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49화 (249/653)

제249화

-상대의 역량도 제대로 파악 못 하다니….

라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네놈의 머리통에 꼽힌 칼이 두 개로 늘은 모양이구나.

녀석은 이길 수 없는 자에게 싸움을 걸었다며 혀를 찼다.

라온은 라스의 조롱을 무시하고 제천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걸 누가 모르나.

로만에게 이길 수 없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 지금 하는 행동은 도박. 모두 무사히 살아날 수 있는 동전 던지기를 하는 중이었다.

폐에 깊게 차오른 탁한 숨을 내뱉고 로만을 살폈다. 그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이쪽을 향했다.

‘내 검을 보는군.’

그는 싸우자고 한 자신이 아니라, 제천검에서 깃든 글래시아의 냉기를 보고 있었다. 조금 전 남북맹 무인들을 모조리 쓰러뜨린 청우를 파악하려는 것 같았다.

‘예상대로야.’

이런 상황에서 오러부터 살피는 걸 보면 소문대로 무학에 미친 인간이 분명했다. 살아날 가능성이 3할 이상 높아졌다.

“검명에 오러를 담아 저것들을 기절시킨 건가?”

로만은 거품을 문 채 기절한 수적들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마찰음과 검명 소리가 퍼지는 그 찰나의 순간에 오러를 조작해 신경계를 흔들다니, 마음만 먹었다면 진즉에 죽였겠군.”

그는 청우의 운용방식을 단번에 파악하고,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악기로 공격하는 건 많이 봤지만 검명으로 사람의 신경계를 건드리는 건 처음이다. 창의적이면서도, 효과가 뛰어나. 다만 그만큼 방식이 어렵군. 따라 하고 싶어도 어렵겠어.”

로만이 붉은 도끼날을 만지며 피식 웃었다.

“개안하는 느낌이다. 좋은 걸 보았으니 조금 전에 했던 건방진 말은 잘못 나왔다고 생각해주지. 물러나라.”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서 시선을 돌렸다.

“잘못 나온 게 아니다. 네 상대는 내가 하겠다.”

라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쿠웅!

로만이 들고 있던 도끼로 바닥을 찍었다. 시선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 믿기 힘든 압력이 전해져왔다.

“정말 네놈이 날 상대하겠다고?”

“그렇다.”

라온이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다. 라스가 성장시켜준 영혼의 격을 끌어 올려 로만의 기파를 밀어냈다.

“나름 괜찮구나. 듣던 것보다 훨씬 뛰어나. 다만….”

로만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기세를 일으켰다. 조금 전과는 격이 다른 무게가 전신을 짓눌러왔다.

“네 주제를 알고 나서라.”

리메르와의 전투를 방해했기 때문인지 그의 눈동자에서 시뻘건 분노가 피어올랐다.

“네깟 놈은 이 일격조차 막아낼 수 없음이니.”

로만이 도끼를 들어 올린다. 붉은 도끼날 앞으로 검환이 돋아나 강대한 기류를 일으켰다.

“마지막 경고다. 대가리를 쪼개버리기 전에 물러나라.”

힘이 깃든 경고에도 라온은 물러나지 않고, 검을 내리지 않았다.

“라온.”

어떻게 나오나 지켜보고 있던 리메르가 앞을 막았다.

“저 말이 맞다. 아직은 네가 상대할 녀석이 아니야.”

“맞습니다. ‘지금은’ 이길 수 없죠.”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그럼 미래에는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정말이지 주제를 모르는 꼬마로다.”

로만이 코웃음을 치며 도끼를 내렸다. 모여들던 강환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라온을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넌 강한 무학과 싸워보고 싶은 모양이더군.”

라온은 비웃음을 담은 로만의 눈빛을 마주하며 턱을 틀었다.

“물론이다. 강하면 강할수록 좋다. 내 목을 벨 정도라면 더더욱 환영이지.”

그 말이 진심인 듯 로만은 시원하게 웃었다. 저 말을 들으니, 그가 남북맹에 있는 이유가 남북맹주와의 대련 때문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신했다.

생각대로만 된다면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다.

“그럼 내가 보여주지. 네놈보다 강해져서 네 목을 벨 무학을 들고 찾아오겠다.”

그 말과 함께 라온의 기세가 불길처럼 일어섰다. 로만이나, 리메르에게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패기가 전신에서 꿈틀거렸다.

“단단히 돌았군. 내가 죽을 때 와봐야 그게 무슨 소용….”

“3년.”

라온이 왼손을 들고 손가락을 펼쳤다.

“3년 안에 네놈이 경악할 만한 무학으로 네 목을 치러 오겠다.”

3년이라는 말에 갑판 위에 침묵이 맴돌았다.

“푸하하하하!”

리메르가 진지한 분위기에서 폭소를 터트렸다.

“그렇지. 라온이라면 3년이면 충분해.”

그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광풍단에는 그 이름처럼 미친놈만 있는 모양이군.”

로만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겹다는 듯 찡그린 표정으로 어마어마한 기세를 일으켰다.

“어린 나이에 마스터에 올랐다고 그랜드 마스터가 우습게 보이더냐.”

도끼 위로 타오른 검은 오러가 폭발할 것처럼 일렁였다.

“그랜드 마스터에 도달하는 건 마스터가 된 나이와 관계없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평생이 걸려도 그 경지에 닿지 못할 수도 있지. 오르지도 못한 경지에 대해 논하는 건….”

“무섭나?”

라온이 차게 웃었다.

“강한 무학에 죽고 싶다고 하더니, 내 3년 뒤가 두려운 건가?”

“이 정신 나간 놈이….”

“네가 만족할 수준의 무학으로 네 목을 베기에 3년은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좋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내가 왜 너희를 보내주어야 하지?”

로만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짐승을 보는 듯한 살벌한 미소였다.

“여기서 널 제외한 모두를 죽인다면 복수심 덕분에 네가 더 강해지지 않을까?”

그는 협박하듯 도끼를 들어 올리고, 응집된 오러로 강환을 만들어냈다.

“인간은 복수심이 있을 때 큰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네 말이 정말이라면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이고 너만 살리면 되겠지.”

로만은 이쪽의 생각을 전부 알아차린 듯 턱을 들어 올렸다.

“뭘 착각하는군.”

라온이 도끼 앞에서 일렁이는 강환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곳에서 싸운다면 네놈도 죽는다.”

“무슨 미친 소리를….”

“너도 느꼈을 것이다. 단주님과 네가 호각이라는 걸. 단주님이 널 막는 동안 나와 광풍단이 렉터를 쓰러뜨리고 합류하면 네놈은 살아남지 못해.”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많이 죽겠지. 단주님이나, 단원들 모두가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너희도 전부 죽는다. 네놈의 목은 그리 좋아하는 무학이 아니라, 단순하기 짝이 없는 칼질로 베어주지.”

이미 그 일이 이뤄진 듯 담백하게 꺼내는 말에 로만과 렉터의 표정이 굳어졌다.

“렉터. 저놈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지?”

로만이 렉터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음, 그럴 만하다고 봅니다.”

렉터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형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라온 지그하르트의 이름이 대륙 전체로 퍼진 이유는 항상 본인보다 강자를 잡으며 커왔기 때문입니다. 익스퍼트일 때 마스터인 사도를 꺾은 적도 있죠.”

그가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라온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건 분명하지만, 틸러를 잡고도 저리 멀쩡한 것과 조금 전에 보여준 검명의 무학을 생각해보면 숨겨둔 한 수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광풍단까지 함께 한다면 제가 질 가능성이 꽤 높죠.”

렉터는 담담하게 본인의 패배 가능성을 말했다.

“쯧.”

로만이 짧게 혀를 찼다. 그도 렉터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목숨 구걸 한 번 지랄맞게….”

“뭘 착각하는군. 난 네게 구걸이나 부탁을 하는 게 아니다. 제안하는 거지.”

라온이 주먹을 쥐었다. 부탁은 무릎을 꿇고 내미는 손이고, 제안은 동등한 입장에서 건네는 손이다. 절대 낮은 위치에 서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 합공을 당해 처참하게 죽을지. 3년 뒤 네놈을 뛰어넘는 무학에 죽을지를 골라라.”

“큭! 크하하하하!”

로만이 이마를 부여잡은 채 광소를 터트렸다. 한참 동안 미친 듯이 웃다가 천천히 머리를 내렸다.

“네가 검명을 일으킨 무학의 이름이 뭐지?”

“청우.”

“푸른 비라. 그래. 확실히 빗소리가 울렸어. 청아하면서도 고요했지.”

그는 그 소리를 떠올리려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무학에서 네 기질이 느껴졌다. 직접 만든 건가?”

라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네 허세가 거짓처럼 들리지 않는 건 그 청우라는 무학 때문이다. 누구에게서도 본 적 없는 신비로움을 드러냈으니, 흥이 동할 수 밖에.”

로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끼를 뒤로 물렀다.

“좋다. 네놈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계획대로 되었지만 라온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로만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다만 이 상황을 넘기기 위해서 뱉은 추한 거짓말이라면 지금이라도 취소해라. 돌아가는 대로 네놈과 3년 후 생사결을 치르기로 한 걸 대륙 전체에 퍼뜨릴 테니까.”

“난 네놈처럼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지그하르트의 이름으로. 아니, 설화검협 라온 지그하르트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3년 뒤 지그하르트의 대지와 레이블 강이 만나는 곳에서 결투를 벌이겠다.”

“나는 상대의 심장 소리를 읽는 걸 좋아한다.”

로만이 피식 웃으며 본인의 왼쪽 가슴을 쳤다.

“네놈의 심장 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침착하군. 정말 3년 뒤 날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웃기면서도 기대가 되는구나.”

그가 옆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리메르를 보았다.

“지그하르트의 광검. 이번엔 부하덕분에 목숨을 건졌구나.”

“귀 막혔냐? 라온이 목숨을 구한 건 너라잖냐.”

리메르가 낄낄 웃었다.

“네놈은 어떻게 생각하지? 정말 저놈이 3년 뒤에 날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말해 뭐해.”

그는 당연하다며 손을 내저었다.

“저 녀석은 내 제자이자, 부하야. 3년이면 너 따위는 저 위에서 내려보고 있을걸.”

“청출어람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로군.”

로만이 피식 웃고서, 도끼를 어깨에 걸쳤다.

“라온 지그하르트. 3년 뒤를 기대하고 있겠다. 그땐 청우를 완성해서 오도록.”

그는 씩 웃고서 갑판을 박차고 악운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수적들이 밧줄을 타고 내려와 기절한 무인들을 데려갔다.

“잘 끝나서 다행이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렉터가 다가오며 웃었다.

“왜 우리를 도와준 거지?”

라온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렉터를 바라보았다. 그가 끝까지 싸운다고 말했다면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재밌을 거 같아서.”

“재미?”

“그래. 네가 3년 후에 어디까지 올라갈지 궁금해졌거든.”

그는 그 미래를 보고 싶다며 빙긋 웃었다.

“음….”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모르겠군.’

무학에 미친 로만과 달리 렉터의 속마음은 잘 파악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 그래도 착각하면 안 돼. 이번 일은 넘어간 게 아니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우리는 백창을 찾으려던 게 아니라, 던전에 가려다가 우연히 너희를 만난 거니까.”

“던전?”

“노리스 지역에 유명한 마법사의 던전이 발견됐다고 해서 찾아가는 길에 들린 거거든.”

렉터는 마법사 이름이 헷갈리는 듯 이런저런 이름을 중얼거렸다.

“아! 로엔그린이다!”

“로엔그린….”

들어본 적 있다. 배신의 마녀 멀린과 같은 시대를 산 인물로 마법만이 아니라, 점성술, 연금술에도 큰 재능이 있어서 역사에 이름이 남은 마법사였다.

“그래. 그 마법사의 던전을 찾아가다가 우연히 너희를 본 거야. 물론 네가 말한 이야기가 전부 전해진다면 남북맹이 너희를 건드릴 일은 없지만 한 사람은 달라.”

“한 사람?”

“맹의 원로이자, 틸러의 조부가 되는 노괴물이 하나 있지. 사실 틸러가 맹주님의 제자가 된 것도 그사람의 영향이었어.”

렉러의 웃음기 어린 표정이 굳어졌다.

“그 남자가 움직일 수도 있으니, 몸 조심해라.”

“이런 걸 왜 말해주는 거지?”

“3년이 지나기 전에 죽으면 재미없잖아.”

그는 다시 그 가벼운 웃음을 짓었다.

“렉터! 안 올 거면 놓고 간다!”

“아, 알겠어요!”

위에서 들린 로만의 목소리에 렉터가 다급하게 땅을 박차고 악운으로 올라갔다.

“맹으로 돌아간다!”

“어? 던전에 안 가요?”

“흥이 올랐다.”

악운의 갑판 위에서 로만이 이쪽을 내려다보았다.

“새로운 먹이가 생겼으니, 씹을 준비를 해야지.”

그는 서늘한 미소를 보내고서 몸을 돌렸다.

우우우웅!

악운은 처음 봤을 때처럼 장대한 뱃소리를 울리고서 떠나갔다.

“후우….”

리메르는 악운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검계현신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휘청거렸지만 이내 중심을 잡았다.

“괜찮으십니까?”

“당연하지.”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너 나 몰라? 나야 나. 지그하르트의 광검! 리메르 님! 그 도끼 살인마 놈하고 싸웠어도 이겼을 거라고.”

“뭐, 그러시겠죠.”

평소와 같은 리메르의 목소리에 안심이 되었다. 미소를 짓고서 제천검을 검집에 넣었다.

“잘 했다.”

광풍단을 살피려고 할 때 리메르가 다가와 머리에 손을 얹었다.

“단주님?”

“그대로 싸웠다면 네 말대로 모두가 죽었겠지. 나도 머리에 피가 쏠려서 판단이 늦었다. 네가 모두를 살렸어.”

그는 미소를 지으며 뒤를 가리켰다. 멍하니 선 광풍단과 마을 사람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부단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모두의 눈동자에 감사와 기쁨이 비치는 것 같았다. 왠지 민망하여 고개를 숙였다.

“근데 정말 자신은 있어?”

“자신?”

“로만을 3년 안에 꺾을 자신.”

“물론입니다.”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낌없이 주는 호구 마왕과 함께라면 3년이 아니라, 더 빠른 시기에 그랜드 마스터에 오를 가능성도 있었다.

-음? 왜 귀가 가렵지?

라스는 이상하다며 귀를 후볐다.

‘기분 탓이야.’

*     *      *

라온은 가젤 강 상류에 서서 시선을 내렸다.

청루족 족장이 수신석을 들어 올리며 산새 소리 같은 주술을 외운다. 수신석에 기이한 문양이 새겨지며 내부에 깃든 하얀 기운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크륵.”

그가 고개짓하며 가젤 강으로 들어가자, 다른 청루족들도 그가 외운 주술을 읊으며 뒤를 따랐다.

치이이익!

수신석이 강물에 닿은 순간 표면에 새겨진 문양에서 푸른빛이 돋아났다. 족장은 주술을 계속 외우며 수신석을 완전히 강물 속에 담갔다.

우우우웅!

수신석에서 명멸하는 빛이 강물의 흐름을 따라 퍼진다. 저 작은 구슬에서 시작된 빛은 어느새 강물 전체로 번져있었다.

화아아아!

청루족 족장과 청루족들이 마지막으로 솔리도라는 단어를 말하자, 수신석의 빛이 눈조차 뜰수 없을 정도로 진해졌다.

시린 빛에 인상을 찡그릴 때 귀가 열린 것처럼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왔다.

“아!”

천천히 눈을 뜨자, 강물이 보인다. 조금 전 탁했던 강물과 같은 곳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맑은 강이 눈에 들었다. 바닥에 깔린 모래 알갱이조차 셀 수 있을 만큼 깨끗했다.

‘전생에 봤던 그대로야.’

흙탕물처럼 어둑한 강과 대조될 정도로 맑아진 강물을 보니, 가슴 속에서 울컥이는 무언가가 피어났다.

“이, 이게 가젤 강이라고?”

“이렇게 맑은 강은 처음봐.”

“대륙에서 가장 맑다는 말이 진짜였어!”

광풍단 검사들은 맑아진 가젤 강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맑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이 정도로 맑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우와아아아아!”

“허허! 이래야 가젤 강이지! 암!”

“돌아왔구만! 돌아왔어!”

“하아, 드디어….”

마을 사람들은 내부가 비치는 가젤 강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담은 채 눈물을 글썽거렸다.

“수, 수신석을 강과 연결시켰어. 이제 예전처럼 항상 맑을 거야.”

가람이 주술을 외우고 돌아와 볼을 긁적였다.

“그런데 가람.”

라온은 맑아진 강물이 아니라, 가람과 청루족을 보았다.

“정말 괜찮아? 너희 종족에 대한 많은 게 알려졌는데.”

로만과 수적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수신석과 청루족의 비밀에 대해 알려졌다. 계속 이곳에 산다는 선택을 한 게 의외였다.

“응. 나도 걱정했는데, 족장이 남자고 했어. 이유가….”

가람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손가락으로 라온을 가리켰다.

“라온 때문이야.”

“나?”

“응. 이곳을 보호하는 족장이 너라고 설명하니까. 믿을 수 있는 종족이라며 남자고 했어. 내, 내….”

“내?”

“내 친구라고 했더니, 더 믿어보자고도 했고….”

녀석은 부끄러운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냐.”

라온이 옅게 웃고서 청루족 족장을 보았다. 그가 합장하듯 두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사람의 예법을 보고 따라한 것 같았다. 마주 인사를 해주었다.

“그럼 앞으로 네가 할 일이 많아지겠네.”

“응? 내가?”

“넌 청루족과 인간의 언어를 모두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야. 사람과 청루족을 이을 통로가 될 수 있다는 뜻이지.”

“아….”

가람이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올랐다.

“네가 전에 했던 일은 어떻게 해도 되돌릴 수 없어. 너희 부족에서 널 원망하는 사람도 있겠지.”

“으응….”

그 말이 맞는 듯 가람의 어깨가 떨렸다.

“그렇다고 계속 죄의식으로 머리를 가득 채운 채 쪼그려서 살 순 없잖아. 청루족이 인간과 공존해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네가 통로를 이어.”

“통로….”

“오늘부터 가젤 강과 강에 속한 마을은 모두 지그하르트 소속이 될 거야. 누구도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말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응!”

가람은 만난 이후 처음으로 힘차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륵!”

“아!”

청루족 족장의 외침에 가람이 뒤를 힐끔 보았다.

“자리를 잡아야 하니까. 오래.”

“다 끝나면 마을로 와.”

“응.”

가람은 옅게 웃으며 다른 청루족과 함께 물속으로 들어갔다. 맑은 강물이라 안이 보이고 있음에도 모두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저것도 주술인 것 같았다.

라온은 청루족이 사라진 자리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저희도 돌아가죠.”

가람이 보여준 것과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광풍단에게 다가갔다.

*     *      *

“단주님.”

라온은 숙소로 향하는 길에 리메르의 옆으로 붙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괜찮다니까. 그 가벼운 도끼 다 쳐낸 거 봤잖아.”

리메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기감으로 그의 상태를 확인했는데. 큰 이상은 없어보였다. 다만 그의 표정이 평소와 같음에도 이상하게 불길했다.

“이거라도 드세요.”

라온이 도리안의 배 주머니에서 성자에게 받았던 내상약 하나를 꺼냈다.

“이거 뭐냐?”

“내상약입니다.”

“쓰지?”

“약이니까 쓰겠죠.”

“그럼 안 먹을….”

“시끄럽고 가져가요!”

고개를 젓는 리메르의 입에 내상약을 억지로 밀어넣어 삼키게 만들었다.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들어가서 연공이나 하십쇼.”

“끄윽, 더럽게 쓰네. 사탕 없냐?”

“아 좀!”

“어휴, 악마 같은 녀석….”

리메르가 인상을 찌푸리고서 손을 흔들었다.

“광풍단 모두 고생했다. 오늘은 쉬고 내일 다시….”

“제가 정리할 테니, 들어가서 쉬기나 하세요.”

“알겠다. 알겠어.”

그는 피식 웃고서 먼저 숙소로 들어갔다.

“음, 오늘 수고 많았다. 작은 부상이라고 놔두었다간 상처가 번지는 법이니, 부상자는 상처를 확실하게 치료한 뒤 휴식할 수 있도록.”

“예!”

라온이 부단주로서 내린 지시였기에 모두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누구도 죽지 않고 임무를 완수했으니 모두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그럼 휴식.”

지시를 내리고, 잠시 리메르가 들어간 방을 보다가 등을 돌렸다. 내상을 치유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라스에게서 꿍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곧 오겠군. 오겠지. 오지 않을리가 없느니라….

‘뭐가 온다는 거야?’

라온이 인상을 구긴 라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녀석은 공포에 눌린 것 같기도 했고, 분노하는 것 같기도 했다.

-모르느냐?

‘무슨 말이야. 누가 오는 건데.’

조금 전 렉터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긴장감이 차올랐다.

-생각 없이 그저 정해진 대로만 움직이는 멍청한 놈이 곧 올….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앞으로 메시지가 튀어올랐다.

[자신보다 강한 자를 상대로 승리….]

[<불의 고리>의 성취가 상승….]

[새로운 검술을 창안했….]

여러 메시지들이 줄줄이 솟아올라 시야를 가렸다.

라온이 입을 떡 벌렸다. 이제보니 라스는 이 메시지가 오는 걸 두려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이럴 줄 알았느니라!

라스가 메시지를 보며 빽 소리쳤다.

-융통성 없이 다 올려줄 줄 알았다고!

“허….”

라스는 이제 능력치를 주는 것으로 모자라, 언제 주는지 알람까지 해주었다.

‘내가 별명 하나는 참 잘 지었어.’

세상 그 누가 와도 아낌없이 주는 라스라는 말은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이 녀석이 있는데 3년 안에 그랜드 마스터야 쉽게 가겠지.’

-이대로는 못 사느니라! 이렇게는 못 살아!

라온은 바둥거리며 소리를 지르는 라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