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4화
라온은 로엔그린의 뒤를 따라 네 번째 공동에 들어갔다.
‘여기도 시체가 가득하네.’
공동 이곳저곳에 시체들이 널려 있었는데, 상처를 보니 서로 싸우다가 죽은 것 같았다.
[분노의 신관이시여.]
로엔그린이 공동을 쭉 둘러보다가 뒤를 돌았다.
[조금 전에 하신 말씀은 정말이십니까?]
“조금 전이라면?”
라온은 로엔그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으면서 되물었다.
[분노의 신께서 단전을 고치는 물건을 원한다고 하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로엔그린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하며 눈동자를 내렸다.
“물론입니다.”
라온이 로엔그린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그마한 구김도 없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제가 어찌 그분의 이름으로 거짓을 뱉겠습니까. 당연히 사실입니다.”
-지금! 지금 뱉고 있잖느냐!
라스가 술 취한 사람처럼 양손을 마구잡이로 휘저었다.
-본왕은 한마디도 안 했는데, 네 멋대로 주절거리고 있잖아!
녀석은 미치고 팔짝 뛰겠다며 허공에 드러누워 발장구를 쳤다.
[으음,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제가 본 그분은 신 그 자체였습니다. 단전 따위가 아니라, 전신이 강대한 힘과 분노로 가득 차셨는데, 왜 단전을 고치는 물건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아, 오해하셨군요.”
[오해라고 하신다면….]
“그 물건이 필요한 건 그분이 아닙니다.”
[예?]
“그분의 하인에게 주어질 물건입니다.”
라온이 눈을 내리감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노오오오오놈!
라스가 왼쪽 귀로 올라가 비명을 질렀다.
-그 귀때기가 왜 본왕의 하인이더냐! 본왕은 그놈을 치료해주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느니라!
“로엔그린 님도 그분을 모셨으니, 알고 계실 겁니다.”
라온이 귀를 만지는 척하며 라스를 밀어냈다.
“분노의 신께서 신도들을 얼마나 배려하고 생각해주시는지를.”
[물론입니다! 그분은 제게 많은 것을 주시고도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라스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로엔그린의 눈동자가 열의로 반짝거렸다.
‘역시.’
예상대로 흘러가는군.
지금까지 봐온 라스는 일단 하인이라고 말하면 여러 방법으로 도와주고, 챙겨주었다.
‘도리안도 살려주고, 루난도 도와줬었지.’
도리안이 위험할 때 경고해주었고, 루난이 시리아에게 다시 세뇌를 당할 뻔했을 때도 말해주었다. 하분 성에서 유아를 배려해 준 일도 있었다.
‘로엔그린도 그걸 알고 있겠지.’
로엔그린이 복수에 성공하자마자 연결을 끊고 본인의 삶을 살라는 말을 해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라스는 냉정해 보여도 자신의 사람만큼은 확실하게 챙기는 가는 녀석이다.
-이 족제비 같은 놈아! 본왕을 어디까지 농락할 거냐! 말이라도 좀 해보라고!
라스는 이제 왕의 말투를 버리고 애들처럼 소리치기 시작했다. 얼굴이 빨개지는 걸 보니 폭발까지 멀지 않았다.
“음….”
라온은 라스의 분노를 흘려넘기며 로엔그린을 보았다.
“저 말고도 그분의 뜻을 따르는 신관이 한 명 더 있습니다. 임무를 수행하다가 다쳤기에 그분께서 많은 걱정을 하고 계시죠.”
-본왕이 언제!
라스가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냉기를 일으켰다.
-본왕은 그 귀때기 놈을 구하긴커녕 후려 패고 싶었느니라!
‘잘 알고 있지.’
저 외침대로다. 라스는 누워서 빈둥거리는 리메르를 보고 매번 이를 갈았었다. 하지만 지가 어쩔 건가. 들어 줄 사람이 없는데.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두 가지. 로엔그린 님의 미련을 풀고, 다른 신관의 단전을 고칠 방법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음, 그렇습니까.]
로엔그린이 짧게 입맛을 다셨다.
‘의심이 살짝 끼어있군.’
전능하다고 믿는 라스가 신관의 치료를 못 하기 때문인지 완전히 믿는 표정은 아니었다.
‘마침표가 필요하겠어.’
라온은 로엔그린이 아니라, 라스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쩌냐. 네 하인은 네 말이 아니라, 내 말만 들을 수 있는데.’
-끄으윽….
라스의 눈동자가 파도 맞은 돛단배처럼 출렁였다. 머리에 분노가 차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 하는 상태였다.
‘라온 님이라고 하면서 정식으로 부탁하면 내가 한 마디 정도는 전해줄….’
-끄아아아! 못 참겠다! 이 사악한 마귀 놈아!
매번 놀릴 때 보여주는 능글맞은 미소를 짓자마자 라스의 눈동자가 회까닥 돌아갔다.
쿠구구구!
때와 장소를 못 가리는 분노의 마왕답게 라스가 폭발시킨 분노와 냉기가 마나회로를 파고 들어왔다.
‘됐어.’
라온이 미소를 지었다. 평소와 달리 불의 고리와 오러를 움직이지 않고 라스의 분노와 냉기를 그대로 견뎠다.
쿠구구구구!
라스가 일으킨 분노와 자신의 영혼에 깃든 분노가 어우러지며 발끝부터 머리까지 푸른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아!]
로엔그린이 라온의 전신에서 치솟은 푸른 분노를 보고서 입을 떡 벌렸다.
[이, 이런 분노와 냉기라니, 마치 그분이 앞에 있는 듯하군요!]
라온이 고통을 참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예. 앞에 계시지요.’
다른 사람은 이 상태를 못 보지만, 라스의 분노와 냉기를 받았었던 로엔그린은 자신의 몸에서 터지는 막대한 분노를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그분께서 일을 확실하게 처리하고 오라며 더 큰 분노와 냉기를 보내주셨군요. 신도를 생각하는 그분의 다정함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겁니다.”
라온은 고통을 참으며 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아아! 이 미천한 종의 의심을 용서해주십시오!]
로엔그린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믿겠습니다. 사제여! 제가 가지고 있는 영약과 아티팩트를 모두 드리겠습니다!]
그의 눈동자에서 의심의 싹이 완전히 파여나갔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당신의 봉헌에 그분도 기뻐하실 겁니다.”
라온은 마주 인사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됐군.’
라스의 진짜 분노를 마주한 로엔그린의 음성은 신뢰로 가득 차 있었다.
-어?
라스는 분노를 뿜어내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꿈뻑였다. 로엔그린의 반응에 제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이, 이게 무슨….
‘네가 분노를 터트려 준 덕분에 로엔그린의 의심이 완전히 가셨어.’
진심으로 웃으며 라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고맙다. 라스.’
-보, 본왕을….
라스의 미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본왕을 또 이용했구나! 이 뱀 같은 놈아!
‘어쩌다 보니.’
-어쩌다? 아예 대놓고 계획을 짜놓고 어쩌다? 이이익!
포효 같은 외침과 동시에 더 큰 분노와 냉기가 밀려 들어왔다.
[분노가 더 커지고 있군요.]
“그분께서 절 많이 신뢰하나 봅니다.”
-시, 신뢰? 시이이이인뢰? 시발이겠지! 네놈은 악 그 자체이니라! 세계를 위해서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끝장을 내주마!
라온은 불의 고리와 글래시아를 운용하여 라스의 냉기와 분노를 막았다. 로엔그린의 신뢰도 얻었기에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었다.
-네놈만큼은! 세상을 위해서라도 네놈만큼은!
‘소용없어.’
라스가 모아둔 분노와 냉기를 모조리 일으켰지만, 당연하게도 불의 고리와 글래시아의 벽을 뚫지 못했다.
[<분노>의 방해를 견뎌내셨습니다.]
[근력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합니다.]
쏟아진 분노와 냉기가 너무 강했기 때문일까.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바로 능력치가 올라갔다.
-끄아아아아악!
라스는 정말 죽기라도 한 듯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가라앉았다.
[이 정도 분노라니, 그분을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부러울 정도입니다.]
로엔그린은 그런 주인의 비명을 듣지 못한 채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고, 라스의 동그란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차라리 죽여….
[허허허허!]
* * *
“여기 함정이다. 넘어서 와.”
“예….”
도리안은 함정을 알려주고 나아가는 라온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대체 뭐지?’
아이 같지 않은 언행과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침착함 그리고 상대를 농락하는 심계까지. 오랜 시간 라온을 봐왔기에 그가 평범함과 거리가 멀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최근엔 자신을 지갑이나, 주머니로 쓰고 있는 것 같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과거의 일들을 다 떠나서 지금은 라온이 너무 무서웠다.
“아, 우측이군요.”
라온은 우측 허공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도리안. 우측 벽면에 손을 짚으면서 와.”
그는 시범을 보이듯 손바닥으로 벽면을 누르면서 이동했다.
‘저거! 바로 저거라고!’
무서워 뒤지겠어!
오늘 수없이 본 저 모습. 라온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하면서 이 던전의 함정들을 피하고 비밀통로를 열었다.
‘대체 누구랑 이야기하는 건데!’
손이 파르르 떨린다. 귀신이나, 유령을 너무 무서워하기에 라온이 혼잣말을 할 때마다 소름이 돋아올랐다.
“저, 저기 도련님?”
도리안은 입술을 꾹 깨문 채 라온을 불렀다. 당황했기에 부단주가 아니라, 도련님이라는 예전 단어가 튀어나왔다.
“응?”
라온은 평소와 같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저, 저기 누구랑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제 좀 알려 주셔도….”
“아까도 말했잖아. 길잡이님이라고.”
“그니까 그 길잡이가 누구신지….”
“아! 그렇네. 잠시만.”
그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을 보니 정말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정말 알고 싶어?”
대화를 끝냈는지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예?”
“정말 알고 싶냐고.”
“그, 그게
“정말 보고 싶다면 잠깐은 보여줄 수 있데. 다만 잘 생각해야 할 거야.”
“끅….”
저런 식으로 말을 하니까.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침이 미친 듯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괘, 괜찮습니다. 모르는 게 약이죠. 하하!”
도리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왠지 보았다간 오늘 잠을 못 잘 것 같았다.
“그래?”
라온은 피식 웃고서 다시 허공과 이야기를 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으으, 귀신이야! 여기서 죽은 귀신이 분명해!’
그거밖에 없어!
도리안은 배 주머니에서 귀신이 쫓아낸다는 신성한 백목으로 만든 책상을 꺼냈다.
책상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채 부채처럼 휘저으며 라온의 뒤를 쫓았다.
‘물러가라!’
귀신은 물러가!
* * *
마르타가 인상을 찌푸리고 식당 문을 열었다. 가장 안쪽 대형 테이블에 광풍 1조가 모두 모여 있었다. 식탁에 앉자마자 검사들의 표정을 살폈다. 모두 똥 씹은 듯 구겨져 있었다.
“다들 못 찾은 모양이네.”
“예….”
“오러를 늘리는 영약은 있지만, 단전을 고치는 영약은 듣지도 못했답니다.”
“깨진 단전을 고치는 무학서도 없었습니다.”
“아티팩트 상점에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있어도 굉장히 희귀할 거라고….”
검사들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럴 줄 알았어.”
마르타가 차게 코웃음을 쳤다.
“그런 희귀한 물건이 찾는다고 나오겠냐고.”
잠도 자지 않고 달려서 수상 도시 듀단에 도착했지만, 리메르를 회복시킬 만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힘들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마리도 보이지 않으니 불안해서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후우!”
“젠장….”
다른 검사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가는 신음을 흘렸다.
“그래도.”
마르타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가볍게 친 손짓에 모두의 심장이 울렸다.
“찾는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흑진주 같은 선명한 빛이 돌았다.
“지금 라온 녀석은 죽을 힘을 다해서 던전을 돌파하고 있을 거야. 너희들도 알다시피 지가 상처 입는지도 모르고 영약을 구하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겠지.”
“으음….”
“그 사람이라면 그러고도 남죠.”
검사들이 입매를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에 비하면 우리 일은 숨 쉬는 것보다 가벼워. 이 도시 전체를 뒤집어엎더라도, 안 되면 대륙 전체를 뒤져서라도 찾는다.”
“예!”
검사들이 검병을 꾹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
부조장인 예디가 짧게 손을 올렸다.
“뭐지?”
“내일 경매가 있다고 하는데….”
“경매?”
“예. 그런데 굉장히 비밀스럽고 귀한 물건들이 나와서 각 단체에서도 귀빈들만 입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귀빈….”
마르타가 인상을 찡그렸다.
“광풍단 조장으로도 안 된다는 건가?”
“될 수도 있지만, 이전 경매 명단의 수준을 보면 안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럼 성현전주 데니어 지그하르트의 막내딸이라면 되나?”
“아….”
예디가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건 될 겁니다. 하지만….”
마르타는 가문의 이름이나, 단체의 이름. 특히 아버지인 데니어의 이름을 빌리는 건 병적으로 싫어했다. 무조건 본인의 이름만을 말했던 그녀였기에 저 말은 굉장히 의외였다.
“다들 죽을 노력을 하고 있는데, 나만 자존심 챙긴다고 뭐 되나.”
마르타가 차게 웃으며 일어섰다.
“다들 준비해. 내일 밤 그 경매에 참여한다.”
그녀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야 해.’
* * *
[이제 곧 여섯 번째 공동에 도착할 겁니다. 그곳이 마지막 공동이고 바로 아래에 제 연구실이 있죠.]
로엔그린이 비밀통로를 내려가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지금 그 공동에서는 먼저 온 자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느껴지네요.”
라온이 아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통로 바로 아래에서 강대한 힘의 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쪽 방향으로 들어온 이상 그 공동을 지날 수밖에 없습니다.]
로엔그린이 방법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상관없습니다.”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바로 밑이 연구실이라면 확실하게 처리해두고 가는 편이 좋겠지요.”
공동을 몰래 지나갈 수 있다고 해도 바로 밑이 연구실이기에 방해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저 물건만 받아오는 게 아니라, 로엔그린의 미련도 해결해 주어야 하기에 적들을 확실히 몰아내는 편이 나았다.
“혹시 공동에 들어가기 전에 그 안에 누가 있는지 볼 수 있습니까?”
[음, 제게 남은 힘이 별로 없지만, 그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로엔그린이 손가락으로 허공에 원을 그리자, 동그란 구슬이 돋아나 공동의 모습을 비춰주었다.
라온이 바로 옆으로 붙어서 공동의 모습을 살폈다. 구슬이 돌아가고 있었기에 모든 방향이 보였다.
‘역시 저들이로군.’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중립도시 포르반에서 만났던 발카르 왕국의 마법사들이었다. 살라만의 단장 모렐과 그의 제자이자, 자신에게 얻어터졌던 이닐드도 있었다.
‘당연하겠지.’
발카르의 주력은 기사가 아니라, 마법사다. 육황 중 마법에 가장 관심이 많은 두 세력 중 하나니 당연히 왔을 거라 예상했다.
‘싸가지 왕녀도 있군.’
이번까지 따지면 세 번째 만나는 제이나 왕녀와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기사 자티스도 있었다.
‘옆은 중소 단체인가.’
마법사들의 왼쪽에는 여러 단체의 연합으로 보이는 무인들이 둥글게 뭉쳐 있었다. 모양새를 보니 발카르와 대립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반대에는….’
발카르의 맞은 편엔 키가 크고, 눈이 째진 장발의 중년인이 비스듬한 자세로 서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코트 위에 새겨진 네 개의 구슬. 백혈교의 4사도였다.
‘역시 사도였군.’
첫 번째 공동을 지키는 놈이 주교였기에 아래엔 사도가 있으리라 예상했었다.
‘저자는 대주교인가?’
사도 옆에 회색 머리칼의 노파가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포르반에서 만났던 대주교들에 비해 조금도 밀리지 않은 무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라온이 마지막으로 백혈교 옆으로 구슬을 돌렸다. 검은 가죽 갑옷을 두르고 복면을 쓴 암살자들이 보였다.
‘여기서 또 보게 될 줄이야.’
그림자.
복면인들의 감정 없는 눈동자를 보자마자 헛바람이 나온다. 데루스 로베르트. 그 욕심 많은 놈은 이곳의 정보를 알게 되자마자 근처 지부에 있던 그림자들을 보낸 것 같았다.
‘2대 2구도인가.’
상황을 보면 발카르와 중소 세력이 힘을 합치고 백혈교와 그림자가 임시 연합을 맺은 듯했다.
‘물론 균형은 맞지 않지만.’
사도와 모렐이 호각이지만, 백혈교도와 그림자의 숫자가 더 많아서 전체적인 양상으로는 발카르가 밀리고 있었다.
지금도 중소연합 쪽 사람들이 한 명씩 숫자가 줄며 점차 균형의 추가 백혈교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진혼검이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사도의 기운을 느끼고, 격한 울음을 토해냈다.
‘약속을 지키라는 건가.’
다음에는 사도의 피를 보게 해준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기라면 가능할지도….’
라온이 천천히 손을 풀었다. 이 던전 전체에는 글래시아의 냉기가 깔려있다.
그 기운을 이용하여 기척을 숨기고 적의 살기에 자신의 살기를 덮는다면 암살이 가능할 것 같았다.
‘다만 그 전에….’
꼭 확인할 것이 필요했다.
“혹시 저 공동에 있는 자들을 묶어둘 방법이 있을까요?”
라온이 구슬을 통해 비치는 공동을 가리켰다.
[꽤 괜찮은 함정을 설치해 둬서 작동만 시키면 되지만 지금의 제겐 그 함정을 운용할 힘이 없습니다. 이곳을 유지하는 게 전부죠. 죄송합니다.]
“그럼 제가 드리겠습니다.”
[제, 제게 냉기를?]
“저희는 같은 신을 모시는 형제 같은 관계잖습니까.”
라온이 당황한 로엔그린에게 자애로운 눈빛을 보냈다.
-신? 신이라고?
소리를 지르다가 지쳐 누웠던 라스가 발딱 일어섰다.
-네가 본왕을 사람 취급이라도 해주더냐! 신? 병신으로 보지 않으면 다행이지! 네놈은 천벌을 받을 것이니라!
녀석은 갈라진 목소리로 악을 썼다.
[허허, 그리 말씀해주시다니, 감사드릴 뿐입니다.]
로엔그린은 그런 라스의 속을 모른 채 오랜만에 그분의 진짜 냉기를 느낄 수 있겠다며 기뻐했다.
-이이이익! 안경잽이! 속지 마라! 저놈은 본왕을 이용하는 거머리 같은 놈이니라!
‘조용히 좀 해봐.’
라온은 꽥꽥 소리치는 라스의 비명을 들으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태양에 먹구름이 낀 듯 선명한 붉은 눈동자에 어둑한 빛이 스며들었다.
‘오랜만에 본업으로 돌아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