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8화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검계현신….’
리메르가 전대 광혈귀를 잡았을 때처럼 갑판 위에 무풍지대가 생성됐다.
부왕 로만이 일으키던 패기와 도끼에 깃들어 있던 강기가 무풍지대의 외곽으로 쓸려나간다.
바람이 지워지고, 공기의 흐름이 사라진다. 중력이 배가 된 듯 묵직한 압력이 전신을 짓눌렀다.
우우우웅!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한 원형의 공간 속에서 리메르가 쥔 검 위로 진녹색 바람이 깃든다. 칼날에서 전해지는 진중한 울림이 정신을 일깨워주었다.
라온이 리메르의 검에 깃든 바람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달라.’
이전에 본 폭풍의 눈과 비슷하지만, 완성도가 다르다. 무풍지대가 2배 이상 커졌고, 검에 깃든 바람은 검신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압축되어 있었다.
전해지는 압력도, 검신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의 위력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고오오오!
로만은 부왕이라는 이명을 가진 무인답게 완벽해진 검계현신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내리누르는 압력과 흩어지는 오러를 느끼면서도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더 강대한 일격을 내리쏟았다.
리메르 역시 피하지 않는다. 정면으로 부딪칠 생각인지 미소를 짓고서 하단에서부터 끌어 올린 바람의 칼날을 그대로 뻗어냈다. 하늘조차 갈라버릴 기세였다.
쩌어어어억!
검붉은 도끼날과 진녹색 검신이 맞부딪치며 한순간 공간이 비틀어졌다.
황색 스파크가 갑판 전체를 뒤덮고, 가라앉아 있던 강물 저절로 솟아올라 때아닌 소나기를 내렸다.
쿠구구구구!
두 괴물이 일으킨 파동이 나선으로 퍼지며 배가 반으로 갈라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으윽!”
“끄으으윽!”
“제, 젠장….”
“뭐 저런 괴물들이!”
광풍단이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도와주고 싶지만, 여유가 없다. 자신이 이 위치를 벗어나는 순간 마을 사람들과 가람은 그대로 터져버릴 것이다.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집중했다.
‘이것도 기연이야.’
로만이 검계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리메르가 칼날에 깃든 바람을 어떻게 집중시키는지. 두 사람의 정면 대결을 보는 것만으로 큰 공부가 되고 있었다.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며 그 모든 흐름을 두 눈에 담았다.
찌이이이잉!
도끼날과 검신이 사선으로 빗겨 나며 중앙에 모여든 강대한 기운이 한순간에 폭발했다.
쿠와아아앙!
어마어마한 폭발과 굉음이 강 전체로 뿌려졌다. 무언가가 박살 나는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다만 이 와중에도 리메르와 로만이 밟고 있는 갑판은 무너지지 않았다. 두 괴물이 배가 부서지지 않도록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때문이었다.
쿠웅!
서로의 무기가 떨어지자마자 리메르와 로만이 뒤로 한 발씩 물러섰다. 뒤로 밟는 걸음에 산 같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검계현신이라.”
로만이 도끼를 어깨에 걸친 채로 눈매를 찡그렸다.
“생각지도 못한 수를 쓰는군.”
“살려면 뭐라도 해야지.”
리메르가 검을 휘돌리며 고개를 틀었다. 여유로운 눈빛. 얼마든지 덤비라는 듯한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괜찮은 건가?’
참는 건지 아니면 정말 괜찮은 건지 리메르는 평소보다 즐거워 보였다.
“네 기운을 느꼈다. 폐인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거늘. 나름 즐거움을 주는구나.”
“폐인은 맞아. 여러모로 더럽게 살고 있거든.”
리메르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오랜만에 흥이 동하는군.”
로만이 어깨에 걸치고 있던 도끼를 양손으로 잡고 아래로 내렸다. 하단세를 비튼 듯한 자세를 취하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긴말할 필요 없겠지. 두 번째는 악굉잔부다.”
대결이었기 때문인지 로만은 사용할 무학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얼마든지.”
리메르가 고쳐 잡은 검을 위로 들어 올렸다. 내려 베기의 자세. 첫 번째 대결 때와는 자세와 투로가 반대가 되어 있었다.
“이쪽으로 와.”
라온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는 광풍단 검사들에게 턱짓했다.
“다시 오기 힘든 기연이니까. 여기서 제대로 봐둬.”
“으윽….”
“나, 나도 알아!”
“응….”
버렌과 마르타, 루난은 그나마 입을 열었지만, 나머지 검사들은 기어 와서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이런 전투를 보면서도 깨달음을 얻는 건가?”
렉터가 옆으로 다가와서 씩 웃었다.
“깨달음이라기보다는 배울 점을 찾는 중이다.”
“크으! 대단해. 괜히 그 나이에 그런 경지에 오른 게 아니구만!”
그는 가벼운 박수를 보내고 물러갔다. 리메르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성격. 전에도 느꼈지만, 저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파악되질 않았다.
쿠구구구구!
오러가 일그러지는 듯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로만의 도끼에서 타오르는 강기가 한곳에 모여들더니, 검붉은 구체 형태로 응축되었다.
‘강환….’
강환은 강기를 무학의 묘리에 따라 압축시켜 그 파괴력과 지속력을 몇 배로 늘린 그랜드 마스터의 상징이었다.
“후우….”
리메르가 짧게 숨을 고르자, 좁아졌던 검계현신의 범위가 처음보다 더 넓어졌다.
찌이이잉!
로만의 도끼 위에 어린 강환의 기운이 감소하고, 반대로 리메르의 검에 깃든 녹색 바람은 더 장대한 빛을 뿌렸다.
로만은 이번에도 힘이 줄어든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도끼를 쳐올렸다. 단순한 투로지만 저 안에는 상상하기 힘든 무학의 묘리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있었다.
리메르 역시 마주 미소를 지으며 검을 내리친다. 깎고 또 깎아서 세운 바람의 칼날이 한층 더 압축되며 섬뜩할 정도의 날카로움을 비췄다. 베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찬 극한의 예기였다.
쩌어어어억!
떨어지는 검과 올라서는 도끼가 격돌하며 뇌운으로 가득했던 하늘이 열리고, 강이 갈라진다.
두 괴물이 경합하는 힘의 여파가 주변으로 퍼지며 피부를 찢어버릴 듯한 기파가 뿜어졌다. 라온은 뒤에 있는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만화공을 극성으로 일으켰다.
고오오오오!
반대편에 있는 렉터도 수적들이 피해를 입지 않게 오러로 전투의 여파를 지워내고 있었다.
찌지지직!
로만의 도끼에 깃든 둥그런 강환 위로 리메르의 바람의 칼날이 쏟아진다. 강환이 터질 것처럼 비틀어지고, 바람의 칼날은 깨질 듯 흔들렸다.
콰아아아아앙!
고막을 뜯어버릴 듯한 굉음과 함께 리메르와 로만의 기운이 사선으로 꼬이며 터져나갔다.
밤에 쏟아지는 유성우처럼 두 기운 잔재가 강물 위에 맹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쿠우웅!
로만이 세 발 그리고 리메르가 네 발 물러섰다. 그 묵직한 걸음에 갑판 위로 시꺼먼 족적이 새겨진다. 신기와도 같은 무력 조절이었다.
“멋지구나. 지그하르트의 광검!”
로만이 진한 미소를 지으며 도끼로 바닥을 찍었다.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다!”
“그러냐?”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목과 어깨를 풀었다. 조금 전 무시무시한 대결을 벌였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평온한 표정이었다.
“더 할 수 있겠지?”
“이제 숫자도 못 세냐? 이게 두 번짼데 뭘 물어.”
“그래야지! 이제야 광검을 보는 듯하구나!”
로만은 흡족한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묵직한 성격 속에서 무학에 미친 괴물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다만 조금 전 보여준 게 전부라면 네게 다음은 없다.”
“입 그만 털고 시작이나 해. 지루하니까.”
리메르가 빨리 덤비라는 듯 네 손가락을 모아 까딱였다.
“무력만이 아니라, 성격도 과거로 돌아간 듯하군. 좋다.”
로만이 뒤로 훌쩍 물러섰다. 도끼를 옆으로 세운 뒤 리메르를 노려보았다.
쿠구구구구!
도끼에 다시 한번 어마어마한 기운이 모여든다. 강환의 부피가 두 배로 커지고 회전하기 시작했다. 강환을 만드는 묘리에 강환을 운용하는 방법까지 더해진 초상승의 무학이었다.
‘미친….’
욕이 저절로 나오는 경지의 무학이었지만, 리메르는 낮술이라도 마시는 듯 여유 있는 눈빛으로 검을 휘돌렸다.
“마지막은 악부공환격이다.”
그 말과 함께 로만이 도끼를 내지른다. 도끼날 앞에 치솟은 강환이 양옆으로 벌어지며 막대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야말로 포. 중천포처럼 앞으로 뻗어나가는 시꺼먼 오러의 파동이었다.
콰아아아아아!
로만은 리메르만이 아니라, 뒤에 있는 사람들까지 지워버릴 무시무시한 공세를 펼치고서도 멈추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에 리메르의 앞에 나타나 내지르던 도끼를 그대로 밀어붙였다. 강환의 파동과 함께 직접 타격까지 이뤄내는 절묘한 일격이었다.
“이것으로 끝이다.”
“누구 마음대로?”
리메르가 피식 웃는 순간 진녹색의 바람이 타오르는 검신 위로 적색 뇌광이 튀었다.
파지지직!
뇌기. 바람 속성의 응용 식 중 최강의 화력을 자랑하는 오러가 그의 칼날에 치솟았다.
“뇌기? 네놈이 어떻게 뇌기를!”
“많이 맞다 보니까 되더라고.”
리메르가 아랫입술을 씹으며 진각을 밟았다. 눈앞을 검게 물들인 악부공환격을 향해 뇌기와 바람이 어우러진 검을 내질렀다.
치이잉!
두 속성의 오러가 검극이 응집되며 상서로운 빛을 뿌리는 광구를 일으켰다.
풍뢰광조섬. 바람과 뇌기를 조화시킨 구체가 상서로운 빛줄기가 되어 어둠으로 가득 찬 파동을 휩쓸었다.
쿠구구구!
강 전체를 가를 듯했던 로만의 악부공환격의 풍뢰일조섬의 섬광 앞에 막히며 거대한 해일이 대지를 내리치는 듯한 파공음이 사위로 퍼져나갔다.
어둠과 빛을 뿌리는 두 기운이 동심원을 그리며 끝없이 맞물린다. 서로가 서로의 기운을 먹어 치우며 무거우면서도 날카로운 기파를 뿌렸다.
우르르르릉!
두 막대한 기운이 경합하며 하늘을 덮었던 먹구름을 지우고, 푸른 하늘을 드러냈다. 미친 듯이 폭발하는 기운 아래로 청아한 태양빛이 내리쬐는 모습은 기괴 그 자체였다.
콰아아아앙!
리메르와 로만의 기운이 얽히고 꼬이며 응축되다가 한계를 넘어 폭발한다. 검과 도끼 사이에 공간에서 하얀빛이 솟구쳐 모든 것을 지워버렸다.
* * *
라온이 찡그렸던 눈을 떴다. 하늘이 열린 듯 모든 구름이 사라졌고, 강은 수위가 반 이상 낮아진 채 출렁거렸다.
고오오오!
리메르와 로만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는데, 둘 다 싸움 따위는 하지 않았다는 듯 멀쩡해 보였다.
“삼격.”
리메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받아냈다.”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옅은 미소를 짓고서 검을 아래로 내렸다.
“인정하지.”
로만이 고개를 끄덕이고 도끼로 땅을 찍었다.
“네놈은 세 번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다. 내기는 내 패배다.”
그는 너무도 시원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빠른 인정 감사.”
“그리고 널 무시했던 걸 사과하지.”
로만이 턱을 살짝 돌리며 말을 이었다.
“폐인이라고 모욕했지만, 네 무력은 전성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더군. 감탄했다.”
“아직 한참 멀었….”
“본래 검계현신은 지그하르트의 씨족만 쓸 수 있는 혈계 무학. 가신이자, 엘프인 네가 쓰는 건 말이 안 되지.”
로만의 갑작스러운 말에 리메르의 입이 닫혔다.
“넌 극도로 높인 바람의 친화력을 이용하여 검계를 만들었군.”
“한번 보고 잘도 아네.”
“그로 인해 꽤 많은 것을 희생하더구나.”
그가 도끼를 매만지며 턱을 들어 올렸다.
“오러, 정신력, 체력은 물론이고 단전 대신 마나 회로를 자극하기에 수명까지 깎아 먹는 방법이지.”
로만이 리메르의 전신을 훑어내리며 눈매를 좁혔다.
“무력 자체는 예전을 보는 듯하지만 안정성과 지속력은 최악이다. 지금 당장 기절하고 싶을 정도로 괴롭겠군.”
“전혀.”
리메르가 검을 휘돌려 앞으로 내밀었다.
“하루 종일도 싸울 수 있다.”
“허세로군.”
로만은 고개를 저었다.
“허세고 자시고 인정했으면 꺼지기나 해. 낮잠이나 자게.”
리메르는 빨리 물러가라는 듯 손을 저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뭐?”
“네 무력이 예상외인 건 사실이지만 모든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하다.”
“그게 무슨….”
“네 부하들은 전투를 치러 힘이 빠진 상태지. 렉터가 라온 지그하르트만 맡으면 1분이 지나기도 전에 모조리 벨 수 있다. 네놈과 지그하르트의 싹들을 뭍을 기회인데 그냥 갈 필요가 있을까?”
로만은 이미 계산이 끝났다는 듯 차가운 눈빛을 발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건가?”
리메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못 본 새에 많이 달라졌군.”
“강물이 흘러가듯 사람도 변하는 법이지.”
로만은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는 듯 웃었다.
“너….”
“물론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 불이 꺼질지 모르는 네놈을 보니 참을 수가 없구나. 네 시간이 끝나기 전에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싶다.”
그가 도끼를 들어 리메르에게 겨누었다.
“네 부하들이 죽어간다면 남은 수명을 모조리 바쳐서 힘을 끌어 올리겠지.”
“이 미친놈이!”
“렉터!”
로만이 움직이라는 듯 렉터를 불렀다.
“아, 귀찮은데….”
렉터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듯 입맛을 다셨다.
“지그하르트의 광검. 한 명이라도 살리고 싶다면 네가 쌓아 올린 것들을 모조리 보여라.”
“그러다가 네 목이 날아갈 텐데?”
“무인에게 죽는 건 언제라도 환영이다.”
“추잡한 무광 새끼!”
리메르의 녹안에 살의가 깃든다. 사신이 강림한 듯 소름이 돋아오르는 살기가 대기를 옥죄였다.
우우우웅!
검날에 어린 뇌기와 바람이 불길처럼 솟구친다. 리메르의 피부가 바싹 말라붙는다. 로만의 말대로 수명을 걸고 극한까지 힘을 끌어 올리는 것 같았다.
“윽!”
라온이 인상을 찡그리고 관자놀이를 눌렀다.
‘방금 뭐가….’
피부가 말라붙는 리메르를 본 순간 머리에 지끈거리는 통증이 일며 어떤 이미지가 보였다.
갑판 전체가 핏물로 가득 차고 그 밑에 광풍단의 시체가 널렸으며, 리메르가 미라처럼 말라서 쓰러진 모습이 모습이었다.
‘꿈인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이런 상황에서 잠에 빠졌을 리 없다. 이건 지금까지 쌓아 올린 전투 경험들이 미래를 경고해준 걸지도 모른다. 이대로 싸움이 시작되면 모조리 죽는다고.
‘막아야 해.’
로만의 생각대로 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상황을 이쪽에서 이끌어야 한다.
“렉터! 움직여라!”
“어쩔 수 없네. 얘들아! 일 시작….”
라온은 렉터가 나오기 전에 먼저 한 발 나아갔다. 오른손으로 검병을 쥐고, 왼손 엄지손가락과 함께 제천검을 뽑았다.
찌잉!
일어서는 건 글래시아. 은백색 검신 위에 푸른 서리가 녹아내린다. 대기를 오선지 삼아 뻗어가는 수십 줄기의 선율에 고고한 빗물 소리가 담겼다.
라온 지그하르트 류 검식.
제4형 청우.
제천검이 우아한 떨림을 자아내는 검신을 드러낸 순간 렉터의 뒤에 있던 수십 명의 도적이 모조리 쓰러졌다.
치잉!
시린 빛이 명멸하는 칼날로 로만을 겨눴다.
“네놈의 생각대로는 되지 않아.”
라온이 눈동자에 시뻘건 휘광이 어렸다.
“넌 네가 상대한다.”