하실 거라 생각했다.
“뭐가 웃긴 것이냐! 안경잽이!”
[당신은 원하지 않으셨겠지만, 이게 저의 삶의 방식입니다. 신이시여.]
“예전에 봤을 때부터 한심함을 금치 못했노라. 어벙한 놈!”
로엔그린은 욕을 먹으면서도 그저 웃었다. 이 순간이 행복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전 당신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신이시여.]
“…….”
라스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분노의 눈빛 속에 작은 따스함이 피어났다.
“정말 행복했느냐?”
[당신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되었다.”
라스가 가볍게 손을 털었다.
“로엔옐로. 수고했느니라. 또 보도록 하지.”
[예!]
로엔그린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은은한 별빛처럼 푸른 서리를 흩날리며 천천히 가라앉았다.
라온은 손바닥에 떨어진 로엔그린의 서리가 완전히 녹고 나서야 라스에게 받았던 분노를 가라앉혔다.
‘만족하나?’
-고맙다.
라스는 정말 드물게도 고맙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로는 로엔그린이 사라진 허공을 쫓았다. 정말 마왕답지 않은 녀석이다.
“그럼 남은 물건들을….”
도리안에게 남은 물건들을 챙기라고 말하려고 할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로엔그린의 사념이 보유하던 능력들이 흡수됩니다.]
[특성 <수속성 친화력>이 생성됩니다.]
[로엔그린이 보유했던 글래시아의 지식이 새겨집니다.]
[모든 능력치가 6포인트 상승합니다.]
-?
“?”
라온과 라스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 그게 왜 네놈한테….
‘나도 모르지.’
당연히 라스의 본체에게 갈 거라고 생각했던 로엔그린의 능력은 자신의 몸으로 파고 들어왔다. 단전에 쌓인 글래시아의 기운이 한층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아, 아니! 이게 말이 되는 것이냐! 본왕이 넘겨주고, 본왕이 돌려받아야지! 왜 네놈에게 가냐고!
‘그걸 나한테 말해봐야….’
-야이 자식아! 네놈이 아니면 누구한테 말해!
라스는 더 이상 못 참겠다며 악을 내질렀다.
-그게 왜 네놈의 주둥아리로 들어가냔 말이다!
‘아니, 우, 우리 좋았잖아. 감동적인 연기로….’
-닥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